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딸들을 서쪽 방으로 부른 것은 오후 느지막이였다. 저고리 앞섶 같은 마당을 시침질로 드뭇이 뜬 땀처럼 가로지르는 나일론줄에는, 한 마 길이의 풀 먹인 모시가 여섯 장 게으르게 늘어져 있었다. 어쩌다 굼뜨게 뒤척이는 모시는, 깃들 육신을 기다리다 지친 영혼이었다. 모시영혼이었다. 오후가 기울도록 깃들 육신을 찾지 못한 모시영혼들은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함석 대문 기둥에 맨 고무줄 한끝을, 작두날처럼 팽팽하도록 당겨잡은 금택은 어머니가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예의 그렇듯자갈돌이 혀를 누르고 있는 듯 구눌하게 잠자리들이 금택의 종아리높이에서 방향도 없이, 헛바느질을 하듯 날았다. 땅에서 한 뼘쯤 들린 함석 대문 밑에는 지칭개와 바랭이 같은 잡초가, 뜯긴 실밥이나거칠게 지은 매듭처럼 지저분하게 돋아 있었다.  - P9

한 흰색이어도 멥쌀 같은 흰색이 있고, 갓 지은 백미 같은 흰색이있다는 것을 금택은 알았다. 배꽃같은 흰색, 달걀 껍데기 같은 흰색이, 두부 같은 흰색이 있다는 것을. 멥쌀 같은 흰색에는 옅은 밤빛이, 갓 지은 백미 같은 흰색에는 초겨울 새벽녘의 푸른빛이, 배꽃 같은 흰색에는 노란빛이 미미하게 감도는 연둣빛이, 달걀 껍데기 같은흰색에는 탁하고 흐린 분홍빛이, 두부 같은 흰색에는 살굿빛에 가까운 노란빛이 감돌았다. - P11

한 자색이어도 천 종류에 따라 그 색이 띠는 느낌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 또한 알았다. 금택은 그것을 어머니가 옷감용 천을 염색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저절로 깨우쳤다. 양단이 띠는 자색은 광목이나 명주가 띠는 자색과는 사뭇 달랐다. 무명이 띠는 자색과도 달랐는데, 그보다 화사하지만 어쩐지 가벼웠다. 양단이 띠는 자색이 밭에서 금방 따 매끈한 윤기가 감도는 가짓빛이라면, 무명이 띠는 자색은 솥에서 한소끔 쪄 윤기가 걷힌 가짓빛이었다. 명주가 띠는 자색은 갓 피어난 가지꽃 색이지만, 목이 띠는 자색은 시들해진 가지꽃 색이었다. 어머니는 자색을 화살나무 홑잎과 소목에서 얻었다. - P11

방금까지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던 바늘은 어느 길에 금택의 손에들려 있었다. 자귀나무 꽃술만큼 가는 데다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않아서인지, 바늘이 어머니의 손을 떠나 자신의 손에 들려 있다는사실이 금택은 믿기지 않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으면서도 바늘을 놓칠까 두려웠고, 그것을 잡은 손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이야."
어머니는 딸들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이르듯 중얼거렸다. 금택은그 말을 바늘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마르고핏기 없는 얼굴에 그 어떤 낯선 표정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어머니는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개한 해당화를 말끄러미바라볼 때도, 달고 시원한 국을 묵묵히 떠먹을 때도, 쪽마루에 나와 고개를 외로 틀고 소슬바람을 쐴 때도, 누비대 앞에 바투 앉아 바늘땀을 떠 넣을 때도, 어머니의 얼굴에는 바위에 새긴 것 같은 절대적이고 독보적인 표정이 어려 있었다. 장독대에서 쇠공처럼 얼어 죽어 있던 콩새를 발견했을 때도. - P15

독 오른탱자나무 가시라면 몰라도, 금택은 바늘에 찔린 적이 있었다. 누비바늘보다 크고 굵은 바늘이었다. 피가 났지만, 바늘에 찔린 자국은흉터를 남기지 않고 아물었다. 아홉 살인 금택은 흉터가 생기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지고, 그 딱지가 굳어떨어진 자리에 훈장처럼 자리 잡는 것이 흉터였다.
며칠 전 서쪽 방 앞을 지나다 우연히 목격한 어머니의 행동이 새삼의미를 띠고 금택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다 말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는데, 특별할 것 없는 그 행동을 금택은더러 목격했다. 가만히 숨을 고르는 것 같은 그 행동이 어쩌면 흉터를 어루만지는 행동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금택은 들었다.
어머니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의 흉터를 생각하던 금택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최초로 찌른 물건이 바늘이라는 걸. 칼이나 못이나 유리 조각이 아니라.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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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즌에는 마늘을 다 까야 한다."
할머니가 늘어진 볼을 사납게 떨며 엄포를 놓았다.
마늘은 밤톨보다 작았다. 그리고 그 안에 박힌 알들은 내 엄지손톱보다 쪼끄마했다. 까도 까도, 마늘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늘마다 까맣게 썩어 문드러진 알이 꼭 한두 개씩은 들어 있었다. 알들이 죄다 썩어 문드러진 마늘도 있었다. 썩고 말라비틀어졌는데도 마늘이 어찌나 매운지 손톱마다 금세 검푸른 마늘독이 올랐다. 다리에 쥐가 나도록 깠지만, 깐 마늘보다 까지 않은 마늘이 더 많았다.
밥상에는 까만 강된장국과 들기름에 달달 지진 시래기, 곰팡이가 허옇게 낀 동치미뿐이었다. 놋쇠로 만든 숟가락은 크고 무겁기만했다. 보리가 반도 더 섞인 밥알들이 입속에서 낱낱으로 흩어져 굴러다녔다. 숟가락 한가운데에는 해괴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기역자도 배우지 못한 나는 그 글자가 뭔 글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P12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한없이 마늘을 까고 또 까며, 나는 한 번이라도 들어본 이름들을 곰곰 떠올려보았다. 엄마의 이름은 귀숙, 이모들의 이름은 양숙, 명숙, 광숙, 고모의 이름은 춘자, 그리고 또...... 인숙, 경미, 미정··· 할아버지는 그렇게나 많은 이름들을 놔두고 어째서 동화라는 이름을 토해낸 걸까.
‘동화······‘
나는 매운 마늘이라도 씹듯 입속에서 중얼거려보았다.
손끝이 얼얼하도록 깐 마늘을 몰래 땅속에 묻으며, 나는 내 이름을 저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이름을 저주한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동화라는 이름이 마냥 싫기만 해서 … 그 이름 때문에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엄마가 도망을 간 것만 같아서, 동화, 라는그 이름 때문에. - P26

엄마는 내게 숨바꼭질을 하자고 해놓고는 도망을 갔다. 내게 꼭꼭 숨으라고 해놓고는 파란 비키니옷장 속에 숨어든 날 찾을 생각도 않고 도망을 가버렸다. 비키니옷장 안에 걸어놓은 옷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어대며 내 목과 팔다리를 친친 조여오는데도, 겁에 질린 내가 발악을 하듯 소릴 질러대는데도, 나를 비키니옷장에서 꺼내줄 생각도 않고 도망을 가버렸다.
술래가 나였나?
엄마가 아니라 나였나?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꼭꼭 숨어버린 게 아닌가?
나는 눈을 꼭 감고, 아버지를 따라 떠나온 서울의 단칸방을 떠올려보았다. 부엌이 딸렸던 단칸방 그 어딘가 엄마가 숨어들었을 만한 곳을…… 혹시 빨간 다라이 속에 숨었나? 이불을 빨거나 목욕을 할 때나 쓰던 커다랗고 빨간 다라이 속에 언젠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빨간 다라이를 뒤집어쓰고는 어서어서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33

나는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싫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물어보는 것은 조금도 싫지가 않았다.
"동화라…………?"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래요."
나는 할아버지가 동화라는 내 이름을 토해놓고는 쓰러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동화라………? 겨울 동(冬) 자에 꽃 화 자라 치면..….…… 엄동설후에 피어난 꽃이구나……!"
옥천 할마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엄, 엄동..... 설……?"
"눈이 내린 뒤의 몹쓸 추위를 엄동설후라 하지.
그녀가 눈꺼풀을 조금 내리떴다.
"엄동설후….……?" - P54

마을사람들은 그러니까, 몽롱하고 기괴하게 뭉개진 금방이라도저 멀리로 가라앉을 듯 어렴풋한, 그리고 살아가는 오이지처럼 쭈글쭈글한 자신들의 얼굴을 아침저녁으로 증거하듯 들여다보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울을 닦는 동안 마을 사람 전부가 실은 거울 속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쑥불쑥 갖고는 했다. 죽어도 골백번은 죽었다던 옥천 할마마저도. 그러니까, 쌀뜨물처럼 흐린 거울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리고 말 존재들로살아가고 있다는...... 어쩌면 나는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거울을, 깨알만 한 얼룩 한 점도 없도록 말끔히 닦아놓은 뒤에야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놓은 뒤에야,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이 아닐까. - P59

급기야 나는, 마을 거울들의 흐려짐이, 할머니들이 입버릇처럼달고 사는 거부할 수 없는 팔자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는 그런 거울 앞에 바짝 웅크리고 앉아 염색을 하고는 했다. 거울을 마루 기둥에서 내려 괘종시계에 기우뚱 기대어 세워두고는, 머리를 귀신처럼 풀어헤치고서. 장날 읍내에서 사온 염소똥같은 염색약을 못 쓰는 밥주발에 떨어뜨린 뒤 침을 두어 번 뱉고는,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으깬다. 딱딱하기만 하던 염색약은 거머리처럼 납작해져서는 자글자글 거품을 일으키며 풀어졌다. 할머니는 참빗에 염색약을 묻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를 빗어대었다.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염색약을 바르고 나면 그녀의열 손가락에도 까맣게 염색물이 들어 마치 썩은 것처럼 보였다. 거울마저도 염색물이 든 듯 검은빛으로 일렁거렸다. 그녀는 뼈 속까지 썩어 금방이라도 뚝 부러질 것만 같은 손가락으로 백노지에 담배를 꾹꾹 말아 피우다가 머리카락을 감았다. - P59

싸릿대 같은 비가 나흘 내내 내렸다. 장마라고 했다.
할머니는 집 뒷산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까 봐땅이 꺼져라 걱정을 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해, 장마가 유난히 극성맞았다고 했다. 양동이로 들이붓듯 퍼붓는 비를 이기지 못하고, 뒷산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시루떡 같은 흙더미가 와르르 떠밀려와 지붕을 무너뜨리고, 뒷마당 우물을 덮쳤다고 했다.
"그게 그러니까 네년이 태어나던 해에 말이다. 꼭 그해에··할머니의 중얼거림은 괘종시계의 데엥 데엥 소리와 섞여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습기를 잔뜩 먹어서인지 데엥 소리는 무겁게 늘어졌다.
왜 하필이면 내가 태어나던 해인가. 그러니까 꼭 내가 태어나던 해에……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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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사막에서 돌아왔다. 아버지는 푸른 줄무늬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50억 년의 시간 동안 사막을 건너온 사람 같았다. 50억 년은 지구의 나이와 비슷한 시간이었다. 50억 년의 어느 순간에 암석들이 깨지고 깨져 자갈들이 되었을 것이며, 그 자갈들이 깨지고 또 깨져 직경 1.6~2밀리미터의 모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래들은 바람을 따라 한 지점으로 이동해 광활한 사막을 이루었을 것이다.
푸른 줄무늬들은 흡사 광속의 시간이 칼날처럼 긋고 지나간 자국들 같았다. - P4

아버지의 이마가 창백하게 빛났다. 소중한 두 귀는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에 뒤덮여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막을 건너오는 50억 년 동안 몸 한구석쯤은 퇴화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귀일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누군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나는 어릴 적부터 그 모든 두려움의 근원지가 귀일 것이라고믿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묵묵히 건너려면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하며, 두려움의 발생지인 귀부터 둔해져야 하지 않았을까. - P7

나는 아버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거리는 서너 발짝 정도였다. 거리는 내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투명한 얼음 덩어리를 사이에 두고 있듯 ‘거리‘는 저 스스로 형성되었다. 운동장 같은 장소에서라면 서너 발짝은 그리 먼 거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껏해야 네 평도 안 되는 공간인 방(房)에서라면 서너 발짝은 꽤나 멀고 심각한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서너 발짝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서로를 무심히 경계하며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오빠와 동생도 저마다 아버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 P11

가령 다섯 발짝이 1미터라고 가정해보자. 지구의 둘레는46,286,000미터다. 다섯 발짝은 지구의 둘레에서 1미터를뺀 만큼의 거리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1미터가아니라 46,285,999미터의 거리를 두고 무심을 가장하며 서로를 지극히 멀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섯 발짝의 거리, 즉 46,285,999 미터의 거리는 좀처럼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만약에 오빠와 아버지, 둘 중에 누군가가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딛는다면 거리는 더 멀어지는것이 되었다.
나는 46,285,999미터의 거리가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 P12

국경아저씨, 만우아저씨, 희야아저씨, 소진아저씨, 순진외삼촌, 당숙어른...... 그들도 백치였다.
나는 그들이 백치인 것을 몰랐다. 그들은 한 동네에 살고있는 친척이거나, 어쩌다가 골목에서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한 어른들이었다. 구장동 15번지에 살고 있는 적당히 어수룩하고 적당히 온순해 보이는 어른들 말이다. 순진외삼촌과당숙어른을 뺀 그들 누구에게도 나는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나는 골목 끝양옥집에 살고 있는, 아버지가 사막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평범한 여자아이였을 뿐이었다. - P13

아버지는 살기 위해 사막으로 갔고, 역시 살기 위해 사막에서 돌아왔다. 사막은 아버지에게 기회의 땅이자 형벌의땅이었다. 아버지가 사막으로 떠난 것이 전적으로 아버지의의지만은 아니었듯이 아버지가 사막에서 돌아온 것 역시 전적으로 아버지의 의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큰결정들이 단순히 당사자의 의지에 의해서 선택되는 것만은아님을 나는 아버지와 백치들의 생애를 통해 배웠다. - P16

아버지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먼저 아버지에 대해 내가 그다지 알고 있는 것들이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아버지는 내게 사막이자 사막의 모래이며, 사막의 뜨거운 열기였다. 나는 간혹 내가 아버지의 생애를 너무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아버지의 생애 중에서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한알의 모래만큼이나 지극히 작은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한 알의 모래만큼이나. - P16

단봉낙타의 넓적하고 두툼한 발바닥들이내 이마를 꾸욱 누르고 갔다. 베르베르인처럼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막을 쳐놓고 그 앞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장작불을 지피고 있었다. 백치들이었다. 국경아저씨, 희야아저씨, 만우아저씨, 소진아저씨, 도식아저씨, 순진외삼촌, 당숙어른, 그리고 아버지……. 비쩍 마른 양 두 마리가 백치들 곁을 서성이고 있었다. 백치들의 낯들이 호두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찬 모래바람이 백치들의 광대뼈를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백치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려고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를 뒤덮고 있던모래가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어금니가 쩌그적쩌그적 부딪칠 만큼 혹독한 한기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동생이 아니라나를 등에 들쳐 업고 비탈길을 넘어갔다.
한기는 사흘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나는 한기를 약과주사로 겨우 극복한 뒤에야 진심으로 모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 P90

아버지가 밥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가 씹고 있는 것이 밥알이 아니라 모래인 것만 같았다. 밥을 한 공기 다 비우는 동안 아버지의 남은 인생이 전광석화처럼 흘러갔다. 아버지는한없이 늙고 늙어 구석기인으로 퇴화해 있었다. 허리가 굽고, 손등과 귓불 아래로 고불거리는 털이 부숭하게 자라나있었다. 백치들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백치들마저도 구석기인으로 퇴화해 있었다. 아버지가 백치들을 이끌고 옥상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달과 별들이 구름 속에 가려 옥상은 동굴 속처럼 어두웠다. 백치들은 옥상에서 돌멩이를 갈고다가 날이 환하게 밝아서야 철제 계단을 내려왔다. 백치들의 손에는 도끼처럼 갈린 돌멩이가 한 개씩 쥐어져 있었다. - P106

1986년 4월 15일, 미군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했다. 미사일이 붉은 불을 뿜으며 트리폴리의 하늘을 날아가고 등화관제령이 내려졌다. 미군이 트리폴리를 공격하기 10일 전 서베를린의 한 디스코장에서 강력한 폭발물 테러가 발생했다. 미군 1명과 미국인 1명을 포함한 23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건의 배후로 사회주의 국가인 리비아가 의심을 받았다. 미국은 트리폴리뿐만 아니라 벵가지 근처의 테러리스트 센터, 항공기지 등 5개 주요 군사 시설물을 선정하고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티브이를 보다가 전쟁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티브이에서 눈과 귀를 떼지 않고 있다가, 뉴스가 끝나자마자 옥상으로 올라갔다. - P112

정말이지 벽돌공장밖에는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부역을 나온 수인처럼 푸른빛이 도는 잠바와 바지를 입고 벽돌을 찍었다. 벽돌 한 장을 찍어낼 때마다 한살이라는 나이가 그에게 더 보태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어깨는 급격히 무너져 내렸으며 광대뼈가 바위처럼 불거져 나왔다. 머리칼은 백설기 부스러기를 버무려놓은 듯했다. 손가락들은 시멘트 독이 올라 노란 농물을 줄줄 흘렸다. 그는어느 벽돌공보다도 왜소했고, 어느 벽돌공보다도 숫기가 없었다. 벽돌공들이 술에 취해 소주병을 깨뜨릴 때도 그는 고개를 깊숙이 파묻고 침묵을 지켰다. - P165

나는 푸른 줄무늬들이 단말마의 빛을 발하다가, 완전히소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생각해보니 그날은, 동생 인영이 한 줌의 모래로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희야아저씨를 따라 도배 일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 P208

오빠는 여태도 사막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사하라사막에서도, 고비 사막에서도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사막을 달리려는 사람들이 사하라 사막이나 고비 사막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오빠가사막에서 돌아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동경과 기대와 경이가 사라진, 고단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아비가 그랬듯 오빠는 사막에서 모래를 한 삽 가지고 올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막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치가 되어버릴지도..... - P211

어느 날, 당숙어른의 아들은 소리 소문 없이 집에 돌아와있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집을 누더기처럼 덮고, 나막신 신은발을 대문 밖으로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당숙어른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들고 간 나막신이었다.
집은 한층 더 가라앉아 그의 등짝에 껍질처럼 가라앉았다. - P213

 작가의 말 


내가 쓸 수 없는 것,
내가 부득불 쓰고자 하는 것.
내가 쓰고는 싶지만 남들이 이미 써버린 것,
내가 쓰고자 하면 잘 쓸 수도 있을 같지만 써서는 안 된다고 짐작되는 것,
내가 단 한 편이라도 쓰고 싶은 것,
시詩를 쓰고자 했던 내 욕망에 조금이라도 가 닿는 것,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동안 백치들‘은 완성되었다.
대부분을 연필로 쓴 소설이기에 애착이 가고 또 그만큼 부끄럽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은 전적으로, ‘백치들‘을 불러낸 내 몫일 것이다.
한때는 꿈속에서조차 증오했지만, 내 슬픔과 독을 키운 이들이 백치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태도 백치들의 허술한 구두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불편한 것 또한.


세상의 모든 백치들에게 한 줌의 소금 같은 축복을!


2006년 9월 김숨

우연히 김숨이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노동과 소설 쓰기에 관한 짧은 글이었다.
김숨은 "소설을 쓰는 행위가 노동처럼 느껴지지않을 때 벼락처럼 죄악이라는 말을 떠올린다"고 썼던 것 같다. 식물성의 세계, 혹은 간질발작과 수면제로 대표되는 그로테스크한 소녀들의 세계를 주조했던 김숨, 그녀의 노동량은 엄청나다. 게다가 그소설들이 다 좋다. 이번에 김숙이 발표하는 첫 장편소설인 ‘백치들』에는 산업 역군이 되어 중동의 사막으로 떠났던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우리 옆집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돈 가방을 들고 사막에서 돌아왔다.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을 이루고, 어렵게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어가고, 동서 냉전의 담들이 허물어지고 새롭게 주의의 틀을
"구축되는 사이, 소위 문화와 정보의 시대에 이르러 제법 먹고 살만해진 시점에 이 산업 역군들은 한순간 ‘백치들‘로 전락한다. 이들은 왜 "하루아침에 구석기인으로 퇴화해 옥상으로 올라가 술이나 마시는걸까." 김숨은 밀도 높은 상징을 활용한 시적인 문체로 백치들의 내면을 향해 흘러드는 사막의 모래와 자줏빛 양탄자로 가려졌던 소외의 시간을 살려낸다. 인간의 삶이란 사실 노동의 역사가 아니던가. 선명한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이 소설로 인해 독자들은 이제 작가 김숨을 향해 새로운 명명을 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 강영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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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에 그런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 헐렁한 승복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지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드린 적이 있었을까.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이 저렇게 삶의 때가 안 낀 천진덩어리일 수가 있다니.
암만해도 저건 현실이 아니야,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영주는 그래서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못했다. 그녀가 딛고 서 있는 곳은 현실이었으니까. 현실과 환상사이는 아무리 지척이라도 아무리 서로 투명해도 절대로 넘을수 없는 별개의 세계니까. - P338

아침상에 앉은 세 사람은 모처럼 잘 잤다며 집터가 좋은가 보다고 덕담까지 해주었다. 내 보기에도 그들은 어제보다 훨씬 맑고 개운해 보인다. 어디로 보나 망측하고 지저분한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 같지가 않다.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나고 샘도났다. 그래서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을 툭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풍기면 어쩌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들을했죠?"
"어떻게 풍겨요. 우리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끼리도 어제 같이 잤지만 서로 그런 거 안 물어봤거들랑요."
용용 죽겠지 하는 투의 ‘소아마비‘의 대답은 옳았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왜 물어봤을까.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나는 대책 없이 불쌍하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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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공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 P10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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