울프만큼 많이 알려져 있으면서 울프만큼 읽히지 않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모르긴 해도 다른나라에서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이것은 울프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평생 소설의 새로운 기법을 천착했던 그녀는 작은 표현 하나의 실험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는 우선 모더니스트이다. 조이스와 더불어 의식의흐름 수법을 소설에 도입하고 완성시킨 작가였다. 또 그녀는 누가 뭐래도 철저한 페미니스트이다. 울프의 페미니즘은 비록 예술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격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은 울프 문학의 진수도 아니며, 더더욱 전부는 아니다. 그녀의 문학은 - P4

한마디로 말해 인간주의 문학이다. 모더니즘, 페미니즘, 사회주의 따위는 그녀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른 간이역들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목적지는 사랑과 이타주의利他主義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주의라는 정거장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그녀를 지나치게 모더니즘의 기수로, 또는 페미니즘의 대모로 부각시키면서, 크고도 울창한 숲과같은 그녀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경향이 없지않았다.
이 전집의 발간이 울프의 세계를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나아가 읽는 분들의 정서를 순화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된다면 더없는 보람으로 여길 것이다.

박희진 - P5

많은 독자들에게 울프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을발간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울프는 소설이 아닌 평문이나 에세이를 꾸준히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에세이스트이기도 합니다. 작가와 그 문학관, 역사와 사회상까지 망라한 서평과 함께 작가를 조명한 전기적 에세이,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한 비평적 에세이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에세이들은 정곡을 찌르는 문장의 묘미와 명징한 사고의 흐름으로 또 다른 울프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광범한 독서에서 연유한 통찰력과 혜안이 번득이는 에세이들이야말로 그녀만의 탁월한글쓰기 훈련장이었습니다. 이렇듯 균형 잡힌 시각과 명철한 사고를 바탕으로 소설적 기법을 실험했기에 그녀의 소 - P6

설이 갖는 난해성은 난해함 자체가 아니라 그 밑에 투명하게 비치는 밑그림을 드러내지 않나 싶습니다. 울프의 에세이는 지금까지 여섯 권이 발간되었습니다. 울프의 생전 출판된 『평범한 독자』 I, II와 울프의 사후, 남편인 레너드가에세이들을 모두 다시 편집해 네 권으로 묶은 게 그것입니다. 이번 번역의 원전은 레너드 울프가 편집한 네 권의 에세이 모음집 중 1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P7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를 책으로 읽기를 선호하는사람들,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을 보기를 선호하는 사람들,
그리고 책에서 무대로 끊임없이 달려가 노획물을 챙기는사람들, 만약 사과하나가 땅에 툭 떨어지는 소리나 나뭇가지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않는 정원에서 『십이야 Twelfth Night)를 읽을 수 있다면, 분명히 『십이야』를 책으로 읽는 것에 관해 얘기할 게 많다. - P11

우선, 시간이 있다. 제비꽃이 핀 둑에서 숨 쉬는 향긋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작이 사랑의 본성을 파고들 때 그 미묘한 말의 암시를 설명할 시간이 있다. 또한 여백에 기록할 시간이 있다. ‘그녀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애정들을……) 간, 뇌, 심장이‘ [1막 1장]・・・・・・ 어느 날 밤 당신이데리고 들어온 멍청한 기사에 대해서‘ [1막 3장]와 같은 기이한 어구들에 경탄하고 이런 어구들로부터 ‘그런데 저는 일리리아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나요? 제 오라비는 일리시움에 계시는데 [1막 2장]와 같은 사랑스러운 어구가 생겨났는지 자문할 시간이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통제하에서 움직이는 완전한 정신으로 쓰는 게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단어의 흔적을 붙잡아 무모하게 따라가기 위해 단어들과 놀고 장난치며 날아다니는 더듬이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단어의 메아리로부터 다른 단어가생겨나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아마도, 우리가 이 희곡을 읽을 때 이 희곡은 음악의 가장자리에서 영원히 떨고 있 - P12

는 것 같다. 그것들은 항상 『십이야』의 노래들을 불러내고있다. ‘오 친구여 오게나, 우리가 지난밤에 불렀던 노래 말일세.‘ [2막 4장]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단어들과 깊은 사랑에빠지지는 않아서 언제나 단어들을 향해 비웃을 수 있었다.
‘단어들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들은 바로 단어들을 난잡하게 만들기 마련이지. [3막 1장]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고나면 토비 경과 앤드루 경과 마리아가 불쑥 나타난다.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의미 있는 말들이다. 이 말들은 한 인물의 전체적인 성격을 짧은 구절에 집약한 채 성급하게 튀어나온다.  - P13

앤드루 경이 ‘나도 한때는 숭배를 받았단 말이지‘ [2막 3장]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손아귀에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가라면 그와 같은 친밀한어조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데 세 권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이올라와 말볼리오와 올리비아와 공작이, 우리의 정신이라는 무대의 빛과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움직일 때 그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추측하는 모든 것들로 정신은 가장자리까지 차고 넘쳐흐르게 되어서 우리는 왜 그들을 실제의 남자와 여자라는 육체 속에 가두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왜 이러한 정원을 극장으로 바꿔야 하는가? 대답은 셰익스피어가 무대에 올리기 위해 글을 썼으며 아마도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 P13

그다음엔 아마도 배우들이 너무나 개성이 뛰어나거나 너무나 맞지 않게 배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연극을 분리된 조각들로 나누었다. 한번은 우리가아카디아의 숲 속에 있었고, 한번은 블랙프라이어에 있는어느 숙소에 있었다. 책을 읽는 정신은 장면에서 장면을거미줄 짜듯 이동하면서, 떨어지는 사과와 교회의 종소리와 그 희곡을 하나로 묶어주는 부엉이의 환상적인 비행으로 하나의 배경을 만들어낸다. 여기 공연장에서는 그러한연속성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보다 덜 화려한 공연의 만족스러운 절정이 될 수도 있을,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결합하는 듯한 느낌 없이 많은 화려한 파편들만을 가지고 극장을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극은 그 목적에 잘 - P18

부합했다. 그 연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읽은 말볼리오와 쿼터메인 씨가 연기한 말볼리오, 우리가 읽은 올리비아와 로포코바 부인이 연기한 올리비아, 그리고 그 희곡 전체에 대한 우리의 읽기와 거드리 씨의 읽기를 비교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셰익스피어에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십이야』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 거드리 씨는 그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앞으로 공연될 『체리 과수원Cherry Orchard』,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 그리고 헨리 8세 Henry the Eighth』에 대한 갈망을 자극했다. - P19

지난 삼백 년간 영국에서 얼마나 많은 수백만 개의 단어가 쓰여지고 인쇄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그 대부분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는지를 생각하면 던의 언어가도대체 어떤 속성을 갖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분명하게 들리는지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1931년은 아첨을 해도 용서를 받을 기념비적 해이지만 던의 시가 대중적으로 읽힌다거나 타이피스트가 퇴근하면서 지하철에서 던을 읽고 있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았다고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의시는 읽히고 우리 귀에 들린다. 그의 시집 개정판들과 그에 대한 글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 시대와 우리 시대를 갈라놓는 거친 - P20

바다를 건너는 오랜 비행 후에도 그의 목소리가 왜 우리 귀에 울려 퍼지는지 그 의미를 분석해보는 것은 아마도 가치있는 일이리라.
그의 시가 의미로 꽉 차 있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첫 번째 속성은 의미가 아니고 훨씬 더 순수하고 직접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그가 갑자기 말문을 터트리는 폭발력이다.
모든 서두와 논의는 다 소진되어버리고 그는 가장 짧은 길로 시 안에 바로 뛰어든다. 시구 하나면 모든 준비를 무색케 한다.


나는 어떤 늙은 연인의 유령과 이야기하고 싶소. - P21

또는


한 시간 동안이라도 사랑했다고 말하는자,
그 누구든 그는 완전히 미친자요. 


즉시 우리는 사로잡혀 멈춘다. 가만히 서시오. 그가 명령한다.



가만히 서시오. 그럼 나는 당신에게
사랑의 철학을 강의하리라, 내 사랑이여.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서야만 한다. 첫 단어부터 충격파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전에는 무기력하고 마비되었던 직관이 떨리면서 살아난다. 시각과 청각의 신경들이 일깨워진다. 우리 눈앞에 ‘빛나는 금발머리로 만든 팔찌‘ 가타오른다."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아름답게 기억 - P22

에 남는 구절들을 단지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마음의 자세에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된다는 점이다. 던의 열정이 일격을 가하면 일상적인 인생의 흐름에서 흩어져 있던 요소들이 하나로 완전해진다. 한순간 전에는 여러 다양한 속성으로 들끓던 유쾌하고 단조로운 이 세상이 바로 소멸되어버린다. 이제 우리는 던의세계 안에 있다. 다른 모든 풍경은 날카롭게 단절된다.
독자를 갑자기 놀라게 하고 굴복시키는 이런 위력에 있어서 던은 대부분의 시인을 능가한다. 이것이 그의 특징적자질이다. 그런 식으로 그의 정수를 한두 단어로 요약하면서 그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작용할 때는두 개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대조로 나누어지는것 또한 바로 그 정수이다. 곧 우리는 이 정수가 무엇으로구성되었는지, 어떤 요소들이 함께 만나 그렇게 깊고 복잡한 인상을 새겨놓는지 자신에게 묻기 시작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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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부고를 일삼아 읽고 끌리는 이들을 골라 소개하는 지면(<한국일보> ‘가만한 당신‘)을 2년 남짓 맡아왔다. 관련 보도들을 종합하고, 보충 자료를 찾고, 책이나 영화 등 도움 되는 것들은 최대한 참조했다. 국내에 알려진 이들은 어떻게든 기억되리라 여겨 외면했고, 떠난 자리에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다. 그들 중 특히 기억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를 어렵게 골라 이책을 엮었다.


그들이 왜 끌렸는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 글을 깊이 읽은 내 친구는 그들을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글보다 먼저 사진 속 표정과 미소와주름살들을 먼저 ‘영접하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낯선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 P6

그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빚을 갚는 일 같아 조금은 행복했다. 떠듬떠듬 원서로 된 탐정소설 읽듯 그들의 말투나 표정을 상상하기도 했고, 매개변수가 빠져 해명되지 않는 단층이 보이면 탐정처럼 자료와 인터뷰, 그 무렵의 사건 따위를 다시 뒤지기도했다. 물론미제로 남을 때가 많았지만 억지로라도 잇고 싶을 땐 내 상상이나 희망 따위를 표 나게 끼워 넣기도 했다. 나처럼, 쓰이지 않은 내용과 행간을 뒤져 읽어준 독자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이 책의 어떤 대목이 읽을 만하다면, 책 속 그들의 삶과 그들이추구한 세상이 아름다워서일 테고, 책바깥 독자들의 세상이 너무고약해서일 테다. 그 간극을 메우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란다.

2016년 6월
최윤필 - P7

콩고의 마마
전쟁 속에서 끌어안은 인간의 존엄



콩고의 레베카 마시카 카츄바Rebecca Masika Katsuva는 ‘마마‘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콩고전쟁중 강간당한 여성과 고아,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거둬 치료하고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가르쳤다. 그의 품을 거쳐 간 여성만 약 6000여명. 아이들이 부르던호칭을 그들이 따라 불렀고, 친해진 뒤로는 이름을 포개 ‘마마시카‘
라고도 했다. 카바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참혹한 강간 피해자, 아니 생존자였다. 콩고의 여성들은 그런 그에게서 용기를 얻고조금은 덜 힘들게 다시 일어서곤 했다. 콩고의 ‘마마‘가 2016년 2월2일 별세했다. 향년 49세.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면 콩고 현대사를 짧게라도 들춰봐야 한다. 벨기에의 오랜 식민지에서 1960년 독립. 1961년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1925~1961 암살, 미국·소련·벨기에의 암투와 내전, 1965년 미국을 등에 업은 모부투 세세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 집권과 32년간의 독재, 동쪽 국경 너머 르 - P15

완다의 1994년 내전과 반군들의 월경, 1996년 제1차 콩고전쟁으로 이듬해 5월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 1939~2001 의 콩고민주공화국 탄생, 1998~2003년 제2차 콩고전쟁, 전쟁 중이던 2001년에 카빌라 암살(사실상 집권 세력에 의한 숙청)과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Joseph Kabila, 1971~의 집권.
콩고전쟁이 내전이 아닌 까닭은 이웃 국가의 무력이 공공연히 개입했기 때문이다. 특히 앙골라, 짐바브웨, 우간다, 르완다 등 중부아프리카 8개국이 각각 콩고 정부군과 반군을 편들어 벌인 제2차전쟁은 당시 미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Madeleine Albright, 1937~의 표현처럼 콩고를 무대로 한 ‘아프리카 세계대전‘이었다. - P16

전쟁 원인은 구리와 우라늄, 다이아몬드 등 콩고의 자원, 특히 동부 지역에집중 매장된 콜탄 때문이었다. ‘잿빛 골드‘라 불리는 분쟁 광물 콜탄은 희소원소 ‘나이오븀ND‘과 ‘탄탈룸‘의 원광석이고, 두 광물은 각각 초경합금과 첨단 전자 장비의 재료로 쓰인다. 특히 탄탈룸은 전자무기와 스마트폰, 노트북 등 IT 장비 전자회로와 전지의 필수 광물, 전 세계 콜탄 매장량의 70퍼센트 이상이 콩고에 있고, 그 대부분이 동부 콩고우간다 르완다 부룬디와 국경을 맞댄 남·북키부주에 묻혀 있다. 콩고의 서쪽 끝 수도 킨샤사의 권력은 동부까지 미치지 못했고, 쿠데타군은 동부의 자원을 떡밥 삼아 저들 국가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제2차 전쟁 희생자는 400~600만 명에 달했고, 집단 학살과 강간, 고문, 기아, 질병으로 숨진 민간인이 전투에서 숨진 군인보다 훨씬 많았다. 반군 진영은 광산들을 꿰찬 채 아동·여성 노동력을 노예처럼 부려콜탄을 채석했고, 걸러진 탄탈룸은 여러 경로로 팔려 - P16

나가 무기로 바뀌어 동부로 되돌아왔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곳도 당연히 동부 키부 지역, 카추바가 나고 자라 결혼해 살던 곳이 거기였다. - P17

얻는 게 있다" "아이들이 나를 안정시켜준다"라고 그는 말했다. 피오나의 다큐멘터리에는 그가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병원에데려가는 뭉클한 장면들이 나온다. "나 역시 죽을 마음을 여러 차례 먹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 도움을 원하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본다"

유엔 등 국제사회의 중재와 분쟁 광물 무역 규제 등에 떠밀려 콩고 정부군과 반군은 2003년 휴전했다. 하지만 동부는 지금도 사실상 반군 수중에 놓여 있고, 분쟁과 강간도 지속되고 있다. 옥스팜은2004~2008년 사이 남키부 주 유일한 산부인과 병원인 판지병원에서 진료받은 강간 피해자 9709명 가운데 4311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2010년 4월 공개했다. 피해자의 56퍼센트는 들판이나 숲속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밤중에, 다시 말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당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온 이는 1퍼센트가 되지 않았고, 세 명 중한 명은 혼자 왔으며, 절반 이상은 강간당한 지 1년질병 등 후유증 때문에 온 이들이었다. - P20

휴전 뒤 민간인에 의한 강간범죄도 그사이 무려 열일곱 배나 증가했다. 2004년 1퍼센트 미만이던 민간인 강간 비율은 2008년 전체의 38퍼센트였다.
카추바도 2006년 이후 무려 세 차례나 더 집단강간을 당했다. 2009년 1월 강간은 카추바가 군인들의 강간 사실을 고발 · 폭로해온데 대한 보복·협박 강간이었다. 카추바의 어머니도 그의 일을 돕다2010년 4월 마시카 카쿠바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지네타사강상을수상했다. "끊임없는 공격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폭력 생존자 - P20

와 청소년,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돌본" 공로였다.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시상식에 그는 불참했지만, 국제사면위원회 미국 지부의 수잔느 트리멜은 카바가 상금 1만 달러를 어떻게 쓸지궁리 중이었다고 전했다. "돈을 집에 둘 수 없으니 우선 은행에 넣어두려고 한다. 나중에 고마에 집을 한 채 사서 세를 놓을 생각이다. 아이들의 학비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남으면 그 아이들과여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데 쓸 거다." 그에겐 함께 돌보는 아이들 외에 입양한 고아 열여덟 명이 있었다.
콩고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인권운동가 바바 탐파는 <가디언>기고문에서 작년 말 카추바가 재봉틀을 구해 달라고 했으며
"다섯 대가 있었는데 세 대는 망가지고 하나는 도둑맞았다"라고 했고, 몇 달 뒤에는 "수확한 농작물을 시장에 내가기 위해 밴 한 대가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여성과 아이들과 마을살림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몸은 못 챙겼던지, 카추바는 2016년2월 2일 오전 8시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 4시에 숨졌다.  - P21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HRW의 콩고 담당 선임연구원 아이다 여는 "카추바가 떠난 뒤 세상이 더황량해진 것 같다"라고 HRW 홈페이지에 썼다. 그는 "카추바 덕에모진 일을 겪었던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자신들도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됐고 또 힘을 얻었다" "내 삶도 그를 알아더 풍요로워졌다"라고 추모했다. 유엔의 분쟁 지역 성폭력 특별대표자이납 하와 방구라Zainab Hawa Bangura, 1959~는 "마시카는 영웅이었다. (…) 그 어떤 야만도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이길 수 없음을 그는 내게, 이 세계에 보여주었다"라고 밝혔다.
- P21

"이듬해 만나면 우리는 누가 안 왔는지,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서로 묻곤 했고, 점점 그 질문은 누가 죽었는지로 바뀌어갔다." 그들 다수는 혈우병 때문이 아니라 에이즈로 숨졌고, 그가 10대 중반에 이르러 캠프가 문 닫을 즈음까지 살아남은이는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콜트와 같은 생존자를 대상으로 HIV 내성 인자 보유 여부를 검사, 그중 일부가 실제로 돌연변이를 통해 HIV 면역에 기여하는 케모카인Chemokine 단백질과 수용체를 보유한 것으로 훗날 밝혀냈다. 콜트는 그런 변이 없이 감염되지 않은, 기적 같은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13세 때 감염된 혈액제제 때문에 C형 간염에 걸려 약 2개월간 입원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완전항체반응full antibody response‘, 즉 몸 면역시스템이 스스로 병을 치유해내는 또 한 번의 마법 같은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혈액제제가 안전해지고, 유전자재조합 방식의 새로운치료제, 즉 비감염 혈액의 특정 단백질을 햄스터의 난소 등에 주입해 혈액응고인자를 추출해 만드는 농축제제가 나온 것은 1990년대이후였다. 콜트는 ‘행운‘이라고 했지만 그건 사무치게 원망스러웠을자신의 몸을, 그래도 믿고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 P26

 "효과적인 치료법을 가지지 못한 채 암환자를 대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실험실로 돌아가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만큼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환자들의 심정을 잘 알았을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만큼 내 모든 걸 과학과 환자들에게 쏟아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만일 당신이 어려서부터 심각한 질병을앓아왔다면, 아마 당신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걸알 수 있을 거다." 그는 "그건 인간관계에서는 썩 좋은 일이 아니어서 나는 결혼을 두 번 했다"라고 덧붙였다. - P29

그는 2016년 2월 22일에 바하마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뇌출혈을일으켜 마이애미의 잭슨메모리얼병원으로 후송됐고, 이틀 뒤 24일에 별세했다. 향년 38세.
근년 들어 그의 육체는 응고인자제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체 면역 체계가 농축제제를 항원으로 인식해 공격에 나선 거였다. 항체반응은 대개 초기에 발현하지만, 그의 경우처럼 드물게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스탠퍼드 의대 종양학과장 조지 슬레지 주니어는 "그는 재능과 헌신, 끈기 면에서 예외적으로 탁월한 동료로 존경받았다"라며 "수많은 선배 연구자들도 그를 통해 많이 배웠다며슬픔을 전해왔다"라고 전했다.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을 레비는 "그는 항암 면역요법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발견을 해냈고, 환자에게 직접 혜택을 줄 수 있는 여러 임상 실험을 디자인해 추진해왔다"라고 말했다." - P29

작은 거인
장애 편견과 고통 앞에서 춤추다


스텔라 영Stella Young은 호주의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었고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불완전골형성증osteogenesis imperfecta이란 희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었다. 뼈가 약하고 변형되는 저 증상 때문에1미터가 되지 않는 키에 골절상을 달고 살았는데, 일곱 살 무렵 친구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과자를 먹던 중 사레가 들려 쇄골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맹렬한 장애인인권운동가였다.
2013년 11월, 31세의 영은 <시드니모닝포스트>에 여든 살의 나에게」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편지 형식의 글에서 영은 "와인이라도몇 잔 마신 날이면 잔망스럽게 혼자 하던 생각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라고 한 말은 진심"이라고 하지만 당신(여든 살의 나)을 만나러 가는 동안 모든 가능성을움켜쥐고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지혜롭게, 즐겁게 살겠다고 약속하겠다"라고 썼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지만 여든 살의 자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는 2014년 12월 6일에 숨졌다. 향년 32세. - P31

금요일 밤이면 영은 댄스클럽의 플로어에 서서 춤을 추곤 했다.
그의 춤은 휠체어 안에서 펼쳐지는 아주 절제된 동작이었을 것이다. 호르몬이 충동질하는 만큼, 아니 여린 뼈와 근육이 허락하는만큼, 리듬을 타며 춤추는 것을 즐겼던 영에게 그 순간은 몸의 감각을 가장 예민하게,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의식하는 순간이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그들에게 영의 춤은 춤이 아니었을지 모르고, 영의 존재 자체가 이채로웠을지 모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즐기기 위해 추는 춤이 비장애인에게는 ‘특별한 행위‘로 느껴지는 현실, 그는 그 시선들을 ‘논평의 시선‘이라고 했다. 놀랍다, 대단하다, 라며 말을 건네는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램프>의 한 칼럼에 이렇게 썼다. "음악에 영혼을 맡기고 춤으로 근심 따위를 털어내는 그 공간에서조차 그들, 비장애인들은 나의 존재를 교훈적 타자로 대상화한다."
"장애인의 몸은 그 자체로써 정치적이기 때문에, 나의 춤은 정치적발언이 된다." 하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난 춤을 추고플 땐 출것"이라고 썼다. "문제는 우리의 장애가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당신들의 방식입니다." - P38

2014년 12월 18일 멜버른 타운홀에서 열린 영의 추도식 드레스코드는 ‘재미있는, 멋진 fabulous‘이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큐빅장식의 스팽글 드레스나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꽃 장식을 달았다. 진행을 맡은 방송인 월리드앨리는 "오늘은 맘껏, 무제한 즐기는 자리"라며 "환호하고 박수치고 춤추자"라고 말했다. 온당치 못한 사회와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그것을 또 나눠주기까지한 고인의 삶처럼 영을 잃은 슬픔도 행복한 웃음으로 기억하자는취지였을 것이다. 행사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타운홀 바깥 연방광장으로 나가 영이 그렇게 즐기던 춤으로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 P39

비행하는 인간
육체의 해방을 꿈꾼 익스트리머


그는 날고 싶어 했다. 오래 날기 위해 점점 높이 올라갔고(클라이밍), 그러자니 더 가벼워져야 했다(프리솔로잉), 부력을 아끼려면 정밀한 몸의 균형은 필수였다(하이라이닝). 윙슈트플라잉은 그의 꿈에가장 근접한 익스트림스포츠였다. 그의 마지막 꿈은 맨몸에 윙슈트로만 날아 낙하산 없이 착지하는 거였다. 땅의 속박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기. 그에게 비행은 자유였다.
어쩌면 그는 추락과 비행의 차이를 활강하는 육체의 방향각이 아니라 의지의 지향각에 두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절벽에 부딪쳐 부서져버린 몸이 균형과 부력을 잃고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비로소 날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음의 추락이 아닌, 마침내 삶의 비행. 다만 그 비행은 너무 짧았다.
200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뽑은 ‘올해의 모험가‘ 딘 포터DeanPotter가 2015년 5월 16일 요세미티국립공원 윙슈트플라잉 도중 사고로 숨졌다. 향년 43세. - P41

2009년 여름, 등산화도 스틱도 없이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윙슈트에 낙하산 하나 달랑 메고 아이거 북벽 디프블루시 Deep BlueSea 루트의 해발 3970미터 벼랑에 섰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떨어진돌이 바닥에 닿는 데 약 8초가 걸리는 그 높이에서, 그는 장장 2분50초 동안 5.5킬로미터를 날았다. 윙슈트플라잉 최장 기록이었다.
2011년 11월 그는 아이거 서벽수직 고도 2804미터에서도 3분 20초 동안7.5킬로미터를 날아 자신의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윙슈트의 활공비는 2.5쯤 된다. 1미터 하강하는 동안 2.5미터를수평 이동한다는 얘기다. 땅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강하는 각, 즉활강각은 50.7도다. 그의 2011년 활강각은 20.5도였다. <토니윙슈트>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그는 "내가 사람보다 새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라고 썼다. - P46

1990년대 말의 그는 세계적 클라이머가 돼 있었고, 굴지의 스포츠 용품 업체들-파타고니아, 블랙다이아몬드, 파이브탠과 스폰서십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2006년 파란의 스캔들로 기억되는 유타주 아치스국립공원 프리솔로잉으로 그는 저 스폰서들을 잃고 만다. 무른 사암岩들의 풍화로 조성된 유타 주 남부의 랜드마크들중에서도 크기로나 모양에서 가장 돋보이는 델리키트아치 DelicateArch 프리솔로잉한 거였다. 불법은 아니지만 클라이머들조차 신성시하며 넘보지 않던 바위였다. 거기에서 촬영팀의 밧줄에 긁힌 듯한 자국이 발견됐다. 클라이머들의 성토가 이어졌고, 공원 측도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딘은 "바람 불면 날아갈 초크 자국 외엔 남긴흔적이 없다"라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정황상 궁지에 몰릴 수밖에없었다. 그 일로 2002년에 결혼한 클라이머이자 아내 스테프 데이 - P48

비스Steph Davis, 1973~의 스폰서 계약마저 끊겼다. 둘은 2010년 이혼했다. 2008년 ESPN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자연을 신성하게지키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 사건 이후 아치스국립공원은 일체의 등반 행위를 공식적으로 금했다. 물론 더트백에게법은 대수로운 게 아니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기 몸이 바위(자연)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따지고 보면 요세미티를비롯한 국립공원 베이스점핑도 모두 불법이다. 점퍼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진 뒤 주로 점핑을 한다. 어두워서 더 위험한 대신,
어둡기 때문에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 더 예민해질 수 있다고 딘 포터는 말했다.
"인간이 난다는 게 미친 생각이란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그게 가능해지려면 생각이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는 나아가야 한다." 그는 동료 그레이엄 헌트와 2015년 5월 16일 저녁 7시 30분, 요세미티 협곡의 고도 914 미터 ‘태프트 포인트 Taft point‘에 올랐다.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몸에는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은 채매여 있었다. - P41

모성이라는 환상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주는 게 더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바버라 아몬드 Barbara Almond는 정신분석 · 상담 의사로 어머니는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그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희생을 뭉뚱그려 ‘모성motherhood은 무조건 완벽하고 최고여야 한다는 아득한 기준을 부정했다. 끊임없이 ‘모범 어머니‘를 찾아 전시하는 사회, 모든 어머니가 그런 모범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사회를 비판했다. 책의 제목처럼, 그녀는 모성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나란히 있고 모든 어머니는자식을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있다고 썼다. 당신만 아이를 미워하는게 아니고,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며 한결같이 감싸주는 게 아이에게 좋은 일도 아니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썼다.
실패의 예감과 불안, 실패했거나 하고 있다는 자책과 죄의식에 - P51

시달리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든든한 ‘어머니‘ 같았던 그가2016년 3월 6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작가이자 교수인 캐럴린 시Carolyn See, 1934~는 2010년 10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아몬드의 책 서평 첫 줄을 "우선 이 매혹적인책을 모든 새로운 엄마와 나이 든 엄마,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 아이와 남편, 아빠와 연인 들에게 권한다"라고 썼다. "(이 책은) 모두가알고 있지만 거의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사실을 전한다. 우리 중 최고의 엄마들조차 때때로 모성이란 것이 요구하는 바에서비롯된 두려움과 공포, 증오와 역겨움으로 고문당하고, 심지어 아이들을 향한 순전한 살의를 경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 P52

자살연구자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하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장 아메리Jean Améry, 1912~ 1978는 『자유죽음』 서문에 "이 책은 심리학이나 사회학과는 거리가 멀다. ‘자살학suicidology‘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라고 썼다. 그는 책에서 생명의 논리, 삶의 논리로 죽음과 자살을 설명하고배격하는 모든 시도들을 반박하고 조롱하며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자유죽음을 옹호했다. 그에게 자유죽음은 ‘에셰크échec, 체스 게임의 외동수‘, 즉 돌이킬 수없는 총체적 삶의 실패에 직면한 이가 "모든 삶의 충동, 살아 있는존재의 끈질긴 자기 보존 충동"에 저항하며 그에셰크를 돌파하는유일한 길이고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어떤 점에서는 가장 생생하게" 실천하는 행위였다.
아메리보다 6년 늦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시에서 태어난 심리학자 노먼 파버로 Norman Farberow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아우슈비츠 수감자가 아닌 미 공군 대위로 경험했다. 그는 전후 참전군인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사회 부적응과 급증하는 자살률에 학자 - P61

로서 감응, 아메리가 "경의와 더불어 약간의 경멸도 숨기지 않았던 자살학의 토대를 닦았다. 미국 최초의 자살예방센터를 세워 ‘생명의 전화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제는 상식이 된 자살 예방 연구와자살로 친지를 잃은 생존자의 심리 치유에 생을 바쳤다. 국제자살예방협회IASP 설립을 주도한 그가 국가자살예방협회가 제정한 세계자살 예방의 날이던 2015년 9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전혀 상반된 입장에 선 듯 보이는 아메리와 파버로는 자살에 대한 세상의 통념에 맞서 싸운 동지기도 했다. 아메리가 ‘생명의 논리‘ 로부터 죽음과 자살의 인식론적·철학적 해방을 추구했다면, 파버로는 자살이라는 행위에 드리운 종교적·사회문화적 보편 인식들, 예컨대 자살자에게 드리운 비겁함과 나약함의 이미지, 남은 자가감당하는 수치와 죄의식을 걷어내고 현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게하는 데 헌신했다. - P62

그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거의없었다" "그가 은퇴 후 근 20여 년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않으면서그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도 밝혀야겠다"라고 썼다.

LA 자살예방센터는 1997년 이후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DHMHS‘ 와 통합, 운영돼왔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실직한 여성들의 실의를 치유하고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 자선단체인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는 시대 상황에 따라 빈민, 소수인종 등 다양한소외 계층의 정신보건 증진을 위해 일했다.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 디렉터인 심리학자 키타 커리는 파버로 헌정 비디오에서 "파버로는 자살의 오점‘을 지우기 위해 헌신한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P68

 "자살하려는 이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누구보다 앞서 이해한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2014년 파버로는 미국자살학회학술대회비디오 연설을 통해 "전화 한 통화 같은 아주 사소한 우정을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자살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내겐 늘 굉장한 일처럼 여겨졌다" 하고 말했다.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처럼, 그는 저 ‘소박한 말로 자신의 학자이자 봉사자로서의 생애와 자살학의 역사를 포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살과 자유죽음은 동의어가 아니고, 노먼 파버로가 막고자 한 모든 자살이 장 아메리가 옹호한 자유죽음은 아니다. 심리부검을 포함한 자살 연구와 예방 활동, 또 자살 후 생존자에 대한 심리 치료의 목적이 "(자살자 본인보다는 가족, 나아가사회의 보상 심리에 달려 있다"라고 한 아메리의 비판에는 부인하기 - P68

힘든 진실이 있고, 여전히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와 관습과 법이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아메리의 목소리는 좀 더 커져야 할 필요가있다.
하지만 심리학과 자살학이 자유죽음의 "존엄성을 박탈"한다는아메리의 단죄에 파버로와 슈나이드먼 같은 이들이 고분고분하게수긍할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은 아마 아메리가 책에서 예로 든 숱한이들의 자살이 모두 그의 기준에 부합하는 자유죽음이었는지 심리부검을 통해 규명하자고 따져 물을 것이고, 아메리는 삶의 외통수를 판별하는 판관은 개인과 사회이지만 둘의 판단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응수할 것 같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와철학적 논리로 끝도 없이 맞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선 너머에서 ‘자살=죄악‘이라는 해묵은 주장이라도 끼어들면 금세 나란히 서서 사회의 위선에 맞서 동지로 싸웠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한 형태와 거기 이르는 삶의 보편과 특수를, 지금 우리 삶의 양상을 조금은 더 느긋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P69

사랑의 합법성
동성혼의 법제화를 위하여


난소암을 앓던 니키 콰스니Niki Quasney는 2014년 3월, 운전 중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곧장 응급실로 와야 한다며 의사가경고했던 바로 그 증상이었다. 하지만 콰스니는 통증을 견디며 혼자 40여 분을 더 달려 인디애나 주 경계를 넘어 일리노이 주 병원을찾아갔다. 지난해 8월 AP통신 인터뷰에서 그는 "두려워서 그랬다" 라고 말했다.
그가 두려워한 건 병과 죽음보다 법과 제도의 억압이었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인디애나 주법에 따르면 13년 반려자 에이미샌들러도 완벽한 타인일 뿐이어서, 가족에게만 면회가 허용되는 투병 과정이 더 고독하고 절망적이리라 그는 두려워했다.
다행히 퇴원한 그는 곧장 인디애나 주 연방지방법원에 자신들을법적 부부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사망진단서에 샌들러가 아내로 기록될 수 있도록, 사망 후 유산과연금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거였다. 앞서 콰스니와 샌들러는 2011년 일리노이 주에서 시민결합Civil Union, 동성혼 대신 부부 지위만 - P71

보장을 했고, 2013년에 매사추세츠 주에서 결혼도 했지만 인디애나주는 다른 주의 동성혼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연방지방법원은 그해 4월 주정부가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이었다. 그리고 6월 동성혼을 허용해달라는 소송 10여 건에 대해서도 주정부가 승인해야한다고 판결한다. 주정부는 즉각 항소했지만 9월에 제7항소법원은만장일치로 연방지방법원의 판결을 편들었다. 인디애나 주는 10월부터 동성 커플의 혼인확인서 발급을 시작했다. 소송을 시작한 지6개월 만이었다.
목숨을 건 사랑과 호소로 연방법원을 감동시키며, 미국의 모든주를 통틀어 법정투쟁 최단 기록으로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를 이끈 니키 스니가 2015년 2월 5일에 별세했다. 향년 38세. - P72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
안정된 진로를 벗어나 학문의 의미를 찾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재위의 회칙 ‘레룸노바룸Rerum Novarum‘이발표된 것이 1891년이다. 교황은 19세기의 10년을 남겨둔 인류가 20세기를 맞이하며 감당해야 할 숙제와 지향을 밝힌 그 회칙의 뼈대를 "자본주의의 폐해와 사회주의의 환상"이라는 함축적인 표현 안에 담았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91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재위는 같은 이름의 새로운 교황청 회칙 ‘뉴 레룸바룸‘을 내놓는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확연해진문명사적 전환기였다. 바오로 2세는 회칙에 레오 13세의 구절을 뒤집은 "사회주의의 폐해와 자본주의의 환상"이라는 예언적인 표현을굵은 글씨로 담았다. - P77

귀국 후 그가 처음 쓴 책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이었다. 당시로선 신선하고 충격적인 발전의 이면, 즉 1970년대 광화학스모그와시민의 위협받는 안전 등을 폭로한 책이었다. 근대경제학을 반성적으로 고찰한 근대경제학의 재검토』라는 책도 썼다. 농지 위에 활주로를 닦아 나리타공항을 국제공항으로 확장하려던 일본 정부의 계획에 맞서 1966년부터 20년 넘게 싸운 산리즈카 마을 주민들의 투쟁을 일본 경제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환기시킨 나리타란 무엇인가뿐 아니라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일본의 교육을 생각한다』등등 그의 저서들은 경제 이론의 경계를 벗어나 현실 속으로 뻗어나갔다. 일본 출판업계의 거물인 이와나미문고의 편집자 출신이자사장이었던 오쓰카 노부카즈大信- 1939~는 책으로 찾아가는 유 - P84

토피아』라는 책에서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출간 이후 우자와가감당해야 했던 괴롭힘과 협박, 『나리타란 무엇인가 이후 몇 년간외출할 때마다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1970년대 이와나미문고에서 열린 한 연구회 일화도 있다. 당시 우자와는 근대경제학의 모델과 수식으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문제들을 명쾌하게 분석해 경제·사회학자들을 매료한 뒤 칠판에커다란 X표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모델로는 일본 사회의진정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 파괴나 공해 등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 모델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P85

그는 노벨경제학상의 단골 후보였다. 하지만 시카고대학교나MIT, 프린스턴의 강단 학자들이 그의 이질적인‘ 연구와 사회 활동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의문이다. 어리석은 가정이지만, 만일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 활동에 전념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훗날 우자와는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도 예비 의학도 시절 히포크라테스선서 앞에서 좌절했던 기억을 간직했다고 말했다. 길다면 긴생을 청년기의 어떤 기획 속에두고 마름질하듯 주무를 수는 없겠지만 경제학자로서 그의 마음속에는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자로서 자신만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지만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더 유리한 자리를 포기했다. 그는 학문의 보수적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자신이 설정한 경제학자로서의 경계를지켰고, 그건 그에게 노벨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커다란 야심이었을지 모른다. - P85

잘려나간 장미
여성 할례 금지 운동의 시작


피렐리, 샤넬의 브랜드 모델로 1980, 1990년대 <엘르> <보그> 등 패션지 표지를 장식했던 소말리아 출신 모델리스 디리Waris Dirie,
1965~가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공개한 게 1997년 <마리끌레르> 인터뷰에서였다. 세 살 때 ‘미드간여성 할례 시술자‘에게 클리토리스와 음순을 잘린 이야기, "성냥개비 머리만 한 구멍만 남긴 채 질구를 봉합당한 이야기, 시술 후 자신은 살아남았으나 동생은 과다 출혈로숨진 이야기.
‘사막의 꽃‘으로 불리던 세계적 패션 스타의 고백은 아프리카와중동 대다수 국가들이 종교와 전통의 이름으로 수천 년 동안 자행해온 끔찍한 가혹 행위의 실상을 극적으로 폭로했다. 그는 1998년에 수기 ‘사막의 꽃을 썼고, 2009년 셰리 호만 감독은 에티오피아의 모델 겸 배우 리야 케베데Liya Kebede를 주연으로 이를 영화화했다. 와리스는 유엔 아프리카인권특사, 아프리카연합AU 평화대사 등을 역임하며 여성성기절제FGM, Female Genital Mutilation 근절과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 P87

도케누는 법적 강제에 만족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금지법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법에만 의지할 경우 기소를 면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적도 많았다.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공개적인 발언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살만 루시디에 못지않은 도발로 받아들여졌고 또 실제로 살해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적도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에 아프리카의 여성들, 특히 FGM의 피해자들은 그를 ‘에푸아 엄마Mama Efua‘라고 불렀다. 일곱 살에 FGM을 당하고 현재 ‘더걸 제너레이션‘에서 일하고 있는 지부티 출신의 님코 알리는 "도케누는 (마치 엄마처럼) 유쾌하고 지혜로우면서 언제나 우리의 말을 끈기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 우리도 아프리카의 여성들과 ‘엄마와 딸‘ 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왔다"라고 BBC 인터뷰에서말했다. 그는 <뉴요커> 인터뷰에서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빌려 "그녀는 거인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녀의 어깨 위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도 말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뉴요커>에 보낸 이메일에서
"(도케누는) 희망과 변화의 기적"이라고 애도했다. - P93

탐욕스러운 환경운동가
노스페이스 창업자, 국가에 공원을 기증하다


더글러스 톰킨스Douglas Tompkins는 몽상가였다. 그의 꿈은 자연보호가 아닌 자연의 복원이었다. 이미 병들어버린 땅, 보호는 헛되고부질없는 짓이었다. 잘해봐야 증상을 잠시 완화하거나 지연시킬 뿐그나마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보호였다. 그는 뭇 생명을 자연으로서 사랑했지만 인간만큼은 반反자연으로 여겼다. 자연과 항구적으로 공존하기에 인간은 못 믿을 존재였고, 또 너무 많았다. 그가지구 끝, 인적 드문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광막한 숲과 초원, 화산과습지와 강과 피오르해안에 제 꿈의 거처를 마련한 까닭이 그거였다.
220만 에이커약 27억 평, 서울 면적의 열다섯 배. 그 땅은 자연의 피난처가 아니라 수복의 거점이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더글러스 톰킨스가 2015년 1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 P95

크리스는 "이곳을 예전처럼 목장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100년 뒤, 아니 10~20년만 지나도사람들은 여기가 공원이 아니었던 때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양을 키우기 시작한 1940년 이전에는 그 땅의주인이 농부가 아닌 야생의 동물들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크리스는 남편과 달리 "주민 설득을 등한시한 탓에 오해와 불신을 증폭시킨 점"을 후회했고, 별도의 팀을 꾸려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관계를개선하는 노력을 도맡았다. 지역 청소년들의 하이킹·캠핑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주민들의 공원안내원 취업 프로그램을 열었으며 향후국립공원이 되면 관광 수입으로 지역 경제가 더 활성화될 것이라는믿음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 P102

자연을 복원해서 지키는 가장 근사한 해법으로 그들이 택한 게 국립공원화였다. 1929년 미국 연방정부가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인근 티턴Teton 산맥을 제외하자 록펠러가 15년 동안은밀히 그 땅들을 사들인 이야기, 지역 정치인들과 목장 주민들의반대를 뿌리치고 국립공원으로 국가에 기증해 당시 대통령이던 루스벨트가 수락한 이야기, 여름 들꽃이 그렇게 황홀하게 핀다는 그랜드티턴국립공원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톰킨스는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개인이나 단체가 사적으로 넓은 땅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다만 자신은 임시 집사provisional stewards일뿐이라고 말했다. "나도 해낼 수 있다. 일이십 년만 기다려달라"라고말한 게 불과 2014년 9월이었다. 크리스는 그런 그를 늘 ‘롤로(젊은이)‘ 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 P102

하지만 그는 2015년 11월,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 현지 잡지 <파울라 Paula>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나의 생물학적 시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서두르라고, 죽기전에 다 끝마쳐놓으라는 말이들린다"라고 말했다. 푸말린공원의 도로와 안내소, 식당 등의 시설을 갖춘 뒤 칠레 정부에 열쇠를 넘길 참이라고 했다. 은퇴를 생각한다」라는 인터뷰에서 그는 두 딸과 손자들에게 단 한 푼의 유산도남기지 않겠노라고, 노년에 쓸 작은 농장과 집만 남기고 전 재산을칠레와 아르헨티나 환경 보존을 위해 기부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베테랑 카야커이기도 했던 그는 2015년 12월 8일 지인들과 함께파타고니아 헤네랄카레라 호수 투어에 나섰고, 돌풍에 보트가 전복되면서 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훗날 사람들이 이 땅을 걸을 것이다. 무덤보단 이게 더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 P103

거인 같은 여성상
전쟁으로 시작된 여성해방의 상징


1943년 5월 29일, 발행 부수 400만 부에 달하던 미국 주간지 현재격월간지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는 메모리얼데이 기념호 표지를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1921~1978 의 그림으로 장식한다.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여성이 커다란 리벳건을 무릎에얹고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습. 샌드위치를 든 그는 이두박근이라도과시하려는 듯 왼팔을 힘주어 구부렸고, 발은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을 짓밟고 있다. 무릎 위 도시락에 새겨진 ‘로시‘라는 이름 때문에 <리벳공 로시Rossi the Riveter>가 된 그림은 더 많은 여성 노동력을동원하기 위한 전시 국가와 자본의 홍보물로, 전시 채권 판촉용포스터로 활용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로시는 또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내건 여성 파워의 상징으로,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애국주의의 한 표상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리벳공 로시>의 모델이었던 메리 도일 키프Mary Doyle Keefe가 2015년 4월 21일에 별세했다. 향년 92세. - P105

미국리벳공시위원회는 1998년에 만들어졌다. 각자의 경험을기록하고 그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설립된 이 단체는 여성주의와 애국주의의 묘한 결속 위에서 강연과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펼치고 있다.
9·11 사태 직후 <리벳공 로시>를 비롯한 노먼 록웰의 주요 작품들은 미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됐다. 2001년 11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 때에는 1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관람했다. 큐레이터 비비언 그린은 "록웰의 작품들이 지닌 애국주의와 미국적 삶에 대한 찬미가 관객들의 욕구에 부합한 것 같다"라고 한 잡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구겐하임의 홈페이지를 장식한 그림도 <리벳공로시였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의 숨은 공로자로 리벳공 로시>의 사연이 언급될 때마다 키프의 이름은 곁두리처럼 소 - P110

개되곤 했는데, 그는 조금은 쑥스럽고 또 조금은 뿌듯했던 듯하다.
키프가 AP통신과 인터뷰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2002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그 일(모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나 자신을 현대 여성의 상징 같은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고말했다. 또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록웰의 그림이 잡지에 실리기 전까지 나는 그 그림을 보지도 못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몰랐다" 하고 덧붙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버몬트 주 템플대학교에 진학, 치위생사 학위를 받고 고향 베닝턴에서 치위생사로 일하다가 1949년에 결혼, 네 명의 자녀를 두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림이 그려진 지 24년 뒤인 1967년 록웰은 키프에게 사과편지를 썼다. 날씬한 몸매를 우람하게 그려 미안하다고 "그때는 ‘거인 같은 여성상이 필요했다"라고 말이다. 그림 자체가 아니라 남성 지배사회의 여성 대상화, 즉 필요에 따라 모범적 여성상을 상정하고 닮게 하려 한 관행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걸 인류가 알기까지는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 뭐가 문젠지 모르는 이들도있다. - P111

잊을 수 없는 기억
챌린저 참사의 비극을 밝히다


2016년은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 참사 30주년이다. 언론이 사고 당일1986년 1월 28일을 전후해 거의 매년 저 일을 고통스럽게 환기해온 까닭은, 우주탐사 역사상 최악의 저 참사가 인재였음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사고는 추진체 부품 결함, 엄밀히 말하면 결합부 고무 패킹의 저온 손상 때문에 빚어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그릇된 의사 결정 구조와 추진체 제작업체 모턴사이어콜사의 안일한 판단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기술진의 사전 경고와 발사 연기 주장을 묵살했다.
대통령직속사고조사위원회의 첫 조사 보고서가 나온 건 그해 6월이었지만,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는 사고 후 근 3년간 전면 중단됐다. 사이어콜은 존폐 위기에, 직원들은 실직 위기에 몰렸다. 유타 주 브리검 시 사이어콜 공장 주변은 "살인자들"이라는 낙서로 뒤덮여 있었다. 사고에 연루된 이들, 그릇된 결정의 책임을 져야 했던 이들은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 P113

정년이 임박했던 이블링도 1986년 직장을 떠났다. "그들(회사)은나를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했다" "나도 누군가의 생명에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자책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1989년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유타 주 철새 보호 시민단체 ‘베어 강 철새들의 피난처‘의 자원봉사자로 살았다. 1980년대 중반 솔트레이크 범람으로 무너진 제방을복구하고 수로와 데크와 탐조 루트를 다시 손보고 수초를 가꾼 건전적으로 그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기부와 모금과 노동 덕이었다고 단체는 밝혔다. 공학기술자 이블링은 특히 관개시설, 수로 보강 등 기술적인 분야를 진두지휘했고, 1990년 시어도어루스벨트환경보존상‘과 2012년 국립야생보존위원회NWRA의 ‘올해의 자원봉사자상을 탔다.‘ - P120

이블링이 세상에 나선 건 2016년 1월이었다. 30년 전 익명으로NPR과 인터뷰했던 그는 다시 NPR 기자를 브리검 집에서 만나 "이제 진실을 알릴 때"라며 "당시 NASA의 발사 결심은 확고했다"라고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난 세월 혼자 감당해야 했던 자책과 죄의식을 울먹이며 토로했다. "나는 좀 더 노력할 수 있었고,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신은 그 일을 내게 맡기지 않았어야 했다. 나중에 신을 만나면 따져 물을 거다. ‘왜 나였냐? 당신은 패배자 loser를 선택했다‘라고."
그의 인터뷰가 1월 28일 미국 전역에 방영되자 시민들의 격려 편지가 쇄도했다. 앨런 맥도널드도 그에게 전화해서 "알면서 아무것도 안 하거나 어찌 되든 신경도 안 쓰는 게 루저"라면서 "당신은 위너winner"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면, 우리 - P120

는 멈추려는 시도조차 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들은 사이어콜이 아니고 NASA가 아니라는 거였다. 사이어콜 부회장이던 로버트 루트와 NASA의 조지 하디가 편지를 쓴 건 그 직후였다. 하디는 "당신과 동료들은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NASA도 언론담당관 스테파니 쉬어홀츠 명의의 성명에서 "우주비행사들이 보다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있도록 용기 있게 발언해준 이블링 같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라고 밝혔다.
그제야 이블링은 마음이 좀 편해져서 "모든 건 끝을 맺어야 하는법"이라 말했다고 NPR은 전했다. 말한 적 없지만 그에게는 보이스졸리에 대한 부채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모두를 대신해 그 빚을 다깊고 그는 2016년 3월 21일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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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꽃집을 지나는데 창문에 예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리엄마도 한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 발걸음이 멎었다. 뭐랄까. 애잔함과 서글픔과 허탈함이 차례로 밀려왔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애들한테 카네이션 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저문구에 쓰인 ‘우리엄마‘에 나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싫었다. 어느덧 내가 효孝 마케팅의 판촉 대상으로 위로받는처지가 된 게 못마땅했다. 그럼 뭐 지금은 시들었어도 예전엔생기 어린 꽃이었다는 건가? 고쳐 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
예전에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노문희 씨를 인터뷰한 적이있다. 그녀의 담당 구역인 건물 3층 복도 끝에 휴식 공간이 있었다. 새의 둥지처럼 몸 하나 겨우 웅크릴 공간, 책상 하나 놓이니 꽉 차는 창고 같은 방이지만, 다행히 벽면의 통유리 너머로짙푸른 나무가 흔들려 운치를 더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스프링 노트가 정물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학생들이 버린 노트를 주워서 일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넘기는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소녀 얼굴의 스케치가 마치 전혜린의 노트처럼 동경과 낭만으로 일렁였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맣게 염색한 보글보글 억센 파마머리에, 울퉁불퉁 힘줄 튀어 - P11

나온 마른 손등에, 소매통넓은 파란색 작업복을 걸친 청소부단풍예순살의 그녀가 감수성 주체로 여기 책상에 앉곤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 엄마도 가을이면 ㄷ잎, 은행잎을 주워서 식탁유리 밑에 끼워 놓곤 했던 생각이 났다. 엄마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엄마가 주운 것은 낙엽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살면서흘린 것, 놓친 것, 떨궈진 것들을 낙엽에서 봤던 게 아닐까. 잃어버린 당신 시간을 모으듯 몸을 구부려 줍고 부서질세라 쥐고고이 간직하는 동안 엄마는 가을을 통과하는 소녀였던 거다.
나는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다. 엄마로 오래 살았다. 남들은 나보고 젊은 엄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일찍엄마가 된 소녀였다. 엄마 아닌 생에 대한 갈망이 컸다. 앞치마풀어버리듯 엄마의 옷을 간단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체념인지적응인지 마흔에 다다르자 심신의 변화가 왔다. 최승자 시인의시구대로 "모든 일이 참을만해요. 세포가 늙어가나 봐요" 하는상태가 되었다. 그럭저럭 살만했고 얼렁뚱땅 살아졌다. 하지만 심신의 변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체력의 저하와 감각의 퇴화가 그래프처럼 항목별로 고르게 나타나는 건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여전히 왕성하게 분열 중인 세포를 발견했다. 두루두루 참을 만하다가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 불쑥 튀어 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 그것은 한숨이나 - P12

눈물 같은 울컥함으로 나타났다. 나는 불행을 예민하게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려는 어떤 경향성일 것이다. 일상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뭉그적뭉그적 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나는 어떤 소녀와 대면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올드걸‘은 고정된 인격체가 아니라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니까 피부에 잔주름 없애고 명품몸매 가꿔 ‘영우먼‘이 되려는 욕망처럼 눈가의 물기와 사유의탄력을 잃지 않는 올드걸이 되려는 욕망도 있다. 그런데 올드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영우먼은 미용산업, 성형산업, 의류산업을 거쳐야 만들어지므로 매스컴에 의해 떠들썩하게 알려지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반면, 노트 하나 시집 한 권이면 족한 올드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거미줄 같은 자본 시스템을 경유하지 않는 존재는 발굴되지도 부각되지 않는법이니까. 또한 일상생활에서 엄마 역할로 기능하면 딱히 드러날 기회가 없기도 하다.
나이 든 여자를 마주하고 당신은 꿈이 뭐냐고, 무얼 욕망하느냐고, 어떤 슬픔이 있냐고 물어본다는 건 영 어색하다. 나도엄마에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보통명사 ‘엄마‘의 사적 영역은 한때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우리 모두에게 상상 불가능한지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걸은 살아 있다. - P13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라고.

내 생애 첫 시집은 《한국명시선》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하얀 거품, 까만 포도알 같은 아이의 눈망울, 세모 지붕에 낮은울타리가 쳐진 집으로 뛰어가는 들판의 아이들 등등 70년대 지방 소도시에 있는 이발소 달력 그림에 쓰일 법한 사진에다가,
윤동주, 이육사, 김소월 등의 국정교과서 수록 시가 어우러진 사진판 양장본 책이었다. 내가 둥그런 바가지머리 아이였을 때그 시집을 방바닥에 드러누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 두번째 시집은 잡지 부록으로 딸려 온 《세계의 명시-애송시 200선》으로, 국내편 국외편이 섞여 있었다. 괴테의 <첫사랑>, 릴케의 <가을날〉, 롱펠로의 <인생찬가〉 등 어색한 번역에 따른 비장한 시어를 나는 아무 이물감 없이 그대로 흡수했다. 책을 읽다보면 심오하고 난해해서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느낌에 압도되는 경우가 있는데 소싯적 읽은 시들이 그랬다. - P14

아이에서 소녀로 자라면서 나는 시의 풍요를 제대로 누렸다.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그 시절에는 시가 봄날 개나리처럼 어디에나 흐드러졌다. 꼭 시집을 사지 않더라도스프링 연습장 겉표지에 조병화의 <남남>, 서정윤의 <홀로서기>,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같은 시가 예쁜 글씨체로꾸며져 있었다. 그뿐인가. 대중가요도 시적 정취가 물씬했다. 산울림과 들국화와 김광석의 어떤 가사는 시보다 시적이었다. 나는 노래와 시를 구분치 않았다. 노트를 쫙 펴고 한쪽에는 이형기의 <낙화>, 그 옆에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베껴쓰곤 했다.
부피가 얇고 작아서 손에 쏙 들어가는 시집은 선물용으로도그만이었다. 삼천 원에 그만큼 기품 있는 선물이 또 없었다. 친구들과의 갈등에서 속상함을 표현할 때나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존경과 사랑을 고백할 때 등 언어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시집을 뒤적거렸다. 연애편지에도 시 한 편씩 꼭 곁들였다. 그렇게 꽃이 피고 낙엽이 질 때마다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시가 쌓였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김남주와 박노해의해방문학 시편들도 빼놓을 수 없다. 뜨겁게 달궈진 불온한 언어는 정신의 성냥불을 확 그어 주곤 했다. 비장미와 숭고미와낭만성과 유치함이 교차하던 이십 대, 온통 정서 과잉의 그 시대. 일상, 연애, 투쟁 어느 곳에서도 나는 손 길게 뻗어 시에 의 - P15

을 지했다. 시로 지은 집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얼굴이 누워 있었으니, 그 인연이 매개한 ‘말들의 풍경‘은 그대로 세상 읽기의 독본이 되어 줬다.


서른 중반 즈음부터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삶이복잡계 수준으로 얽혔고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을 지나오면서 나는 더 이상 한갓 취향으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않은 김치 보시기,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TV는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씩 시를 읽으면서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 P16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 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얼마전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 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그 책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 이영희의 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1권

문학에 눈뜨는 일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일은 존재에 눈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 - P17

음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할 뿐이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 준 것도 삶의 치유 불가능성이다. 니체가 말했듯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재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 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 줬다. - P18

삶은 천연덕스럽고 시는 몸부림친다. 시가 뒤척일수록 삶은 명료해진다. 삶이 선명해지면 시는 다시 헝클어버린다. 나는 시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 아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좋은 시를 읽으면 자동인형처럼 고개가 올라간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누르듯이 책장을 덮는다. 방 안을 한 바퀴돌고 나서야 다시 시 앞에 앉아 베껴 쓴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글쓰기 충동에 시달렸다. 시가 휘저어 놓아 화르르 떠올랐다가 층층이 가라앉는 사유의 지층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어디다 꺼내 놓고 싶었다. 꺼내 놓고 싶은 만큼 꺼내 놓고 싶지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가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말은 나를떠났다. 계속 쓰고 싶었다. 궁여지책으로 사유를 자극한 시 한 - P19

편과 차오르는 말들을 나란히 블로그에 올렸다. 혹여 누가 그섬에 닿더라도 시 한수 나눈다면 덜 민망하리라 더 인정 어리리라 생각했다. 그 후로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시를 읽고 글을 썼다.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시를 핑계 삼았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고, 회한이 쌓이고, 시집이 늘었고, 눈물이 마르고, 아이들이 커 가고, 《올드걸의 시집》이 자랐다. - P20

이 책은 단순하게는 서른을 지나 마흔에 들어선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 챙겨 주고픈 구닥다리 모성관의 소유자이자, 문득 일상을 전면 중지하고 홀연한떠남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시때때로 아름다운 언어에 익사당하고 싶은 문자중독자이고, 밥벌이용 글을 써야 하는 문필하청업자이며, 사람 만나 이야기하고 그 소소한 행복을 글로 쓰길 좋아하는 데이트 생활자인 나.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나를 추스르느라 휘청거리며 살아온 날들을 담았다. 요란한 삶이고 빈 수레다.
살면서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지만 학위가 없고, 책 읽기와 - P20

글쓰기로 생활비를 벌지만 명함이 없고, 시를 늘 곁에 두지만 등단이나 전공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능력이 닿지 않는다 해야겠다. 이런 나의 삶의 이력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살면서 민망한 적 많았다.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지 않고 성과를 축적하지 않는 삶은 설명하기도 이해받기도 어려웠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애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이 바닥났을 때, 시가 내게로 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잘 정의한대로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말하려 하는 시", 그 포기하지 않음에 기대어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동시에, 익숙한 나로부터 떠나는 연습을 일삼았다. 지금나는 손에 쥔 것은 없으나 눈에 보이는 사람은 더 많아졌으니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었구나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엄연하게는 삶과 시의 합작품이다. - P21

이것을 왜 책으로까지 묶어야 하는지 고민이 길었다. 블로그와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 연재한 ‘올드걸의 시집‘을 읽고
"시가 좋아졌다" "시집을 샀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냈다. 시의 사적 소유가 아닌 시의 공적 순환을 위해서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 - P21

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편의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시를 읽는 것은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고, 나를 허물어뜨린 자리에 남을 들여놓는 행위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 그것을 ‘시‘와 ‘시에 곁들여진 수다‘가 조금이라도 도우면 좋겠다.
2011년 가을부터 연구실에서 시 세미나 ‘말들의 풍경‘을 진행하며 열 명 남짓한 벗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시를 읽었다. 시의 이해도와 삶의 만족도가 동시에 상승했다. 말을 들어 주고, 말을 만들어 가는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엄마의 돌연한 죽음으로 삶의 일회성을 자각했고 존재의요청을 들을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생을 귀히 여기도록 영감과 자극을 준 눈물겨운 인연들이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타인의 지분과 체온이 깃들어 있음을 말하고 싶다.
2012년 다시 가을 - P22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의 시 <옛노트에서> - P35

홍상수는 사랑을 교통사고라고 생각할까. 그런 것도 같고아닌 것도 같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의 숭고함을 말하지않고 신발처럼 일상의 맨바닥을 지탱하는 소모품 같은 사랑을얘기한다는 점에서 교통사고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이합리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감정중추로 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또 본능적이고 실재적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달콤한 충돌을 왜 피하냐고 묻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번개처럼 이미 와 있는 사건으로서의 사랑을 얘기한다. <옥희의 영화>에서 그의 사랑관이 드러나는 대사.
"사랑 절대로 하지 마. 정말로 안 하겠다, 결심하고 버텨 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 걸……." 받아 적고 싶어 손이 움찔했다. 니체가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줬듯이, 속물 대마왕 홍상수가 사랑의 사이비 신도였던 나를 일깨운다. 사랑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 P38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_함성호의 시 <낙화유수〉 - P39

삶이라는 극지

그대라는 대륙

목표도 없이, 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
-박정대의 시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부분 - P45

한 사람은 끝없이 자기를 바닥으로 몰아간다
더 이상 가라앉지 않을 때까지
그녀는 대기중으로 그녀의 전부를 흩어놓고 싶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껍데기의 공허를 맛보고 싶다
사랑이 그녀를 밑바닥에 이르게 한다
그녀의 텅 빈 육체 안엔 이제까지의 그녀가 아닌 다른 영혼이 심어진다
-이선영의 시 <사랑하는 두 사람> 부분 - P51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 - P54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
_채호기의 시 <사랑은> 부분 - P55

직감이라는 것.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경험치에비례해 발달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고통 체험이 감각세포를단련시키는 것 같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번뇌 그 후,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한테 가을날 단풍이나 밤하늘 둥근 달이 이전처럼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또 자아 붕괴의 통증으로 몸부림쳐 본 사람은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고유의 느낌을 짚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나름의 곡절을 겪으며 나도 철이 좀 들었을까. 지난주에는선배한테 ‘아현동 철거 사진전‘을 보러 가자고 문자 메시지가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담에 가자고 하려다가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망설였다. 좀처럼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고강인하며 냉철하기 이를 데 없는, 나하고는 종 자체가 다른 사람인데 그날은 문자만으로도 어떤 ‘흔들림‘과 ‘갈망‘이 읽혔다.
난 발목 잡는 일 더미를 제쳐 놓고,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연탄이었느냐"를 읊조리며 나갔다. - P56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 - P58

그렇게 부산스럽게 준비한 저녁 먹고서 식탁을 정리하고는, 한쪽에 밀어 두었던 책과 노트북을 끌어와서 긴긴밤을 보냈다. 둥근 모서리에 배를 붙이고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이유식을 먹었던 그곳에서, 나 역시 더운 밥덩이를 넘기고 매운 책뭉치를 삼키고 비린 언어들을 게웠다. 일명 생계형 글쓰기. 밥상에서 밥을 위한 글을 쓰면서 나는 밥의 절실함과 서러움을 배웠다.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서 운다는 말처럼 배 굶고 아픈 것들이 더 잘 눈에 들어왔다. 나의 반려가구인 그 원형식탁 의자 한 개는 삐걱거려 두꺼운 테이프로 붙여 가며 버티다가 결국 버렸다. 다른 하나는 쿠션이 푹 꺼졌다. 멀쩡한 의자가 두 개뿐이다. 식탁도 다리 쪽 부품이 빠져서 살짝 피었다.  - P64

이 틈이 좋아요
내 살과 당신의 살 사이, 서로 다른 육즙의 신선한 향내
뭍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는
여기는 시들지 않는 신접살림이 바람개비처럼 까불거리죠
이쪽이기도 하고 이쪽 아니기도 한 소슬한 틈새의 배갯머리에서
시간이 숨구멍처럼 휘는 이곳의 혼돈이 좋아요
-김선우의 시 <빨에 울다> 부분 - P66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고
벽으로 놓던 흰머리 창가로 두고 잔다
밤새 은현리 바람에 유리창 덜컹거리지만
나는 그 소리가 있어 잠들고
그 소리에 잠깬다. 빈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소리 들을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 내가내 손목 긋는 악몽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_정일근의 시 <그 후〉 - P69

생의 거품을 제거하는 방식이든 생의 금을 덧입히는 방식이든, 저마다 나답게 잘 살기 위한 몸부림이 치열하다. 학벌, 가족, 직급, 재산 등을 제외한 나머지 그 실재를 열망하거나, 이름과 얼굴을 바꾸면서 과거 청산을 도모하거나, 기민한 태도로 이익을 챙기거나, 그런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자기를 지우고 바꾸고 숨기고 갱신한다. 남루한 혹은 지루한 생을 리모델링하는 그 힘들이 놀랍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페이지만 찢어 낼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잠시 헷갈린다. 어지럽고 어리둥절하다. 그들의 변신 욕망이 어떤 가치를 낳는지를물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억압하느냐 해방하느냐.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묵묵한 살아냄보다 무구한 조작이우세할수록 삶은 꼬인다는 것. "나는 오해될 것"이고 "결국 나는 나를 비켜 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하는 거 같다. 살면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들은 이름, 감각, 느낌, 음악,
이야기...... 나에게 존재를 위해 금가루 뿌리는 일이란 음악이내미는 손 잡는 것,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는 것, 느낌을 나누는 것. 그리 호사 누리며 살기로 한다. - P71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 식탁에서
신호등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다.
_이장욱의 시 <오해> 부분 - P72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슨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 P73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산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 이성복의 시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P79

어디 살림만 그러겠는가 싶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책 한권을 어렵사리 읽어도 돌아서면 내용을 까먹지 않던가. 두툼한책 한 권에서 단어 하나 내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수학도 몇번을 풀어야 자신 있게 답을 쓴다. 수년간 다달이 부은 보험금을 해약하면 푼돈만 남는다.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콩나물을 다듬고 깻잎을 씻고 쌀을 씻으면서, 땅에서 난 그것들을 만지면 마음이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바닥 구석구석에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헝클어진 번뇌를 같이 모아 버린다. 떨어진 단추를 달고 터진 솔기를 꿰매면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메운다. 해 드는 오후 마루에 앉아 빨래를 반에서 반으로 접으며 미련과 회한을 접는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 P82

온전한 순결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대를 다 닦겠는가
더러워진 방
팍팍 문질러 훔치다보면
그대를 내가 닦는 것인가
나를 그대가 닦는 것인가
후줄그레한 걸레의 물기에 어른거리는
세월이여, 조각난 마음이여
-이재무의 시 <걸레질> - P83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몸이 말라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의 사랑이여!
- 김중식의 시 <모과> - P87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신해욱의 시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부분 - P91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송이 참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이리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_김이듬의 시 <겨울휴관> - P96

아득한 고층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난간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 P100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심보선의 시 <슬픔이 없는십오초> - P101

하나의 시험대가 주어졌음을 알아챘다. 내 신체가 거부하는 그곳, 불편함을 느끼는 대상에 바로 나를 성장시킬 무언가가 있다며 니체는 "금단의 땅에서 열매를 구하라"라고 했다. 유목은 한국에서유럽으로 여행 가는 게 아니라, 자기로부터 떠나는 능력이다.
나의 정체성은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이다. 그동안 배운 이론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앞으로 삶을 뚫어야 하는 상황. 불현듯용기가 났다. 원한 감정을 털어버리자. 나를 개방하자. 내 살 곳은 속세다. 산 중턱 절간에 절대 고요를 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심심해서 살지 못한다. 사람과 사건이 넘쳐 나는 이 대지가나의 삶의 절대 조건이다.
- P104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어디에 있을까.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은 나는 적어도 그랬다. 근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뭔가 늘 못마땅하고 모자란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치를 들고 정자를 짓고 물길도 트고, 그렇게 땀 흘리면서 친구도 만나고 하루가 가고 한 시절이 갔으니 말이다. 이마 위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에서 느끼는 자유 지옥을 느끼던 그곳이 천국으로 변하기도 하는 경험은 매우 짜릿하다. 밥 짓고 아이 키우고 두세 시간 출퇴근 기분 내면서 살아 보고 싶어졌다. 동료한테 우리 앞으로 삼성전자 직원보다 더 열심히 살아 보자며 웃었다. 즐겁게 이사했고 부엌도 정리했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개운하다. 정이 생겨서 다니는 게 아니라 다니다 보면 정이 - P104

들게 마련이다. 우선은 시 세미나를 시작하고 니체를 일독할참이다. 삼선동에 놓인 나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이것이 셀프 구원 - P105

내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내가 늙어 자식에게 의탁하든, 비참하고 비루한 생이 지겨워 눈물바람 할 테고 태어난걸 후회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살 만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하겠지. 육아가 힘들 때 아이들이 족쇄 같아 ‘괜히 낳았다‘고 워망했던 것처럼 더러는 괜히 죄 없는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딛으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걸린 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 행복은 아니었다. - P112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아직도 파김치 올라온다
고속버스 트렁크를 열 때마다
비닐봉지에 싼 파김치 냄새

텃밭에서 자라 우북하였지만
소금 몇 줌에 기죽은 파들이
고춧가루를 벌겋게 뒤집어쓰고
가끔 국물을 흘린다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대처에 사는 자식들을 못 잊어
젓국에 절여진 뻣뻣한 파들이
파김치 되어 오늘도 올라온다
우리들 어머니 함께.
-강형철의 시 <사랑을 위한 각서8 - 파김치> - P113

<바다> 라는 시를 읽다가 청승맞게 공상에 빠져버렸다. 푸른하늘의 ‘겨울 바다‘가 생각나서 찾아들었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
‘바다‘가 연상되어 또 그것을 듣고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정말이지 이럴 때만 좋다. 이럴 때만 사는 것 같다. 나의 영혼이 촛불처럼 환해지고 기타처럼 딩가딩가 자유롭게 춤을 춘다.
가족들이랑 캐리비안베이 가는 거 말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여수 밤바다다. 혼자서 가고프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수행 우등고속을 끊고 떠났다가 여수에서 며칠 묵고, 또백석이 "자다가도 바다가 보러 나가고 싶다"라고 한 통영에도가고, 민박집에서 하루 종일 방 끝에서 방 끝으로 뒹굴면서 책보고 밤이면 파도 소리 들으면서 글 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붙박이 인생 청산하고 떠돌이처럼 살면 내가 어떻게 될지궁금하다. 그럼 사는 일이 덜 지겨울까. 역할에서 빠져나오면 나비처럼 자유로울까. 여섯 시간째 뱃속이 텅 비었다고 전화하는 딸내미에게 즉시 달려가지 않아도 되면 나의 인생이 더 고상해질까.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 바다 되어 출렁이고, 마음만은 지중지중 물가를 거닌다. - P118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하구려 섧기만하구려
_백석의 시 <바다> - P119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서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 보면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 P125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놓고
잘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들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평 임대 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
_최금진의 시 아파트가 운다> - P126

원래 큰 사건이 생기면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끊임없이 이어지기 일쑤다. 수습하다가 지치셨다. 그래도 엄마의 표정은 늘 그렇듯이 밝았지만 가슴속은 이미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는 집이 좁아도 괜찮다, 오빠도 몸이 불편하지만 자유롭게 잘 살지 않느냐, 왜 내 행복을 남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라고 아무리 말해도 내 집 마련해서가정 꾸리고 사는 자식 보는 것을 부모 임무의 완결판이라고생각하는 엄마를 설득하기엔 논리가 부족했다.
모든 엄마들이 그럴 거다. ‘남들처럼 평범하게‘가 이 땅의 엄마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바람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자동차나보험회사 광고에 나오는 정상가족의 판타지를 버리지 못하는한, 엄마의 자리에서는 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미 한 방향으로만 사고가 굳어져버렸기에, 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형을 기대하고 상상하면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는 거다. 우리 엄마 역시, 결핍과 우울에 겨워하다가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고 몸 안에서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이라고, 나는 엄마의 죽음 - P130

을 이해했다.
김중식 시인의 시구대로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않으시는 어머니, 원초적 모성으로서의 엄니, 신문이 조종하는 대로 사고하고 광고에 나오는 대로 욕망하는 엄마, 사회적 모성으로서의엄마. 어떤 개념을 걸어도 ‘엄마‘는 문화적 산물이고,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다. 더 이상 엄마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나부터 아프지 않고 울지 않는 엄마가 되는 일이 남았다. 자식이울까 봐 미리 우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웃어서 자식도 옷게하는 그런 행복한 엄마들이 많아지는 세상,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숙제다. - P131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_김경주의 시 <주저흔> 부분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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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 주리라.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빌라 아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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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의 첫 독서는 <울프 일기》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서른여섯 살부터 쉰아홉 살까지 쓴 일기를 연도별로 정리한 책이다.
나는 목차에서 ‘50세‘를 찾아 그곳부터 펼쳤다. 내 나이 즈음 울프는 어떤 경험과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때까지 고친다" "이번 책은 내가 내 안에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실들을쏟아 내고 있다." 같은 구절들이 눈에 박혔다. 쓰는 자의 근심, 집념, 희열 같은 감정이 잔파도처럼 일렁였다. 대작가도 말 그대로 일희일비했구나 싶으니 숙연해졌다. - P5

사는 게 만만해지는 날이 오지 않듯이 쓰는 게 담담해지는날도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심 기대했다. 글 써서 생활한 지 십수 년이 지났고 단행본을 몇 권 냈으면 점차적으로쓰는 일에 의연해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건 글쓰기가
‘기준의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독자가 늘었고 시간이 경과하면 글이 나아져야 한다는 내적 압력은 커진다.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실력은 더디게 쌓이니 도통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막막할 때면 미래가 아닌 과거를 더듬는다. 예전엔 내가 글을어떻게 썼더라, 하고.
그 시작에는 《올드걸의 시집》이 있다. 지금부터 12년 전이다. 2008년 11월 개인 블로그에 ‘올드걸의 시집‘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생활에서 자라나는 감정에 시를 덧대어 한 편 두 - P5

글 편 글을 올렸다. 돈을 벌거나 책을 내려고 쓴 게 아니라 속을 달래려고 일이 버거워서, 어쩌면 쓴다는 의식도 없이 쓴 글들이다. 생애 가장 눈물 많던 시절이다. 몸의 우기를 지나며 썼던지라 자기 연민이 과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가 글과 삶의거리가 없었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가장 고통 없이 글을 썼던 것이다.
한 무명작가의 글은 운 좋게 출판 기회를 얻었다. ‘은유‘라는필명으로 2012년 첫 단행본 《올드걸의 시집》을 펴냈다. 그런데 3년 후 출판사가 경영상의 이유로 절판을 결정하고 책의 판권과 남은 책 백 권을 돌려줬다.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책 무더기가 현관에 무덤처럼 놓여 있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 P6

그렇지만 슬픈 일 다음에는 좋은 일이 오기도 하는 법. 사연을 전해 들은 은평구의 작은 서점 ‘책방비엥‘에서 책을 위탁판매해줬고, 《올드걸의 시집》을 아끼는 독자들과 모여 책을 추억하자며 ‘절판 기념회‘를 열어 줬다. 그 후로도 책방에는 ‘그 책‘을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꾸준했다고 한다. 외부 강연에서 내가만난 독자들도 ‘그 책‘을 읽고 싶다는 바람을 전해 왔고, 실제로중고 책이 정가보다 두세 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2016년 12월에 《올드걸의 시집》의 전부는 아니고 절반을추려 그간 쓴 다른 글들과 묶어 개정증보판 격인 《싸울 때마다투명해진다》를 펴냈다. 나는 새로 나온 분홍 표지의 책을 ‘그 - P6

책‘을 찾는 이들에게 권하곤 했는데 일부 독자들은 말했다. "이책이 그 책은 아니다"라고
‘그 책‘, <올드걸의 시집》을 원본 그대로 다시 세상에 내놓게되었다. 절판된 지 5년 만이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면 저자의 손을 떠나 제 운명을 산다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곡절이많아서 나에겐 ‘감정 꽃다발‘ 같은 책이 되었다. 어느 날 저자가되는 어색한 기쁨을 안겨 주더니 불쑥 절판되는 쓸쓸한 아픔을느끼게 해 줬고 이번에는 복간이라는 애틋한 설렘과 부끄러움을 선물해 준다. 가끔 강연회에서 《올드걸의 시집》을 들고 오는 분들을 만나면 나는 ‘인연의 증표‘라도 발견한 것처럼 북받치다가 마음이 녹아버렸다. 책에 대한 감상으로 "실컷 울었다"
- P7

는 고백을 종종 듣는다. 초보 저자의 책을 무려 사고 읽고 아끼고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초판본을 지닌 삼천 명의 독자는 한 사람이 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튼튼한 뗏목이되어 줬다. 첫 책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 고마움이 크다.
"내가 감히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자기가 쓴 것이 출판되어 나온 것을 얼굴을 붉히거나, 떨거나, 얼굴을 가리려 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날이 언제고 오기는 올까?" 버지니아 울프가 ‘37세 일기에 쓴 문장이다. 내 나이 서른일곱부터 쓴 글들을 보는 지금 내 심정이 딱 이렇다. 두 번째 서문을 쓰기 위해 - P7

‘죄스러운 열정‘으로 철 지난 글들을 찬찬히 일독했다. 얼굴이화끈거려 지우고 싶은 문장들, 거친생각과 서툰감정들에 한없이 난감해졌지만 그대로 두었다.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른 중요한 오류는 각주를 달았다.
가족과 결합된 시간과 사건이 많았던 시기라서 동거인들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일상에서 발아한글이기에 불가피했다. 육아 집중기 시절 나는 좋은 엄마에 대한 높은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나와 남을 부단히 들볶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먹을 밥을차리는데 자꾸 한숨이 나는 내가 미워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다.
아이들용으로 손이 가는 반찬을 해 놓았을 때 그걸 먹는 남편이미운 내가 싫어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다. 먹는 이를 미워하는사람은 예정에 없던 내 모습이었다.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으로인간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한 여자의 분투, 수없이 무너졌던실패의 기록을 너그러이 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 P8

나는 슬픔의 친척인가?
우리는 친척인가?
이리도 자주 내 문 앞에서
오, 들어오라!
_
빈센트 밀레이의 시 <슬픔의 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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