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딸들을 서쪽 방으로 부른 것은 오후 느지막이였다. 저고리 앞섶 같은 마당을 시침질로 드뭇이 뜬 땀처럼 가로지르는 나일론줄에는, 한 마 길이의 풀 먹인 모시가 여섯 장 게으르게 늘어져 있었다. 어쩌다 굼뜨게 뒤척이는 모시는, 깃들 육신을 기다리다 지친 영혼이었다. 모시영혼이었다. 오후가 기울도록 깃들 육신을 찾지 못한 모시영혼들은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함석 대문 기둥에 맨 고무줄 한끝을, 작두날처럼 팽팽하도록 당겨잡은 금택은 어머니가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예의 그렇듯자갈돌이 혀를 누르고 있는 듯 구눌하게 잠자리들이 금택의 종아리높이에서 방향도 없이, 헛바느질을 하듯 날았다. 땅에서 한 뼘쯤 들린 함석 대문 밑에는 지칭개와 바랭이 같은 잡초가, 뜯긴 실밥이나거칠게 지은 매듭처럼 지저분하게 돋아 있었다. - P9
한 흰색이어도 멥쌀 같은 흰색이 있고, 갓 지은 백미 같은 흰색이있다는 것을 금택은 알았다. 배꽃같은 흰색, 달걀 껍데기 같은 흰색이, 두부 같은 흰색이 있다는 것을. 멥쌀 같은 흰색에는 옅은 밤빛이, 갓 지은 백미 같은 흰색에는 초겨울 새벽녘의 푸른빛이, 배꽃 같은 흰색에는 노란빛이 미미하게 감도는 연둣빛이, 달걀 껍데기 같은흰색에는 탁하고 흐린 분홍빛이, 두부 같은 흰색에는 살굿빛에 가까운 노란빛이 감돌았다. - P11
한 자색이어도 천 종류에 따라 그 색이 띠는 느낌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 또한 알았다. 금택은 그것을 어머니가 옷감용 천을 염색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저절로 깨우쳤다. 양단이 띠는 자색은 광목이나 명주가 띠는 자색과는 사뭇 달랐다. 무명이 띠는 자색과도 달랐는데, 그보다 화사하지만 어쩐지 가벼웠다. 양단이 띠는 자색이 밭에서 금방 따 매끈한 윤기가 감도는 가짓빛이라면, 무명이 띠는 자색은 솥에서 한소끔 쪄 윤기가 걷힌 가짓빛이었다. 명주가 띠는 자색은 갓 피어난 가지꽃 색이지만, 목이 띠는 자색은 시들해진 가지꽃 색이었다. 어머니는 자색을 화살나무 홑잎과 소목에서 얻었다. - P11
방금까지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던 바늘은 어느 길에 금택의 손에들려 있었다. 자귀나무 꽃술만큼 가는 데다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않아서인지, 바늘이 어머니의 손을 떠나 자신의 손에 들려 있다는사실이 금택은 믿기지 않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으면서도 바늘을 놓칠까 두려웠고, 그것을 잡은 손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이야." 어머니는 딸들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이르듯 중얼거렸다. 금택은그 말을 바늘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마르고핏기 없는 얼굴에 그 어떤 낯선 표정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어머니는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개한 해당화를 말끄러미바라볼 때도, 달고 시원한 국을 묵묵히 떠먹을 때도, 쪽마루에 나와 고개를 외로 틀고 소슬바람을 쐴 때도, 누비대 앞에 바투 앉아 바늘땀을 떠 넣을 때도, 어머니의 얼굴에는 바위에 새긴 것 같은 절대적이고 독보적인 표정이 어려 있었다. 장독대에서 쇠공처럼 얼어 죽어 있던 콩새를 발견했을 때도. - P15
독 오른탱자나무 가시라면 몰라도, 금택은 바늘에 찔린 적이 있었다. 누비바늘보다 크고 굵은 바늘이었다. 피가 났지만, 바늘에 찔린 자국은흉터를 남기지 않고 아물었다. 아홉 살인 금택은 흉터가 생기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지고, 그 딱지가 굳어떨어진 자리에 훈장처럼 자리 잡는 것이 흉터였다. 며칠 전 서쪽 방 앞을 지나다 우연히 목격한 어머니의 행동이 새삼의미를 띠고 금택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다 말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는데, 특별할 것 없는 그 행동을 금택은더러 목격했다. 가만히 숨을 고르는 것 같은 그 행동이 어쩌면 흉터를 어루만지는 행동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금택은 들었다. 어머니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의 흉터를 생각하던 금택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최초로 찌른 물건이 바늘이라는 걸. 칼이나 못이나 유리 조각이 아니라. - P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