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세계적인 생물학자, 페미니즘 이론가, 문화비평가, 과학 및 테크놀로지 역사가다. 1944년생으로 미국콜로라도대학교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고예일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크루스캠퍼스University ofCalifornia, Santa Cruz(UCSC) 의식사학과 명예교수다.
인류학, 환경학, 페미니즘, 영상·디지털미디어학등과 연계해 다학제 연구를 진행해오면서인문학과 기술의 접점을 모색하고자 했다. 
저서로<영장류의 시각 Primate Visions》,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겸손한 목격자@제2의 천년여성인간 앙코마우스™를_만나다》, 《한 장의잎사귀처럼》 등이 있다.



어려울 것이란 선입견으로 시작했는데... 서문에서부터 마음에 확~ 들어온다.
‘홀딱 반해버린 레코드판을 맨 처음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과 더 비슷하다.‘ 니...



서문

캐리 울프

나로서는 30년 넘게 비판이론과 문화이론에 관한 문헌을 읽어왔지만, <사이보그 선언>에 견줄 만한 걸작은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글을 처음 읽었을 때가 어렴풋이 기억난다(논문은 복사해서 모서리를 접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대학원생들이 늘 쓰던 방법이다). 그 글을 읽고 나와 같은 경험을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이 경험을 떠올리는 것은 9/11이발생했을 때 있었던 장소를 떠올리는 것보다는, 홀딱 반해버린 레코드판을 맨 처음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과 더 비슷하다. - P7

철학, 사회주의 페미니즘 정치, 이론을 뒤섞는 글쓰기 스타일에 얼마간 익숙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나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글의 파격적인 문체와 화법, 스웨거 swagger라고 불러도 괜찮을 스타일을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여기서 나는 선언문 자체의 정신에 충실하게, 일부러 이단자가되려는 중이다). 글을 "사이보그의 ‘섹스‘는 양치식물과 무척추동물의 매혹적인 복제 패턴(이성애주의 예방에 효과적인 천연약품)을 일부 복원한다"는 관찰에서 시작한 다음 "나선의 춤에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라는 문장으로 끝내는 사람이 대체 또 어디에 있겠는가? - P8

수사학적 퍼포먼스가 너무나 인상적이라는 이유로, 이 글이 백과사전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박식한 내용을 대단히 넉넉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기 쉽다. 이런 글을 쓰겠다는엄두라도 내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하는 걸까? 게다가 이미 학계 스타 시스템이 단단히 자리 잡았던 당시에 이만큼 인용을 후하게 하는 글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나와 해러웨이가 나눈 대화를 읽는 독자는 알게 되겠지만, 해러웨이는 인용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취급한다.) 글에서 언급되는고유명사 목록을 만들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리고 물론 그 이상의) 이유로 <사이보그 선언>은 수많은 독자에게 더없는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자유" - P9

물론 생물학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은 해러웨이의 전기와후기를 아우르는 글에서 늘 완전히 뒤얽혀 있었다. 첫 번째 선언문을 마감하는 "나선의 춤" 안에 함께 둘둘 감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려종 선언>은 생명/기술 문제의 반대편 극점인 육신the tiesh 을 향해 뻗어나가며, 심지어 열망한다. (다만 두 번째 선언문의 서두에서 주의를 주는 것처럼 "이들 형상은 정반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해러웨이가 두 번째 선언문에 적은 것처럼 "사이보그나 반려동물은 종의 경계를 더잘 관리하면서 범주 이탈자의 번식을 막는 순수성을 지향하는사람들에게는 영 못마땅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육신과 대지를 다루는 두 번째 선언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육신과 대지는 회로나 칩 또는 알고리즘보다 촘촘히 짜인 존재론적 윤리적·정치적인 복잡성의 장소라고 밝혀진다는 정도의 이야기를하는 것이 아니다. 또 이 선언문은 기술과학에 관한 것이면서도 "생명권력과 생명사회성"의 이야기에 더 가까워서, 어떻게 "자연문화에서 역사가 중요한지 알려준다. - P11

생명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세속주의, 개신교, 자본주의 그리고 현대미국사에서 국가의 형식이 이루는 특정한 배치 및 헤게모니적기반에 맞서는 중요한 대항 논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해러웨이는 스스로 밝히듯 천주교 신자로 자라났기 때문에 이와 같은 수사에 이끌리게 된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실체변화 transubstantiation는 천주교인으로 성장했다는 내력뿐 아니라 스푸트니크 Sputnik와 우주 경쟁의 시대에 교육을 받고 성년이 된 천주교인 여성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이보그 선언>의도입부로 돌아가서, 해러웨이가 사용하는 어구 "육신이 말씀이되다"는 어쩌면 "신성모독"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덕분에 훨씬더 진지하고 충실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해러웨이 자신이 분명하게 밝히며 상기시키듯 "신성모독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 P14

이 글은 페미니즘, 사회주의, 유물론에 충실하면서 아이러니한정치 신화를 세우려고 시도한다. 나의 화법은 엄숙한 경배나 동일시identification 보다 오히려 더 충실한 신성모독blasphemy에 가까울 것이다. 신성모독은 언제나 진지함을 요구하는 일처럼 보인다. 내가 아는 한, 사회주의 페미니즘socialist-feminism을 포함하여,
세속화된 종교와 복음주의가 깊이 스며든 미국 정치의 전통에서 채택하기에 신성모독보다 나은 입장은 없다. 신성모독은 공동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그 내부의 도덕적 다수파 moralmajority로부터 보호받게 해준다. 신성모독은 믿음을 배반하는것과는 다르다. 아이러니는 변증법을 통하더라도 더 큰 전체로통합할 수 없는 모순에 관한 것이며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모두 필연적이고 참되기 때문에 그대로 감당할 때 발생하는 긴장과 관계가 깊다. 아이러니는 유머이며 진지한 놀이다. 일종의수사학적 전략이자 정치의 방편인 아이러니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더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나의 아이러니한 믿음, 신성모독의 한복판에 사이보그의 이미지가 있다. - P17

사이보그는 포스트젠더postgender 세계의 피조물이다. 사이보그는 양성성bisexuality, 오이디푸스 이전의 공생 symbiosis, 소외되지않은 노동을 비롯하여 부분들을 상위에서 통합해 그 전체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전유하여 얻어지는 유기적 총체성을 향한 유혹과 거래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어떤 면에서 서구적 의미의기원 설화가 없다. 이것이 사이보그 "최후의 아이러니다. 사이보그는 추상적 개체화로 지배력을 확장한다는 "서구의 끔찍한종말론적 목표telos, 마침내 모든 의존에서 벗어난 궁극적 자아, 다시 말해 우주인a man in space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인본주의적 의미의 기원 설화는 본원적 일체original unity, 충만함, 은총과 공포의 신화에 의존하며, 이는 남근적 어머니로 표상된다. - P20

강력한 쌍둥이 신화는 특히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있다. 힐러리 클라인Hilary Klein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모두 노동과 개체화 및 젠더형성의 개념을 다룰 때 본원적 일체라는 서사 장치에 기대는데, 이는 본원적 일체로부터 차이가 생산된 뒤 여성/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넓혀가는 드라마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이보그는 이와 같은 본원적 일체, 서구적 의미의 자연과의 동일시 단계를 건너뛴다. 이것이야말로 사이보그가 자신을 탄생시킨 목적 teleology 인스타워즈 Star Wars" 의전복으로 이끌 수 있는 사이보그의 불법적 약속이다. - P21

스타워즈

조지 루커스George Lucas가 제작한 영화 시리즈를 의미할 뿐 아니라 레이건 시대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방어 프로젝트인 전략 방위 구상StrategicDefense Initiative, SDI을 뜻하기도 한다. 냉전 시대에는 대륙 간 탄도탄을 비롯한 공격 기술들을 막기 위한 군사 전략이 여럿 고안되었는데, 전략 방위 구상은 미사일 공격이 발생할 경우 우주 공간에 있는 군사용 장비로해당 미사일을 격추하여 목표지점에 명중되는 것을 막는다는 계획이다.
이는 기존의 냉전 패러다임인 "상호 확증 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즉전쟁이 발발할 경우 전멸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을 확증함으로써 역으로전쟁 발발을 막을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으로 클린턴 정부 시절 철회되었다. SDI는 1983년 로널드레이건의 1차 대국민 보고 이후 비판자들에 의해 당시 유행하던 영화 <스타워즈>에 빗댄 이름을 달게 되었고 계획의 비현실성 및 군비 확장과 관련된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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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를 쓰는 건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지 눈빛이 어떠했는지… 꽃매미 날개를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것도 내 삶이 너무 허망하기 때문이에요. 시는 이제는 기억도 못 하는 숱한 상처들의 기록이에요. 그 속에는 내가 받은 상처뿐 아니라, 내가 준 상처도 포함돼 있어요. 길바닥의 개미를 보고 피하려고 조심하지만,
이미 내 구둣발 밑에 으깨어진 개미는 보이지도 않았을 테니…… -P147

202
글을 쓰나 안 쓰나 우리는 망하게 되어 있어요. 글로써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뿐이에요.

203
시는 기도예요. 하느님한테 뭐 해달라고 조르는 기도가아니라, 어쩌든지 당신 뜻대로 살겠다는 약속이지요. 시는번제예요. 희생제물을 까맣게 태워 아무도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시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자리예요.

204
『주역의 수뢰 준‘ 괘는 물 밑에서 우레가 솟는 형상인데, 창조와 신생의 간난을 의미해요. 특히 이라는 글자는 어린 싹이 땅속에서 뒤틀리며 어렵게 올라오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출구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시도 그렇지 않을까해요. - P83

205
인간의 한계와 삶의 한계는 같은 것이고, 그것이 곧 시의 한계예요. 시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탐구와 모색이에요.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부정같은 시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일이에요.

206
문학은 외줄 타는 광대의 막대기와 같아요. 막대기는 흔해빠진 것이지만, 줄타기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이에요.

207
문학은 허기로서 가 닿아야 해요. 허기진 얘기는 골백번들어도 늘 새로워요. 이 허기는 하느님도 못 건드려요. - P84

210
시는 고통스러운 거예요. 대상에 상처를 내고 그 맨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좋은 시는 실성한 사람의 헛소리에 가까워요. 여러 번 읽어도 잘 모르지만, 한번 읽고 나면두고두고 잊히지 않아요. - P85

230
시는 언제나 ‘젊은 시‘예요. 시의 깊이는 불화에서생기고, 시의 감동은 열정에서 나와요. 시가 만약 재능이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나비나 공작새를 따라갈 수 있겠어요.

231
파카 볼펜의 화살표시 아시지요. 쉽게 들어가지만 나올때는 도무지 안 빠지는 화살촉 같은 시를 써야 해요. - P92

239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240
시인은 입을 닫고 보여주기만 할 뿐이에요. 입을 열더라도 헛소리만 할 뿐, 계속 딴전을 피워야 해요. 독자가 이해하는 순간, 시는 죽어버려요. - P95

276
모든 사연을 지워버리고 ‘그리고‘로 시작해보세요. 우리 안의 내밀한 상처, 미처 돌보지 않은 거친 것들이 올라올 거예요. 우리의 참 모습은 ‘그리고‘ 이후예요.

277
야단맞은 아이들 자면서도 훌쩍거리던 모습, 잊히지 않아요. 그렇게 풀어주지 못하고 떠나온 것들 참 많지요. 이번 가을 오고 또 가고, 내년에 다시 올 것 같지만 영영 안올 수도 있어요. 사랑을 못 받아도, 못 주어도 응어리가 남아요. 그 응어리를 뒤늦게 풀어주려는 게 시예요.

278
다친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예요. - P108

280
우리의 일상은 얼다 녹다가 하는 일의 반복이에요. 이지루한 아름다움! 우리가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얼마 되지 않아요, 오직 견디는 것뿐. 위로 안 받기 위해,
좀더 강해지기 위해 우리는 시를 쓰는 거예요.

281
겨울에 오줌 누고 나면 몸을 살짝 떨게 돼요. 체온이 떨어졌기 때문이라 하지요. 시 읽고 나서도 잠깐 떨게 돼요.
사시나무 떨 듯 하는 건 아니고… 시도 오줌도 늘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나오기 때문이겠지요. - P109

286
시는 틈새 만들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우리는시가 만든 틈새만큼 숨 쉴 수 있어요. 그 틈새만큼이 인간의 자리예요.

287
삶을 바꾸는 대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려는 게글쓰기예요. 경상북도 속으로 대한민국이 쑥 빨려 들어가는 일은 글쓰기를 통해 언제나 가능해요. - P111

303
시는 나를 통과해 씌어지는 거예요. 생각이 뻗어나가도록 가만히 두세요. 시를 통해 이전의 관념에서 벗어나는순간, 이전의 ‘나‘는 사라져요.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내가 잘 죽어야 해요.

304
글을 쓸 때는 내가 글의 품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은 내가 맺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맺어지게 돼 있어요. 글쓰기는 머리가 아니라, 말이 하는 거예요. 써나가다헛소리가 튀어나올까 봐 겁내지마세요. 너무 튀면 나중에 잘라주면 되니까요.
OR - P119

342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게 중요해요. 자신이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가봐야 알아요. 스스로 통제할 수없는 데까지 나아가면, 비로소 고요하게 돼요. 그와는 달리, 뭔가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에게 속는 거예요.

343
시는 살아내려는 의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이 구멍저 구멍 기웃거리면 죽도 밥도 안 돼요. 재료를 최소한으로 쓰는 대신, 꺾임을 확실하게 하세요. 자기 몸에 붙여 쓰되,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달라야 해요. - P133

399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더럽게 하는 것이더러운 거예요. 되도록 세상에 짐이 되지 않도록 하세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스쳐 지나가는 건 할 수있어요.

400
먹고 싶을 때 먹고, 싸고 싶을 때 싸면서 아름다울 수 있겠어요. 소중한 건 언제나 어렵게 얻어져요. 쉽게 만들고쉽게 보여주면, 쉽게 버림받아요. 물 안 줘도 시들지 않는꽃은 가짜 꽃이에요. 글쓰기는 한 번 할 때마다 한 번씩 죽는 거예요.

401
시의 아름다움은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에 있어요. 시는 자세예요. 어떤 자세든 정신과 결부되지 않은 자세는 없어요. 세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건 아름다운자세밖에 없어요. - P154

414
테니스 칠 때 공을 앞에서 맞추라 하지요. 뒤에서 맞은공에는 힘이 실리지 않아요. 시 쓸 때도 전향적 사고를 해야 해요. 가령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게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낳았다고 해보세요. 안 될 게 없잖아요. 삶이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은 사소한 생각의 전환에서 와요.

415
삶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은유를 바꾸어야 해요. 믿을 수 없고 수긍할 수도 없지만,
글쓰기 외에 다른 천국이 없어요. - P159

418
시는 욕망의 꿈틀거림이고, 불화의 부르짖음이에요.
생피를 보려면 딱지 않은 것을 벗겨내야 해요. 예술은 생을 알몸으로 사는 일이에요. - P160

433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세계라는 관념이에요. 얼마든지 다른 관념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관념을 세계라고 믿으면 자기 오줌을 마시고, 자기가만든 귀신에 홀리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고 관념을 무시해서는 안 돼요. 문화가 없다면 자연이 있을 수 없듯이, 관념이 없다면 세계를 재구성할 수도 없으니까요. - P166

435
글도 마음도 자주 살피지 않으면 나와 다른 사람을 해치게 돼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도덕과 달리, 윤리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무한 책임! 자기가 얼마나 피상적인지 아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에요. 피상적인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 더 악질이에요.

436
삶과 글은 일치해요. 바르게 써야 바르게 살 수 있어요.
평생 할 일은 이 공부밖에 없어요. 공부할수록 괴로움은 커지지만, 공부 안 하면 내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구분할수 없어요. 젠체 안 하고 남 무시 안 하려면 계속 공부해야해요. 늘 문제되는 것은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태도와 방향이에요. - P167

445
이 세상은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인연으로 생기지않은 의미는 없어요. 살면서 우리는 인연에서 한 발자국도벗어날 수 없어요. ‘인연‘을 은유라는 말로 바꾸어도마찬가지예요. - P170

448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의 주인이고, 모르는 것의 하인이라 하지요. 어떤 것을 이해하는 순간, 그것이 우리를 놓아줘요. 삶과 죽음을 함께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보도록해야 해요. - P171

467
깨달음의 순간이 있기는 할까요? 문제는 깨닫고 나서도몸과 마음이 옛날방식 그대로 움직인다는 거예요. 깨달음에 목 매지 마세요. 어리석음을 그냥 두고 바라보세요.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絶처럼……‘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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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망망대해의 물거품 하나에도 못 미쳐요. 문학이란건 허망한 존재가 자기 허망함을 알고 딴짓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에요. 비참하게 깨져도 한심하게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것. 모든 것이 허망하다 해도, 허망하지 않은 게 꼭하나 있어요. 일체가 허망하다고 말하는 이것! 이 공부를오래 해야 독하게 벼려져요. - P182

469
축구 경기에서 끝까지 무승부가 되면, 양팀 선수들이승부차기를 해요. 그때 한 선수가 골대를 향해 가면, 다른선수들은 스크럼을 짜고 격려를 하지요. 기독교 박해 시대때 형장으로 들어서는 순교자를 다른 교우들이 격려할때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시를 쓰는 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사 앞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을 위해 스크럼을 짜는 게 아닐까 해요. - P183

470
‘당랑거철‘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마귀가 겁 없이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것이지요. 참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지만, 시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아름드리 나무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올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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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아무리 슬픈 사연도 말하고 나면 고통이 줄어들어요. 아무리 고된 노동이라도 노래에 실리면 힘든 줄을 몰라요.
리듬 때문이지요. 그건 일의 리듬이고 몸의 리듬이에요.
계단 잘 내려가다가도 ‘조심해야지‘ 하면 걸음이 엉켜 비틀거려요. 몸 하는 일에 머리가 개입해서 생기는 혼란이지요. 시 쓸 때도 머리보다 몸에 맡기도록 하세요.

48
머리로 쓰는 글은 세수 안 하고 분 바르는 것과 같아요. 글 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밀고 들어가세요. 생각은 나중에 와야 해요. ‘기다리면 늦어지고, 생각하면 어긋난다‘
는 경구는 어느 수행에서보다 글쓰기에 필요해요. - P27

77
시는 감정도 비유도 아니고, 패턴이에요. 패턴은 소급적인 동시에 예시적이에요. 은유적 의미를 띠지 않는 패턴은없어요. 패턴 자체가 은유에서 나오고, 은유를 가능하게해요.

78
시를 쓸 때는 말의 꼬임새로 패턴을 만들어야 해요. 꼬임은 서너 번 정도면 족해요. 그 이상이면 우리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요. ‘그 사람은 착한 것이 아닌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하면 벌써 착한 건지, 아닌 건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 P37

121
글을 쓸 때 잡생각을 받아 적어보세요. 일상에서 잡생각은 시에서 진실이고, 일상에서 진실은 시에서 잡생각이에요.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리는 것 안에 우리 자신이 가장많이 들어 있어요.

122
잡생각은 가장 그 사람다운 생각이고, 진짜 인생이에요.
그 안에는 꿈과 사랑, 욕망과 희망이 다 들어 있어요. 잡생각의 채널에 접속하고 나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잡생각이라는 것조차 없어요. - P54

172
다시 정리해볼게요. 행갈이를 하든 안 하든 시는 시예요. 말과 말 사이 점착성을 의식하고, 되도록 쉽게 쓰세요. 중학교 이학년 이상의 말은 필요 없어요. 담장 너머있는 사람에게 하듯 보이게 얘기하세요. 할머니가 손자 데리고 계단 올라가는 것처럼 말하세요. 아기 한 발, 나 한 발그렇게 해야지, 안그러면 가랑이 다 찢어져요.

173
보여준다고 해서, 다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이야기가밖으로 드러나면 힘이 없어요. 포르노는 두 번 다시 안 보잖아요. 윤리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포르노예요. 그것들을 얘기할 때는 에로티시즘으로 하세요.

174
시 쓰기는 봉오리가 피어나거나,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워요. 또 시는 재즈 연주와 비슷해요. 과정이 목표이고, 멈추는 곳이 끝나는 곳이에요.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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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2
시는 진실과의 우연한 만남이에요. 시를 쓸 때 우리는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시는 무지가 주는기쁨의 약속이에요.

3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에요. 언어 자체가 대상이고 목적이에요.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제나 결핍감을 느껴요. 글쓰기는 언어 자신의 탈주이며 모험이에요. - P12

17
시에 힘이 실리지 않는 건 언어에 대한 소홀한 대접 때문이에요. 언어는 시의 처음이고 끝이에요. 하지만 언어가유일한 낙처處라 해서, 반드시 시의 형식을 가질 필요는없어요.

18
우리의 세계는 언어로 된 세계예요. ‘언어 너머‘ 또한 언어이고, 지금 이 말조차 언어예요.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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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라투르 신부는 그의 호주머니에 성모마리아상이새겨진 작은 은빛 메달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는 그녀에게 그 메달을 주며 이는 거룩한 성부께서 축복해 주신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녀는 숨겨 두고 잘 보호하며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잘 때 숭배해야 할 보물을 갖게 된 것이다. 아, 글을 읽을 수 없거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에게형상 같은, 사랑을 상징하는 물질적인 형태 같은 게 필요하구나! 하고 주교는 생각했다.
그는 커다란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나무로 된 문지방 위에서 천천히 되돌렸다. 문밖의 평화와 그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평화가 모두 하나 되는 것 같았다. 눈이 그치고, 아치형의하늘을 뒤덮은 희뿌연 구름이 이제는 모두 상그레 데 크리스토 산 너머로 부드러운 하얀 안개가 되어 가라앉아 있었다.
보름달이 파란 둥근 천장에서 높이, 그리고 외로이 인자하게빛나고 있었다. 주교는 성당 문가에 서서 그의 방문객이 질척한 눈 속에 남기고 간, 한 줄로 늘어선 검은 발자국 띠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P244

바일랑 신부가 그곳으로 가버린 이후 주교의 부담은 점점더 커져 왔다. 오베르뉴에서 새로 데리고온 사제들은 모두좋은 사람들이어서 주교가 소망하는 것을 실현시키는 데 충실했고 지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이 지방에 낯설어서 결정을 하는 데 소심해 모든 어려운 문제를 주교에게맡겼다. 라투르 신부는 그의 주교 대리가 필요했다. 그는 원주민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재주가 있었고, 그들의 단점에도아주 쉽게 동정심을 베풀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면 주교는 바일랑 신부의 낙관적인 경솔함을 늘억제하지만, 혼자있게 되면 바일랑 신부의 그런 자질을 몹시도 그리워했다.
게다가 그는 바일랑 신부의 동료애가 그리웠다. 이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249

지금까지 25년간 요셉 신부와 함께 일해 왔지만, 주교는요셉 신부의 모순된 천성에 동조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다만 그 모순된 성질 그대로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리고요셉이 오래도록 멀리 가 있는 사이에 자신이 그 모순된 성질들을 모두 사랑했음을 깨달았다. 주교 대리는 그가 알고있는, 가장 진실 되게 영적인 사람들 중 하나였다. 비록 그가너무나 열정적으로 이 세상의 많은 물질에 집착하는 경향이있긴 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만 그는 가톨릭교회의 모든 금식을 잘 준수할 뿐 아니라, 기나긴 선교여행에서 힘겨움과 먹을 것이 없음을 견뎌내야 하는 데 대해서도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요셉 신부가 좋은 포도주에대해 남달리 탐을 내는 취향은 다른 사람에게는 결점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몸이 허약한 그에게 포도주는그의 목적과 상상을 단숨에 실행시키도록 지원해 주는 약효빠른 육체의 자극제 같은 것이어서 그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듯했다. 훌륭한 만찬이나 클라레 적포도주 한 병이 그의 눈밑에 영적인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것을 주교는 여러 차례 봐 - P252

바일랑 선교사가 의전 수행관의 안내로 면회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축복을 받아야 할 물건들로 가득 찬 두 개의커다란 검은 가방을 가지고 왔다. 관습대로라면 가방 하나만가지고 와야 하는데 두 개씩이나 가져왔던 것이다. 교황을접견하고서 요셉 신부는 그의 선교와 다른 선교사들에 대해너무나 생생하게 설명을 하는 바람에 교황과 비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다가 다음으로 예정되어 있던 면회를 세 번이나 뒤로 미루어야 했다. 교황 그레고리 16세는 귀족적이고전제적인 성직자로서 유럽의 정치 파동에 대해 지고 있는 편을 지지해 주고 있었고, 일관성 있게 자유 이탈리아의적에게 편을 들어주고 있었으며, 앞서 수행한 어떤 교황보다도세상의 먼 곳에 믿음을 전파하는 선교 수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자신의 마음에 맞는 선교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바일랑 신부는 그 자신과 그의 동료 사제들, 그의 선교, 그의 주교를 위해 축복을빌어 주십사고 청했다. 그는 행상인 보따리처럼, 십자가와묵주와 기도서와 메달과 성무일과서로 가득 차 있는 커다란가방들을 열더니 그것들에 평소보다 더 많은 축복을 주십사 - P255

고 청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데 놀란 의전 수행관이여러 번 드나들었고, 마츄치도 교황에게 다른 면회객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귀띔을 했다. 의전 수행관이 그곳에 없었으므로 바일랑 신부는 직접 두 개의 가방을 들고 힘겹게 뒷걸음질 쳐 나가고 있었는데, 이때 교황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손을 들어 올렸다. 축복을 해주려던 게 아니라, 교황이 아닌한 인간으로서 선교를 위해 떠나는 또 다른 인간에게 인사를하려던 것이었다. 「잘 가요, 미국인!」 - P256

라투르 주교는 나바호족의 집이 숙고를 하며 머물거나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계획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는 것을알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그의 형과 옛 친구들에게기나긴 편지를 썼다. 그 인디언 집은 대양 위에 있는 배의 선실처럼 고립되어 있어 집 주변에서 센 바람이 웅얼대고 있었다. 문 말고는 밖으로 열린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문은 늘 열려 있었고, 밖의 공기는 모래 폭풍으로 인해 몽롱하고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하루 종일 모래가 벽의 틈 사이로 들어와흙바닥에 약간 언덕을 형성할 정도로 쌓였다. 이 집은 아주허름한 주거지라서, 마치 거기 있는 사람이 먼지가 많은 땅과 움직이는 공기로 이루어진 세상의 중심에 앉아 있는 것같아 보였다. - P256

네 시쯤 그들은 리오그란데 계곡 위로 높이 솟은 산등성이로 나왔다. 이 지점에서 오솔길은 기나긴 내리막길이 되어약 60마일 떨어져 있는 앨버커키로 진입하는 샌디아 산맥의발치쯤에서 구불구불 구비치고 있었다. 이 산등성이는 원추형으로 된 바위 언덕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소나무들로 얇게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위는 신기할 정도로 바다 빛 푸른색과 올리브 빛 푸른색 사이의 푸른빛 음영을 띠고 있었다. 단지 풍화 작용으로 인해 바위가 부서져 이루어진, 얇게 울퉁불퉁 덮인 흙도 이와 마찬가지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라투르 신부는 산등성이의 서쪽 가장자리 위로 뾰족하게 내민한적한 언덕 위로 노새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뾰족하게 내민 그 지점부터는 내리막길이었다. 이 언덕은 홀로 떨어져높이 솟아 있었고, 대담하게도 지는 해와 파란 빛깔의 샌디아 산맥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언덕을 향해 다가갔을때, 바일랑 신부는 서쪽 정면으로 흙이 푹 파진 곳에 울퉁불통한 바위벽들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바위벽은 주변 언덕처럼 푸른빛이 아니라 누런빛이었는데 그것도 아주짙은 금빛에 가까운 것으로, 이제는 그 위로 내리비치고 있는 태양빛의 금빛과 매우 흡사했다. 그곳에는 곡괭이와 쇠지렛대가 놓여 있었고 갓 캐낸 돌조각들이 있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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