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네 가지 요소를 살펴봐야 해요.
작자, 언어, 대상, 독자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 하지요.

언어, 대상, 독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러닝 소매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아이나
매연을 뿜으며 내달리는 트럭과 뭐 다르겠어요.

어디 시 쓰는 일에서만 그러할까요.
‘안 좋은 시인의 사랑을 받는
남(여)자는 얼마나 안 행복할까.‘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P7

시 쓰는 공부는 가파른 길이에요.
자기 자신을 내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삶은 사라지고 시만 남겠지요.

예술과 삶은 거의 같이 나가는 것 같아요.
예술 가지고 장난치거나 멋 부리면 안 돼요.
무엇보다 정성이 있어야 해요.

공자의 스승 주공은 머리를 감다가도손님이 오면 그대로 나가 맞이했다 하지요.
‘구이경지‘라는 말처럼,
시는 끝까지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거예요. - P8

가려운 데를 박박 긁으면 쾌감이 있지요.
그러나 긁고 싶은 대로 다 긁고 나면
온통 피투성이가 되지요.

시 쓸 때 들어가는 문은 가려움,
나가는 문은 따가움,
들어가는 문은 부질없음,
나가는 문은 속절없음이에요.

언제나 가까운 데서 찾고,
다른 데서 가져오려 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자기에게 절실해야 해요.
쓰고 나서 많이 아파야 해요. - P15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피상적인 사고밖에 안 나와요.
예술은 불화에서 나와요.
불화는 젊음의 특성이지요.

나이 들어 좋은 글을 쓰는 건
정신이 젊다는 증거예요.
젊지 않으면 쓰나 마나 한글,
써서는 안 되는 글을 쓰게 돼요.

우리가 할 일은
자기와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오직 시하고만 화해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헐벗게 하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을 안겨다줄 거예요. - P20

진정성을 가지고 뒤집으면, 모든 게 뒤집어져요.
이제까지 알고 있던 진실도, 거룩함도 다 뒤집어져요.
시가 안 되면, 나에게 뒤집음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세요.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 찾아보세요切問近思.
난간끝으로, 뜨거운 물속으로 자기를 밀어 넣어야 해요. - P21

시 쓰는 건 자기 정화예요.
화장실에 볼일보러 가듯이,
밥 먹은 다음 양치질하듯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할 일이에요.
우리는 그러지 않으면
금세 지저분해지는 존재예요. - P25

시 쓰는 사람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해요.
‘자기‘라는 것도 관념일 뿐이에요.

습관과 무감각은 우리를 살게 해주지만
우리를 삶과 절연시키는 것이기도 해요.
시가 고통스러운 것은 고정관념을 벗기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거예요. - P31

시를 쓸 때는 멀리 가되
반드시 돌아와야 하고,
자기 땅을 확보해야 하고,
멀면서도 가까워야 하고,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아야 해요.
그래서 부정확한 게 가장 정확한 게 돼요. - P54

산문은 ‘……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주지만,
시는 ‘...... 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지요.
시는 삶 앞에 마주서게 하고 눈뜨게 해요.

정상적인 언어의 흐름을 교란시킴으로써
삶의 치부를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것.

그건 카메라 조리개가 찰칵! 하고 열리면서
동시에 닫히는 것과 같아요.
또 어둠 속에서 성냥불을 밝혀 잠깐 환해졌다가
어두워지는 것과 같아요. - P61

시는 전적으로 말의 일렁임,
술렁임, 속삭임이에요.
시는 뭔지 모르는 거예요.

‘오직 모를 뿐只不知!‘

시를 쓰고 나서, 읽고 나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야
밥에 뜸이 들고, 물이 끓는 거예요.

시를 임신하고 싶으면
‘모르는 것‘과 섹스하세요. - P83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시는 일차산업이고 철저히 수공업이에요.
시 쓰는 사람은 말을 꼬기만 할 뿐,
시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말이 알아서 할 거예요. - P93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닿으려고 해야 해요.

쓰다가 막히면
위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세요.

등산할 때, 길 잃으면
출발한 데로 되돌아가듯이……

소주 두 잔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다음에 써 오실 구절은
‘다시 울 일이 없다.‘ - P108

시는 물수제비뜨는 거예요.
언어라는 수면 앞에 한껏 몸을 낮추는 거지요.

시는 절대적으로 듣는 방식이에요.
대상이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내 얘기를 하지 말고, 대상의 얘기를 하세요.
의미는 숨기고, 말의 감촉을 느끼도록 하세요.

언어에서 언어로 건너뛰다 보면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어요.

동질적인 재료로 동질적인 판을 짜세요.
만두피처럼 단단히 붙여야 해요.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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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고 싶은얼마 전 신문에서, 안나푸르나 등반에서 조난당한 젊은대원의 일기를 보았어요. 그분은 삼십대초반의 나이였던것 같고, 사고 당하기 전날 밤 쓴 글이라 해요. 일부러 고심해 다듬은 글이 아닌데, 어떻게 칼바람이 부는 텐트 안에서군더더기 하나 없는 글을 쓸 수 있었는지, 감탄과 존경의마음을 이길 수 없었어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 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 - P35

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이 글은 글쓰기의 완벽한 은유로서, 글 쓰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준엄하게 예시하고 있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생이라는 깎아지른 절벽 앞에 마주 서는 거예요. 그 앞에서는 온갖 지식과 경험이 쓸데없는 일이 돼요. 글쓰기에앞서 우리가 내쉬는 긴 호흡은 어떤 도저한 각오이면서 비장한 결단일 거예요. - P36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길이에요. 이 길은 오직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야 하므로, 우리 몸속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가령거미같은 곤충을 보세요. 자기 몸속에서 토해낸 실을 밟고 공중에서 옮아가잖아요. 그처럼 이 길은 오직 우리자신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어요.
이 길은 김수영과 나쓰메 소세키처럼 ‘온몸으로‘ ‘소처럼‘ 밀고 나아가는 길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요행도, 행운도 없는 그 길에서 살아 돌아와야 해요. 그렇지않다면 목숨을 건 여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처럼삶은 의무이며 희망이에요. - P36

벤야민이 역설하는 것은 의미 전달이 끝나자
마자 효과가 소멸하는 ‘정보‘와 달리, ‘이야기‘는 그 의미를 최종적으로 유보하기 때문에 계속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이 같은 ‘이야기‘의 소생 능력을 벤야민은 피라미드에서 발견한 ‘밀알‘에 비유해요. 수천 년 버려져 있던 씨알에 물을 주면 싹이 튼다는 거지요. 최근 시베리아 동토(凍土에서 발견한 씨앗에서 만이천 년 전 패랭이꽃이 피어났고,
미국의 암염 광산에서 채취한 소금물에서 일억 년 전 박테리아가 헤엄쳐 나왔다고 해요.
그처럼 ‘아는 것‘이 정보의 생명이라면 ‘모르는 것‘은이야기의 생명이에요. ‘모르는 것‘이 남아 있어 ‘아는 것‘
을 부추기기 때문에, 이야기는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어요.
반지름과 원의 넓이처럼,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것‘은 곱절로 많아진다잖아요. ‘아는 것‘이 무엇이냐는 안회의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해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 P53

현실경계 안에 있는 ‘동일성‘과 ‘차별성‘을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보자면, ‘무경계‘는 그 위로 나 있는 높이축에 해당된다고요. 또 십여 년 전 어느 자리에서 제가 문학에 대해 말한게 있는데, 이 또한 세 가지 좌표축으로 이해될 수 있어요.
"문학이란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위가 되고, 그것을 말하면 모든 게 스캔들이 되는 것입니다(가로축). 또문학이란 그것을 말하기 전에는 모든 게 ‘이놈‘ ‘저놈‘으로있다가, 그것을 말함으로써 ‘이분‘ ‘저분‘의 상태로 드높여지는 것을 말합니다(세로축). 마지막으로 문학은, 등을 긁을 때 오른손으로도 왼손으로도, 위로도 아래로도 닿지 않는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다 실패하는 것입니다(높이)." - P55

사물이나 사건이 제 본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은 반드시 와요. 그걸 믿어야 해요. 그러나 끝까지 지켜봤는데도그 순간이 안 올 수도 있어요. 그건 내잘못이 아니에요. 그래도 어떻든 그렇게 믿고 하는 수밖에 없어요. 왜? 보들레르 식으로 말하면, 글쓰기란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내가 누군지 알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글 쓰는 사람이 그 일을 제대로 할 때, 읽는 사람도 자기가 누군지 알게 되고,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사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중요해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기 - P107

때문에 사고가 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직 모를 뿐只不知!‘이라는 경구는 참 소중해요. 가령 탐정소설 작가도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써야 끝까지 긴장감이 유지된다고 해요. 만약 범인을 미리 정해 두고 쓰면 독자가 벌써 김새를 차린다는 거예요. 자기도 몰라야 끝판에 가서 자기도 알게 되는 거지요 - P108

시 쓰기는 언어로 하는 거예요. 시의 본령은 자신의 체험을 보고하거나 외부 현실을 기록하는 게 아니에요. 이런건 언어로 안 해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얼마든지 잘 할수 있어요. 시는 언어를 춤추게 하는 거예요. 너무 진지하면 춤이 안 돼요. 언어에 기대려면 차라리 술 한잔하는 게나아요. 그때 나오는 혀 꼬부라진 말, 더듬거리는 말, 실성한 말이 시에 가까워요. 어떻든 시 쓰는 사람이 시 속으로들어와 자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인형극을 보면 인형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 같지만, 막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대부분의 실패한 시는인형 조작하는 사람이 밖에 나와 관중하고 직접 말하는 것과 같아요. 시인은 끝까지 시 뒤에 숨어 있어야지, 독자 앞에 나오면 바로 죽어버려요. 햇빛을 죈 드라큘라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시는 고장 난 변기의 레버를 내리거나,
체인 벗겨진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과 같아요. 뭔가 저항하는 느낌이 안 나잖아요. 그 느낌이 없으면 시가 아니에요. - P110

바위투성이인 그 산은 깎아지른 절벽과 눈썹을 닮은 봉우리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나정말 아름다웠던 것은 거기서 내다보이는 다른 산들의 아스라한 모습이었어요. 액자처럼 드리운 가까운 산의 능선위로 드러나는 먼 산들의 정경은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떤 산이 아름다운것은 제 스스로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바라보이는다른 산들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어쩌면 한 존재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다른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일 거예요. 한 존재의 올바름과 진실함 또한 다른 존재들의 진실함과 올바름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기 때문일 거예요. 그 자리는 영원하지만, 그곳에 머물다 가는 존재들은 덧없습니다. 그 사실을인정할 수 없거나, 자신을 그 자리와 동일시할 때 그 자리는 숨어버리지요. 잊혀진 그 자리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환기시키는 것이 시와 시인의 역할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 P111

ㅁ아름다움의 종교가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먹은 것만큼은 토해내야 해요. 최소한의 고통까지도 안 받으려 하면, 도둑놈 심보예요. 깨달은 사람은 치매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 깨달은 사람한테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다만 수레의 테두리와 중심축 사이 바퀴살 위에서, 지금 내 의식이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돌아보세요. 테두리 가까이 있으면 고통스럽고 중심축 가까이 가면 힘이 덜어져요. 하지만 테두리나 중심축이나 다 같은 바퀴살 위의 두 지점임을일지 막아야 해요. - P119

정말 좋은 문장은 눈물을 나게 하는 게 아니라, 눈물이깊은 속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거예요. 저는 문장을 어떻게써야 할지 막막할 때마다 카프카를 읽어요. 아무 페이지나펼쳐놓고 말이에요. 카프카의 문장은 전부가 시예요. 시적인 문장은 산문으로서는 약점이라 하지만, 카프카 문장은그렇지 않아요. 거기에는 아무런 비유나 장식이 없지만,
본질에 닿아 있어요. 저는 그의 문장들 몇 개를 지금도 외우고 있어요. 그러면 저도 언젠가 그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시를 쓰려면 시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보다, 좋은시 읽는 것이 더 중요해요. 또 좋은 작가가 되기보다 좋은 - P130

독자가 되려는 게 글쓰기의 지름길이에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김수영, 카프카, 벤야민, 뭐 그런 이름들을 들 수 있겠지요. 어떤 작가를 스승으로 택한다는 건 배우자를 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요. 스승이 없으면 헤매게 돼요. 아까도 말했지만 시 쓰는 사람은 시가 씌어지는 자리를 자꾸 돌아봐야 해요. 삼사십 년 썼다고 어느 날 좋은 시가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중학생은 바로 돼도 예순 살 먹은 문학박사는 잘 안 되는 게 이 세계예요. 바른 길을 찾아가지않으면 백 년 천 년이 가도 헛방이에요. 평생 서울 간다면서 부산 가놓고, 남대문이 왜 안 보이느냐고 떼를 쓰면 뭐라 하겠어요. 글쓰기에서 ‘서울가는 것‘은 자기 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해요.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요. 나도 안 아프면서어떻게 남을 아프게 할 수 있겠어요. 결국 자기를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 거지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속으로깊이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돼요. 시가 뭔지, 시가 어디 있 - P140

는지 말이에요. 시는 시인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에게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각각의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즉 ‘화자‘에게 있어요. 그 자리에 제대로 서면 모든 게시가 돼요. 좋은 시는 언제나 독자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들어요.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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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논할 때는 시를 쓰듯이 해야 한다는 김수영의 말도 있지요. 시를 산문으로 하면, 산문이지 시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하면 시를 논할 필요도 자격도 없는 거지요.
시의 본질이 은유에 있다면, 그 은유는 다른 은유로밖에표현될 수 없고, 이 점은 다른 여러 예술의 경우에도 같다고 봐요. 시를 산문으로 설명한다면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떠먹거나, 지난주 일기예보로 내일 산행을 하는 것과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 P26

이 표현은 여러 곳에서 농담처럼 쓰여요. 밥을 왜 먹느냐고 물으니, ‘밥이 거기 있으니까‘, 시를 왜 쓰느냐고 하니, ‘시가 거기 있으니까………… 이표현이 자주 쓰이는 것을 보면 분명히 보편적인 데가 있는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본 표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것은 등산로 옆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리본에 적혀 있었어요.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은 산, 가고 또 가도 가고 싶은산.‘ 이 말이 불러오는 숨 막히는 그리움은 대상 앞에서시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해요. 시는 우리 주위의 하찮은 대상이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고‘ ‘가고 또 ‘가도 가고 싶은‘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지요.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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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고난과 순명의 표상인 육사의 시는 저에게언제나 시가 있어야 하고 떠나서는 안 될 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절정」과 「광야」는 그분이 살았던 삶 전체를아우르는 열쇠말인 동시에 시가 머물고 지켜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이 시들은 당시의 곤핍한 상황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애초에 시라는 장르가 ‘절정‘과 ‘광야‘라는사실을 준엄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육사의 시는 어떤 임계점, 혹은 극한점에서 씌어진 것으로서, 시라는 것이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극지‘의 산물이자 ‘극지‘ 그 자체라 - P9

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다른 시인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소월의 「초혼」은 초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본래 시라는 장르 자체가 ‘초혼‘인 것이고, 시인은 그 불가능한 초혼제의 역할 수행자인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시라는 형식이 자기 규정적이고 자기 회귀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말들이 자기 규정적이고 자기 회귀적입니다. ‘나 너를 미워해‘ 라는 말의 효과는
‘너‘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오롯이 돌아옵니다. 또 어떤사람 욕을 해도 그에게로 가지 않고 고스란히 자기한테 돌아오지 않습니까. 마치 누워서 침을 뱉거나 오버잇을 하면자신이 뒤집어쓰는 것과 같지요. - P10

말의 자기 규정성, 자기 회귀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라는 장르라는 사실은 길지 않은 우리 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월이나 육사뿐 아니라백석과 윤동주, 이상과 김수영의 삶과 시를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의 일차적인 희생자가 되고, 그가 자초한 희생을 어떻게든 피하지 - P10

않음으로써 그의 말은 일종의 상징이 되는 것이지요. 사실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말은 머리 위 도끼날처럼 제 말이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가령 통증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명치끝을 맞았을 때의느낌이 그러하다고 할까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이 말은도무지 번역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시가 지향하고 조명하는 것은 이 말이 가리키는 어떤 지점이 아닐까합니다. 오직 이 지점에서 씌어진 것만이 시이고, 이 지점을 벗어나면 사이비가 됩니다. 만약 어떤 시가 이지점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책임회피와 방관에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표현하려다가 실패하는 것일 테지요. - P11

시가 지향하는 자리, 시인이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더이상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극지‘이고, 그 지점에남아 있기 위해서는 무작정 버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없습니다. 시는 머리가 아니라 다리로 쓰는 것이며, 시가있는 자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연소함으로써 밝힐 수 있습니다. 시에 대한 공부는 자기 안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이지, 그것을 이론이나 사상으로 대체하려 하면 도리어 멀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저는 본래 출발했던 그 자리만을 놓치지 않으려 애쓸 것입니다.
두서없는 말씀과 몸짓, 표정에서 시를 향한 저의 안타까움이 전해졌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끝맺겠습니다.
(제11회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 소감)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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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 주교는 아주 열렬한 세속적인 야망을 하나 가지고있었는데, 그것은 산타페에 그곳의 주위 자연환경과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성당을 짓는 일이었다. 그는 이 소망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대해 숙고함으로써 그런 건물을 지으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이 목표로 해온 이상이 지속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감으로써 그것은 곧그의 열망이 되었다. 이곳에 취임해 온 초창기부터 그는 이성당을 지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형편없는 재산에서 얼마간씩 저축해 오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그는 어느 멕시코인 부자 목장 주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돈 안토니오 올리바레스라는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올리바레스는 지성적이고, 형제들과 사촌들이많은 대가족 출신의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녀 경험이 풍부했으며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는 인생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뉴올리언스와 엘파소 델 노르트에서 보냈지만, 주교 라투르가 취임한 지 몇 해가 지난 후에 산타페로 돌아왔다.  - P197

올리바레스의 아내인 도나 이사벨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들의 집에서는 프랑스인 사제들이 늘 환영받았는데최고로 친절하게 환대받았다. 올리바레스 부인은 산만한 어도비 흙벽돌 건물과 커다란 뜰과 대문, 조각한 들보와 서까래, 청어 뼈 모양으로 아름답게 조각한 천장과 아늑한 벽난로들을 쾌적한 분위기로 꾸며 놓았다. 그녀는 우아한 안주인으로서, 비록 이제는 아주 젊어 보이지는 않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날씬하고 생기있고 동작이 민첩하며 섬세하고 하얀 얼굴을 가진 그녀는 산타페의 좋지 않은 기후에도 불구하고 워낙 자신을 잘 보호하고 가꾸어 아름다웠으며, 약간 은빛이 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을 지니고서 얼굴 윤곽이 더 뚜렷하게 보이도록 머리카락을 많이 부풀리고 동글동글하게 말고 있었다. 그녀는 스페인어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어를 잘했으며 하프를 연주할 줄 알았고 노래도 아주 잘 불렀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꾼들과 인디언들, 거친 개척민들 - P198

사이에서 살고 있는 라투르 신부와 바일랑 신부에게 가끔 모국어로 교양을 지닌 여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 환대할 만한 벽난로 가에 앉아옛 스타일의 거울과 조각들과 천으로 치장된 의자들이 있는풍요로운 방에서, 창은 깨끗한 커튼이 쳐져 있고 장식장과식기장들은 접시와 벨기에산 유리잔들로 채워져 있는 그곳에서..…….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많은 이 집 부부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훌륭한 저녁식사를 하고 훌륭한 포도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것은 유쾌한일이었다. 모순투성이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요셉 신부는듣기 좋은 테너 목소리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강하지 않으면서도 진실한 목소리였다. 올리바레스 부인은 그와 함께옛날 프랑스 노래들을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사소한 데서 약간 잘난 척하는 면이 있어서, 노래를 부를 때면 언제나세 개의 언어로 부르자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 P199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 건배를 하며 술을 마셨고, 남자들이담배를 피우는 동안 파블로라는 소년이 반조 연주를 위해 불려 왔다. 반조는 라투르 신부에게 늘 이국의 악기 같았다. 그는 반조가 약간 야만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문명화된 것임을알게 되었다. 이 낯선 누런 피부의 소년이 반조를 연주하자.
그 현이 울리는 음악 속에는 부드러움과 권태로움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일종의 광기 같은 것도 있었다.
어떤 무모함,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여기 멕시코 남자들 모두가 느끼고 따르는 황야의 부름 같은 것. 시가 담배연기 속에서 정찰병들과 군인들과 멕시코 목장 주인들과 사제들이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웅크리고 반조를 연주하는 소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활을 켜는 그의 누런 빛깔 손이 얼마나 빠른지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마치 어떤 물체가 한 무더기의 모래 포풍처럼 회 지나가는 것 같았다. - P205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명상을 하면서 그 손들을 지켜보며 라투르 신부는 이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자신의 이야기도 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불안한 듯 먼 곳을 응시하는 카슨의 파란 눈, 그 눈은 정찰병에게도, 산속에 오솔길을 처음 만들어 내는 사람에 - P205

게도 있는 것이 아니던가? 돈 마누엘 차베스는 일행 중 가장잘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벨벳으로 된 아주 우아하고 폭넓은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에는 경멸하는 듯한 모습이 어려 있었다. 그가 방을 걸어가는 모습을 통해서나 식탁에서 그 옆에 앉기만 해도 그의 차가운 과묵함 아래로 전기처럼 섬뜩 하는 것, 어떤 씁쓸한 격렬함, 위험에 대한열정 같은 게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 P206

성모 마리아의 달이었고, 5월이었다. 바일랑 신부는 정원에 있는 포도덩굴 정자 아래서 군용 침대에 누워 담요를 덮고서 주교와 그의 정원사가 채소밭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지켜보고 있었다. 사과나무는 꽃이 한창 만발해 있었고 벚꽃은 이미 진 상태였다. 따스한 봄바람에 공기와 흙냄새가 스며 있었다. 흙은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햇빛은 붉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숨 쉬는 공기에는 흙냄새가 배어 있었고, 발밑의 풀은 그 속에 파란 하늘을 투영해 내고 있었다.
이 정원은 6년 전에 계획되었는데, 그때 주교는 이곳으로 - P224

와 빛의 성모 학교를 설립한 로레토의 축복받은 수녀들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에서 과수나무(그때는 그저 마른 가지에 불과해 보였다)를 마차에 실어 가져왔다. 학교는 이제 잘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어서 그 지역에 사는 가톨릭교도들뿐 아니라 신교도들까지 혜택을 보고 있었으며, 나무들은 과일을 맺게 되었다. 일부 잘려 나가 접목된 나무들은 여러 멕시코인정원에서 이미 많은 과일을 매달고 있었다. 주교가 볼티모어로 처음 여행을 간 동안 요셉 신부는 그가 맡은 많은 공식적인 일들 이외에도 시간을 내서 멕시코 가정부인 프룩토사에게 요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후에는 라투르 주교가 프룩토사의 남편 트란킬리노를 일손으로 맞아들여 그를 정원사로 훈련시켰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데, 성당 뒤에 있는 땅과 주교의 집과 수녀원 학교 사이에 있는 땅을 방대한 과수원과 채소밭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그후로 주교는 거기서 일을 하며 나무를 심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 P225

성당의 뜰과 수녀원 학교 사이에 어린 포플러 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흙 담장 앞에 그들이 처음왔을 때부터 일렬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들은 늙을대로 늙은 능수버들 나무로 줄기가 비틀어져 있었다. 아무도돌봐주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는 그 나무들은 햇빛에 구워지고 당나귀 발에 밟혀 단단해진 땅에서 그토록 힘겹게 살고있었기에 줄기가 삼나무처럼 강인했다. 그들은 실로 비바람에 잘 단련되고 세월에 의해 반들반들해진 아주 오래된 막대기처럼 보였는데 봄이 되면 기적적으로 섬세한 잎새와 꽃을틔워 내는 힘을 갖고 있었고, 기다란 빗자루 같은 라벤더 빛 - P225

이 도는 분홍빛 꽃으로 나무 전체를 뒤덮기도 했다.
요셉 신부는 어떤 나무보다도 이 능수버들 나무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나무는 방랑하는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의 사막을 지나 길을 가다가 멕시코인 마을이 나타나기만 하면 늘 햇빛에 구워진 흙에서, 혹은 햇빛에 구워진 어도비 흙벽돌 담에서 능수버들은 청록 빛 날개 달린 잎들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가족용당나귀가 능수버들 나무줄기에 묶여 있거나, 능수버들 아래서 닭들이 긁어 대고 있거나, 개들이 능수버들 그늘 아래서잠을 자거나, 혹은 빨래가 능수버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곤했다. 라투르 신부는 종종 이 나무가 어도비 흙벽돌집 마을에잘 어울리도록 그 형태나 색상이 특별히 고안된 것 같아 보인다는 말을 했었다. 이 나무의 가지들을 장식하는 꽃들은 붉은흙 담장의 또 다른 그늘 같아 보였으며, 그 섬유질의 줄기도금빛과 라벤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셉 신부는 그런 것에 대한 주교의 안목을 존경했지만 그 자신은 그 나무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나무이고, 모든 멕시코 가정에 마치 가족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아주 좋아했다. - P226

선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세계로 출발하는 일이었다. 그 헤어짐은 헤어짐이 아니라 일종의 도피였다. 멀리 도망치는 것, 더높은 믿음을 위해 가족의 믿음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그는이제야 그때 일을 돌이켜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그 당시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저 너머에서 당근을 솎아내고 있는 주교는 그 일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으리라. 실로 그 시간에 라투르 신부가 그와 함께 있어 주었기에 요셉 신부가 이처럼 산타페의 정원에있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새로 임명된 주교가 그와 새주교지로 가서 힘든 일을 함께 해보자고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사랑하는 샌더스키를 결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혼자 스스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아, 이제 그가 힘겨운 일에 처하게 되었구나! 우리가 길가에서 파리행 역마차를기다리며 서 있던 그날 그가 내게 해주었던 것을 내가 그에게 해줄 차례가 되었구나. 내 결심은 무너졌었지. 그런데 그가 나를 구해 줬었지.> - P229

선교사들이 아파치족들에게 약탈당할 때 그의 선조들이거기서 이 성스러운 물건들을 몰래 가져왔는데 얼마나 오래전에 그랬는지는 그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 비밀은 그의 가족 대대로 전해 내려왔는데, 내가 처음으로 그 성물들을 꺼내다가 하느님께 다시 바친 사제가 된 거였어요. 제게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상황 그대로였어요. 그 황량한 변방지에서 믿음은 묻혀 있는 보물과 같아요. 그들은 그것을 지키고만 있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서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할지를 모르고 있어요. 한마디의 말, 한 번의 기도 한 번의 미사면 속박되어 있는 그 영혼들을 석방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것이 되는데도요. 고백하건대, 나는 그런 선교를 꼭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잃어버린 아이들을 하느님께 되돌리는 일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제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이 될거예요.」주교는 이런 탄원에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진지하게 말했다. 「요셉 신부, 당신은 내가 여기서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아야 해요. 내가 해야 할 일도 한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거든요.」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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