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는 이처럼 말년을 봉은사에서 지내며 대웅전 서편에 있는 판전에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판전은 당대에 화엄 강의로 이름 높았던 남호(南湖) 영기 1820-72) 스님이 봉은사에 간경소(刊經所)를 차리고왕실 내탕금(판공비)과 대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 소초본(疏鈔本)』80권 등을 목판으로 새기는 불사를 일으켜 마침내 3,175매의 목판으로완성하고, 이를 보관할 경판고로 지은 건물이다. - P229

이때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추사는 병들고 쇠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현판으로 걸 <판전(板殿)> 두 글자를 대자(大字)로 쓰고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 病中)‘이라고 낙관했다. 즉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뜻이다.
이 판전의 현판 액틀에는 작은 글씨로 누군가가 써놓은 오래된 글씨가 하나 있었다. 내용인즉, 추사가 이 글씨를 쓰고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판전이 건립된 때가 1856년 9월 말이었고 추사가 세상을떠난 날이 10월 10일이었으니 대략 들어맞는다. 이 <판전>은 추사의 절필(絶筆)인 것이다.
추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온다. 이쯤 되면 뛰어난 솜씨는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 P230

30여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추사의 일대기로 『완당평전』을 준비하면서 어느 날 틈을 내어 봉은사에 갔다. <판> 글씨를 보고 있자니 홀연히추사가 7세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글씨와 꼭 닮아 보였다. 참으로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은사이신 동주 이용희 선생을 뵐 일이 있어오늘 본 판전 글씨가 추사의 어릴 때 글씨 같아 보였다고 말씀드렸더니동주 선생은 한참을 생각하시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아버님은 아흔여섯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본래 아버님은 경주와 대구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 경상도 사투리를 썼지만 젊어서 서울로 올라와 사시면서 경상도 말투는 다 없어지고 서울말을 하게 되어사람들은 아버지가 서울 사람인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돌아가시던 그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버님이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러고는 얼마 안 되어 운명하셨죠."
이승만 대통 - P231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전설적인 얘기가 하나 있다.
령은 유언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않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망명했을 당시 부인 프란체스카와 단둘이 쓸쓸히 지냈다. 두 분은 항시 영어로 대화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운명할 때만큼은 침상에 누운 채로 프란체스카를 바라보며 힘들여 한국어로 유언을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끝내 그의 유언은 세상에 전해질 수 없었다.
이렇게 인생이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는가보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겠지. - P231

〈판전〉을 보고 일주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길 바로 아래에는 돌기와 담장을 낮게 두른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여기는 주지 스님의 거처로사용되고 있는 다래헌(茶來軒)이다. 한때 법정 스님은 여기에 기거했다.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인 『무소유』에는 이 다래헌 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는 지난해(1968)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 - P232

(그러나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버린 것이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 (・・・)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理)이니까.


이것이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상을 펴는 계기가 되었다. - P233

다래헌을 곁에 두고 일주문을 향해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다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봉은사 경내를 다시 한번 사방으로 훑어보니 빈 하늘엔늠름하게 잘 자란 미송들이 곳곳에서 준수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저 앞쪽으로는 찻집 연회원 앞마당에 있는 수령 300년의 라 - P234

일락 노목 두 그루가 여전히 기품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그루는분홍 꽃, 또 한 그루는 흰 꽃을 피우는데 부처님오신날 무렵 만개하면그 짙은 향기가 온 봉은사에 가득하다.
판전 옆에는 추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백송 두 그루가 자못 싱싱히 자라고 있다. 어려서 추사는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 - P235

고, 예산 추사고택의 김흥경(추사의 고조부 묘소 앞에는 추사가 북경에 다녀올 때 가져다 심은 백송나무(천연기념물 제106호)가 있다.
문화재청장 시절 나는 명진당이 봉은사에 한창 노송을 심는 것을 보고 문화재청에서 유적지에 심기 위해 기르고 있는 수령 30년 백송 두 그루를 보내주었다. 그 백송들이 고맙게도 잘 자라고 있다. 백송의 줄기는처음엔 초록빛을 띠다가 수령 50년을 넘기면 비로소 껍질을 벗고 흰빛을 띤다고 한다. 이제 5년만 더 지나면 아름다운 백송이 되겠거니 하는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발길을 돌려 다시 법왕루 아래로 내려와 일주문을 향해 내려가자니부도밭 돌축대 위쪽에 구불구불하게 몸을 비틀고 자란 산사나무 노목새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봉은사에서 간행하는 잡지 판전」(현 월간 『명은판전』)에는 이 나무에서 유래한 ‘산사나무 아래서‘라는 고정지면이 있었다. 이 산사나무는 오랫동안 잡목 속에 갇혀 보이지 않았는데 부도밭을 정비하면서 환히 드러나게 되었다. 다른 나무들과 어울리며 자라는 바람에 이처럼 기굴한 모습이 되어 오히려 귀한 정원수인 양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 P236

신경림 선생의 <나무1 지리산에서> 라는 시가 절로 떠오른다.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 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 P236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예부터 전하는 말대로 ‘절집의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산사나무를 뒤로 하고 다시 일주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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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 사적 제199호)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의 선릉(宣陵)과 11대 중종의 정릉(靖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선정릉은 지하철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7분, 9호선 선정릉역 3번 출구에서약 16분 걸린다. 능의 출입구는 본래 선릉로 곁 서쪽에 있었지만 8년전(2014)에 넓은 주차장을 마련하고 동쪽으로 옮겼다.
선정릉의 위치(선릉로100길 1)는 서울 강남의 한복판으로 동쪽으로는봉은사와 무역센터 등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선릉로라 불리는 대로가 바짝 붙어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빌딩 너머로 테헤란로가 길게 나있다. 현재 선정릉의 면적은 7만 2,800평이며 둘레가 2킬로미터에 달하는 부채꼴 모양으로 능침(무덤) 주변은 솔밭과 숲으로 이 - P151

루어져 있다.
도시공학적으로 볼 때 선정릉은 서울 강남 도심 속의 녹지 공간으로훌륭한 가치를 지닌다. 강남에 선정릉마저 없이 빌딩 숲을 이루었다면그 삭막한 도시경관이 어떠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선정릉의 하루 입장객 수는 약 천 명이다.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밤9시(동절기에는 오후 4시 30분, 2월은 오후 5시에 닫는데 아침에는 대개 인근주민, 점심때는 외지 탐방객과 주변 직장인, 저녁에는 데이트족이 많이이용한다. 봄철 선릉과 정릉 사이로 난 긴 숲길에 벚꽃이 만발할 때면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이런 봄꽃놀이를 만끽한다는 것에 너나없이 놀라움을 느낀다. 공원도 이런 공원이 없다.
그래서 한때는 선정릉에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붙여진 이름은 선정릉공원이 아니라 삼릉(三陵)공원이었다.
이는 참으로 엉뚱한 명칭이다. 선정릉에는 선릉과 정릉 둘밖에 없음에도 삼릉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능침(봉분)이 셋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나 능침이 셋이라고 무조건 삼릉이 되는 것이 아니다. - P153

왕릉이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왕과 왕비는 함께 묻히기도 하고 따로묻히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조선시대 왕릉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단릉(單陵): 왕이나 왕비 한분만 묻힌 능 (예: 문정왕후 태릉) - P153

합장릉(葬陵): 두 분이 하나의 봉분에 함께 묻힌능 (예: 세종 영룽)
쌍릉(雙): 왕과 왕비가 곁에 나란히 묻힌 능 (예: 태종 헌릉)
삼연릉(三連陵): 왕, 왕비, 계비 세분이 나란히 묻힌능 (예: 헌종 경릉)
동원상하릉(同原上下): 왕과 왕비가 같은 언덕 아래위로 묻힌 경우(예: 효종 영릉)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왕과 왕비가 같은 산줄기의 다른 언덕에 묻힌 경우 (예: 성종 선릉)

중종의 정릉은 단릉이고 성종의 선릉은 동원이강릉이다. 성종의 능침과 계비인 정현왕후의 능침이 다른 언덕에 있지만 같은 산줄기에 있어홍살문과 정자각이 하나만 있다. - P154

성종대왕 선릉
중종대왕 정릉
세종대왕 영릉
정조대왕 건릉
장조(사도세자) 융릉
문정왕후(중종 비) 태릉 - P155

왕릉을 비롯한 무덤에는 죽음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유교적 사생관(死生觀)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혼(魂, 넋)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 형체)은 땅에 묻힌다. 그래서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사당에 모시고 백은 땅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왕가에서 혼을 모신 곳이 종묘이고 백을 안치한 곳이 왕릉이다.
조선왕조 역대 왕은 27명이지만 왕과 왕비의 왕릉은 총 42기이다. 이 - P156

는 왕과 왕비가 따로 묻힌 단릉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태조의 4대조능과 실질적인 왕은 아니지만 나중에 왕으로 추대된 추존왕들의 까지더하면 숫자는 50기까지 늘어난다.
조선시대 왕릉은 풍수상 길지를 택해 양지바른 남쪽 언덕에 품위있게 조성되어 있다. 왕릉의 구조에는 정연한 건축적·조경적 의장(디자인)이 구현되어 있다. 절대군주의 무덤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 아니지만 다른 나라의 왕릉처럼 인공적인 축조물로 위세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과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공간 경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왕릉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그 독특한 문화유산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9년에 북한에 있 - P157

는 2기를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 모두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2기는 태조의 원인 신의왕후제릉(齊陵), 정종의 후릉(厚陵)이다.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때 전문가들 사이에서 선정릉은빼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유산 심의는 아주 까다로워문화유산으로서의 ‘고유 가치‘ 못지않게 ‘보존 실태‘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하는데 선정릉은 능역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미리 제외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조선왕릉 등재를 위한 2차에 걸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을 때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외국인 학자들을 선정릉에 안내하여 서울의 강남 개발과 이곳 주변의 엄청난 땅값을 알려주자 이들은 오히려 이와 같이 개발 압력이 크고 지가가 높은 지역에서문화재를 끝까지 보존하고 있는 국민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며 조선왕릉전체를 빠짐없이 연속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것을 권유했다. ‘보존 실태‘
는 나쁘지만 ‘보존 의지‘를 보여준다고 인정한 것이었다. - P158

정자각 좌우 아래쪽에는 대개 3칸짜리 작은 건물이 마치이 건물을 호위하듯 다소곳이자리하고 있다. 오른쪽(동쪽)은제사를 준비하는 수복방(守僕房)이고, 왼쪽(서쪽)은 제수를넣어두는 수라간(水間)이다. 이 두 건물이 있어 왕릉은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분위기를 얻는다. 중종대왕 정릉이 썰렁해 보이는 것은 이 수복방과 수라간이 없기 때문이다.
두 건물은 비슷해 보이지만 수라간은 벽돌 담장으로 닫힌 공간이고수복방은 콩떡 담장에 툇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건축에서 보여주는 ‘비대칭의 대칭‘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 디테일을 달리하여 은근히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자각 오른쪽 계단을 내려와 능침으로 가자면 바로 이 왕릉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을 모신 비각(碑閣)이 있다. 비석에는 단정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전서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P165

조선국(朝鮮)
성종대왕(成宗大王)선릉(宣陵)
정현왕후(貞顯王后) 부좌강

부좌강은 왼쪽 언덕에 합사(合祀)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능침은 달라도 같은 선릉이라고 밝혀둔 것이다. 영조 31년(1755)에 세운 이 비석 뒷면에는 성종대왕의 이력 중 1457년에 태어나 1469년에 즉위하고1494년에 승하했으며 재위는 25년, 향년 37세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정현왕후 윤씨의 경우, 1462년에 태어나 1480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1530년에 68세로 승하하여 대왕릉 왼쪽에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간단히쓰여 있다. - P166

중종대왕의 정릉으로 가는 길은 방문객들이 선정릉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이다. 벚꽃나무 숲길을 지나가다보면 왼쪽으로 정릉의 정자각과 능침이 비껴 보인다. 그러나 정릉은 그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쓸쓸하기만 하다. 오늘날 쓸쓸해 보이는 까닭은 바로 곁으로 큰길이 나있고 그 너머로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수복방과 수라간이 복원되지 않아 전체적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 P179

그 옛날에도 쓸쓸했다는 것은 중종에게 3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사후어느 왕비와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홀로 누워 있는 단릉이기 때문이다.
중종의 첫째 왕비는 단경왕후, 둘째 왕비는 장경왕후, 셋째 왕비는 문정왕후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았고, 문정왕후는 명종을 낳았다.
단경왕후(1487~1557)는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로 연산군 5년(1499)에 진성대군 시절의 중종과 결혼했는데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중종반정 때 반대편에 있었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이에 단경왕후는역적의 딸이라고 하여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궁궐에서 강제로 쫓겨난 신씨는 인왕산 아랫마을 서촌에 살면서 중종을 향한 그리움을 전하기 위해 다홍치마를 산자락 바위에 펼쳐놓고눈물을 흘리다 내려오곤 했다고 한다. 이 바위가 인왕산 치마바위다. - P180

그러나 명종 20년(1565)에 세상을 떠난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지못했다. 대신들은 정릉이 지대가 낮아 또 하나의 능침을 조성하는 것은불가하다고 반대했다. 실제로 정릉은 무리하게 이장한 것이어서 장마때마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침수되었다. 이에 명종은 다시 정릉을 원래있던 희롱으로 옮길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는 지금의 서울 노원구 공릉동 언덕에 홀로 묻히고 능호를 태릉(泰陵)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문정왕후의 태릉은 외따로떨어진 단릉으로 조성되었지만 능침과 정자각 사이가 어느 왕릉보다 길고 문신석·무신석의 조각상도 늠름하여 장중한 기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연 여장부 문정왕후의 능 같다고들 말한다.
이처럼 중종의 무덤은 계비 장경왕후 곁에 나란히 모셔져 있던 것을굳이 이곳으로 이장해 결국 외따로 떨어진 단릉이 되었다. 조선왕릉 중왕만 홀로 있는 무덤은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이외엔 중종의 정릉밖에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곁에 묻혀 있다는 점이다. - P182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30년에 걸쳐 이와 같은 치유의 과정이 이루어진 뒤 조선과 에도막부 사이에는 비로소 친선 외교의 길이 열렸다. 다만 일본의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테니 그 경비는 일본 측이 부담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일본 측은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636년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은 이제 쇄환사라는 이름을버리고 ‘신뢰가 통한다‘는 뜻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는 이름을 달 - P190

고 출발했다. 조선통신사의 일행은 정사, 부사 이하 400명에서 500명에이르는 규모였고 왕복 열 달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이때부터 1811년까지 조선통신사가 모두 아홉 차례 파견되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이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조일 간의 평화와 선린외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일제 식민지배라는 과거사문제를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시사점을 보여주는 역사적 경험으로 삼을만하다. - P191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현대사회로 들어와 도심속의 섬처럼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찰이 갖고 있는 불교계에서의위상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봉은사는 명종 5년(1550) 문정왕후(중종의 왕비가 어린 명종을 대신해대리청정하면서 보우(1509~65) 스님을 앞세워 조선불교를 중흥하며 선·교양 부활시킬 때 선종의 수사찰(寺刹)이 되었다. 그때 교)을종의 수사찰은 세조 광릉의 능사인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였다. 그리고보우 스님은 판선종사 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로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사실상 오늘날 봉은사의 중창조가 되었다. - P193

봉은사의 이런 영광은 선정릉의 능침사찰로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광주군 언주면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장점 덕분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들어와서는 서울과 가깝다는 사실이 정반대 상황으로 작용했다.
서울이 날로 팽창하여 1963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니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는 1975년에는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사찰 영역전체가 개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76년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하는경기고등학교 부지를 선정릉과 봉은사의 뒷산인 수도산 일대로 정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봉은사는 건물이 들어선 4천여 평만 남기고 토지를전부 내주게 될 판이었다. 이 위기를 헤쳐나간 분이 당시 주지직을 맡고있던 영암당(廣巖堂) 임성(任性, 1907~87) 스님이었다.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진화 스님은 "영암 스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봉은사는 없다"고했다. - P194

그런데 일주문이 사라진 봉은사는 절 입구가 너무도 허전하다 생각해모처럼 자리 잡고 잘 있는 오봉산 석굴암에서 다시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초정권창륜이 쓴 <수도산 봉은사>라는 현판을 달고 찰주도 반듯하게 깎아 비스듬히 받쳐둔 것이 오늘날 이 봉은사일주문의 모습이다.
이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중창의 개념으로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일주문을 세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중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일주문을 벤치마킹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도심 사찰에 어울리도록 현대건축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일주문을 세워본다든지. 아무튼 이 일주문으로 봉은사는 첫인상에서 꽤나 손해를 보고 있다. - P201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으면서 국초부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강력히 시행해 태종 6년(1406) 조계종, 천태종 등 11개종파의 242개 사찰만 공인했는데 이때 견성사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종 6년(1424)에 조선불교를 선교 양종 체제로 통폐합하고선종은 덕수궁 자리에 있던흥천사(興天寺), 교종은 당시 연희방(연희동)의 흥덕사(興德寺)로 지정하며 최종적으로 36개 사찰만 공인했다. 이때도 견성사는 보이지 않는다.
건성사가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것은 1495년에 타계한 성종의 선등이 견성사 곁에 조성되고 나서다. 이에 견성사는 왕릉을 지키는 왕실의 원찰(利)이 되어 연산군 4년(1498)에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도 능침사찰에 걸맞게 봉은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 P207

당시 유학자들은 보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이다. 보우의불교 중흥은 문정왕후의 권세를 끼고 벌인 사상적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보우에 대한 증오는 오랫동안 유가 사회에 내려와 급기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진짜 ‘요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 역시 한때는 보우스님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보우 스님은 진심으로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고자 노력했던당대의 능력 있는 스님이었다. 그는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아 열과 성을다해 불교를 일으켰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보우 스님은 비참한 죽음을맞았고 유학자들의 기록에 역사를 더럽힌 죄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만약에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불교는 진짜 미미했을 것이다.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 같은 엘리트를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僧軍)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 P213

다. 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 덕에 제작 과정이 소상히 밝혀져 있기때문이다.
이 세 불상은 1651년 조각승 승일(勝一) 등 9명이 대웅보전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인데, 1689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소실된 본존 석가여래좌상을 1765년에 새로 조성하여 기존의 아미타여래좌상,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봉안한 것이라며 불상들의 이름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좀더 설명하자면 조선 후기에 부처님만 세 분 모신 삼존불은 삼세불(三世佛)인 경우도 있고 삼신불(三身佛)인 경우도 있어 이를 구별하기 쉽지 않다. 삼세불은 시간적 개념으로 약사여래(과거불), 석가여래(현재불), - P218

아미타여래(미래불)를 모신 것이고, 삼신불(三身佛)은 존재론적 개념으로비로자나불(법신불) 석가모니불(신불)과 노사나불(보신불)을 모신 것이다.
그런데 봉은사 삼존불은 명확히 삼세불이라고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삼존불상의 인상을 보면 참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어서 더욱 인간미가 느껴진다.
어찌 보면 단정한 선비의 이미지 같기도 하다.
본래 불상이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한다. 삼국시대 청동불이 절대자의 친절성을 나타내는 미소가 특징이고, 통일신라 석불이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근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나말여초의 철불에 힘있고 현세적인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고려시대 철불·석불이 파격적인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 불상은 이봉은사 삼존불상처럼 거의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의 좌상 모습을 하고 있다. - P219

북극보전(北極寶殿)은 보통 절집에서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이 있는자리에 위치한 건물로 민간신앙을 불교가 받아들인 곳인데, 봉은사에서는 산신님, 칠성님에 더해 나한 중에서도 원력이 뛰어난 독성(獨聖, 나반존자까지 모두 모시고 있어 제법 큰 규모다. 이름 또한 독특하게 북극성을 끌어와 지었다. 북극보전은 대중들이 대웅전 다음으로 선호하는 기도처이다.
영각(閣)에는 봉은사의 역대 주지 중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연회국사, 보우대사, 서산대사, 사명당, 그리고 <판전>의 화엄경판을제작한 영기 스님, 오늘의 봉은사를 지킨 영암 스님, 그리고 불교계의 큰스님이었던 석주 스님 등이다. 참으로 봉은사는 영각을 지어 자랑스러운 주지 스님들을 기릴 만하다. - P221

을늙은 스님 한 분이 댓가지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댓가지끝에 작은 종이 통 하나를 매달았다. 통 가운데에는 바늘과 같은 작은봉(화)이 있었다. 1개를 골라 공의 바른팔 근육 위에 곧추세웠다.
작은 스님이 석유황에 불을 붙여 가지고 와서 작은 봉끝에 붙였다.
타는 것이 촛불 같았으나 바로 꺼졌다.
나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일이었다. 스님이 나간 후 공들에게 물었다. "그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며, 뭐라고 부릅니까?"
어당 이상수 선생이 말씀하기를"이는 자화참회라는 것이다. 수계(受戒)라고도 부른다. (…) 이는 모든 더러운 것을 살라버리고 귀의청정(歸依淸淨)하는 맹세이니 불법(佛法)이 그러하니라."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이 일을 보았고, 비록 말하지는 않았으나 심히 의아스럽고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추사처럼 높고 귀한 분이 어찌 이렇게 불심(佛心)에 미망되었는지 늘 의심했다. - P228

추사는 이처럼 말년을 봉은사에서 지내며 대웅전 서편에 있는 전에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판전은 당대에 화엄 강의로 이름 높았던 남호(南湖) 영기(永, 1820~72) 스님이 봉은사에 간경소經所)를 차리고왕실 내탕금(판공비)과 대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 소초본(疏鈔本)』80권 등을 목판으로 새기는 불사를 일으켜 마침내 3,175매의 목판으로완성하고, 이를 보관할 경판고로 지은 건물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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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2월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가자고 다시 청했으나 역시 거절 당했다. 이에 백석은 홀로 신경 (현 장춘시)으로 떠나면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지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자야는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해 그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금식을 하고 그를 기렸다고 한다.
P119, 120



아침에 읽는 ‘백석‘ 좋다. 좋구나!
그저 좋구나.







우리나라는 화강암의 나라여서 일찍부터 석조 조각이 발달했다. 불교가 들어온 이래로는 석탑·석등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고 능묘에서는 석인상과 장명등이 세워졌다. 민간신앙처에서는 돌장승, 민묘에서는 동자석이 무덤을 지켜왔다. 그 하나하나가 독특한 아름다움과 그 시대의문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중 많은 석물들이 일제강점기에 박물관으로혹은 대저택의 정원 조각으로 팔려나갔는데 그 수가 얼마인지 헤아릴수 없다.
우리옛돌박물관은 세중그룹의 천신일 회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석물들을 모아 전문 박물관으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우리석조 조각의 다양한 면모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우리의 석물들은 일본을 비롯한 외국으로도 많이 흘러 나갔다. 천신일 회장은 2001년 - P115

일본인 구사카 마모루에게서 문인석·무인석 · 동자석 등 석조 유물 70점을 환수해 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우리옛돌박물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야외 전시장 맨 위쪽의 쉼터다. 여기에는 민묘의 귀여운 동자석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도열해 있는데 시계(視界)가 사방으로 열려 있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가구박물관은 전통 목가구 전문 박물관으로 우리나라 전통 주생활 공간과 실내 가구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통 가구를 종류별(사랑방 ·안방·부엌 등), 재료별(먹감나무·은행나무·대나무·소나무 · 종이 등), 지역별(각 지방 형식)로 분류·전시하고 20명 이내의 그룹 가이드 투어로 관람객에게 사랑방 가구의 단아함, 안방 가구의 화려함, 서민 가구의 질박함을 느낄 수 있게 해설해주고 있다. - P116

한국가구박물관은 이화여대 미술대학을 나온 정미숙 관장이 오랜 기간 수집한 목가구 2,000점을 기반으로 세운 것이다. 한옥의 마니아인정관장은 사라져가는 고가 열 채를 박물관으로 옮겨와 고재를 그대로살리면서 적절히 배치해 한옥의 총체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CNN이 2011년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선정하기도했다.
한국가구박물관에는 서울을 방문한 외국 귀빈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독일 대통령, 벨기에 국왕 부부, 스웨덴 국왕, 중국 국가주석, IMF 총재,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등이 다녀갔다. 그리고 우리 한옥의 멋과 분위기를 살린 넓은 특별전시장에서는 강연과 연회를 열 수 있어 2010년G20 서울정상회의의 20개국 정상 배우자의 공식 오찬을 비롯해 굵직한국제회의 연회장으로 이용되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KBS)의 촬영 장소, 그리고 ‘유 퀴즈 온 더 블럭‘(TVN)의 BTS 인터뷰 장소로사용되어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 P117

한국가구박물관 아래쪽 선잠단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선잠단로) 대로변에는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이 있다. 본래 이 건물은 1970년대에 삼청각, 오진암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일컬어지던 대원각(大苑閣)이었는데1997년에 사찰로 태어난 것이다.
대원각 주인 김영한(金英韓, 1916~99)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집안이 가난에 몰리자 17세 때(1932) 조선 권번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기생이 되었고 여창가곡과 궁중무의 명기로 성장했다.
1935년 진향은 조선어학회 회원인 해관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에 - P117

유학했는데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해 함흥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듬해(1936) 함흥 권번에서 시인 백석(白石, 1912~66)을 운명적으로만났다. 백석이 막 첫 시집 『사슴』을 펴내고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을 때 회식 자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백석은 진향에게 첫눈에 반해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라고 하며 ‘자야(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야는 이백(李白)의 「자야의 오나라 노래(子夜吳歌)」라는 시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이다. 그때부터 둘은 연인이되었다.
1937년 12월 백석은 아버지의 강요로 고향으로 내려가 결혼했다. 그러나 곧바로 함흥으로 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가서 살자고 했다. 하지만 자야는 거절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백석은 뒤따라 서울로 올라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자야와 재회해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 P118

8·15해방 후 백석은 북에 남고 자야는 중앙대학교 영문과에 들어가1953년에 졸업했다. 1955년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이라 불리는 대지 2만평을 빚을 내어 매입했다. 10여 년간 땅을 되팔아 빚을 갚으면서도 7천평이 남았을 때 한옥을 짓고 대원각을 열었다. 마침 1970년 삼청터널이 - P120

뚫리면서 대원각은 크게 번창했다. 당시는 요정 정치가 한창인 때여서대원각은 권력자나 재력가 아니면 갈수 없었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요정 정치도 시들해졌다. 김자야는 일선에서물러나 대리 사장에게 운영을 맡겼다. 대리 사장은 대원각을 불고기와평양냉면을 파는 고급 음식점으로 바꾸었다. 그 시절 나는 어른을 따라대원각에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기본 한상이 1인당 2만5천 원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김자야는 스승 하규일(河)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펴냈다. 그러다 1987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다가 불현듯 대원각을 절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고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법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법정은 주지를 맡아본경험이 없고 아무것에도 메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 자리에 적합하지않다고 거절했다. 이후 자야가 10년을 두고 부탁하자 법정은 마침내 이 - P121

곳을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이자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근본도량으로 삼기로 했고, 대원각은1997년 길상사라는 이름으로다시 태어났다. 자야에게는 길상화라는 법명이 주어졌다.
당시 대원각의 재산은 시가1천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 기자간담회 때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야는 "1천억은 그 사람(백석)의시한줄만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P122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창건 법회 때 법정 스님이 대시주자인 김자야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자 그는 "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제가 대원각을절에 시주한 소원은 다만 이곳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최종태 <관음보살상>길상사 경내에는 극락전·지장전·설법전 등 여러 법당과 행지실·청향당·길상헌 등 요사(寮舍, 스님들의 처소)가 있다. 대원각의 본채는 극락전으로, 대연회장은 설법전으로, 기생 숙소는 요사채로 바뀌었고, 팔각정에는 자야가 백석과 함께 듣고 싶다고 한 범종이 걸려 있다.
- P122

설법전 앞에는 조각가 최종태가 제작한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가 명동성당과 혜화동성당에 조성한 성모마리아상과 많이 닮았다. 본래 불교와 천주교는 닮은 점이 많다. 1997년12월 14일 개원법회를 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축사를 했고,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축성 100주년을 맞은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했다.
1999년 11월 14일 자야는 임종을 앞두고 유언하면서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고 했다. 백석의 시 나와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구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 순애보를 이생진 시인은 「내가 백석이 되어로었다.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자야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P123

해방공간에서 백석은 북에 있었다. 말하자면 재작가였다. 그러나백석은 월북작가로 지목되어 1988년 해금될 때까지 금기였다. 백석 시집 ‘사슴』을 갖고 있으면 불온문서를 지녔다는 물증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북에서 대접받은 것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잊힐 수밖에 없었던백석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계기는 시인 이동순이 『백석시전집』(창작사 1987)을 펴내면서다.
그러나 백석이 동시대와 후대의 시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동순은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 본 백석의 시에서 백석의 시 영향 아래 있던 시인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청록파 시인(박목월 · 박두진 · 조지훈)들과 윤동주, 그리고 해방 후의. - P123

신경림·박용래·이시영 · 김명인·송수권·최두석·박태일·안도현·심호택·허의행 등


안도현은 『백석 평전』(다산책방 2014)에서 ‘백석 시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고는 다섯 살 아래의 윤동주는 사슴』을끼고 살았고 신경림은 ‘내 시의 스승으로는 서슴없이 백석‘이라고 했다고 증언했으며 안도현 자신은 백석의 영향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베꼈다‘고 했다. 실제로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을 비교해보면그가 백석의 시에 얼마나 큰 신세를 졌는지 알 수 있다. 백석의 사슴은2005년 계간 『시인세계』에서 현역 시인 156명이 뽑은 ‘우리 시대 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야는 말년에 이동순의 교열을 받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1995)을 - P124

펴내고 1997년에는 백석문학상 제정 기금 2억 원을 출연했다. 백석문학상은 출판사 창비 (당시 창작과비평사) 주관으로 1999년부터 지금(2022)까지 32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제1회에는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와 이상국의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8)가 공동수상했다. - P125

「고풍의상」은 우리 고유의 의상인 한복과 춤을 제재로 고전적인 우아한 아름다움과 낭만을 노래한 조지훈의 시를 가사로 윤이상이 작곡한 곡입니다. 풍속도와도 같은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율동에서 오는 우아한 고전미 그리고 청각적인 맛과 현대미가 조화를 이룬 작품입니다. 「산유화」(김소월 시, 김순남 작곡)와 함께 전통음악에 바탕으로 둔독자적인 음악어법으로 한국예술가곡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곡이기도합니다. 금지곡은 아니었지만 작곡자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한때안 불린 적이 있습니다. 광복 이후에 만든 작품 중 남북한에서 모두애창하는 가곡이라는 이색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수자(李子) 여사의 『내 남편 윤이상』(전2권, 창작과비평사 1998)을 보면 1953년 전쟁이 끝나면서 피아노 값이 치솟아 오빠가 결혼 기념으로사준 피아노를 팔고 약간을 보태서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는데 개울(성북천) 건너에 조지훈 시인이 살고 계셔서 아주 가까이 지냈다고 했다. 그래서 고려대학교 교가는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으로 되어 있다. - P129

윤이상이 살던 집은 최순우 옛집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최순우 옛집은 성북동에서 전통 가옥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옥으로수연산방과 쌍벽을 이룬다. 미술사학자 정양모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 P129

박물관에서 퇴근하면 예쁜 한옥을 고르기 위해 함께 한옥을 보러 여러동네를 다니다가 결국 1976년에 최순우 선생이 이 집으로 이사하셨다고 한다.
이 집은 1930년대 성북동의 주택 붐 때 부동산 개발업자가 지은 기역자 집으로 앞마당과 뒤뜰이 나뉘어 있는 공간 구조가 맘에 들어 결정했다고 한다. 그 대신 기둥과 마루에 니스 칠한 것을 모두 벗겨내어 나무의 재질감을 다 살려내고 뒷마당엔 소나무, 아가위나무, 모과나무, 감나무, 산사나무 등 우리 산천의 친숙한 나무들을 심고, 모란과 수련 등을손수 키우시며 강진 청자가마 발굴 때 캐온 국화를 비롯해 여름 풀꽃을심어 꾸미지 않은 듯 꾸민 정겨운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실내에는 문갑·책장·서탁·서안·사방탁자·반닫이 등 조선시대 실내 장식을 재현하듯 배치했는데 목기들은 하나같이 단아한 사랑방 - P130

가구로 오동나무 가구를 선호했다.
뒤뜰로 통하는 사랑방 문에는 ‘오수당(午睡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에 쓰인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이 집을 보고 있으면 최순우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절로 생각난다.


한국의 미술은 언제나 담담하다. 그리고 욕심이 없어서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가 별로 꾸밈없이 드러난 것,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픈 것도 즐거울 것도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한국미술의 마음씨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14~19면) - P131

이처럼 최순우 옛집은 우리 한옥과 목가구의 멋을 은근히 보여주는데 최순우 선생 사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2002년 겨울 사단법인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 모금으로 구입해 보수했고,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창립과 동시에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북동 답사에서 한옥의 참 멋을이렇게 느끼고 배우고 맛볼 수 있게 되었다. - P132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84) 선생은 개성 출신으로 한국미술사의 아버지인 우현 고유섭 선생이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 박물관에들어와 평생을 박물관에서 살았다. 말년에는 7년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다가 재직 중 돌아가신 박물관 인생이다.
최순우 선생은 미를 보는 타고난 안목과 뛰어난 미문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문, 잡지에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는 많은 글을 기고했다. 600여 편에 달하는 글이 『최순우전집』(전5권, 학고재 1992)에들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글을 모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한국미의 지남철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이 책을 책임 맡아 편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P132

"평소에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눈을 뜰 수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지체 없이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길‘이라고 대답하곤한다. 그때의 선생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좋은 선생, 좋은 책으로 이 책 이상이 없다는 대답까지 해오고 있다." - P132

최순우 선생의 최고 가는 명문으로는 역시 부석사무량수전」을 꼽아야겠지만 여기서는 「백자 달항아리」을 예로 들어보겠다. 최순우 선생은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잘생긴 종갓집 맏며느리를 보고 있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폭넓은 흰 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그 흰 바탕색과 어울려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 P133

최순우 선생은 인품이 고고하여 항시 주위에 많은 학자·문인 · 언론인 화가들이 모였다. 그래서 그 교류의 폭이 넓었는데 그중 빼놓을 수없는 분이 수화 김환기이다. 김환기는 작업일기를 매일 한두 마디씩 적어놓았는데 일기장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날 일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1974년 7월 9일
어젯밤, 최순우 씨 꿈을 꾸다… 불란서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리고 수화 김환기는 보름 뒤인 7월 25일 세상을 떠나셨다. - P133

산정이 2020년 타계하면서 유족들은 많은 작품을 기증하여2021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화가의 사람,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장대하게 열었다.
산정은 옛 호고일당 못지않게 추사 김정희에 심취했고 목가구를 비롯한 고미술을 사랑했다. 무송재는 한옥을 품위있게 지은 것으로 이름높다. 정원에 있는 괴석은 자신의 은사이기도 한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무송재의 한옥은 모르긴 몰라도 그의 부인인 정민자 여사의 안목이크게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정민자 여사는 전통 한옥에 대한 조예가 깊은 한옥연구가이자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고문으로 안국동 샛골목에 있는 아름지기 한옥을 현대식으로 아름답게 리노베이션한 분이다.
산정은 서울미대 출신 화가들과 묵림회 (墨林會)를 창립하고 이를 이끌어왔는데 무송재 주위에는 묵림회 회원인 백계 정탁영, 이석 임송희,
남계 이규선 등의 집들이 모여 있어 언젠가는 나 같은 답사객이 여기를찾아와 내가 수향산방과 최순우 옛집을 말하듯 이야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35

그뿐 아니라 그의 소설에서는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에 소련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 Eisenstein)이 「전함 포템킨」에서 보여준 그 유명한 ‘몽타주기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면 장면을 나열하는 것 같지만 그 장면들이 정반합(正反合)으로 발전하면서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서술 방법이다. 그러니까 박태원의 소설에는 전위적인 미술, 고현학이라는 학문적 시각, 영화의 몽타주기법 등 여러 요소들이 녹아 있어 내용은 세태소설이면서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박태원은 영화광이어서 극장 명치좌(明治座, 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 르네 클레르(René Clair) 감독의 유령은 서쪽으로 간다」와 「최후의억만장자」를 이상과 함께 보러 다녔다고 한다(김인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때」, 국립현대미술관 2021). 그래서 그의 외손자인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외할아버지 DNA가 그렇게흘렀다고들 말하기도 했다. - P138

그런 모더니스트 박태원이 월북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의아스럽게생각했는데 전하기로는 가족들에게 (이미 월북한) 이태준을 만나러 간다고 하고 나갔다고 한다. 월북 후 박태원은 평양문학대학에서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지만 남로당 계열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고 4년간 평안남도 강서 지방의 한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1960년에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해 1965년에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제1부와 제2부에 해당하는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발표했다.
그러나 강제 노동 중 겪은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1965년에 망막염으로 실명했고, 1975년에는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박태원은 1977년부터 갑오농민전쟁』의 마지막 제3부를 북 - P138

한에서 새로 결혼한 부인 권영희에게 근 10년간 구술로 불러주어 완성해갔다. 그러나 완간을 보지 못한 채 1986년 7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고 소설은 이듬해 부인 권영희와의 공동 저작으로 발간되었다. 이것이북한의 역사소설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는 『갑오농민전쟁』이다. - P139

이 시기 그 유명한 『님의 침묵』(1926)을 발표했다. 국문학자들은 말한다. 소월의 『진달래꽃』(1925)이 나올 때 곧바로 만해의 ‘님의 침묵이나온 것은 우리 근대문학 전개의 홍복이었다고.
1927년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일제에 맞서 신간회를 결성할 때 만해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신간회는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결국 사회주의자들의 주장대로 1931년 5월에해체되었다.
그러자 만해 선생은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고 혼신을 다해 펴냈다. 사직동 셋방 냉골에 혼자 살면서 1933년 7월 재정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108호를 펴내면서 200편이나 되는 글을 썼다(고은 『한용운 평전』, 민음사 1975).
그 무렵 만해가 당수로 있는 불교 비밀결사인 ‘만당(卍黨)‘도 해체되었다. 일제의 폭압은 날로 심해져갔다. 그때 나이 53세였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만해는 1933년 재혼을 하고 심우장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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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에 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이다. 서울 인구가 폭증하면서 한양도성 외곽을 택지로 개발하는 신흥 주택 붐이 일어난 때였다. 서울의 인구는 190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2배늘어났다.
이에 일제는 국유림을 주택지로 개발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여1931년 1차로 서울 남산 뒤쪽(남쪽) 이태원 일대의 방대한 국유림을 불하했다. 이 택지 불하 사업은 정부의 심각한 재정 결핍을 해결하는 데도큰 도움이 되었다(『동아일보』 1931년 2월 22일자). 그러자 1933년엔 우리에공동묘지를 조성해 서울 근교에 있던 이태원·노고산 · 미아리 등의 공동묘지를 이장시키고 빈 공간을 택지로 개발했다. - P53

성북동은 시내와 가까울 뿐 아니라 1928년에 혜화문(동소문)을 헐어큰길을 냈고, 또 종로4가에서 돈암동까지 다니는 전차가 혜화동과 삼선교에 정거장이 있어 변두리 치고는 교통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조용한 전원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문인 묵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33년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과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이 먼저자리 잡았고 1934년에 간송 전형필은 성북초등학교 옆에 북단장을 마련했다. 뒤이어 1935년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이 들어왔다. 1936년에는 그때까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里)였던 것 이곳이 마침내경성부(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북정(町)이 되었다. 이후에도 백양당 출판사 사장인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 P54

방유룡 신부는 1930년 서품(品)을 받고 강원도 춘천성당과 황해도장연, 재령, 해주, 개성 성당을 거쳐 서울 가회동,제기동 성당에서 본당사목자를 지냈으며 김대건 사제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46년, 동양적이며 한국적 영성을 바탕으로 한국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1953년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세우고 이 건물을 지은 것이다. 1955년 무렵이 건물과 주위의 지붕 낮은 집들이 함께 찍힌 사진은 당시 성북천변의그윽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 쌍다리께의 문인촌 중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다. 이태준은 1933년에 초가집을 사서 들어와 이듬해에 이를 헐고 아담한 한옥을 지었다. 이후 1946년 7월 무렵 월북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문학을 꽃피우고 잡지 - P56

『문장(文章)』을 주관하며 생의 전성기를 여기서 보냈다. 특히 이곳은 근원 김용준, 인곡 배정국 등 자칭 ‘호고일당(好古一黨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성북동 근현대 문화예술인 거리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집 앞으로 난 길에는 ‘이태준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연산방 앞에 이르면 화강암 마름모꼴 석축 위의 콩떡 담장에 반듯한 일각대문이 있다. 그 너머로 엇비스듬히 팔작지붕이 보이는데 대문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마당의 오른쪽에 본채, 왼쪽에 별채가 있다. 담장 높이, 마당 넓이, 집 크기의 비례가 아주 쾌적하다. - P57

이태준의 수연산방] 이태준은 1935년에 이 집을간 생의 전성기를 여기서 보냈다. 이곳은 근원 김용준, 인곡 배정국 등 자칭두벌대 축대 위에 올라앉은 본채는 기역자 집으로 돌계단 위로 대청마루가 넓게 열려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사각 돌기둥 위에 번듯한 누마루가 서 있어 이 집의 기품을 자랑한다. 집안 구조를 보면 대청마루 오른쪽으로는 안방과 부엌의 살림 공간이 있고 왼쪽으로 서재를 겸한 건넌방이 있는데 건넌방 툇마루는 방보다 약간 높고 멋스러운 아자(亞)난간을 두르고 있다.
이태준은 이 집을 지을 때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던 자신의 안목을 유감없이 구현했다. 이태준은 목재부터 생목을 쓰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철원의 고가를 해체한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목수도 고급인력을 썼다며 목수들」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 P58

전에 대어 온다. (…)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기뻐하며 바란다.(문장』 1권 8호)


그래서 이 집은 1930년대에 유행한 집장사의 개량 한옥과는 격을 달리한다. 눈 있는 사람은 이 집의 세심한 아름다움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1939년 어느 날 치과의사이자 고미술 애호가인 함석태(咸錫泰)는 이 집을 방문한 인상을 청복반일(淸福田)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원(長, 긴 담장을 앞으로 남서(南西) 정을 널리 이고 남향대청을 동으로 꺾은 누간(樓)의 기역자 형 윤환미(輪奐美, 빛나는 아름다움)는 틀림없이 아담한 이조사기(조선백자) 연적을 확대한 감이다. - P59

이태준은 1946년에 월북하면서 이 집을 두 누이에게 넘겨주었다. 월북문인이라는 ‘빨간딱지‘ 때문에 한동안 ‘이태현‘
의 집으로 이름을 감추었다가1988년에 해금되면서 이름을 되찾아 1998년부터 누님의 외손녀인 조상명 씨가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수연산방 왼쪽에는 행랑채 ‘상심루(賞心樓)‘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고 그 자리엔 새로 지은 건물에 이태준이 만든 문학동인의 이름을 딴 ‘구인회(九人會)라는 이름의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 P60

이태준은 「고완」에서 조선백자의 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첫눈에 화려하지 않은 대신 얼마를 두고 보든물려지지 않고, 물려지지 않으니 정이 들고, 정이 드니 말은 없되 소란한 눈과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선 서로 어루만짐을 받고, 옛날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 영원한 긴 시간 선에 나서 호연(浩然)해 보게 하고,
그러나 저만이 이쪽을 누르는 일 없이 얼마를 바라보는 오직 천진한심경이 남을 뿐이다. - P63

이태준의 이 조선자기 예찬에는 애국적인 정서가 들어 있어 다소 감성적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으나 고미술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역력하다. 이런 시각은 조선도자의 천진성과 무작위성을설파한 우현(又) 고유섭(裕燮)의 ‘조선미술의 특질‘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고유섭은 이태준과 같이 이화여전에 출강했으니 교류가 없었을 리 없고 또 기질상 둘의 민족 정서에 대한 뜻이 통하지 않았을 리없다. - P63

호프, 미국에 오 헨리가 있다면 우리에겐 이태준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빛나는 문학적 위업은 이태준 문학을 연구하는 ‘상허학회‘가일찍부터 활동해왔다는 사실이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이태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밤」 「복덕방」 「가마귀」 「밤길」 「돌다리」 같은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주인공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에 가슴이 아려와 책장을 덮고 한동안 빈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모진 세월을 어처구니없는 아픔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인데 전편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는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패강랭(江冷)」의 "하늘과 물은 함께 저녁놀에 물들어 아득한 장미꽃밭으로 사라져버렸다" 같은 자연에 대한 묘사라든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글쎄요‘ 하고 없는 정을 있는 듯이 웃어 보이니..." 같은 심리 묘사가 나오면 밑줄을 긋게 한다. 특히 이태준의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에서 그 미문(美文)의 진수를볼수 있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달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 (「패강랭」) - P68

이태준의 문학세계를 말할 때면 으레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립해김기림·정지용·박태원·이상 등과 순수예술을 추구한 ‘구인회(九人會)‘
의 핵심 멤버였다가, 8·15해방이 되자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즉 카프와 함께하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뜻밖의 사상의 전환처럼 회자되곤한다.
그러나 이태준의 지향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수문학이 아니라, 문 - P68

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한 카프 방식에 반대하면서도민중적 삶의 운명을 ‘진짜‘ 문학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시대 상황이 돌변하면서 이를 적극 실현할 의지를 굳혔을 뿐이다. 최원식 교수의 표현대로 ‘평지돌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당시 이태준의 마음과 결심은 무엇보다도 「해방전후에 명확히 드러나있다.
그러나 이태준이 1946년 여름 벽초(初) 홍명희(洪)와 월북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족이었다. 그의 문학이 망가진 것은말할 것도 없고 인생 자체가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 P69

나는 이태준의 「만주기행」에서 특별히 크게 감동받은 대목이 있다.
이는 순전히 나의 답사 취향 때문에 눈에 띤것이다. 이태준은 기차가마침내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단둥을 지나자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있었다고 한다.


차는 다시 떠난다. 객은 모두 다시 눕는다. 이곳을 누워서 지나거니!‘ 깨달으니 문득 나의 머리엔 성삼문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세종께서 지금 내가 쓰는 이 한글을 만드실 때 삼문을 시켜 명(明)의한림학사 황찬(黃, 음운학자)에게 음운을 물으러 다니게 하였는데 황학사의 요동적소(所)에를 범왕반십삼도운(凡往返十三度云)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1. 2 왕반도 아니요 범 13도라 하였으니성삼문의 봉사도 끔직한 것이려니와 세종의 그 억세신 경륜에는 오직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 P71

이따금 나는 문장 수업은 어디에서 받았으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면 특별히수업받은 것은 없고 있다면 『문장강화(文章講話)』에서는 아름다운 문체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만주기행」에서는 기행(답사)이란 목적지 못지않게 그곳까지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념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대답한다. - P71

이태준의 수연산방에서 나와 대로변으로 들어서면 바로 인곡(배정국(裵正國)의 ‘승설암(勝雪庵)‘이 나온다. 생몰년 미상의, 우리에게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배정국은 해방공간에서 백양당(白楊堂)이라는출판사를 경영한 출판인으로 그 자신이 서예가이고 고미술 애호가였다.
승설암은 3칸 팔작지붕에 얇은 눈썹지붕의 문간이 붙어 있는 아담한한옥으로 현재는 ‘국화정원‘이라는 게장백반집이 되어 있다. 본래 이집은 건물보다도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원이 일품이었다고 하는데 마침 서예가로 문인화에도 능했던 소전 손재형이 그린 <승설암도>가 있어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감나무를 중앙에 두고 기역자로 돌아간 기와돌담의 모서리에 괴석 - P72

이하나 놓여 있다. 그림에 어려 있는 조용한 문기(文氣)가 그 옛날이집 정원의 아취를 말해주는데 그림 상단에는 이 그림의 내력을 알려주는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을유년(1945년) 청명(淸明, 양력 4월 5일 무렵 날에 승설암의 한정한적한 정원)에 놀러갔는데 상허 이태준 인형(仁兄)께서 나에게 이 즉경도(圖)를 그리라 하여 이로써 한때의 성대한 모임을 기록한다. 함께 모인 사람은 토선(禪), 인곡(仁谷), 모암(慕菴), 심원(園), 수화(樹話), 소전(素 )이다.


토선은 미술 애호가 함석태이고, 인곡은 승설암 주인 배정국이고, 모암은 누군지 미상이지만, 심원은 한국화가 조중현이고, 수화는 그 유명 - P73

한 화가 김환기이며, 소전은 손재형 자신이다. 그림을 보면 어딘지 추사김정희의 〈세한도〉 풍이 느껴진다. 실제로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추사의 ‘광팬‘이다. 이 집 당호인 숭설암은 추사의 여러 아호 중 하나인 승설에서 따온 것이다. - P74

「근원 김용준 전집」에 부쳐근원 김용준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그의 담박한 예술을 떠올리며흐뭇한 마음이 일어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불우한 말년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온다. 20년 전 열화당에서 『근원 김용준 전집(전5권, 2007년에 전6권으로 구성된 증보판 출간)이 출간되었을 때 나는 기꺼이 『동아일보』(2002.
11.6)에 다음과 같은 서평을 기고했다.


누군가 했어도 벌써 했어야만 했던 일이다. 근원 김용준 전집(전5권)은 한 사람의 화가,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로서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자취이자, 불행했던 민족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서려 있는 한 지성의 증언이다.
1988년, 이른바 월북문인들의 저작이 해금되면서 그의 아름다운수필집 『근원수필』이 복간되고, 또 환기미술관에서 ‘수화와 근원‘이라는 이름 아래 그의 작품들이 전시되면서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오던 근원이 이제 전인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 P82

근원 김용준은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우리 근대미술 초기의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미술활동은 화가보다도 이론가로서의 역할이 더 두드러졌다. 1930년대, 근원은 이제 막 서양화에 눈뜬 우리 화단에서 이른바 모더니즘의 기수로 당시로서는 아방가르드라고 할 정도의 비평활동을 벌였고 민족적 서정을 ‘황토색‘이라는 이름으로 담고자 할 때 그것이 소재주의에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높은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길을 명석하게 외치고 나섰다. 이때가 아마도 미술평론가로서 근원의 전성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1940년에 들어서면 근원은 『문장』 동인으로서 주옥 같은 수필을 - P82

기고하고 또 이 잡지의 표지 장정을 맡아 지금 보아도 고아(古雅)한북디자인 작업을 해냈다. 당시 김기림, 정지용, 이태준 같은 문사들이아름다운 수필을 많이 발표한 것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뚜렷한 자취인데 특히 근원의 수필은 문인화가적 편모와 모더니스트다운 세련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뛰어난 문체로 그가 화가인지 문장가인지 알 수없게 했다.
근원은 미술사에도 조예가 깊고 높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8·15광복이 되자 서울미대 교수로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를 저술한것은 단순히 한국미술사 교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미에 대한자신의 미학을 집약적으로 기술한 것이었다. - P83

월북 후 근원은 고구려 벽화무덤인 안악3호분 발굴에 동참하며 미술사가로 활동하여 그의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1958)는 북한 과학원이 펴낸 ‘예술사 연구총서‘ 제1집으로 출간될 정도였다.
또 근원은 <승무> 같은 명작을 발표하면서 화가로서도 붓을 놓지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북한에서 이른바 ‘조선화 논쟁‘이 일어나자근원은 ‘김일성 교시‘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조선화라는 것이 작가적개성과 문인화의 정신을 손상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펴다가 사실상숙청되고 만다.
근원 김용준 연보에 의하면 196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였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쓴 『등나무집』을 보면 근원은 김일성 사진이 실린 신문을 마구 버린 죄로 보위국에 끌려갈 것을 예감하고는 자살로생을 마감한 것으로 되어 있다. - P84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화가와 미술평론가 그리고 문장가로 빛나는 지성과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열심히 살아갔던 근원김용준, 자신의 소신과 기대를 안고 월북하여 학문적 · 예술적 최선을다하지만 끝내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그의 인생편력이 이렇게 전집 5권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남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북에서는 당의 방향에 반대했다는이유로 남과 북 모두에서 금기시했던 그의 저작들이 이제 아름다운장정에 어엿한 전집으로 출간됐다는 사실에서 나는 세월의 고마움과함께 쓸쓸함을 느낀다. - P84

재의 그림을 그렸을 뿐 본격적인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 『문장』의 수많은 표지화와 이태준의 『무서록(無序錄)』같은 표지화들이 오히려 그가 뛰어난 문인화가였음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북한에 가서 그린 <승무가 화가로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중 근원이 벽초 홍명희 선생 회갑에 바친 <홍명희 선생과 김용준〉(1948, 밀알미술관 소장)은 그가 인물화에 얼마나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화다. 벽초 선생의 어른스러운 모습과서재의 분위기를 잡아낸 것도 그렇지만 공손히 절을 올리는 자신을 그린 것이 일품이다. 그림 오른편의 화제 또한 얼마나 단아한 글씨인가. 이그림을 보면서 근원이 왜 이런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았는지 한편으론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P88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건대 근원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그림을 그릴 기분이 나지않아 편안한 문인화만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창작 의욕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존경하는 벽초 홍명희 선생의 회갑 기념화는잘 그려 바쳐야겠다는 충심이 일어나 이런 명작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근원은 수필에서 문장가로서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의근원수필』은 편편이 다 주옥같다. 김용준, 이태준 등 ‘문장‘들은 수필에 대하여 명확한 장르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1941년 『문장』 3권 1호의편집후기인 「여묵(餘墨)」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이번 호부터 종래의 ‘수필(隨筆)‘을 ‘수제(隨題)‘라 고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실려왔던 수필이 ‘에세이 문학‘의 진수와 얼마간 거리가있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문장』이 새로 ‘수제‘와
‘에세이‘의 장르를 각각 구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 P88

이들이 생각한 수필과 수제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둘 다 붓 가는대로 편안히 써내려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수필에는 모름지기 인생이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같은 일상사의 이야기라도 그 속에서 은근히, 또는 알레고리로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때수필의 진가가 나온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기」는 수필문학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이라 한 것은 삼사 년 전에 이군(이태준)이 지어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감나무 이삼 주(株)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떻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주 - P89

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군이 일러 노시사(老舍)라명명해준 것을 별로 삭여볼 여지도 없이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원래 나는 노경(老境)이란 경지를 퍽 좋아한다. (・・・) 수법이 원숙해진 분들이 흔히 노(老)자를 붙여서, 가령 노석도인(道人)이라 한다든지 자하노인(紫霞老人)이라 하는 것을 볼 때는 진실로 무엇으로써도 비유하기 어려운 유장하고 함축있는 맛을 느끼게 된다. 노인이 자칭 왈 노(老)라 하는 데는 조금도 어색해 보이거나 과장해 보이는 법이 없고, 오히려 겸양하고 넉넉한 맛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아무튼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모옥(茅屋)을 노시산방이라 불러오는 만큼 뜰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 P90

특히 신인 추천제를 두어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 시조는 이병기가 맡아 시에서 박두진·박목월·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킨 것은너무도 유명한 사실이고, 소설에서는 임옥인·지하련, 시조에서는 김상옥·이호우 등을 배출했다.
또 국어국문학 논문으로는 이희승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송석하의 봉산가면극각본(鳳山假面劇本)」, 조윤제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와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 손진태의 격(巫)의 신가(神歌)」, 양주동의 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 최현배의 「한글의 비교 연구」와 「춘향전집」, 이병기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 등이 실렸다. 이태준의 그 유명한 『문장강화』 창간호부터 총 9회에 걸쳐 연재한 것이다. - P94

실상이 이러하니 문장 전26호는 우리 근대문학과 국학의 보석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이 점을 생각할 때 수연산방 별채의 북카페 이름은 ‘구인회‘보다 ‘문장‘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 전26호는 1981년에 영인본이 나왔다. 나는 이를 구입해 이날이때까지 심심하면 한 권씩 꺼내 소설과 수필, 평론을 읽곤 한다. 그런중 각 권의 맨 마지막 면의 편집후기인 여묵」을 보면 매번 책을 펴낼 때마다의 어려움과 보람이 생생하게 실려 있다. - P95

또 근원은 노시산방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1947년 봄 수향산방에 들렀다. 그날은 마침 부처님오신날이었는데 수화가 부처님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수화 소노인(老人) 가부좌상>을 그렸다. 당시 불과34세이었던 수화에게서 ‘애늙은이‘ 같은 듬직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그림에는 근원의 수화에 대한 미더움과 애틋한 애정이 그렇게 담겨 있다. 수화가 이렇게 근원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인생과 예술의 큰 복이었다. - P100

수화가 『문장』의 문인들과 교류한 것은 그가 우리 근현대미술의 최고가는 거장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수화 예술의 모더니즘은 그가 미술대 학생 때부터 추구하던 생래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에 서려 있는 문학적 서정성은 『문장』 문인들과의 교감에서 나온 것이다. 수화의표지 그림과 장정 들은 ‘문학이 미술을 만났을 때 얻어내는 시너지 효과에 그치지지 않고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나오는 서정적이면서도이지적인 예술세계로 나아가게 했다.
수화가 근원에게서 받은 또 하나의 큰 감화는 우리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과 사랑이었다. 근원을 비롯한 ‘호고일당들의 상고 취미는 단순한 골동 취미를 넘어 우리 민족혼이 살아 있는 한국미의 발견이었다. 수화는 특히 조선시대 백자항아리에서 서구미술과 미학에서 볼수 없는 새로운 조형세계를 발견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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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 평 (605제곱킬로미터)이나 된다(참고로 제주도는 약 6억 평).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왕조의 멸망 이후 근현대에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넓은들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테네, 로마 같은 고대도시들과는사뭇 다른 지형적 이점이다. 특히 한강 남쪽의 드넓은 강남 지역으로 인구가 대이동하면서 서울의 넓이와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런 이유로 서울 사대문 밖의 역사문화 유적은 대부분 양주군·광주군·고양군·양천현 등 옛 조선시대 경기도 군현(郡縣)이 그대로 편입된것이어서 ‘서울적(的)‘이지 않은 것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현릉,
순조의 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 이왕릉들의 답사기를 쓰자면 미상불 별도의 한 - P5

권이 될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대표적인 예로 강남구의 선릉과 정릉을 소개했다. 특히 이 두 능은 조선 왕릉 중 임진왜란 때 일본인 ‘범릉적(犯陵賊)‘에게 도굴되는 아픔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각별한 해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왕릉의 답사 때는 여기에 실린 왕릉의 기본 구조에 대한 해설이 나름의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강남의 봉은사는 본래 한강 뚝섬 너머 경기도 광주에 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선종종찰(禪宗宗刹)‘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는 고찰이다. 강남 개발로 주변의 자연 경관을 다 잃었지만 지금도 도심 속의녹지 공간으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 P6

특히 봉은사는 문정왕후가 보우 스님을 앞세워 불교를 중흥시킬때 승려들의 과거 시험인 승과가 치러지던 사찰이다. 이때 제1회에 서산대사 휴정, 제4회에 사명당 유정이 배출되었고 두 분이 모두 봉은사의주지를 역임했던 명찰이다. 그뿐 아니라 많은 불교 문화재가 지금도전해지고 있고 추사 김정희의 절필(絶筆)이자 명작인 <판전>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서울의 대표적인 사찰로 삼아 답사기에 쓴 것이다.
강서구 가양동은 본래 경기도 양천현으로 지금도 양천향교와 소악루가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동의보감』의 저자인 구암 허준의 관향인 이곳에는 ‘허준박물관‘이 있고, 겸재 정선이 노년에 5년간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경교명승첩〉을 비롯한 많은 명작들을 남겨 ‘겸재정선미술관‘이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의 의성(聖)인 허준과 화성(聖)인 정선의 기념관이 있으니 답사처로 빼놓을 수 없었다. 특히 이곳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통해 그 옛날의 한강 풍광을 복원해볼 수 있는 아주 각별한 답사처다. - P6

성북동은 여느 유적지와 다른 근현대사 답사처다. 이곳은 근대사회로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형성된 동네로 사대문 안의 북촌, 서촌과는 또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밖 10리 지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屯田)이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때 둔전 주민들이비단 표백과 메주 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집 주위에 복숭아를 많이심어 이곳은 ‘북둔도화(北屯桃花)‘라는 명승의 이름을 얻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다.
1930년대 들어 경성(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일제가 택지 개발을적극 추진할 때 성북동은 신흥 주택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간송 전형필의 북단장,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조지훈의 방우산장,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 수화 김환기의 수향산방 등이 있었다. - P7

한국전쟁 이후에도 시인 김광섭, 작곡가 윤이상, 화가 김기창과 서세옥, 박물관장 최순우 등이 들어와 살면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를 형성했다. 거기에다 백석 시인의 영원한 사랑 김자야의 요정 대원각이 법정 스님의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고, 간송미술관과 함께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성북구립미술관이 들어서면서 품격 높은 문화예술의 동네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성곽 비탈진 곳으로는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형성한 북정마을이 있고 1970년대 삼청터널이 뚫린 이후로는 각국 대사 - P7

저들과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어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것을 느낄 수있는 곳이다. 나는 여기에 살았던 문화예술인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우리 근현대 예술의 향기를 담아보고자 성북동 답사기를세장에 걸쳐 실었다.

‘망우리 별곡‘은 망우리 공동묘지 답사기다. 망우리공동묘지 역시1930년대에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성 근교이태원, 미아리, 노고산, 신사동(은평구 고택골) 등에 있던 기존의 공동묘지들을 멀리이장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40년간 4만 7,700여 기가 들어섰다. 1973년에 매장이 종료되고 이후 이장과 폐묘만 허용하면서 현재 약 7천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 P8

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방정환, 죽산조봉암, 설산 장덕수, 종두법의 지석영, 독립운동가 유상규, 소설가 계용묵,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조각가 권진규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락 등많은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할때 무연고 묘지의 시신을 화장하여 합동으로 모신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에는 유관순 열사의 넋이 들어 있기도 하다.
망우리공동묘지는 폐장된 이후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이곳을 역사문화 위인들을 기리는 묘원공원으로가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고, 독립유공자 여덟 분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호(1~8)로 일괄 지정되었다. 금년(2022) 4월 방문자 센터 ‘중랑망우공간‘이 개관하면서 이름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었다.
공동묘지라는 어두운 이미지가 역사문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 P8

다.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는 작곡가 쇼팽,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가수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것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우산에 위치한 우리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역사인물들의 넋이 그렇게 서려 있는 귀중한 공원묘지다.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이 모든 유적들을 이야기하면서 서울 답사기를 엮어갔다. - P9

이번에 서울 답사기 두 권을 펴냄으로써 서울편은 4권으로 완결되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은 총 12권이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 나온 때가 1993년이었으니 그로부터 장장 30년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가 이제 12권째를 펴냈는데도 아직 수많은 답사처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답사기 시리즈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장 여기에서 끝내지 못하는 것은 경주남산, 남도의 산사, 경상도의 가야고분 등 시리즈 전체로 보았을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유적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마침표를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다음 답사기는 ‘국토박물관 순례‘라는 제목으로 그간 다루지않은 유적들을 시대순으로 펴내고 이 시리즈를 끝맺을 계획이다. 첫 번째 꼭지는 ‘전곡리구석기시대 유적‘이고, 마지막 장은 ‘독도‘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
2022년 10월유홍준 - P9

성북동은 한양도성 북쪽 성곽과 맞붙어 있는 산동네로 북악산(백악산)구준봉에서 발원한 성북천의 산자락에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집들이 무리 지어 들어서 있다. 타동네 사람들은 성북동이라고 하면 번듯한 외국대사관저와 높직한 축대 위의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부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이 전화를 걸 때 "여기는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 집들은 1970년 12월 30일,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꿩의 바다‘라는 길을 중심으로 들어선 신흥 저택들이다. 성북동에는 이곳 외에도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묵은 동네들이 따로 있다. - P13

삼선교에서 천변길을 따라 들어오는 막힌 골짜기로 한양도성 축조 당시엔 자연 그대로의 산림녹지였다. 그러다 약 300년전, 영조시대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둔전이란 병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주둔하는 군사제도로, 처음에는 이곳에 30여 가구의 둔전 주민들이 베와 모시를 표백하는 마전 일을 하면서 살았다.
둔전 주민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유실수로 복숭아를 많이 심어 이곳은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는 꽃동네가 되었다. 장안에 이 소문이 퍼져봄철이면 많은 문인 묵객들이 유람을 오는 한양의 대표적인 명승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마전골의 북둔도화(北屯桃花)‘라고 예찬했다.
그리고 조선 말기가 되면서 이 풍광 수려한 골짜기에 권세가들의 별장과 별들이 곳곳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 성북동 별서‘와 학교법인보인학원을 세운 이종석의 ‘일관정‘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오로정‘
등 10여 채의 별장이 있었다. - P14

그후에도 성북동은 여전히 도심과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여서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친일문학론』의 임종국, 화가 윤중식, 조각가 송영수, 한국화가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집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영원한 박물관장인 혜곡 최순우의 ‘최순우 옛집‘, 최근(2020)에 타계한 한국화가 산정서세옥의 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성북동은 시내와 가깝고 자연 풍광이 살아 있다는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어 간송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변종 - P16

하미술관 같은 유수한 사립 미술관들이 들어서 있고, 백석 시인의 영원한 연인인 김자야가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법정 스님게 부탁해 아름다운 절집으로 다시 탄생시킨 ‘길상사‘도 있다. 이리하여2013년, 성북동은 서울시 최초로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성북천은 복개되어 삼선교에서 삼청터널로 이어지는 성북동길이 되었다. 이 대로변에 일찍부터 기사식당 쌍다리 돼지불백을 비롯해게장백반의 국화정원, 국밥집 마전터, 국시집, 누룽지백숙 등 고만고만한단품요리 맛집들이 들어섰고 근래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양식당들이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이곳은 마이카 시대의 유람객들이 편하게 들렀다가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성북동은 이처럼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대표적인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어 우리 같은 답사객들의 발길을 부르고 있다. - P17

정조 8년(1784) 봄, 당시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던 65세의 채제공은아들 채홍원을 데리고 벗과 친지 5~6명과 도성 안팎의 경치 좋은 곳을노닐고는 네 편의 기행문을 썼는데,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유저동기(遊北渚洞記)』라는 성북동 유람기다.


북성을 돌아 몇 리안 되어 골짜기가 입을 벌리듯 열려 있다. 여기가 이른바 북저동이라는 곳이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니 제단이 하나 있는데 (・・・) 여기서 춘삼월에 선장에게 제사 지낸다고 한다. 백 보쯤 더 가니 (…) 다리 아래로 여러 물길이 모이고 있어 물소리가 우렁찼다. (・・・) 복사꽃 무더기가 비단으로 장막을 친 듯 물가 이편 저편이온통 붉었다. (…)또 다리를 건너니어영둔(屯, 성북)이 나왔다. 정원과 건물이제법 넉넉해 보였다. 둔사 밖에는 작은 연못에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 꽃이 물에 거꾸로 비쳐 꽃 그림자가 아물거리고 줄기가 구부러져암벽과 맞닿아 활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 병풍이나 장막 같았다. (・・) - P27

혹 가다가 혹 앉아 있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창호과 처마의 모서리가 언뜻언뜻 울타리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도성의 인사들은 고관에서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 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수레와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노랫소리 번갈아 일어나며 사이사이 생황과 퉁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채제공은 유흥객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참지 못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 아래에 부들자리를 펴고 나란히 앉아 성안에서 가져온 떡과 밥을 먹은 뒤 신시(오후 3~5시) 무렵 다시 - P27

성북둔으로 와서 잠을 잤다고 하며 유람의 소회를 이렇게 말했다.


나와 더불어 세 사람이 각각 시 한 편씩을 지었다. 싸늘한 산기운을머금고 석양을 마주하니 (・・・) 낮에 놀던 사람들은 돌아가고 흰 달만이 텅 빈 하늘에 홀로 떠 있었다. 연못 위에 호젓하게 앉아 있노라니 잠자는 것도 잊었다. 달은 색이고 꽃은 향일 뿐이어서 눈으로 보고 코로맡아도 무엇이 많고 적은지 알지 못했다. (・・・) 잠자리가 향기의 나라에 있는 것만 같았다. - P28

별장과 별서는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庭園), 정확히 말해서 원림(園林)으로 꾸며져 있다.
정원과 원림은 개념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원과 원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원은 주택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수려한 곳에 살림집 · 서재 · 정자 등 건물을 적절한 곳에 배치한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정반대인 셈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별장·별서가 발달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었는데 북둔도화의 성북동에도 자연히 문인 묵객과권세가들이 경영하는 별장 별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유득공(柳得恭)의 ‘북 비롯해 ‘오로‘ ‘성북정‘ ‘백운정사‘ 등초당‘을이 이곳에 있었다. - P29

성북동 삼거리 선잠단에서 길상사로 올라가는 선로에 위치한 서울성북동 별서는 약 4,360평(주변 경관을 포함하면 약 3만 평) 규모로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급한 물살이 하나로 합쳐지는 골짜기로 초입 벼랑에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라는 글자가 굳센 글씨체로 크게 새겨져 있다.
여기서 계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청산일조‘(靑山壹條, 푸른 산한 줄기)라는 멋진 전서체의 암각 글씨가 새겨져 있고 이내 영벽지(影 - P32

池)라는 아름다운 인공 연못이 나온다. 영벽지란 푸른빛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계곡을 원림으로 경영한 이별서의 핵심 공간으로 모든건조물이 여기를 중심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다. 보길도 원림의 세연정,
소쇄원 계곡의 광풍에 해당하는 곳이다.
영벽지 서쪽으로는 연못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낮은 기와돌담으로 감싸인 사랑채와 안채가 있고, 동쪽의 집채만 한 바위 위로는원림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다. 그리고 맨 위쪽에는 송석정(石亭)이라는 정면 7칸, 측면2칸의 제법 큰 누각형 건물이 있다. 이것이 서울 성북동 별서의 기본 구조다.
영벽지에는 아담한 초서체로 ‘영벽지(影池)‘라고 깊게 새겨져 있고그 아래에 단정한 해서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얕게 새겨져 있다. - P33

장빙가는 고드름집이라는 뜻인데 그 옆에는 추사의 또 다른 호인 ‘완당(堂)‘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어 김정희의 글씨임을 말해주고 있다. 뜻도 그렇고 추사체의 파격미를 보여주는 멋진 글씨인데 이것이 추사 당년 그의 글씨인지, 후대에 그의 글씨를 빌려와 새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장병가를 장외가外家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벽지에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이라는 인공 조산이 있으며 주위에는수령이 200~300년 되는 느티나무·소나무·참나무·단풍나무. 다래나무.엄나무·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철마다 다른 빛으로 그윽한 풍광을 자아낸다. 봄철 신록이연두빛으로 피어날 때도 아름답지만특히 늦가을 단풍잎들이 영벽지 물 위에 수북이 쌓여 있을 때, 그리고얼음장 위에 흰 눈이 쌓이고 벼랑에 고드름이 달려 있을 때는 가히 환상적이다. - P35

망국의 왕손으로서 수난받은 일생이었으나, 그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은 기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의친왕 시절 성북동 별서의 일은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동아일보』 1927년 12월 23일자에는 ‘이강공 별저 화재‘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20일 오후 12시 경에 시외 숭인면 성북리 이강공 전하 별저에 불이나서 오전 1시까지에 안채 열네 간이 전소하고 부속 건물 한 채가 반소하였는데 원인은 온돌불을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며 손해는 건물2,000원에 가구 100원, 합이 2,100원이라더라. - P39

이외에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백양당 출판사 사장인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 등등이 뒤이어 들어왔으니 성북동은 과연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산실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문예의 향기와 인문정신이 살아 있는 동네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곳으로 유람도 아니고, 피크닉도 아니고, 답사를 떠난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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