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소시민 지하련
숨이 노닷게 정거장에 들어서, 대뜸 시계부터 바라다보니, 오정이 되기에도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다. 두시 오십분에 떠나는 기차라면 앞으로 늘어지게 두 시간은 일찍이 온 셈이다. 밤을 새워 기다려야만 차를 탈 수 있는 요즘 형편으로 본다면 그닥빨리 온 폭도 아니나, 미리 차표를 부탁해놨을 뿐 아니라, 대단히 늦은줄로만 알고, 오분 십 분, 이렇게 달음질쳐 왔기 때문에, 그에겐 어처구니없이 일찍 온 편이 되고 말았다. 쏠려지는 시선을 땀띠와 함께 측면으로 느끼며, 석재는 제풀에 머쓱해서 밖으로 나왔다. 아카시아나무 밑에 있는, 낡은 벤치에 가 털버덕 자리를 잡고 앉으니까 그제야 화끈하고 더위가 치쳐오르기 시작하는데, 땀이 퍼붓는 듯, - P13
뚝뚝 떨어진다. 수건으로 훔쳤댔자 소용도 없겠고, 이보다도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더 숨이 막혀서 무턱대고 일어나 서성거려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그는 어디가 몹시 유린되어, 이도 흐지부지 결단하지 못한 채 무섭게 느껴지는 더위와 한바탕 지긋이 씨름을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목덜미가 욱신거리고 손바닥 발바닥이 모두 얼얼하고, 야단이다. 이윽고 그는 숨을 돌이키며, 한 시간도 뭐할 텐데, 어쩐다고 거진 세시간이나 헛짚어 이 지경이냐고, 생각을 하니 거반 딱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하긴 여게 이유를 들라면 근사한 이유가 하나둘이 아니다. 첫째 그가이 지방으로 ‘소개‘하여 온 것이 최근이었으므로 길이 초행일 뿐 아니라. 본시 시골길엔 곧잘 지음‘이 헷갈리는 모양인지, 실히 오십 리라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칠십 리는 톡톡히 된다는 사람, 심지어는 거진 백리 길은 되리라는 사람까지 있고 보니 가까우면 놀다 갈 셈 치고라도위선 일찌감치 떠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14
아름드리 소나무가 좌우로 갈라선 산모랭이 길을 걸으려니 생각은 다시 그때 학생사건으로 들어와 감옥에서 처음 알게 된, 그 눈이 어글어글하고 몹시 순결한 인상을 주는 김이란 소년이 눈앞에 떠오르곤 한다. 문득 길이 협곡을 끼고 뻗어올랐다. ‘영‘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나 앞으로 퍽 가풀막진‘ 고개를 연상케 하였다. 이따금 다람쥐들이, 소곤소곤 장송을 타고 오르내리락 장난을 치기에 보니, 곳곳에 나무를찍어 송유를 받는 깡통이 달려 있다. 워낙 나무들의 장대한 체구요싱싱한 잎들이라 무슨 크게 살아 있는 것이 불의한 고문에나 걸린 것처럼 야릇하게 안타까운 감정을 가져오기도 한다. ‘저게 피라면 아프다.‘ 근자에 와, 한층 더 마음이 여위어 어디라, 닿기만 하면 생채기가 나려는지, 그는 침묵한 이, 유곡을 향하여 일말의 측은한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넘어 노변에 자리를 잡고 그는 잠깐 쉬기로 하였다. 얼마를걸어왔는지 다리도 아프고 몹시 숨이 차고 하다. 담배를 붙여 제법 한가로운 자세로 길게 허공을 향하여 뿜어보다 말고, 그는 문득 당황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해가 서편으로 두 자는 더 기운 것 같다. 모를 일인 게, 그는 지금껏 무슨 생각을 하고 얼마를 걸어왔는지 도무지 아득하다. 고대 막 떠나온 것도 같고, 까마득히 먼 길을 숱해 한눈을 팔고, 노닥거리며 온 듯도 싶다. 이리되면 장인이 역전운송부에 부탁하여 차표를 미리 사놓게 한 것쯤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길이 얼마나 남았든지 간, 위선 뛰는 게 상책이었다. - P19
그는 가슴이 철썩하며 눈앞이 아찔하였다. 일본의 패망, 이것은 간절한 기다림이었기에 노상 목전에 선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도 빨리 올 수가 있었던가?‘ 순간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림자와 같은 수천 수백 매듭의 상념이 미칠 듯 급한 속도로 팽개비를 돌리다가 이어 파문처럼 퍼져 침몰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은극히 순간이었을 뿐, 다음엔 신기할 정도로 평정한 마음이었다. 막연하게 이럴 리가 없다고, 의아해하면 할수록 더욱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이상 더, 이것을 캐어물을 여유가 그에게 없었던 것을 보면 그는 역시 어떤 싸늘한, 거반 질곡에 가까운, 맹랑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 조선도 독립이 된대요. 이제 막 아베 소또꾸총독가 말했대요." 소년은 부자연할 정도로 눈가에 웃음까지 띠며 이번엔 말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벌써 별다른 새로운 감동이 오지는 않는다. ‘역시 조선 아이였구나.‘ 하는, 사뭇 객쩍은 것을 느끼며 잠깐 그대로 멍청히 앉아 있노라니. 이번엔 괴이하게도 방금 목도한 소년의 슬픈 심정에 자꾸 궁금증이 가는것이다. 그러나 막연하나마 이제 소년의 말에, 무슨 형태로든 먼저 대답이 없이, 이것을 물어볼 염치는 잠깐 없었던지 그대로 여전 덤덤히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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