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허클베리 핀』 『백년의 고독 』 ...... 우리의 경험이라는 바탕은 어둡고, 우리가 창조하는이야기는 모두 그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불길 속에서 훌쩍 뛰어나온다.
상상력은 삶이라는 암흑물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많은개인적 에세이와 자서전에서 내가 점점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신, 우리가 공유하는 친숙한 불행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한 번도본 적이 없는 것을 보고 싶다. 비전이 무시무시하게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나를 향해 뛰어나오면 좋겠다. 변화의 힘을 품은상상력의 불꽃이 되어. 나는 진짜 용을 원한다.
ㅡP 440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가설, 즉 우리 모두 생각이 똑같다고 생각해버리는 실수를 소수집단이나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집단에 속한 작가들은 비교적 덜 저지르는 편이다. 그들은
‘우리‘와 ‘그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를 ‘모두‘와 혼동하는 것에 가장 유혹을 느끼는 것은 사회의 특권층이나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 또는 대학이나 백인 미국인 동네나 신문사 편집부원처럼 고립되거나 비호받는 환경에 속하는 사람이다.
전제는 이렇다. 모두가 나와 비슷하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추론 결과는 이렇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 P396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현상(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삽을 삽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평범하고 소박한 말을하는 걸 막으려고 동정심이 흘러넘치는 자유주의자들이 꾸민 음모)은 앞의 추론 결과를 신념의 문제처럼 전시하며, 갖가지 편협한 주장을 옹호하는 데 이용한다.
오만은 보통 무지다. 때로는 순진함일 수도 있다. 다른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아이들의 무지는 용서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바로잡아줄 필요가 있다. 지리적 요인이나 빈곤 때문에 고립된 공동체에는 어른이 될 때까지 평생 같은 공동체에서 같은 신념, 가치관, 가설을 갖고 살아와서 너나없이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 작가도 글에 드러난 편견이나 편협함을 옹호하는 도구로 무지나 순진함을 정당하게 들고 나올수 없다. - P397

편협성에 대한 거부를 모두 자유주의자의 음모로 보는사람들이 그런 책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릴지도 모른다. 출판사와 비평가도 그런 작품을 대개 게토로 몰아넣어, ‘일반적인 흥미를 다루는‘ 소설과 분리한다. 남자의행동을 중심에 놓은 소설, 주요 인물이 남자, 백인, 이성애자, 젊은이인 소설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언급되지 않고, 소설 자체는 ‘일반적인 흥미를 다루는‘ 작품으로 분류된다. 주요 인물이 여자, 흑인, 동성애자 노인인 소설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이 그 특별한 집단을 다룬 작품이라고말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작품에 공감하는 비평가들조차이런 소설은 주로 또는 오로지 그 집단의 흥미를 끌 뿐이라고생각해버린다. 이렇게 해서 기성 비평계와 출판사의 홍보 활동 및 판매 전술이 편견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한다. - P408

많은 어른들의 문제는 정반대다. 자신감이 부족하다는것, 여자들, 특히 자녀가 있는 여자들이나 나이가 중년 이상인 여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엄청나게 힘들어한다. 이타주의의 함정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돈을 벌어 와야 하는 평범한남자라고 생각하며 자란 남자들도 역시 자신을 작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생각의 도약을 잘 해내지 못한다. 수십 년전부터 아마추어 작가와 반아마추어 작가 집단들이 크게발전했고, 워크숍이 엄격한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기능하고있는데도, 워크숍에 강사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강사는 이미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짜작가로서, 워크숍의 중심인물이 되어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공유하고 참가자 모두에게 작가의 기분을 느끼게 해줄 수있다.
따라서 강사는 반드시 글쓰기 교사가 아니라 글쓰기를가르치는 작가여야 한다. 워크숍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문적인 글을 발표한 적이 있어야 한다. - P420

연습은 흥미로운 단어다. 우리는 연습이 초보자에게나맞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을 연습하는것은 곧 예술을 하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예술이다. 워크숍참가자가 자기처럼 연습중인 작가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글쓰기 연습을 하고 나면, 정말로 작가가 되었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워크숍의 요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집단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집단의 형성에는 강사의 도움이 있지만, 사람들의 모임 그 자체가 에너지원이 된다. 참고로, 그 모임이 가능한 한 문자 그대로 서클, 즉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P421

워크숍에 참가해서 글을 쓰고, 읽고, 비평하고, 토론하는사람들은 많은 것을 배운다. 무엇보다 먼저, 비평을 받아들이는 법, 자신이 비평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배운다. 부정적인 비평, 긍정적인 비평, 공격적인 비평, 건설적인 비평, 가치 있는비평, 멍청한 비평,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직접 해볼 때까지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비평을 두려워하다 보면, 글을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 자신이 가차 없는 비평을 받았는데도 계속 글을 쓸 수 있음을 깨닫고 나면, 갇혀 있던 많은 에너지가 자유로워진다. - P422

워크숍 참가자들은 또한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책임 있는 비평을 내놓는 법도 배운다. 남의 글을 제대로 읽는 경험을 이때 처음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휴식과 도피를 위해 쓰레기 같은 글을 읽을 때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독서와는 다르다. 영문학 기초 수업을 들을 때처럼 냉담하게머리만 써서 글을 분석하는 독서와도 다르다. 적극적으로 열심히 글을 읽으면서 부분적으로만 머리를 사용해 텍스트와협업하는 독서다. 이런 독서를 가르치는 워크숍은 스스로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집단이 만들어지고 나면,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이 서로의 작품을 그런 식으로 읽게 된다. 이런 독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이 방식이 몸 - P422

시 짜릿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 텍스트를 과대평가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활기찬 워크숍의 사소한 위험 중 하나다.
글을 읽는 법을 배우면, 글쓰기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자신이 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제알기 때문이다. 비평과 협업 기술을 자기 작품에도 적용할 수있게 되었으므로, 건설적인 퇴고와 수정이 가능하다. 경험이일천한 많은 작가들처럼 퇴고가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까 봐,
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워크숍에서 집단 활동을 하며 심리적 예리함과 감수성을 믿고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함께 힘든 일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고 느끼는 데에서, 정직과 신뢰가 일을 해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경험한 데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런 정직과 신뢰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재주를 모두 동원할 것이다. 집단이 집단으로서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면, 강사를 포함해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이 에너지를 얻어 더 강해진다. - P423

예술은 기술이다. 모든 예술은 언제나 기본적으로 기술의 산물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 작품에는 근본적이고 영속적인 핵심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기술이 작용해서 자유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돌덩이 안에 들어 있는 조각상을 조각가는 어떻게 찾아내는 걸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각상을 어떻게 알아볼까? 이것이 진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내가 가장 즐겨 하는 대답 중 하나는 다음과같다. 누군가가 윌리 넬슨에게 어떻게 악상을 얻느냐고 묻자그는 이렇게 말했다. "허공에 곡조가 가득합니다. 나는 그저손을 뻗어 하나를 골라잡을 뿐이에요."어서이건 비결이 아니지만, 달콤한 미스터리다.
그것도 진짜 진짜 미스터리, 바로 그거다. 픽션 작가에게 이야기꾼에게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다. 이야기가거기 있으니, 작가는 그저 손을 뻗어 붙잡을 뿐이다.
그다음에는 그 이야기가 스스로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는능력이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침묵 속에서 기다리는 - P430

법 침묵 속에서 기다리며 귀를 기울인다. 곡조를, 비전을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움켜쥐지도 말고, 밀어붙이지도 말고, 그냥 기다리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원하는 것이 찾아올 때 잡을 수 있게 준비를 갖추고서. 이것은 신뢰의행동이다. 자신을 믿고 세상을 믿는 행동, 예술가는 말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내게 줄 것이고, 나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움켜쥐고자 하는 탐욕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준비 자세가 필요하다. 기꺼이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선명한 눈으로 정확하게 본 다음에 단어들이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아가게 가만히 두고 보는 자세. 거의 올바른 길이 아니다. 올바른 길이다. 그 비전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기술이다. 연습은 바로 이 기술을 위한 것이다. 준비 자세로 기다리라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 P431

비록 작가들이 주로 하는 일이 그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을 연습한다. 그리고 글쓰기는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예술이다. 음계와 손가락 연습, 연필 스케치,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채 계속 퇴짜를 맞는 이야기들...... 연습하는 예술가는 연습과 성과의 차이를 안다. 그둘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 언뜻 몇 시간또는 몇 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인내심과 준비 자세, 좋은 귀, 예리한 눈, 솜씨 좋은 손, 풍부한 어휘력과문법 지식이라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재능이 어디서 오는 - P431

지는 하느님만 아시지만, 기술은 연습에서 온다.
힘들게 얻은 숙련된 기술, 이 도구를 가지고 예술가는 ‘아이디어‘(곡조, 비전, 이야기)가 일그러지지 않고 선명하게드러나도록 최선을 다한다. 어리석음, 어색함, 서투름이 없어야 한다. 관습, 유행, 여론에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과격한 일이다. 자신의 직업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 예술가가 아이디어를 다루는 일, 비전을 언어라는매체로 다듬어내는 일. 이것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일이고, 기술은 내가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즐겨 말하는주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한없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작업의 기반이 되는 비전, 즉 ‘아이디어‘ 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 P432

허공에는 곡조가 가득하다.
돌덩어리에는 조각상이 가득하다.
땅에는 비전이 가득하다.
세상에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예술가는 이것을 믿는다. 맞는 말이라고 믿는다. 그렇게확신한다.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 ‘아이디어‘ 를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여기서부터 나는 음악과 미술을 빼고 이야기에만 집중하겠다. 비록 모든 예술의 뿌리는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진짜 지식을 갖고 있는 분야는 이야기뿐이다).  - P432

상상한 내용을 지칭하기에 아이디어는 이상한 단어다.
추상적이지 않고 대단히 구체적이며, 지식이 아니라 표현으로 구현된 내용을 지칭해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아이디어라는 단어를 고수한다. 또한 이 단어가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간 것도 아니다. 상상력은 이성적인 능력이니까.
"꿈에서 그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1년 내내 좋은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  "오전이 절반쯤 지난 지금 내 머리에는 갖가지 아이디어와 비전 등등이빽빽하게 차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올바른 리듬을 찾지 못해서......"
마지막 문장은 1926년에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이다. 나중에 이 문장에 대해 다시 살펴볼 것이다. 리듬에 대한 언급이 예술의 원천에 대해 내가 생각하거나 읽은 그 어떤 내용보다 더 심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경험과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다. - P433

픽션 작가만 이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한다. 항상,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을 이야기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미쳐버린다. 아니면 유아나 (아마도) 동물처럼 역사가 없는 세상, 오로지 현재밖에 없는 세상에 산다.
동물의 정신은 커다랗고, 신성하고, 현존하는 미스터리다. 나는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언어는 전적으로 진실만을 말한다.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은 우리뿐인 것 같다. 우리는 현실과 다른 것, 처음부터 달랐던 것, 처음부터 달랐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내서 말할 수 있다. 없는 것을 지어내고, 가정하고, 상상할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기억과 함께 뒤섞인다. 그래서 우리는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동물이다. - P434

원숭이는 경험을 기억하고, 경험을 기반으로 추정할 수있다. 개미탑을 막대기로 찔렀더니 개미들이 막대기를 타고올라오는 걸 한 번 본 뒤, 원숭이는 그 개미탑을 다시 그 막대기로 찌른다. 어쩌면 개미가 또 막대기를 타고 올라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또 그 개미들을 핥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냠냠, 그러나 상상력을 지닌 동물은 우리 인간뿐이다. 원숭이가 개미탑을 막대기로 찔렀다가 빼보니 막대기에 금가루가잔뜩 묻어 있었는데, 광물을 찾아다니던 사람이 그 광경을 본것이 1877년 로디지아에서 일어난 대 골드러시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동물은 우리 인간뿐이다. - P434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다. 이 이야기에서 현실과 일치하는 것은, 일부 원숭이가 정말로 개미탑을 막대기로 찌른다는 사실과 로디지아라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1877년에 로디지아에서 골드러시가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부분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다. 나는인간이므로 거짓말을 한다.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다. 이건진실이다. 내 말을 믿어야 한다. - P435

픽션은 경험에 상상력이 작용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경험, 기억, 힘들게 얻은 지식, 과거사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사실 픽션이 아주 많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지금 내가 말하는 주제는 진짜 픽션, 즉 소설이다. 소설은 모두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일에 상상력이 작용해서 변화시키고, 걸러내고, 왜곡하고, 선명하게 다듬고, 미화한 결과물이다.
‘아이디어‘는 세상에서 머리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이 과정 중 내 관심사는 바로 아이디어가 머리를 통과하는 부분이다. 상상력이 원료에 작용하는 부분. 하지만 아주많은 사람이 마뜩잖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P435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허클베리 핀』 『백년의 고독 』 ...... 우리의 경험이라는 바탕은 어둡고, 우리가 창조하는이야기는 모두 그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불길 속에서 훌쩍 뛰어나온다.
상상력은 삶이라는 암흑물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많은개인적 에세이와 자서전에서 내가 점점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신, 우리가 공유하는 친숙한 불행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한 번도본 적이 없는 것을 보고 싶다. 비전이 무시무시하게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나를 향해 뛰어나오면 좋겠다. 변화의 힘을 품은상상력의 불꽃이 되어. 나는 진짜 용을 원한다. - P440

경험은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픽션은 경험을 상상력으로번역하고 변형하고 변신시킨 것이다. 진실에는 사실이 포함되지만, 진실과 사실이 항상 같은 시공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예술에서 진실은 흉내가 아니라 환생이다.
사실을 담은 역사책이나 회고록에서 경험이라는 원료가 가치를 지니려면 선별, 배열, 성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소설에서는 이 과정이 훨씬 더 과격하다. 작가는 원료를 선별해서 성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융합하고, 발효시키고, 다시 결 - P440

합시키고 다시 손보고, 다시 배열하고, 다시 탄생시킨다. 이과정에서 원료는 자기만의 형태를 찾을 수 있게 되는데, 합리적인 사고는 여기에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모든 과정이 순수한 창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괴물에게바쳐진 제물로 바위에 묶여 있는 여자. 미친 선장과 하얀 고래, 절대적인 힘을 주는 반지 용그러나 세상에 순수한 창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출발점은 경험이다. 창작은 재조합이다. 우리는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작업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머릿속에는 괴물, 리바이어던, 키메라가 있다. 이들은 정신적인 사실이다. 용은 우리에 관한 진실 중 하나다. 그 진실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 용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개 용에게 잡아먹힌다. 안에서부터. - P441

독서는 가장 신비로운 행동이다. 시청이라는 방식이 독서를 대체한 적은 과거에도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시청은 완전히 다른 방식이고, 보상도 다르다.
책을 읽는 독자는 그 책을 만들어간다. 임의적인 상징과인쇄된 글자를 자기만의 내적인 현실로 번역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독서는 창조적인 행동이다. 여기에 비해 시청은 수동적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영화에 참여해 영화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영화에 흡수되는 것이다.
독서를 할 때는 독자가 책을 잡아먹고, 영화를 볼 때는 영화가 보는 사람을 잡아먹는다. - P442

이건 아주 굉장한 일일 수 있다. 좋은 영화에 먹혀서, 자신의 눈과 귀를 따라 어쩌면 평생 경험하지 못할 현실 속으로끌려 들어가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그러나 ‘수동적‘이라는말은 ‘취약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매체가 우리에게 이야기를들려주며, 바로 그 점을 이용한다.
독서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적극적인 거래다. 텍스트는 독자의 통제하에 있다. 독자는 텍스트를 건너뛸 수도 있 - P442

고 한 곳에서 머뭇거릴 수도 있고, 테스트를 해석할 수도 있고, 오독할 수도 있고, 앞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에 잠길 수도있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고,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그 판단을 수정할 수도 있다. 진정한상호작용을 할 시간도 여유도 있다. 소설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활발히 진행되는 협업이다.
시청은 이것과는 다른 거래다. 협력적이지 않다. 시청자는 영화 제작자나 프로그래머에게 통제권을 넘겨주기로 동의한다. 심리적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서 영화와 프로그램이들려주는 시청각 이야기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없다. 스크린이나 모니터는 일시적으로 시청자의 우주가 된다.
자유재량의 여지는 거의 없고,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정보와 이미지를 통제할 방법도 없다. 그 정보와 이미지를 거부하고,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거기서 스스로 멀어지는 방법뿐이다. 그러면 그 정보와 이미지가 기본적으로 무의미하게보인다. 아니면 아예 프로그램을 끄는 방법도 있다. - P443

작가들은 모두 서로의 어깨 위에 서 있다. 모두 서로의아이디어와 재주와 플롯과 비결을 이용한다. 문학은 공동 작업이다. ‘영향의 불안‘이니 뭐니 하는 말은 그냥 남성호르몬의 작용일뿐이다. 내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표절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흉내 내기, 베끼기, 도둑질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정말 고의적으로 다른 작가의 글을이용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 이자리에 서서 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종이봉투로 내 머리를 가렸을 것이다(저명한 역사학자 여러 명도 이렇게 해야 한다). 내 말은, 경험이 우리에게 스며들듯이 다른 사람의 책에서 이런저런 것이 우리에게 스며든다는 뜻이다.  - P455

딱 맞는 단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문체는 아주 간단한 문제예요. 리듬이 가장 중요하죠. 이걸 알고 나면 엉뚱한 단어를 쓰기가 불가능해집니다. 오전이절반쯤 지난 지금 내 머리에는 갖가지 아이디어와 비전등등이 빽빽하게 차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올바른 리듬을 찾지 못해서. 이건 매우 심오한 문제예요. 리듬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단어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어떤 광경, 감정이 마음속에 이렇게 물결을 일으킵니다. 그러고 한참 지난 뒤에야 거기에 단어를 맞춥니다. 글을 쓸 때 우리는 이것을 다시 포착해서 (이것이 현재나의 믿음입니다) 작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단어와는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것이 마음속에서 깨어지고 구르면서 단어를 자신에게 맞추죠. 하지만 내년이면 내 생각은 틀림없이 달라져 있을 것 같네요. - P461

울프가 이 글을 쓴 것은 80년 전이다. 그녀가 그 이듬해에 생각이 달라졌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 글에서 울프의 말투는 가볍지만,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매우 심오하다. 나는 이야기의 원천, 즉아이디어의 원천에 대해 이보다 더 심오하거나 더 유용한 것을 아직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 P461

기억과 경험 아래에, 상상과 창조 아래에, 울프의 말처럼단어 아래에 리듬이 있고, 기억과 상상력과 단어는 모두 그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작가가 할 일은 그리듬이 느껴질 만큼깊이 내려가서 리듬을 찾아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듬이 기억과 상상력을 움직여 단어를 찾아내게 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울프는 아이디어가 가득한데 덜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리듬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울프는 그 아이디어들의 잠금장치를 풀어, 그들이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게 해줄 박자, 그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하게 해줄 박자를 찾지 못했다. - P462

울프는 그것을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부른다. 어떤 광경이나 감정이 그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도 한다. 잔잔한 수면에 돌이 떨어지면, 중심에서부터 침묵 속에 완벽한 리등으로 원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다. 마음은 그 원들을 따라밖으로, 밖으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단어로 변한다…… 하지만 울프의 이미지는 이보다 더 거대하다. 그녀가 생각한 물결은 파도다. 조용하고 매끄럽게 바다 위를 1천 킬로미터 넘게가로질러 와서 해안에 철썩 부서지는 파도. 파도가 부서져 날아오르면서 단어라는 거품이 된다. 그러나 그 파도, 일정한박자의 충격은 단어 이전에 존재하며,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작가가 할 일은 그 파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저 멀리 바다에서, 마음이라는 대양 저편에서 조용히 부풀어오르는 파도를 알아보고 해안까지 따라오는 것이다. 해안에 - P462

저 파도는 단어를 변화시키거나 스스로 단어가 되어 품고 있더 이야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미지를 토해내고, 비밀을 쏟아낼 수 있다. 그러고는 이야기의 대양으로 스르르 다시 물러간다.
아이디어와 비전이 꼭 필요한 저변의 리듬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울프는 왜 그날 오전에 아이디어와비전을 ‘덜어내지 못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 걱정거리.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작가가 너무 서둘러서 단어를 너무 일찍 움켜쥐기 때문에 단어를찾지 못할 때가 아주 많은 것 같다. 작가는 파도가 들어와 부서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작가인 탓에 그냥 글을 쓰고싶어 한다.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른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자신이 아는 것, 아이디어, 의견, 신념, 중요한 생각...... 작가는 파도가 들어와 모든 아이디어와의견 너머로 자신을 데려가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그곳에서는 엉뚱한 단어를 쓰기가 불가능해지는데. - P463

우리들 중 누구도 버지니아 울프가 아니지만, 모든 작가가 적어도 한 순간이나마 파도를 타본 적이 있다면, 항상 딱맞는 단어를 찾아내는 경험을 했다면 좋겠다.
독자로서 우리는 모두 그 파도를 타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안다.
산문과 시, 모든 예술, 음악, 춤은 우리 몸, 우리 존재, 이세상의 몸과 존재가 지닌 심오한 리듬에서 솟아나 그 리듬과 - P463

함께 움직인다. 물리학자가 읽는 우주는 아주 다양한 진폭의진동,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은 그 리듬을 따라가며표현한다. 일단 올바른 박자를 찾기만 하면, 우리의 아이디어와 단어가 그 리듬에 맞춰 춤춘다. 누구나 합류해서 춤을 수있는 윤무輪舞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되고 장벽이 내려간다.
잠시 동안. - P464

그녀가 여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신, 초월적인 존재
원래 모든 것을 아는 존재.
타자기 앞의
원형
나는 이 말에 저항한다.

그녀의 일, 나는 정말로 그녀의 일이
싸움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일, 나는 정말로 그녀의 일이
자신의 진짜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일, 그녀 자신의 일,
그녀가 인간인 것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 P479

그래, 만약 내가
작가라면, 내 일은
단어다. 쓰지 않은 편지들.
단어들은 나의 존재 방식
인간, 여자, 나,
단어는 나를 자아내는 물레,
인생이라는 천을 짜기 위해
세월이라는 날실 사이로 던져진 북,
모양을 잡아
사용하고, 장식하는 손.
단어는 나의 치아,
나의 날개.
단어는 나의 지혜.

나는 낡은 책상의
비밀 서랍 안
편지 다발.
편지에 무엇이 있나?
무슨 말이 있나? -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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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유럽 사람들은 ‘하나의 유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독재의 사령부가 된 유럽을 반대한다. 유럽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생의 공동체로 거듭날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그런 이상주의자들은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사람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희망도간직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유럽연합이 지금까지그래왔던 것처럼 개혁이 불가능한 집단임이 분명해진다면, 그어떤 언론의 선동이 있더라도 유럽인들은 유럽연합을 버리는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P231

프랑스와 독일의 철도 공기업들은 각각의 유럽 국가들이 각자자신의 환경에 적합한 최적의 철도운영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놔두라고 유럽연합에 요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 문제에대한 노조와 사용자 측의 현실 진단은 거의 똑같았다. 그들은신자유주의의 유럽이 저지른 거대한 실수를 이제 모두 인정하고 있다. 다만 노조는 17년 전에 알았던 것을 사용자는 이제야,
그것이 자신들이 설 자리마저 밑동부터 위협하자 인정하게 된것이다. 그 해법을 찾는 데서 사용자는 여전히 유럽연합 지도부에게 뒷덜미를 잡혀 있다. 그들도 내심 노조의 강력한 압박을 바랄지도 모른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덜 자유롭다. 떨어지기를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높을수록 진실에서 멀어진다. 발이 땅에 닿지않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자들에게는 머리를 날려 허공에 떠 있는 자들이 현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야 하는 고단한 임무가 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계급투쟁이라 불렀다. - P240

모든 개인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다. 모든 개인적 고통이 사회적 고통이듯, 나의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 남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사회적 치유가 시작되고, 그 안에서개인이 치유될 때 비로소 역사는 전진한다.
2016년 봄,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혐오misogyny의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추모와 분노, 조소와 야유로 부딪혔다. 여성들은 비로소 우리 모두가 피해자였음을, 그 자잘한 일상의 불 - P262

안과 불쾌함, 공포가 여성 모두의 것이었음을 말하는데, 자신의평소 언행이 여자들을 하루하루 죽여가는 것이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들은 그들의 조용한 추모와 분노에 끼어들어 이를 조롱했다.
여성혐오에 대한 여성들의 폭발적 자각과 그 앞에 선 남성들의 망연함 사이에서, 정부는 무슨 일을 했는가. 마치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듯 정부는 아무 말도 행동도취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파리에 가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꿈에 부풀어 있을 뿐이고, 정부의 나팔수 <조선일보>는 강남역에모여든 추모 인파들을 세월호 유가족처럼 폄훼했다. 해결은 없고 훼방만 있으며, 대화는 가로막고 대결만 조장한다.
그러나 솟아오르기 시작한 불기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으리라. 그 누구도 현명한 제도적 해결 방안을 제시해줄 리 없는 사회에서,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여성들의 상처를 있는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녀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여성이 피눈물 흘리는세상에서는 남성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 P264

신자유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옷처럼 우리 몸에 달라붙기 시작한 외환위기 시점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남녀 간 불평등은기하급수적으로 가중되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략 이때부터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현상이 다소 다른 양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모순이 극대화되면, 폭발할 수밖에 없다. 수습 불가능한 수준으로 축적된 모순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표출의 방식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짓밟고 능멸해오던 대상들이 마침내 발끈하며 일어서자, 남자들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어리둥절함이다. 그리고 정의당 탈당 사태에 이어 <시사인> 절 사태가 보여주듯,
기존의 전선과 이념을 초월해 남성들의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되고 있다. 가부장제를 수호하기 위한 이러한 ‘남성 연대‘는 충분히 예측됐던 광경이다. - P267

여성협오를 둘러싼 이 무수한 국지전을 보며 생각한다. 여성에대한 조직적 차별은 가부장제 발생 이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것이지만, 마치 그들에게 원한이라도 가진 듯 여성을 혐오하고공격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남자들이 출현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도드라진 한국사회의여성혐오를 보며 지배계급의 프레임 속에 걸려든 것은 아닌지나는 강한 의혹을 품고 있다. 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조장해온 피지배계급 간의 분열 프레임.
박정희가 호남을 차별하고 영남에 특혜를 제공하면서 지역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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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세요


너는 들어오지 마ㅡ
그 안으로 들어간 누군가가 외쳤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와
찬물 한 컵과 마주하여 앉았다
창 바깥에는 사다리차가
누군가의 세간살이를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다

찬물이 식어가는 동안에
찬물을 마시지 않았다

파란 박스가 네 개씩 포개어져 누군가의 거실로
차곡차곡 운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곧 이웃 사람이 될 것이다

너는 들어오지 말라던
그 안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나에게 남긴 한마디를

나는 모두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찬물이 식어가고 있다

세수를 했다
흰 비누 거품으로 칠해진 얼굴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이 얼굴은 한 번도 진심으로 미워해본 적이 없다
악몽이 보호하고 싶어 하는
나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사 왔어요ㅡ
인터폰 화면 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채워져 있다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안으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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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가 있는 정물


그대라는 자연 앞에서
내 사랑은 단순해요.

금강에서 비원까지
차례로 수국이 켜지던 날도

홍수를 타고
불이 떠내려가던 여름
신 없는 신앙을 모시듯이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사랑일 수밖에요

죽어가며 슬어놓은 알

끝으로부터 시작이
말려들어갑니다

스미다강의 불꽃 축제


강으로 가자고 했다.
진흙 코끼리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좋은 것은 무엇일까
외투를 입히고 단화를 신겼다
부스스 흙이 떨어졌다
코끼리는 밀차 손잡이를 꼭 쥐고
천천히 발을 뗐다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다
더는 걷지 못하겠다는 듯
옆으로 풀썩 누웠다
교각 위에 차량이 길게 늘어섰고
화가 난 사람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연잎만큼 넓은
코끼리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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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진실을 요구하는 싸움을 하는 동안 시민들은 고결하고 당당한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죽은 세월호 희생자들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면, 살아남은 자가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 그리고그 죽음을 사주한 자들을 벌하는 것이다. 돈이 아니라 ‘진실‘을요구한다는 사실이 간혹 어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 같다.
정권과 국회와 언론이 모두 작당하여 공격할 때 맞서 싸울 수있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도 몇몇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 것 같다. 그러나 그 기적 같은 강력한 저항을 통해 우린 부패한 권력과 그 속에서 함께 썩어간 시대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 P138

그럼에도 여전히 가난한 시민이 가진 가장 값진 무기는 그의생명이라는 듯 김영오 씨는 자신의 생명을 잘게 조각내어 이 질긴 투쟁의 제단에 바쳤다. 우리가 빠진 수렁은 생각보다 깊고어둠은 생각보다도 완강하며, 악취는 생각보다 독하다. 진실을알고자 하는 욕구를 죄악시하는 이 사회는 부대낌 없이 이곳을살아내고 싶거든 노예의 정신을 갖추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유족들의 싸움은 결국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싸움이다. 이것은, 2014년 남한사회에서 ‘좌빨‘의 징표가 되어버린 "진실을요구하는 인간들의 싸움"이며, 민주주의라는 거적을 둘러쓴집단을 향해 그 실체를 요구하는 싸움이다. - P139

울어라. 우리 모두 함께 울자. 눈물은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함이고, 솔직함이다. 이토록 큰 슬픔 앞에서 우리 함께 목 놓아울고, 그리고 진실을 역사 속에 남기기 위해 다시 싸우자. 우리위에 내려앉은 이 거대한 슬픔은, 진실을 덮고 쌓아 올린 거짓의 산더미에 올라앉아 더 큰 거짓의 성을 쌓아야만 숨 쉴 수 있는 자들이 벌인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합당한 벌을 받고있다. 단 한순간도 진실을 살지 못하는 그 벌을 우린 지금 울고 있지만, 결코 패자가 아니란다. 우린 함께 진실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편에 선다는 것은 삶에 드리울 수 있는 거대한 축복이며, 인생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강렬한 휘장이다. 우린 그걸 갖고 있다. - P143

가부장제가 부여한 과도한 남성 권력이 가족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데도 스스로 궤도 수정을 할 줄 모르는 이 땅에서, 불굴의 의지로 잔혹한 현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 마침내 승리하는여성들을 보노라면 환희와 절망이 교차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고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만이 스스로 지속에서 해방되는 방법임을 알지라도, 그 수많은 장애물을 건너면서 그들은 얼마나 지치고 다치고 다시 좌절하게 될 것인가.
그러나 용기를내어 자신의 고통을 끄집어내는 순간, 그것은 이제 개인이 아닌 사회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피해자는 이러한경험을 공유하고 사회에 가해자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자기 자신뿐 아니라 동료 여성들을 비추고 끌어안게 된다. 당신들이 저지른 국가적 범죄를 인정하라는 자신의 온 생애와 존엄을 건싸움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세상의 모든 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로 거듭났던 것처럼. - P166

식민통치의 시대는 종식되었지만, 그 시절 빚어진 비극에서기인한 트라우마는 하나도 해소되지 않았고, 여전히 한국사회를 피멍들게 한다. 거기서 헤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고, 명확히 기록하고 인정하며, 반성과 사과로매듭짓는 것이다. 한사코 과거를 덮으려는 나라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그 위대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들이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역사에 명확히 이 일을 기록하고 청산해야 한다. 그 끔찍한 역사를 올바르게 청산해야만 비틀린 현재의 우리를 수정할, 반복되는 트라우마로부터 탈출할 길이 열릴 것이다. - P171

선생의 집은 라스코 동굴벽화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라스코동굴 벽화가 처음 발견된 후 관람객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되기시작하자, 프랑스 당국은 그 옆에 라스코 동굴벽화를 섬세하게재현한 제2의 라스코 동굴을 만들었다. 선생은 7년에 걸친 벽화작업에 참여한 6인의 화가 중 한사람이었다. 작업이 끝난 후 받은 사례비로 근처에 집을 마련했고, 은퇴 후 거기서 살았다. 그런 선생이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다.  83세. 숲 속에 자리 잡은요양원에서 선생은 세상과 단절된 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계신다. 국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필리버스터 투쟁의 놀라운 장면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특히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의원의 발언을 전해드렸더니 감격하셨다. 영국에서 유학하던 전순옥씨와 잘 아는 사이라면서. - P183

선생은 말씀하셨다. 정의로운 길을 택하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승리라고 그 길에 서 있어야만 기쁘고 당당하게 인생을누릴 수 있다고, 그리고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길을 함께할 수 있는 동지를 찾으라고 한사람이면 족하다고. - P184

세상의 모든 문명에는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 어
"*둠과 빛을 조율해내는 방식이 그 문명이 축적해온 문화적 역량일 터이다. "도망간 노예를 잡아들이는 이 시절, 자본과 국가의 무모한 불장난으로 집을 잃고, 더는 잃을 것 없이 탈진하고분노한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드는 이 황망한 사태, 앞으로 어느집 지붕 위로 불이 옮겨붙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럽인들은 수렁에 빠진 바퀴들을 하나둘 끌어올려야 한다. 너무 낙심하거나 지치지 않고, 그 어떤 광기에도 현혹되지 않은 채. - P198

그런데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은 유독 파리의 테러를 아파했고, 파리를 위해 기도했다. 페이스북이 ‘Pray for Paris‘를 외치는 전 세계 유적지들의 사진으로 뒤덮였다. 파리라는 도시가 세계인들에게 갖는 그 각별한 의미와 애정을 드러낸 에피소드였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라는 말은 당신과 나 사이에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호 간에 믿어 의심치 않을 때만 축복의 의미를 갖는다. 신의 존재를 수긍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말은 허무맹랑하고 강압적으로 들린다. 많은 파리지앵은 무신론자이며,
신앙을 지니고 있더라도 굳이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회적 약속과 판단이 통용되는곳이 바로 이 혁명의 도시 파리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들의피를 보고야 마는 배타적 속성을 수세기 동안 겪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테러가 대체 어떤 연유로 일어났는지를 잠시만이라도 생각한다면, 당신들을 파괴한 그들을 벌해달라고 나의 신에게 기도하겠다는 말이 과연 축복으로만 들릴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 P201

테러 직후 파리에서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 있다.
가난한 문학청년 헤밍웨이가 소설 하나 써보려고 애쓰며 돌아다니던 파리 시절의 기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reable Feast」다.
사람들은 기도하는 대신 테라스에 앞다퉈 앉으며 여전히 포도주를 마셨고, 가난한 문청시절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누렸던 축제의 날들을 되찾고자 그의 책을 사 갔다. 기도 대신 파리라는 축제를 계속 즐기는 것. 그것이 파리를 사랑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 P202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테러에 희생당한 파리사람들을 위해Pray for Paris‘라는 배너를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국교를 가지지 않은 세속국가이며, 모든 국민이 자신이 원하는 신앙을 가질, 혹은 가지지 않을 자유를 가지며, 특히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을 금합니다. 그것은 프랑스 공화국이 가진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정교분리의 원칙aicité ‘이지요. 미국에서와 달리 프랑스 대통령은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올리고 맹세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정말로 뭔가를 기원하고 싶다면, 차라리 - P202

Peace for Paris‘ 라든가 혹은 헤밍웨이가 말한 것처럼 ‘파리는 언제나 축제‘라고 기원해주세요. 시네아스트 조안 스파르Joann Star가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더 이상의 종교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음악을 믿고, 포옹을 믿으며, 삶을 믿고, 샴페인과 기쁨을 믿습니다". 그러니 자,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기보다 근본주의자들을 향해 잔을 듭시다. 어둠을 지향하는 자들을 향해 우린 축제의 폭죽을 터뜨립시다. - P203

프랑스가 인류에게 기여한 가장 큰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두말할것도 없이 ‘혁명‘이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면 감옥을 부수고 왕의 목을 칠 수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보여주었고,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세상은 드디어 왕을 없애기 시작했다. 에어프랑스 노동자들의 행동은 프랑스의 대외적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혁명의 화산이 분출했던 순간을 환기하고 혁명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대외 이미지를 고양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장면이지배계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있다. 그 지배계급의 대변자인 미디어는 그 장면을 이용해 역풍을 만들어보려 무진 애를 썼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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