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우
부산에서 태어나,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서부 아프리카의 사하라, 스페인 카나리아 섬에서 십여 년 머물렀고, 대전에서 십 년 가까이 지내면서 문학지기들을 사귀었다. 틈틈이 여행길에 오르며 사진을 좋아한다. 이십 년 만에 귀향, 부산 원도심에 인문학 북카페 <백년어서원>을 열고 너그러운 사람들과 퐁당거리고 있다. 고지식함과 결벽증으로 여러 사람 괴롭히는 이상주의자. 시집 『길의 길」.『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젯밥과 화분』, 산문집 『씨앗을 지키는 새『백년어』 『유쾌한 달팽이, 「참죽나무 서랍」, 「쿠바, 춤추는 악어』가 있으며 사진에세이집으로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밑 푸른 바다』, 『당신은 나의 기적입니다>가 있다. 2005년에 부산작가상을 수상하였다.
항도 부산에는 김수우 시인이 운영하는 인문학 카페 <百年魚>서원이있다. 거긴 백 마리의 나무 물고기가 제각기 한자로 된 외자 이름을달고 있다. 그들은 옛집에서 해체된 목재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어림잡아나무로 백 년, 한옥 목재로 백 년을 살았던 전생을 지녔다. 폐목재로널브러져 있다가 물고기로 환생해서 백 년은 더 살 붙이들이다. "나무는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릭의 힘으로 살아가듯"(「몰락을읽다), 이 목어(木魚)들도 최선을 다해 자랄 것이다. 자리도 꼭 낡고, 작아지는 쪽으로 자라면서 천천히 ‘몰락‘해갈 것이다. 이 시집은 "우리는 아직, 슬픔이 부족하다"고 읊조리는 생명체들이 ‘몰락‘으로 치닫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경전‘이다. 몰락은 바닥을 지향하는 속성을 지녔다. 바닥도 땅바닥이 아닌 속 모를바다의 밑바닥으로 치닫는, 그야말로 몰락(沒落)하는 삶의 기록이다. 몰락과 단절에서 이어지는 죽음, 혹은 오감에서 감지할 수 없는 사라짐에대한 기록과 동시에 부상(上)과 소생, 혹은 첫 호흡에서 거듭나는 여리고순한 것들의 첫 나타남에 대한 기록이다. 앞의 기록은 현실이고 뒤의기록은 미래거나 시원이다. 시원은 지금 없고 미래는 아직 없다. 그래서시인은 "배고플 때 눈물 날 때 헤어질 때도 신발코만 내려다보"「절감둥어운다. 폐목재에서 물고기들을 불러내듯이 폐허의 삶에서 시들을 건져올리며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나가고 있다. 새로운 경전이 생겨난 씨와날이다. 안상학 (시인)
시인의 말
비겁한 슬픔과 모순들이 나를 키우고 있었다. 꾸물꾸물민망한 날들이 구렁이처럼 제 꼬리를 말고 또 말았다. 막막하고 먹먹한 날들을 계속 삼켰다. 아프다 말하는 것도 사치였다. 세월호 이후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지만, 도무지 말이 안되는 날들 속에서 나는 자꾸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었다.
괴물화된 문명 속에서 나도 병든 괴물이었으리라. 다행스럽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낡은 책상에서 ‘몰락‘이라는 단어가 새움처럼 돋아났다. 모든 몰락은 ‘이상‘과 ‘심연‘을 가지고 있었다. 또 몰락은 온 힘으로 생명을 품고 있는 겨울숲 또는 혁명과 닮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얼마나아름답게 몰락했던 걸까. 그 몰락에서 무수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도 영웅들은 열심히 몰락 중이니.
죽어서 빛나는, 죽어서 살아 있는 세계가 바로 시(詩)임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흔쾌히 몰락할 수 있
을까. 가난한 어머니처럼. 전구를 넣고 양말을 꿰매던 늙고못생긴, 어깨 굽은 어머니 말이다. 이상과 심연 사이엔 대지가 있고, 그 대지엔 사랑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모두 메타포로 빛난다. 이제부터 천천히, 다시 사랑을 배울참이다.
내려가는 길. 깜깜한 데로 내려가는 나선형 긴긴 계단을자주 본다. 지옥인 듯 무섭다. 하지만 그 끝자리에 하얀 민들레가 흔들리고 있다. 그 본래 소박하고 위대한 그 눈부심.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착각이다. 울어야 복이 온다. 따뜻한 눈물이 가장 큰 선물이다. 신은 가장 어두운 지하에산다. 오래오래 우리를 기다린다. 시(詩)처럼,
물속 사원
나물다발 속 돈나물꽃 한 줄 묻어왔다
노란 꽃부리 기특해 유리잔에 담았더니 이튿날부터 먼 안부인 듯 내리는 실뿌리 아침저녁 풍경(風磬) 선율인가 했더니
꽃질 무렵 뿌리에서 깨어나는 잎, 잎들
점, 점, 점 번지는 푸른 눈망울 사이로 아득히 수미산 가는 길 초록 만장 나부낀다
매일 백팔배 할 곳이 생겼다 - P43
아직
층계참에 흩어진 호랑나비 날개 넘어진 하늘, 아직 찬란하다
어머니는 운동화 필통 주름치마를 외상으로 사주었다 늘 그랬다 아직도 꿈속에서 외상값을 갚는 어머니, 초등학교 입학식 히말라야시다 옆에서 호랑무늬를 달고 있다 꿈속 운동화가 아직 새 것이듯 엄마 날개는 아직 젊다 젊다
오래 전 잃어버린 단추, 오래 전 사라진 제단, 그 오래 전 닫힌 덧문, 언제나 희미한 암호, 동해남부선이 자귀나무가 되었다는 소문, 불규칙한 이별들, 이끼가 된 진실, 수천 생에서 죽을 때마다 새잎 틔우던 것들, 것들, 호랑무늬가 진하다 아직
먼지로 돌아가는 날개의 힘 - P75
소리 비늘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음성 아득한 원시 북소리로 울린다 괜스레 눈물 괸다. 그가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 먼데서 도착한 안부들이다 모든 길은 기도(祈禱)가 만들어냈으니 물소리도 망치 소리도 원래 기도였으니 새 울음이 만든 구불텅한 하늘을 걷고 걸어 마침내 귀에 닿는, 나를 지상의 모퉁이에 살아 있도록 그려내는 저 숟가락 같은 발언들
몇 이랑 텃밭 푯돌이 되어 메마른 분수대를 지키는 마디풀 되어 문턱에서 마르는 아기 운동화가 되어 허공에 다리를 놓는 노인의 늙은 하모니카가 되어 - P94
두런거린다 보이지 않는 소리 비늘이 서로의 빛깔을 만들고 있으니
당신도 나도 원래 아즈텍에서 태양신을 낳던 여신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 또 출발했으리라 멀리서 듣는 이방인의 목청에 까닭 없이 감동한다 그 안부로 살아갈 것이기에, 다시 걸어갈 것이기에 - P95
꽃잎 감염
올해 처음 핀 거라며 선물 받은 라일락 꽃잎 네 개
보랏빛 마스카라 깜박인다 보라바람 풀럭인다
도시락에 놓은 한 잎 놓으니 괜히 겨드랑이가 가렵다
국어사전에 끼워 넣은 한 잎, 중독된 단어들이 풋풋해진다
엽서에 부친 한 잎, 문딩아, 고맙다, 친구가 키득거린다
송도 앞바다에 한 잎 띄운다, 온 세상이 한참 가렵겠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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