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네 번째 ‘시인의 말‘ 을 쓴다.
‘시인의 말‘ 이라 써놓고 보니 갑자기 먹먹해진다.
시를 들여놓기도 부끄러운 집인데 말에게도 방 한 칸 내주어야 하는지.......
숲에 드는 나이라지만 숲은커녕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제주에서 파풍破風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폭풍의 뜻이 아니라 바람을 깨뜨리는, 현무암 돌담들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단호한 벽이 아니라 숭숭 뚫린 구멍의 몸으로 바람의 길을 내주기 때문이다. 바람과 돌담의 깊은 통정, 김수열 형의 시가 그렇다. 분별지를 넘어 지천명의 경지에 올랐으니 "늙은 밥솥이 아니라 마침내 파풍의 시가 되었다. 문득 "왜, 내 말이 우습냐?! 한잔 따라봐" 뭉쳐도 자꾸 눈물겹다. 실로 오랜만에 인공 조미료를 치지 않은 시의 진경, 원석을 보았다. 입맛 상큼하니 내장마저 환하고 피는 좀 더 맑아진 기분이다. 당분간 꿈자리 사나운 시들은 멀리해야겠다. ㅡ이원규 시인
그는 섬이다. 섬의 기질을 타고 났다. 무리에 섞여 있어도 홀로 고즈넉한 모습이 그러하고, 만만찮은 이력임에도 이를 명함 삼지 않는 은둔의 처세가 그러하며, 여간해선 동요하지 않는 뚝심이 그러하다. "물엣"들은 물론이거니와 "비록 섬에 있어도 섬 아닌 것들은/ 정말 모"르는 섬, 바로 그 자체다. 삶과 시는 무관하지 아니하므로 그가 빚은 시 또한 섬일 터, 쉽게 들고 나지 못해 더욱 절절해진 그리움의 표상일터, 그리하여 김수열의 시집을 펼치는 일은 섬에 입도入島하는 일과 진배없는 일일터이다. 아! 오늘 같은 날 "인생에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 그와 화북방파제에 퍼질러 앉아 "낮술"을 대작하고 싶다. 취한 척, ‘선배는 시가 커? 사람이 커?‘ 딴지도 걸어보면서 역정은커녕 낄낄대며, ‘그래 나 키 크다, 왜?‘ 할 게 뻔하지만 나는 안다. 그의시가 무진장 크다는 거, 어디에 내다 놓아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우뚝하다는 거. ㅡ손세실리아 시인
늙은 밥솥을 위하여
한땐 그랬다 저 밥솥처럼 씩씩거리다가 더 내지를 소리 없어 숨이 막힐 즈음이면 마지막 탄성으로 뜨거운 콧김 길게 내뿜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해졌다
이젠 늙은 밥솥을 이해할 나이 겉은 제법 번지르르하나 속내 들여다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콧김은 잦아들고 잠잠한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고슬고슬한 밥은 간데없고 늘 타거나 설었다
늙은 밥솥 하나 흐린 정물처럼 고즈넉하다 - P13
낮술
인생에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비 내리는 낮술을 안다
살아도 살아도 삶이 내게 오지 않을 때 벗이 있어도 낯설게만 느껴질 때 나와 내가 마주 앉아 쓸쓸한 눈물 한 잔 따르는
그 뜨거움 - P14
쉰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줄 알았다 설운 서른에 바라본 쉰은 너무 아득하여 누군가 손잡아주지 않으면 못 닿을 줄 알았다 비틀거리며 마흔까지 왔을 때도 쉰은 저만큼 멀었다
술은 여전하였지만 말은 부질없고 괜히 언성만 높았다 술에 잠긴 말은 실종되고 더러는 익사하여 부표처럼 떠다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몇 벗들은 술병과 씨름하다 그만 샅바를 놓고 말았다 팽개치듯 처자식 앞질러 간 벗을 생각하다 은근슬쩍 내가 쓰러뜨린 술병을 헤아렸고 휴지처럼 구겨진 카드 영수증을 아내 몰래 버리면서 다가오는 건강검진 날짜를 손꼽는다 - P15
과속방지턱
나이를 먹다 보면 말이야 머리와 발이 따로 놀고 가슴과 아랫도리가 하나가 아닌 거라 생각 같아선 박지성이 부럽지 않지만 십 분만 뛰어봐, 하늘이 노래 오장 쓴 물까지 나온다니까 생각으로야 단번에 설 것 같지만 막상 뛰어봐, 한 게임도 숨차 문전만 어지럽히다 말거든 멀리는 머리와 발 사이 가깝게는 가슴과 아랫도리 사이 그래서 과속방지턱이 있는 거라 한꺼번에 넘지 말라고 한번쯤은 생각하고 넘으라고
왜, 내 말이 우습냐? 한잔 따라봐 - P17
고등어를 굽다가
등푸른 고등어 한 손 사다 절반은 구이용으로 패싸고 나머지는 조림용으로 토막 내고
불판에 올려 고등어를 굽는다 적당히 달구어 뒤집어야 유연한 몸매 그대로 살아 푸른 물결 찰랑이는데 대책 없는 서툰바치 뒤집을 때마다 몸통 갈라지고 머리통 떨어져나간다 능지처참이다
사람 만나는 일 더도 덜도 말고 생선 굽듯 하라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 망가뜨리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 무너뜨리면서 남은 길 가야 하는가 - P18
강
강, 하고 부르면 입안 가득 찰랑거리다 은은한 물비늘로 되울려오는
이미 오래 전이었으나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첫 포옹 같은
어머니, 하고 부르면 온통 그리움으로 환하다가 돌아서면 못내 아련해지는
살아 있는 온갖 것들 품고 어김없이 마른 가슴 열어 빈 젖 물리는 강 - P29
생각을 훔치다
꽃은 하늘 올려다보면서
올까 말까
비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갈까 말까 - P32
새
팔순 고비에서 어머니는 속엣것들을 다 비워내고 새가 되려 하신다
모이 한 줌 물 한 모금
어머니에게 푸른 하늘은커녕 잠시 쉬어갈 나무도 못 되다니!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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