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즌에는 마늘을 다 까야 한다." 할머니가 늘어진 볼을 사납게 떨며 엄포를 놓았다. 마늘은 밤톨보다 작았다. 그리고 그 안에 박힌 알들은 내 엄지손톱보다 쪼끄마했다. 까도 까도, 마늘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늘마다 까맣게 썩어 문드러진 알이 꼭 한두 개씩은 들어 있었다. 알들이 죄다 썩어 문드러진 마늘도 있었다. 썩고 말라비틀어졌는데도 마늘이 어찌나 매운지 손톱마다 금세 검푸른 마늘독이 올랐다. 다리에 쥐가 나도록 깠지만, 깐 마늘보다 까지 않은 마늘이 더 많았다. 밥상에는 까만 강된장국과 들기름에 달달 지진 시래기, 곰팡이가 허옇게 낀 동치미뿐이었다. 놋쇠로 만든 숟가락은 크고 무겁기만했다. 보리가 반도 더 섞인 밥알들이 입속에서 낱낱으로 흩어져 굴러다녔다. 숟가락 한가운데에는 해괴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기역자도 배우지 못한 나는 그 글자가 뭔 글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P12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한없이 마늘을 까고 또 까며, 나는 한 번이라도 들어본 이름들을 곰곰 떠올려보았다. 엄마의 이름은 귀숙, 이모들의 이름은 양숙, 명숙, 광숙, 고모의 이름은 춘자, 그리고 또...... 인숙, 경미, 미정··· 할아버지는 그렇게나 많은 이름들을 놔두고 어째서 동화라는 이름을 토해낸 걸까. ‘동화······‘ 나는 매운 마늘이라도 씹듯 입속에서 중얼거려보았다. 손끝이 얼얼하도록 깐 마늘을 몰래 땅속에 묻으며, 나는 내 이름을 저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이름을 저주한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동화라는 이름이 마냥 싫기만 해서 … 그 이름 때문에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엄마가 도망을 간 것만 같아서, 동화, 라는그 이름 때문에. - P26
엄마는 내게 숨바꼭질을 하자고 해놓고는 도망을 갔다. 내게 꼭꼭 숨으라고 해놓고는 파란 비키니옷장 속에 숨어든 날 찾을 생각도 않고 도망을 가버렸다. 비키니옷장 안에 걸어놓은 옷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어대며 내 목과 팔다리를 친친 조여오는데도, 겁에 질린 내가 발악을 하듯 소릴 질러대는데도, 나를 비키니옷장에서 꺼내줄 생각도 않고 도망을 가버렸다. 술래가 나였나? 엄마가 아니라 나였나?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꼭꼭 숨어버린 게 아닌가? 나는 눈을 꼭 감고, 아버지를 따라 떠나온 서울의 단칸방을 떠올려보았다. 부엌이 딸렸던 단칸방 그 어딘가 엄마가 숨어들었을 만한 곳을…… 혹시 빨간 다라이 속에 숨었나? 이불을 빨거나 목욕을 할 때나 쓰던 커다랗고 빨간 다라이 속에 언젠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빨간 다라이를 뒤집어쓰고는 어서어서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33
나는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싫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물어보는 것은 조금도 싫지가 않았다. "동화라…………?"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래요." 나는 할아버지가 동화라는 내 이름을 토해놓고는 쓰러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동화라………? 겨울 동(冬) 자에 꽃 화 자라 치면..….…… 엄동설후에 피어난 꽃이구나……!" 옥천 할마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엄, 엄동..... 설……?" "눈이 내린 뒤의 몹쓸 추위를 엄동설후라 하지. 그녀가 눈꺼풀을 조금 내리떴다. "엄동설후….……?" - P54
마을사람들은 그러니까, 몽롱하고 기괴하게 뭉개진 금방이라도저 멀리로 가라앉을 듯 어렴풋한, 그리고 살아가는 오이지처럼 쭈글쭈글한 자신들의 얼굴을 아침저녁으로 증거하듯 들여다보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울을 닦는 동안 마을 사람 전부가 실은 거울 속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쑥불쑥 갖고는 했다. 죽어도 골백번은 죽었다던 옥천 할마마저도. 그러니까, 쌀뜨물처럼 흐린 거울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리고 말 존재들로살아가고 있다는...... 어쩌면 나는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거울을, 깨알만 한 얼룩 한 점도 없도록 말끔히 닦아놓은 뒤에야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놓은 뒤에야,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이 아닐까. - P59
급기야 나는, 마을 거울들의 흐려짐이, 할머니들이 입버릇처럼달고 사는 거부할 수 없는 팔자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는 그런 거울 앞에 바짝 웅크리고 앉아 염색을 하고는 했다. 거울을 마루 기둥에서 내려 괘종시계에 기우뚱 기대어 세워두고는, 머리를 귀신처럼 풀어헤치고서. 장날 읍내에서 사온 염소똥같은 염색약을 못 쓰는 밥주발에 떨어뜨린 뒤 침을 두어 번 뱉고는,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으깬다. 딱딱하기만 하던 염색약은 거머리처럼 납작해져서는 자글자글 거품을 일으키며 풀어졌다. 할머니는 참빗에 염색약을 묻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를 빗어대었다.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염색약을 바르고 나면 그녀의열 손가락에도 까맣게 염색물이 들어 마치 썩은 것처럼 보였다. 거울마저도 염색물이 든 듯 검은빛으로 일렁거렸다. 그녀는 뼈 속까지 썩어 금방이라도 뚝 부러질 것만 같은 손가락으로 백노지에 담배를 꾹꾹 말아 피우다가 머리카락을 감았다. - P59
싸릿대 같은 비가 나흘 내내 내렸다. 장마라고 했다. 할머니는 집 뒷산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까 봐땅이 꺼져라 걱정을 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해, 장마가 유난히 극성맞았다고 했다. 양동이로 들이붓듯 퍼붓는 비를 이기지 못하고, 뒷산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시루떡 같은 흙더미가 와르르 떠밀려와 지붕을 무너뜨리고, 뒷마당 우물을 덮쳤다고 했다. "그게 그러니까 네년이 태어나던 해에 말이다. 꼭 그해에··할머니의 중얼거림은 괘종시계의 데엥 데엥 소리와 섞여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습기를 잔뜩 먹어서인지 데엥 소리는 무겁게 늘어졌다. 왜 하필이면 내가 태어나던 해인가. 그러니까 꼭 내가 태어나던 해에……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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