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p.67

대보름
홑이불 같은 구름 헤치고 정월 대보름달 둥실 떠올랐다 연을 시집보내는 애들도 없고 지신밟고 논둑 고사 지내는 어른도 없다 쥐불놀이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부럼을 깨든 단단한 이빨들은 어디서 쓰디쓴 삶을 깨물고 있는지 귀 밝은 술 나 혼자 마신다
갈 테면 다 가고 뺏을 테면 다 뺏어 봐라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아느냐 혼자라도 오곡밥 아홉 그릇 먹고 나무 아홉 짐 할 테다 - P34
하늘은 맑은데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보름달 물먹었다 올해도 물풍년은 틀림없겠다 - P35
모범생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몸으로 글자를 익혔다 아주 천천히
이제 몸은 경전이 되었다 걸어가는 모습도 글자가 되어 앞으로 갈 때는 ㄱ자가 되고 누우면 ㄹ자가 된다 서툴게 익힌 글자가 서 있으면 자꾸 뒤로 꺾어진다 몸의 기억은 완고하여 한 번 습득한 글을 결코 놓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에서 묵묵히 복습을 하는 사람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삐뚤빼뚤한 글자들을 첫눈이 지운다 - P43
동행
그녀는 졸면서 국자로 갯물을 떠서 꽃게 등에 붓고 있다 졸음을 참느라 닫혔다가 간신히 열리는 눈꺼풀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손놀림 배 멀미에 차멀미까지 겹친 꽃게는 뽀글뽀글 힘겹게 바다를 토해낸다 생生이 죽음으로 가는 출발이라고 한다면 꽃게는 지금 생의 종점에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바다를 몸으로 지우는 작업을 하는 중일 게다 그렇다면 졸린 눈을 끔벅이며 꽃게 등에 갯물을 떠 붓는 시장통 늙은 여자의 손놀림은 어떤 기억을 지우려는 반복일까 죽음을 기다리며 엎드린 꽃게처럼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몰릴테지만 그때 담담히 자기 생生의 모든 것을 지우려는 사람 - P44
몇이나 될까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 발꿈치 아래 바다를 버리고도 의연한 꽃게가 열 개의 발을 오므리며 합장을 한다 - P45
냉이꽃
참으로 모질기도 하구나 오고가는 길섶에 밟혀 죽은 줄 알았더니 겨우내 얼어 죽은 줄 알았더니 납작한 이파리마다 어느새 푸른빛 띄우고 모가지 길게 뽑아 눈물겨운 밥사발 가장자리 눌어붙은 밥풀 같은 꽃잎 몇 개 달고 天下의 봄을 호령하는 너는 - P56
똥
한사발의 밥을 먹고 누는 한덩이의 똥 반드시 흙에 누어야 되리
그 똥 맛난 밥이 되어 살찐 흙 우리에게 고봉밥 한 사발 담아 주리니
밥이 똥이고 똥이 흙이고 흙이 밥이고 그 밥 달게 먹고 땀 쏟는 사람 비로소 흙을 닮은 사람 되리 - P66
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 P67
못자리 하던 날
앞산 진달래 혼자 붉어 혼자 지고 황사 바람 속 울던 뻐꾸기 어디론가 날아갔다 일터 잃은 사람들 한숨이 거리를 메우는 오늘도 신문을 꽉 채운 구역질나는 정치 놀음 밭둑 개나리마저 노랗게 질렸다
빼앗지도 뺏기지도 않는 그런 땅에서 더불어 살고 싶은 날 논 한 배미 있는 게 얼마나 황송한지 그 고마운 땅에 볍씨 한 움큼씩 뿌리면서 이 어린것들이 캄캄한 세월 틈에 어찌 뿌리 내려 자랄까 근심되는 하루 누런 들판 참새 떼 쫓는 행복을 꿈꾸면 고달픔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P70
새참 때 옛날처럼 싸라기를 빻아 쑥개떡을 빚어 내오신 어머니는 무논 넘치는 개구리 울음은 마른 봄 판 배곯아 죽은 어린 넋이라 하시며 눈시울 붉히는 저만치 四月, 답답한 마파람 구부러진 논둑에서 쉬엄쉬엄 불었다 - P71
햇빛 한 줌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다
잿빛 무거운 구름 뚫고 칼날바람에 꺾이지 않고 낮은 추녀 밑에 쭈그리고 앉아 마늘씨를 쪼개는 거친 손등 위에 잠깐 머물며 기죽지 말고 살라고 속살거리고 사라지는 - P116
정낙추 시집 「그 남자의 손(애지, 2006)은, 최근 우리 시가 현저하게 망각하고 있는 음역(音域)을 선명하게 복원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태작이 거의 없는 한결 같은 집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들어맨다. 그는 태안에 살고 있는 농부이자 시인이다. 그로서는 첫 시집이 되는 이번 작품집은, 이러한 그의 구체적인 농사체험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상처들을 채집하면서도, 그것들을 깊은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과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주류 미학에까지 다다랐다가 최근 들어급격한 담론적 소강 상태를 보이는 우리 시대의 ‘농민시‘의 한 전형을 만나게 된다. - P117
시집 맨 앞쪽에 실려 있는 시편들은, 시인이 품안에 품고있는 가장 근원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넉넉하고 따뜻한 대지적 긍정에서 발원하여, 생명에 대한 경이와그 생명을 안아 기르는 섬세한 마음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땀과 눈물로 얼룩진 구체적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시집 전체 속으로 아련하고도 아프게 번져간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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