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에서


전쟁과 남북의 분단은 우리 문학사를 두 동강이로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의 인생과 문학을 ‘실종‘시켰다. 남북 양측의 독재체제에서 내쫓겼던 그들의 문학과 삶은 다행히도 남한의 민주화 과정이 진전되면서 복원될 수 있었고, 이는 북측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력이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 분단의 극복이란 ‘좌빨 타령‘이나 ‘북에 가서 살라‘는 폭언과 편향된 생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 - P220

한의 올바른 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태준에 대하여 쓰면서 서두에 백석의 ‘마지막 시‘를 인용한 것은, 이 시가 어쩌면 월북한 이태준의 말년을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방되던 무렵 신의주에 홀로살던 백석의 흔적이 나중에 알려진 이 시로 남아 있다. 시쓰기를 집어치우고 생계를 위해 측량기사가 되었던 백석의 이 시에는, 시를 쓰지않는 기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나 있다. 이후 월북이 아니라 재북하고 있던 초기에 그가 행사시나 선동시 몇 편을 남겼다고 하여, 백석이 시인으로 되돌아갔다고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간절한 시인의 노래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 이태준의 급진적인 변화와 월북한 뒤의 처절한 몰락은 ‘인생파‘ 로서의 그의 소설보다 더욱 소설적인 것이었다. - P221

이태준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남파공작원‘으로 남한에서 체포되어장기수로 살아남은 김진계의 조국이라는 구술자료에 나온다. 그는 이남에 내려와 생존할 수 있는 현장훈련을 위하여 땜장이가 되어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마천령산맥 기슭에 있는 강원도 장동탄광지역에서 열흘간 머물렀다. 마을 사람들이 뚫어진 냄비나 솥단지 등을들고 나오면 김진계가 능숙한 솜씨로 땜질을 해주었는데, 어느 노인이구멍난 솥을 들고 나타났다.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 건장한체구였다. 젊었을 때에는 꽤 미남이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게다가남한 말씨를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김진계는 노인을 어디선가 본 적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땜질하면서 그는 노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혹시 글쓰시는 분이 아니냐고 그가 묻자, 무슨 충격이나 받은 것처럼 노인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이더니 빙긋이 웃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 P226

"이태준이라고 합니다."
김진계는 그를 사진에서 보았을 뿐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평북 안주군에서 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을 정리하면서 이태준의 소설집 『달밤』이나 단편소설 「가마귀」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문장강화라는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도 있었다. 그때 이태준의 글을 읽은 느낌은 우리말을 자유롭게 쓰면서 아름답게 표현해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하다는 느낌도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4년 어느 날 그의 책들이 도서실에서 사라졌다. 작업을 하면서 김진계는 궁금한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아직도 글쓰십니까?"
"쓰고는 싶소만......"
노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이태준의 나이 예순여섯이던1969년의 일이다. 장동탄광 노동자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두 부부가이름도 잊고 살고 있었다. 뒤에 또 어느 탈북 여성작가는 이태준이 숙청된 뒤에 그의 아들딸들이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남편들과도 헤어졌다고 증언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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