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사하라가 ‘몸을 헐어‘ 사막이 된 것이라면, 붉은 사하라 시편들은 ‘마음을 헐어‘ 이룩한 시의 모래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코끼리 같은 허기‘가 기다리는 사막에서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낙타 젖을 먹이는 어미처럼 대지모신大地母神에 접신된 시인은 ‘이 세상 강물이 달지 않느냐‘고 노래하며 달디단 시의 ‘검은젖‘을 꺼내 목마른 세상에 물리려 한다. 인간의 원형적 세계로 눈길을 돌리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확장된 의식을 보여주는 김수우의 시편들은 고독과 적막, 슬픔의 유전인자를 감춘 채 무어인 전사의 ‘붉은 팔뚝‘을 그리워하면서 야성과 신성이 살아 소용돌이치는 시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그 진경의 내부엔
‘핏빛 산맥‘과 황야를 건너는 발바닥이 있고, 사하라처럼 뜨거운 시의 심장에서 솟구친 ‘장엄한 영혼의 춤‘이 있다. 고진하(시인)

김수우 시인의 행로는 오랫동안 사하라 사막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그의 시 속에서 붉은 모래가 날리고 입 속에 그 모래들이 서걱서걱 씹힌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걷는 시인의 시는 우리들에게 푸른 바다가 변한 ‘붉은 사하라‘를 선물하고, 우리는 그 사막을 베개처럼 베고 누워 다시 숨쉬는 바다를 꿈꾼다. 더 이상 사막으로 가는 길을 묻지 마라. 이미 그곳 ‘서쪽 정거장‘에 우리를 다시 사막으로 데리고 갈낙타가 기다리고 있으니.
정일근(시인)

부항뜬 봄


저고리 속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키운 것일까 불빛에드러난 무수한 등비늘, 피멍자국 겹겹 너울진 어머니의 칠순 등짝에 또 부항을 뜬다 그날 이후 양푼마다 빨랫감마다 물고기가 파닥이고 칫솔통에도 동백화분에도 어머니의 비늘이 묻어났다

밀물진 햇살 따라 몰래 솟구치는 중이었을까 아침 대문간에서 물끄러미 하늘 바라던 어머니, 흰 머리칼은 수만갈래 파닥임으로 파도쳤다 그때 실러캔스° 한 마리 반짝, 지느러미를 치며 바람을 타고 오른다 싱싱하게 물오르는아지랑이 나이테

봄, 케토톱을 붙인 바다가 낳은, 일흔 번째
새봄이었다

°실러캔스: 고생대부터 현재까지 생존하는 물고기

저력


태풍이 지나간 숲
풀벌레 울음 가득, 차오른다
숙일대로 숙였던 풀잎들이
낮을대로 낮게 웅크렸던 베짱이며 철써기들이
다시금 나무를, 나무의 어둠을 일으키는 소리.
한번 더 숲을, 숲의 뒷벽을 세우는 소리
고요하다
투명하다
앙금 진한 울음이 별을 띄운다
폭풍에 떠밀린 수천 톤 유조선 위로 별이 맵다
흔들어보아야 알게 되는
낮은,
힘.

꽃이 지네



몰래 스며드는 귀엣말
그래, 그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깜박인다, 쌀푸대에, 눈빛을 쓸어담는다, 나사를 푼다, 살아간다, 알전구 하나, 켠다, 하늘과 지붕의 경계境界를, 빗질한다. 목구멍으로, 죽음이 침넘어간다, 열리는 무덤, 경계經界를 지운다, 푸대를 푼다, 물소리 걸어간다, 무늬도마뱀 태어난다, 맨손이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단추를 푼다, 반점이 많은 시간의 살결, 알전구 흔들린다, 또 살아간다, 또 나사를 푼다, 밥주걱에 붙은 북두칠성, 깜박인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그래, 그래,
바람이 꽃을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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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의자도 거울도 전부 사막이다.
집도 절도 붉은 모래다.
무수한 나사로 조여진 문명 속에서
마주치는 원형의 세계, 그 굳건한 적막에
하루하루 아득하다. 막막하다.

고생대의 숲이 지금도 살아 분열하고 있는
사하라는 가장 치열한 생명의 땅이며, 오늘 내 삶의 현실이다.
말의 틈새기로 먼지처럼 분열하는
몸과 꿈의 뜨거운 분신들이
아프고 그립고 고맙다.
때문인지 이 시집엔 발끝을 세우는 것들이 많다.


이천오년, 가을옷을 꺼내며
수우헌에서

聖발바닥


사하라의 노을을 넘다가
신발을 벗고 동쪽을 향해
무릎 꿇는다
모래비탈에 입맞추며 기도하는
흰옷 입은 모슬렘 사내
왜 엎드린 사람의 키가 더 클까
위대한 건 신이 아니라
모래로 빚어진 나그네다
흙먼지에 수만큼 갈라진 聖발바닥
옷자락 날리며 핏빛 산맥을 다시 걸어가는
모래만 내짚는 모랫덩이의
맨꿈, 맨뒤꿈치
그 삼억만년 퇴적된.

낙타의 젖이 달다


결혼을 앞둔 딸의 단지에
어미는 낙타젖을 따른다°
이는 세상의 강물이니 다 마셔야 한다
코끼리 같은 허기가 기다리리니
저 펄럭이는 사막을 안아야 하리니
딸아, 이것을 다 마셔야 한다
사람이 네게로 흘러오리니
사람이 네게서 넘쳐나리니
일곱 살에 색칠했던 하늘, 한뼘한뼘 완성되어
말라깽이 가슴도 젖살이 오르리라
낙타등에 올라탄 언덕을 보아라
야자나무가 키우는 낮달을 보아라
이 세상 강물이 달지 않느냐

어미 젖가슴에서 쏟아진 사막
딸의 앞자락 속으로 감겨든다


•사하라 모리타니에서는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낙타젖을 먹여 살을 찌우는 전통이 있다.

광야


비쩍 마른 염소를 치는
빼빼 야윈 아이에게
사하라는 한 벌 남루한 옷일 뿐이니
그 옷을 입고
염소는 아이처럼 웃는다
아이는 염소처럼 달린다

둘 다 발꿈치가 단단하다

뿌리


사막에서는 소문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 막막한 신의 등짝에서는
뿌리가 몸통의 두 배라는
바오밥나무가 자랍니다
하늘을 본다는 건
제 넓이 두 배의 침묵 위에 서는 일,
제 키 두 배의 고요를 키우는 일임을 알아
바오밥은 바람이 먼데서 실어온 말까지
그냥, 삼킵니다, 깊은 데로,
깊은 데로 발목만 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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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부산에서 태어나,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서부 아프리카의 사하라, 스페인 카나리아 섬에서 십여 년 머물렀고, 대전에서 십 년 가까이 지내면서 문학지기들을 사귀었다. 틈틈이 여행길에 오르며 사진을 좋아한다. 이십 년 만에 귀향, 부산 원도심에 인문학 북카페 <백년어서원>을 열고 너그러운 사람들과 퐁당거리고 있다. 
고지식함과 결벽증으로 여러 사람 괴롭히는 이상주의자.
 시집 『길의 길」.『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젯밥과 화분』, 산문집 『씨앗을 지키는 새『백년어』 『유쾌한 달팽이, 「참죽나무 서랍」, 「쿠바, 춤추는 악어』가 있으며 
사진에세이집으로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밑 푸른 바다』, 『당신은 나의 기적입니다>가 있다. 2005년에 부산작가상을 수상하였다.

항도 부산에는 김수우 시인이 운영하는 인문학 카페 <百年魚>서원이있다. 거긴 백 마리의 나무 물고기가 제각기 한자로 된 외자 이름을달고 있다. 그들은 옛집에서 해체된 목재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어림잡아나무로 백 년, 한옥 목재로 백 년을 살았던 전생을 지녔다. 폐목재로널브러져 있다가 물고기로 환생해서 백 년은 더 살 붙이들이다. "나무는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릭의 힘으로 살아가듯"(「몰락을읽다), 이 목어(木魚)들도 최선을 다해 자랄 것이다. 자리도 꼭 낡고,
작아지는 쪽으로 자라면서 천천히 ‘몰락‘해갈 것이다.
이 시집은 "우리는 아직, 슬픔이 부족하다"고 읊조리는 생명체들이
‘몰락‘으로 치닫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경전‘이다.
몰락은 바닥을 지향하는 속성을 지녔다. 바닥도 땅바닥이 아닌 속 모를바다의 밑바닥으로 치닫는, 그야말로 몰락(沒落)하는 삶의 기록이다.
몰락과 단절에서 이어지는 죽음, 혹은 오감에서 감지할 수 없는 사라짐에대한 기록과 동시에 부상(上)과 소생, 혹은 첫 호흡에서 거듭나는 여리고순한 것들의 첫 나타남에 대한 기록이다. 앞의 기록은 현실이고 뒤의기록은 미래거나 시원이다. 시원은 지금 없고 미래는 아직 없다. 그래서시인은 "배고플 때 눈물 날 때 헤어질 때도 신발코만 내려다보"「절감둥어운다. 폐목재에서 물고기들을 불러내듯이 폐허의 삶에서 시들을 건져올리며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나가고 있다. 새로운 경전이 생겨난 씨와날이다.
안상학 (시인)

시인의 말


비겁한 슬픔과 모순들이 나를 키우고 있었다. 꾸물꾸물민망한 날들이 구렁이처럼 제 꼬리를 말고 또 말았다. 막막하고 먹먹한 날들을 계속 삼켰다. 아프다 말하는 것도 사치였다. 세월호 이후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지만,
도무지 말이 안되는 날들 속에서 나는 자꾸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었다.

괴물화된 문명 속에서 나도 병든 괴물이었으리라. 다행스럽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낡은 책상에서 ‘몰락‘이라는 단어가 새움처럼 돋아났다. 모든 몰락은 ‘이상‘과 ‘심연‘을 가지고 있었다. 또 몰락은 온 힘으로 생명을 품고 있는 겨울숲 또는 혁명과 닮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얼마나아름답게 몰락했던 걸까. 그 몰락에서 무수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도 영웅들은 열심히 몰락 중이니.

죽어서 빛나는, 죽어서 살아 있는 세계가 바로 시(詩)임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흔쾌히 몰락할 수 있

을까. 가난한 어머니처럼. 전구를 넣고 양말을 꿰매던 늙고못생긴, 어깨 굽은 어머니 말이다. 이상과 심연 사이엔 대지가 있고, 그 대지엔 사랑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모두 메타포로 빛난다. 이제부터 천천히, 다시 사랑을 배울참이다.

내려가는 길. 깜깜한 데로 내려가는 나선형 긴긴 계단을자주 본다. 지옥인 듯 무섭다. 하지만 그 끝자리에 하얀 민들레가 흔들리고 있다. 그 본래 소박하고 위대한 그 눈부심.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착각이다. 울어야 복이 온다.
따뜻한 눈물이 가장 큰 선물이다. 신은 가장 어두운 지하에산다. 오래오래 우리를 기다린다. 시(詩)처럼,

물속 사원


나물다발 속
돈나물꽃 한 줄 묻어왔다

노란 꽃부리 기특해
유리잔에 담았더니 이튿날부터 먼 안부인 듯 내리는 실뿌리
아침저녁 풍경(風磬) 선율인가 했더니

꽃질 무렵 뿌리에서 깨어나는 잎, 잎들

점, 점, 점 번지는 푸른 눈망울 사이로 아득히 수미산 가는 길
초록 만장 나부낀다

매일 백팔배 할 곳이 생겼다 - P43

아직


층계참에 흩어진 호랑나비 날개
넘어진 하늘, 아직 찬란하다

어머니는 운동화 필통 주름치마를 외상으로 사주었다 늘 그랬다 아직도 꿈속에서 외상값을 갚는 어머니, 초등학교 입학식 히말라야시다 옆에서 호랑무늬를 달고 있다 꿈속 운동화가 아직 새 것이듯 엄마 날개는 아직 젊다 젊다

오래 전 잃어버린 단추, 오래 전 사라진 제단, 그 오래 전 닫힌 덧문, 언제나 희미한 암호, 동해남부선이 자귀나무가 되었다는 소문, 불규칙한 이별들, 이끼가 된 진실, 수천 생에서 죽을 때마다 새잎 틔우던 것들, 것들, 호랑무늬가 진하다 아직

먼지로 돌아가는 날개의 힘 - P75

소리 비늘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음성
아득한 원시 북소리로 울린다
괜스레 눈물 괸다.
그가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 먼데서 도착한 안부들이다
모든 길은 기도(祈禱)가 만들어냈으니
물소리도 망치 소리도 원래 기도였으니
새 울음이 만든 구불텅한 하늘을 걷고 걸어
마침내 귀에 닿는,
나를 지상의 모퉁이에 살아 있도록 그려내는
저 숟가락 같은 발언들

몇 이랑 텃밭 푯돌이 되어
메마른 분수대를 지키는 마디풀 되어
문턱에서 마르는 아기 운동화가 되어
허공에 다리를 놓는 노인의 늙은 하모니카가 되어 - P94

두런거린다
보이지 않는 소리 비늘이 서로의 빛깔을 만들고 있으니

당신도 나도 원래
아즈텍에서 태양신을 낳던 여신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 또 출발했으리라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목청에
까닭 없이 감동한다
그 안부로 살아갈 것이기에, 다시 걸어갈 것이기에 - P95

꽃잎 감염


올해 처음 핀 거라며 선물 받은 라일락 꽃잎 네 개

보랏빛 마스카라 깜박인다 보라바람 풀럭인다

도시락에 놓은 한 잎 놓으니 괜히 겨드랑이가 가렵다

국어사전에 끼워 넣은 한 잎, 중독된 단어들이 풋풋해진다

엽서에 부친 한 잎, 문딩아, 고맙다, 친구가 키득거린다

송도 앞바다에 한 잎 띄운다, 온 세상이 한참 가렵겠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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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길


잊혀진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숭고한 영혼들의
용감한 몰락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시와 삶에 빚지는 일, 더 뻔뻔해져도 될까. - P9

최선(最善)


아침 영롱한 거미줄, 창틀과 깨진 화분을 잇고 있다

무한 서사를 퉁기는 외줄 우주, 명랑하다

내가 만든 커다란 먼지들이 거미줄 타고 논다 나를 본다

풀렁플렁 구르는 투명한 몽당발들

한순간, 문득, 툭,

끊어질 평생을 알아 최선으로 빛난다 칡덩굴이 아니라

절대 찰나에 끊길, 끊어져야 하는 영원을 보았기에

최선으로 빛나는, 빛나야 하는, 미치는, 미쳐야 하는

최후, 찬란한 지도 한 장 - P13

굴절의 전통


입석으로 타서 간이의자를 하나 잡았다 다행이다

매화가 번진다 그리운 이가 먼데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지난 겨울 철탑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다행과 다행 사이 다행스럽지 못한 것들이 꽃대처럼 칼금처럼 불면처럼 직립한다

밥그릇 안에서 굴절되는 영혼처럼 눈물은 봄비로 굴절되었다

성냥갑 만한 메아리도 없이 봄비는 다시 철탑으로 굴절된다

내가 가려는 바다는 통로 천정에서 거물거물 떨고 있다 - P14

팬티까지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다가 양말 벗을 때의 수치를 정직이라 부르는

네 칼날도 꽃으로 굴절될 것인가 분노란 그따위 궁리이다

오늘도 손해를 본 토마토 수레는 굴절되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니다

젖을 빨던 질문들은 철탑으로 굴절되었다 다행이다 아니다

햇빛을 탕진하는 흐린 동백, 아슬아슬하다

신호등 앞에 늙은 외투처럼 서 있는 하늘, 뒤뚱거린다

간이의자를 접는다 - P15

빗방울경전


비가 온다 잘 지냈나 익숙한 주문(呪文)처럼 내리는 비, 나도 그들을 잘 안다

과일장수 아버지는 비가 오면 다섯 살 딸을 사과박스에 뉘고 비닐을 덮어 짐자전거에 실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부터 빗방울을 사랑했다 홀로 걷는 법 함께 내려앉는 법 정직한 슬픔을 토닥토닥 배웠다

한때 빛을 키우던 지느러미들, 한때 날개를 고르던 새들

비가 오면 포장마차에 앉는다 빗방울 당도하는 소리 속에서 천천히 빗방울이 된다 단추도 되고 단춧구멍도 되던 빗방울 유리창도 되고 바다도 되던 빗방울들 남비에서 끓는다 홀로 푸는 법 함께 풀리는 법 정직한 슬픔이 보글보글 떠오른다

저주를 푼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알아보는 일이다 - P16

오래, 아무리 모질게 잊혀져 있더라도 금세 알아본다

막다른 골목 유행가도 삐걱대는 관절도 천박한 자유도 불완전한 마술도 새우깡 흘린 노숙의 자리도 싸구려 강박증도 빗방울이 된다 자박자박 낮은 발길이 된다

어떤 저주든 아름답게 풀어낼 수밖에 없는
몇 생애 내 어머니이기도 했던
홀로 걸어와 함께 내리는, 저, 이방인들
슬쩍 지나도 그림자조차 없어도 그들을 잘 안다 냄새와 그 유영이 익숙하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 P17

몰락을 읽다


구름이던 큰 나무에 구름이던 작은 새들이 앉아 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인다 아무 할 일이 없다 씹었다가 밸고 뱉었다 씹는 하느님

담벼락에 걸터앉은 젊은 햇빛이 말을 건다
난 여섯 살 소꿉동무였어 얼굴 잊은, 탱자 울타리에서 불러대던 옥희라는 이름이 간질간질 돋아난다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락의 힘으로 살아가듯

풀꽃과 어깨동무하고 한참 절룩이는데 뒤통수 닮은 진실들이 옆에서 걷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온 나무그늘이 어깨를 걷는다어깨에 작은 새들이 논다 나도 어깨가
있음을 비로소 안다 - P18

몇 번 몰락에 발가벗은 것들은 기원(起源)을 향해 자란다

큰 나무는 자라서 작은 나무가 되고 작은 나무는 자라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자라서 새가 되는 마을

질긴 하느님,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페이지, 유리창이 맑다

한참 가난해지고 나서야, 맑은 옥희 까르륵 웃고 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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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인 난민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태평양 연안 북서부의 유산에 쉽게 동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에서 자유와 관련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러한 역사는 미국의 폭격과 그 뒤를 이은 크메르루주 정권과 내전의 공포뿐만 아니라, 그들이 미국으로 입국한 시기에도 영향을 받는다. 즉 1980년대가 되자 미국의 복지 제도는 끝이 났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캄보디아인에게 복지 수당이 포함된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하지 않았다. 다른동남아시아 난민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인은 전쟁 경험을 포함해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활용해 뭔가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송이버섯이 호황을 보이자 이들은 숲에서 채집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순수한 대담함을 활용해 생계를 꾸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방법이었다. - P166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전쟁의 즐거움을 예찬하는 한인 현장 중개인은 아시아인도 미국의 제국적인 전쟁을 사랑한다는점을 내게 보여줄 것이라며 캄보디아인 벤과 이야기해보라고 제안했다. 벤을 그렇게 소개받았기에, 군대의 원정은 미국식 자유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그가 지지하는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대화는 그 현장 중개인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흘러갔는데, 그럼에도 숲에 있는 다른 캄보디아 사람들의 생각을반영했다. 첫 번째는,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내전에서 누가 어느 편에서 싸우는지 결코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혼란을 야기했다. 백인 - P166

참전용사가 자유는 인종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풍경 속에 있다고상상했다면, 캄보디아인은 전쟁이 어떤 사람을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편에서 저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번째로, 백인 참전용사가 전쟁으로부터 얻은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자유를 실행하기 위해 가끔 산으로 들어왔다면, 캄보디아인은 미국식 자유의 숲에 회복이라는 좀 더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었다.
벤은 열세 살의 나이에 무장투쟁에 합류하고자 마을을 떠났다. 그의 목표는 베트남인 침입자들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국적을 몰랐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크메르루주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어렸기 때문에 상관은그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는 지도자들 곁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있었다.  - P167

그러나 이후에 그는 상관의 총애를 잃게 되었고, 정치적 억류자가 되었다. 억류자들로 구성된 그의 집단은 그들끼리 자활하라고 정글로 보내졌다. 우연히도 그곳은 벤이 전투에 참가하던시절에 알게 된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텅 빈 정글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 숲에 숨겨진 길과 자원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이즈음에 이르자 나는 그가 탈출했다고 말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는특히 그가 얼마나 정글을 잘 알고 있는지를 자랑스러워하며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집단원들에게 숨겨진 우물을 보여줬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마실 물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숲에 감금당한 것에는, 비록 강압에 의한 것이었을지라도, 힘을 실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숲으 - P167

로의 귀환은 마음속에 그러한 불꽃을 다시 튀게 한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적 자유가 제공하는 안전함을 통해서만 그렇다고 그는설명했다.
다른 캄보디아인들은 버섯을 찾아다니면서 전쟁으로부터 치유된다고 말했다. 어떤 여성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얼마나 몸이허약했는지 설명했다. 다리가 너무 약해서 거의 걸을 수 없었는데, 버섯 채집을 하면서 건강을 되찾았다. 그에게 자유란 움직일 수 있는 자유다. - P168

헹은 캄보디아 의용군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서른명을 이끄는 리더였다. 그러나 어느 날 순찰을 돌다가 지뢰를 밟았고 한쪽 다리를 잃게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다리 하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그는 동지들에게 제발 자신을 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그는 유엔 기구에 발견되어 태국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의족을 사용해 별 탈 없이 잘 지낸다. 하지만 그의 친척들은 그가 숲에서 버섯을 채집하겠다고 말했을 때 여전히 비웃었다. 그가 절대로 속도를 맞춰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며 그와 함께 가기를 거절했다. 결국 이모 한 명이 그를 산 아래에 내려줬고 스스로 길을 찾으라고 말했다. 그는 버섯을 발견했다! 그 이후부터 버섯 채집은 그의 이동 능력을 증명하는 방법이 되었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다른 쪽 다리를 잃었는데, 그들은 산에서 채집을 함께하면서 자신들이 "온전해진다"고 농담한다.
오리건주의 산들은 오래된 습관과 꿈을 치료하는 방법이자 연 - P168

결 고리다. 헹에게 사슴 사냥꾼에 대해 물어본 날, 이 사실을 알게되고 깜짝 놀랐다. 그날 오후 나는 혼자서 버섯을 채집하고 있었는데 근처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너무 무서웠다. 어느 방향으로 달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헹에게 물어보았다. "달리지마!" 그는 말했다. "달려간다는 건 두려워한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나라면 절대 달리지 않을 거야. 그게 내가 지도자인 이유야." 숲은 여전히 전쟁으로 가득 차 있고, 사냥은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거의 모든 사냥꾼이 백인이며 그들이 동양인을 경멸하는 경향이있다는 사실 때문에, 숲과 전쟁이 평행선을 이룬다는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러한 주제는 몽계 채집인에게는 더욱 중요했는데, 대부분의 캄보디아인과 달리 그들은 스스로를 사냥꾼임과 동시에 사냥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P169

자유란 무엇인가? 미국의 이민 정책은 ‘정치적 난민‘과 ‘경제적 난민‘을 구분하고 오직 정치적 난민에게만 망명을 허가한다. 이민자들에게 미국에 입국하는 조건으로 ‘자유‘를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계 미국인은 미국으로 이민을 준비하면서 여러 해를 보낸 태국의 난민 캠프에서 자유를 지지하는 것이무슨 의미인지 배울 기회를 얻었다. 이 장의 첫 부분에 인용된 구절은 한 라오계 구매인이 프랑스가 아닌 미국을 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농담하듯이 말한 것이다. "프랑스에는 자유와 공산주의자, 두 가지가 있다. 미국에는 하나밖에 없다. 바로 자유다." 그는 자유때문에 좋은 수입이 보장된 안정적인 직업(그는 용접공이었다)보다 버섯 채집을 선호한다고 계속해서 말했다. - P177

나는 지금까지 상업적인 버섯 채집은 일반적인조건이 된 불안정성의, 특히 ‘정규직‘으로 일하지 않는 생계 방식의전형적인 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나라조차 임금과 혜택을 제공하는 직업이 이렇게 적은 상황에 놓이게 된 걸까?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직업에 대한 기대와 기호를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이런 상황은 최근의 현상이다. 많은 백인 채집인은 예전에 임금과 혜택을 제공했던 직업을 알고 있거나, 최소한 자신들이 젊었을 때는 그런 직업을 기대했다. 그러나 변화가 생겼다. 이 장에서 나는 그동안 도외시되어온 모종의상품사슬을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갑작스럽고 전 지구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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