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당시 일본은 당면한 위협 대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인 일은 부농 박멸 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위협은 소련 내 중국계 소수 민족을,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소련철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구실도 되었다. 일본의 간첩 행위 역시 약17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소련인 전체를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고, 따라서 한국계 소련인은 일본과 관련된 일종의 집단 이주 민족이 되었다. 중국 서부 지역인 신장에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성차이는 직접 테러를 감행해 수천 명이 죽게 만들었다. 중국 북쪽의 몽골인민공화국은 1924년 창설되었을 때부터 계속 소비에트의 위성 국가였다. 소련 군대는 1937년 동맹인 몽골에 진입했고, 몽골 당국은1937~1938년에 직접 테러를 저질러 2만474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을 겨냥한 행위였다.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P 189, 190




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1930년에 집단화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와 여러 외세 사이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자들의 포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안에있는 협잡꾼, 간첩, 파괴 공작원과 살인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정책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역사의 정당한 흐름을 느리게 하려는 반동 국가들의 책임이었다. 5개년 계획의 결함처럼보이는 일은 외세 간섭의 결과였다. 따라서 가장 심한 죄업은 반역자들의 몫이었고, 비난의 대상은 언제나 바르샤바, 도쿄, 베를린, 런던또는 파리였다. - P137

스탈린은 스페인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즉시 예조프를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가 보기에 정치재판과 인민전선은 같은 궤를 타고 있었다. 인민 전선은 모스크바의 전선이 바뀔 때마다친구와 적을 다르게 정의했다. 비공산주의정치세력에 제공되는 모든 기회가 그렇듯이, 이것은 본국과 외국 모두에서 상당한 경계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스탈린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의 무장 파시즘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외세에 대한 전쟁이면서, 동시에 좌파및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투쟁이었다. 그는 간첩과 배신자를 충분히색출해 사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페인 정부를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국가인 동시에 미래상이고, 한 나라의 정치체제이자 국제주의자의 이데올로기였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언제나 국내 정책이었고, 소련의 국내 정책은 언제나 대외 정책이었다. 이는 소련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 P142

오웰의 생각처럼, 소련과 유럽 파시즘의 공개적인 충돌은 본국에서과거의 반대자와 잠재적 반대자를 피로 숙청하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소련의 이 작전은 국내의 숙청 재판 시작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와마드리드에서도 개시되었다. 스페인 파시즘과의 부딪침은 소련에서의경계 강화를 정당화했고, 소련에서의 숙청은 스페인에서의 경계 강화를 정당화했다. 스페인 내전은 인민 전선이 아무리 ‘우리는 다수의 연대 세력이다‘라고 선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사회주의 반대 세력이라고 믿는 이들을 스탈린이 막무가내로 숙청하기로 마음먹었음 - P142

을 드러냈다. 오웰은 공산주의자들이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모스크바에 신세를 진 스페인 정부가 트로츠키파 정당을 금지하는 모습을 봤다.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충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머나먼 도시에서 벌어진 이 추잡한 싸움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스탈린은 바르셀로나가 제5열 파시스트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지리적 특성과 지역 정치 현실에 아랑곳없는 스탈린주의자의 융통성 없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또한 일부 서구 좌파와 민주주의자에게 파시즘 외에도 적이 있음을 가르쳐준, 오웰의 전쟁 회고록 카탈로니아 찬가』에 등장하는 감동적인 장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 P143

비슷한 시기인 1934~1937년, 히틀러 역시 폭력을 이용해 당, 경찰과 군대라는 권력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도 스탈린처럼권력 재창출 수단을 확보했고, 자신을 돕던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사람 수는 훨씬 적었지만, 히틀러의 숙청은 독일 법률이 지도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를 자신의발아래 둔 스탈린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신이 선호하는 준군사 조직인 친위대의 발전을 위해 테러를 명령하고, 다양한 독일 경찰 병력에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숙청을 이용해 소련 군대를 위협했지만,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한 나치 당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독일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숙청의 가장 중요한 표적은 나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의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 P144

부농이란 스탈린 혁명에서, 집단화와 기근에서,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굴라크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농민들이었다. 사회 계층으로서의 부농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용어는 그 자체에 정치적 함의가 담긴 분류의 산물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에서 ‘부농을 청산‘하려는 시도는 대량학살로 이어졌지만, 계급이 파괴되기는커녕 오명과 억압을극복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계급을 이루었다. 집단화 기간에 추방당하거나 도망친 수백만 명은 부농으로 간주된 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이러한 계급 분류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소련 지도부는 혁명 그 자체가 새로운 적을 만든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1937년 2월과 3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 총회에서는 다수의 연사가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도출했다. "외국 분자들이 도시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를 더럽히고 있다. 부농은 소련 체제의 "중대한 적"이다.  - P148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의 저항이 많았던 우크라이나는 살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레플렙스키는 명령 00447호를 확대해, 기근 이후 소련의 영토 보전에 위협적인 존재로 비치던 소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도 대상에 포함시켰다. 우크라이나에서 약 4만530명이 민족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1933년 독일에 식량 원조를 요청했던 우크라이나인들도 체포되었다. 1937년 12월 (이미 두 배로 늘어나 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할당량이 달성되자, 레플렙스키는 ‘더 많은 할당량을 바랍니다‘라고 보고했다. 1938년 2월, 예조는 이공화국의 총살 할당량에 2만3650명을 추가했다. 종합해보면, 1937년과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 위원들은 부농 박멸 작전에서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7만868명을 총살했다. 수용소행 대비 총살의 비율은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특히 높았다. 1~8월까지 약 3만5563명이 사살되었고, 단 830명만이 수용소로 갔다.  - P156

스탈린은 자신의 정책을 대안이 없는 유일한 해답인 듯 내비쳤지만, 그는 지도자들이 향후 계획을 논의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체할 수있게 했던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있었다(그리고 다른 어떤 대체 이념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관한 과학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의 자연은 경제였고 연구 대상은 사회 계급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레닌주의적인 해석에서조차, 인간은 자신의 계급 배경 때문에 혁명에 저항한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에서는 뭔가가달라지고 있었다. 평범한 국가 안보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자의 언어와 융합해서, 영영 다른 언어로 바뀌어버렸다. 정치재판에서 고발당한 사람들은 외세 때문에 소련을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무리간접적이고 약하게 표현해도, 고발문에 따르면 그들의 죄목에는 계급투쟁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본국을 에워싼 대표적인 제국주의국가들을 돕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 P158

1936~1938년의 나치 테러는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는데, 개인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처벌하는 대신 정치적으로규정된 사회 집단을 ‘그 존재 자체‘ 때문에 처벌하는 식이었다. 나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집단은 ‘반사회적 집단‘이었다. 그 뜻은 나치의 세계관에 저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때로는 정말로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실체는? 동성애자,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로 의심되는 사람, 또는 일할 의지가 없는 이들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독일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나치 세계관의 기본 전제들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도 여기에 속했다. - P159

이 시기 소련의 테러는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비할 데 없이 치명적이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소련에서 명령 00447호 때문에발생한, 18개월 동안 약 40만 명이 처형당하는 일에 비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1937년과 1938년, 나치 독일에서는 267명이 처형되었지만, 소련에서는 부농 박멸 작전에서만 37만8326명이 처형당했다. 마찬가지로, 인구 규모 차이를 고려하면, 소련 국민이 부농 박멸 작전에 - P160

서 처형당할 확률은 나치 독일에서 독일 국민이 범죄자로 몰려 사형당할 확률의 700배에 달했다.

지도부 숙청과 주요 기관 장악이 끝나자,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1937년과 1938년에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부농 박멸 작전은 대공포 시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급 전쟁으로 간주되거나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련은 계급으로서의 적을죽이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적도 죽이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적에 대한사살작전을 시작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 P161

소수 민족이라면 "무릎을 꿇리고 미친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 이것은 나치 친위대 장교가 아닌,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민족 박멸 작전‘을 실행하던 공산당 지도자의 말이었다. 1937년과 1938년에는 소련인 25만 명이 민족 때문에 총살당했다. 5개년 계획은 소련이 사회주의하에서 민족 문화를 꽃피우게 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소련은 그 어느 곳보다 민족적 박해가 심한 곳이었다. 인민전선조차 소련을 관용의 고향으로 묘사했지만, 스탈린은 소련을 구성하는 민족 가운데 다수를 대량 살육하라고 지시했다. 1930년대 후반기에 가장 박해받은 유럽의 소수 민족은 주로 이민 때문에 수가 줄어든) 약 400만 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아니라, (주로 처형 때문에 수가 줄어든) 60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계 소련인이었다.‘
스탈린은 민족 대학살의 선구자였고, 폴란드계는 소련의 소수 민 - P165

족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피해자였다. 부농처럼, 폴란드계 소수 민족도 집단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그에 대한 근거는1933년 기금 기간에 창안되어, 1937년과 1938년 대공포 시대에 적용되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회 대표인 프세볼로트 발리츠키는 대규모 기아가 그가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 부른 간첩 도당의 도발이라고 설명했다. 발리츠키에 의하면 이 ‘폴란드 군사 조직‘은우크라이나 공산당에 침투한 다음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수확 과정을 훼방놓도록 후원했고, 굶어 죽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시체를 반소련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말하는 ‘우크라이나 군사 조직‘ 역시 똑같이 악랄한 행위를 한, 기근에 대한 책임을 함께 걸머질 도플갱어가 되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영감을 얻은 발명품이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령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그 어디에도 폴란드 군사 조직이란 없었다.  - P166

1933년 여름, 발리츠키는 ‘폴란드 군사 조직‘이 소련에 무수한 간첩을 보냈고, 이들이 조국 폴란드에서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공산주의자 흉내를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는 불법이었고,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당연한 피란처라 생각했다.
폴란드 군사 정보부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을 활용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으로 넘어갔던 대부분의 폴란드 좌파는 정치적 망명자일 뿐이었다. 소련 내 폴란드 정치 망명자 체포는 1933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극작가인 비톨트 반두르스키는 1933년8월에 투옥당했고, 폴란드 군사 조직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강요당했다. 폴란드 공산주의와 폴란드 간첩 간의 이러한 연결 고리가 심문 절차에서 문서화되면서, 더 많은 소련 내 폴란드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예지 소하츠키는 1933년 모스크바 감옥에서 투신 자살하기 전에 자신의 피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마지막까지 당에 충성하다" - P167

1937년 8월 11일,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 군사 조직의 간첩 연결망 완전 청산"을 수행하도록 하는 ‘명령 00485호‘를 공표했다. 명령 00485호는 부농 박멸 작전 개시 직후에 공표되었지만, 훨씬 더 과격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계급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적을노린 명령 00447호와는 달리, 00485호는 특정 민족 집단을 국가의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작전 효과를 위해부농 박멸 명령 또한 범죄자까지 타깃으로 지정했고, 다양한 유형의민족주의자와 정적들까지 포함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명령의 계급 분석은 불분명했다. 집단으로서의 부농은 최소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화 계획에 대한 소련 국가들의 적대감은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인민에 대한 동지애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전제를 폐기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 P171

어떻게 태어나 이제껏 살았느냐가 처형 사유였는데, 폴란드 문화나가톨릭교에 대한 호의는 국가 간 첩보활동에 동참했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기껏 경범죄 정도의 잘못 때문에 중형을 받아야 했다.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수용소 10년형을 받거나, 설탕을 충분히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당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근거로도 보고서를 작성하고, 앨범에 기록하고, 서명하고, 선고하고, 총살해 시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 P175

레닌그라드 주민과 폴란드계는 당시 이렇게 많은 이가 처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저 이른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죄수호송차, ‘영혼 파괴자‘나 ‘검은 까마귀‘라 불리던 감옥 트럭을 생애 마지막으로) 보게 될까 두려워할 뿐이었다. 어느 폴란드계의 기억에따르면, 사람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 검은 까마귀에게 물려갈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산업화와 집단화 때문에 폴란드계는 방대한 나라의 곳곳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제 그들은 공장, 막사나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수많은 사례 중 하나를들어보자면, 모스크바 서쪽 근교에 있는 쿤체보의 소박한 목조 주택에서 숙련공 여럿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폴란드계 기계공과 금속공학자도 있었다. 두 사람은 1938년 1월 18일과 1938년 2월 2일에각각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군체보의 세 번째 희생자인 예브게니야바부시키나는 폴란드계도 아니었다. 그녀는 충성심 강하고 전도유망한 유기 화학자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폴란드 외교관의 세탁부였다는 이유로함께 처형당했다. - P178

폴란드 박멸 작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곳에는 폴란드계 소련인 60만 명 중 약 70퍼센트가 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 박멸 작전으로 5만5928명이 체포되고, 그중4만7327명이 사살되었다. 1937년과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다른민족 대비 폴란드계의 체포 확률은 12배에 달했다. 우크라이나를 휩쓸었던 기근이 ‘폴란드 군사 조직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발리츠키는 수년 동안 폴란드인을 박해했고, 그의 옛 부관이자 후임자인 이즈라일 레플렙스키는 발리츠키가 제거된 뒤부터 늘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소용없었다. 그 역시 1938년 4월 체포되어 우크라이나에서의 폴란드 박멸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처형당하고 말았으니까. (후임자인 A. I. 우스펜스키는 1938년9월 스스로 실종되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결국 발각당해 처형되었다.) - P181

1937년 당시 일본은 당면한 위협 대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인 일은 부농 박멸 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위협은 소련 내 중국계 소수 민족을,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소련철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구실도 되었다. 일본의 간첩 행위 역시 약17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소련인 전체를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고, 따라서 한국계 소련인은 일본과 관련된 일종의 집단 이주 민족 - P189

이 되었다. 중국 서부 지역인 신장에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성차이는 직접 테러를 감행해 수천 명이 죽게 만들었다. 중국 북쪽의 몽골인민공화국은 1924년 창설되었을 때부터 계속 소비에트의 위성 국가였다. 소련 군대는 1937년 동맹인 몽골에 진입했고, 몽골 당국은1937~1938년에 직접 테러를 저질러 2만474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을 겨냥한 행위였다.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 P190

대공포는 곧 3차 소비에트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1917년을기점으로 정치 체제에 변화를 불러왔고, 집단화가 193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면, 1937~1938년의 대공포 시대는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심문을 통해서만 적의 정체를밝힐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만들었다. 외국 간첩과 국내음모에 관한 그의 판타지는 고문실마다 들렸고, 심문 조서마다 적혔다. 소련 국민으로서 1930년대 후반의 상위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말하려면, 그의 판타지의 등장인물이 되어야 했다. 스탈린의 더 큰
‘이야기‘를 위해, 소련 국민 개인의 ‘이야기(삶)‘는 종종 끝장나야 했다. - P193

그러나 농민과 노동자 집단을 단순한 숫자로 바꿔버리는 일은 스탈린의 기분을 돋워주었고, 대공포 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스탈린의 권력을 굳건히 했다(당연하게도), 1938년 11월, 대규모 작전의중단을 명령하면서, 스탈린은 내무인민위원회 대표를 또다시 교체했다.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의 후임자였는데, 예조프는 그 뒤 처형당하고 만다. 수많은 내무인민위원회 최고 간부들도 월권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했는데, 사실 이러한 숙청은 스탈린 정책의 핵심이었다. 야고다를 예조프로, 예조프를 베리야로 교체함으로써, 스탈린은 자신이 안보 기관의 정점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로 당을 견제하고 당으로 내무인민위원회를 견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소련의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폭군이 자신의 궁궐에서 정치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권력을 증명하는 폭군정치가 되었다. - P193

소련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억압 기구를 이용해 민족 살육 작전을수행한다민족 국가였다. 내무인민위원회가 소수 민족을 죽이고 있던당시, 내무인민위원회 핵심 장교 대부분은 소수 민족이었다. 1937년과 1938년 상당수가 유대계, 라트비아, 폴란드계이거나 독일계였던내무인민위원회 간부들은 히틀러와 나치 친위대가 (당시까지) 시도한모든 행위를 뛰어넘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학살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위와 목숨을 지키려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들은 국제주의(초민족주의)라는 윤리를 만들었고이는 일부 간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대공포 시대가계속되면서 그들도 속속 처형당했고, 대부분 러시아계로 교체되었다.
이즈라일 레플렙스키, 레프 라이흐만과 보리스 베르만처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폴란드 박멸 작전을 실행한 유대인 장교도 체포 후 처형당했다. 이것은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었다. 대공포 시대의대량 살인이 시작되었을 때, 고위 내무인민위원회 장교 약 3분의 1은 유대계였다.  - P194

대공포 시대가끝날 무렵,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과다 비율을 차지한 소수 민족은 스탈린이 그 가운데 하나인 조지아계뿐이었다.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정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계급투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재판에서 내려진 혐의처럼 소련으로 이주한 민족이 소련의 배신자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경제 체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출신 민족에 따라 외국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 P195

대공포 시대에 소련 지도부는 독일에 살던 유대인의 2배에 달하는 소련 국민을 처형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를 제외하면, 히틀러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러한 대량 처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전쟁 이전의 독일에서는 누구도 이런 일을 실행에 옮기지않았다. 제국 수정의 밤 이후에야, 유대인은 비로소 대규모로 독일의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나마도 학살이 목적은 아니었고, 당시 히틀러는 유대계 독일인들을 위협해 나라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이 시기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유대인 2만6000명은 대부분 얼마 지나지않아 석방되었다. 1938년 후반에서 1939년까지 1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독일을 떠났다. - P199

또한 히틀러는 독일을 재무장하는 한편 전쟁 없이 최대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시민 600만명과 막대한 경화를 제공했다. 뮌헨 회담은 히틀러에게 시민 300만명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수산업 대부분을 선사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없애버렸고, 그에 따라 히틀러의 목적이 독일 민족에만 국한된다는 환상은 모조리 사라졌다. 체코 영토는 ‘보호국‘으로 독일 제국에 추가되었고, 슬로바키아는 나치의 감독을 받는 허울뿐인 독립국이 되었다. 3월 21일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합의를 강요했지만이번에도 거부당했다. 3월 25일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에게 폴란드 침공 준비를 명했다. - P203

거의 곧바로, 두 체제는 폴란드 파괴에 대한 열망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끌어들여 소련과 싸우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자, 폴란드에 대한 나치와 소련의 말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히틀러는 폴란드란 베르사유 조약이 낳은 ‘비현실적인 창조물‘이라 했고, 몰로토프도 그 조약의 ‘추악한 후손‘이라고 규정했다. 공식적으로는,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협약은 단순한 불가침 조약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동유럽내 나치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을 정하는 비밀 의정서에도 합의했는데, 이 영향권에는 아직 독립국이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 P205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루마니아가 들어가 있었다. 역설적인 사실은 폴란드가 불가침 조약이라는 명목 아래 독일과 비밀 계약을 맺었다는거짓 주장을 바탕으로, 소련 시민 10만 명 이상을 죽인 사건을 스탈린이 바로 얼마 전에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폴란드 박멸 작전은 독일-폴란드 공격의 대응책으로 설명되었다. 그러고는 이제 소련은 독일과함께 폴란드를 공격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합병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얻은 병력 및 무기를 이용해 폴란드 북쪽,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히틀러가 마침내 자신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 P206

1939년 8월과 9월, 스탈린은 동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도까지 보고 있었다. 그는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입지를 개선할 기회를찾아냈다. 이제 스탈린은 서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와 함께 자국을침공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경우, 제2전선을 염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련은 동맹국 몽골과 함께) 1939년 8월 20일 (몽골과 만주국 사이에 있는 분쟁 국경 지대 내의 (괴뢰 만주국 병력을 포함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1939년 8월 23일, 베를린과의 관계를 회복한 스탈린의 정책은 도쿄를 노린 정책이기도 했다. 소련의 공격이 있고 사흘 뒤에 체결된 독일과 소련 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독일과 일본 간의 방공협정을 무효로 만들었다. 전장에서의 패배 이상으로, 나치-소비에트동맹은 도쿄에 정치적 격변을 일으켰다. 당시의 일본 정권은 붕괴했고, 다음 몇 달 동안 다른 여러 정부도 같은 길을 걸었다. - P206

독일이 일본 대신 소련을 동맹으로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는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지도부는 이미 북쪽 대신 남쪽으로, 소비에트 시베리아 대신중국과 태평양 쪽으로 확장한다는 데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베를린 간의 연합이 결성되면, 붉은 군대는 병력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최정예 부대를 단순한 자체 방어를 위해 북쪽 만주국에 배치해야 하고, 남쪽으로의 진격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동아시아에 대한 재량권을 주었고, 일본은 히틀러가 새 친구를 빨리 배신하기만 바라게 되었다. 일본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 준비 상황을 감시할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에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첩자, 스기하라 지우네가 임명되었다. - P207

1939년 9월 15일에 붉은 군대가 일본 군대를 물리쳤을 때, 스탈린은 자신이 바라던 결과를 온전히 달성할 수 있었다. 대공포 시대의민족 박멸 작전은 일본, 폴란드, 독일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이들이 연합해 소련을 포위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대공포 시대에 살해된 68만1692명은 이러한 포위 작전의 가능성을 줄이진 못했지만, 외교와 군대는 그 가능성에 영향을 주었다. 9월 15일이 되자 독일은 폴란드군의 전투 능력을 사실상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폴란드 연합의 소련 공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독일-일본 연합의 소련 공격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스탈린은 독일-폴란드-일본의 소련포위라는 공상을 독일-소련 연합의 폴란드 포위와 그에 따른 일본 고립이라는 현실로 바꿔버렸다. 소련 군대가 일본에 승리한 후 이틀이 - P207

지난 1939년 9월 17일, 붉은 군대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습격했다. 붉은 군대와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중간지대에서 조우해 공동 승리 퍼레이드를 준비했다. 9월 28일,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폴란드에 관한두 번째 협약을 맺었는데, 이번에는 국경과 친선 관계를 다룬 조약이었다.
이렇게 블러드랜드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의절반을 소련에 내줌으로써, 히틀러는 폴란드 박멸 작전에서 몹시 잔혹하게 자행된 스탈린의 테러가 폴란드 본토에서 재현되게 했다. 스탈린 덕분에 히틀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자신의 첫번째 대량 살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두 국가의 살육 담당 기관은 제3의 영토에 집중했다. 스탈린처럼,
히틀러도 자신의 첫 번째 주요 민족 사살 작전의 대상으로 폴란드인을 선택했다. - P208

독일의 공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20분,
폴란드 비엘룬시 한복판에 돌연 폭탄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어떤 사전 경고도 없이 이뤄진 공습이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군사전략적 의미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곳을 끔찍한 실험의 장소로 택했다. 현대식 공군력이 정밀 폭격으로 민간인 대부분을 공포에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것,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물론 가능했다. 교회, 시너고그, 병원, 이 모든 것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탄약과 총 70톤가량의 폭탄이 거의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숨진 이들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린 채 피란길에 올랐고, 도시를관리할 독일 행정관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의시체가 더 많았다. 서부 폴란드의 수많은 마을과 도시도 같은 운명을 - P211

맞았다. 무려 158개나 되는 삶의 근거지가 폭격에 희생되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던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들을 보며 "에이, 설마 우리 편 비행기겠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1939년 9월 10일은 유럽의주요 도시 중 하나가 처음으로 적국 공군에게 아주 체계적이고 정밀한 폭격을 당한 날로 기록되었다. 이날 바르샤바 습격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는 17세밖에 안 된 독일 소년도 있었다. 그달 중순까지 폴란드 정규군은 대부분 무릎을 꿇었고, 수도만 겨우 버티고 있을 따름이었다. 9월 25일, 히틀러는 바르샤바가 항복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날 약 560톤의 폭탄과 72톤의 소이탄이 퍼부어졌다. 정식 전쟁으로 인정받을 수 없던 이 전쟁의 초반,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이자 유럽의 역사적 수도 하나가 폭격에 무너져 내렸고 도합 2만5000명의시민(그리고 6000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9월 내내 독일 국방군을 피해 달아나던 피란민들의 긴 행렬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독일전투기 조종사들은 이들 위로 유유히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관총을 쏴대는 일에 재미가 들려 있었다. - P212

10월 4일,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은 새로운 공동 국경지대를 정한 추가 협약에 합의했다. 폴란드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 후 독일은 남은 폴란드 지역을 무력으로 합병하고, 나머지 지역은 동방 총독부를 세워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이곳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라는 불청객들을 집어넣는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이 될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동부 어딘가에 있는 "자연보호구역" 같은 곳에따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총독부의 수장이된 히틀러의 전 변호사 한스 프랑크가 분명하게 밝혔듯 식민지 주민들은 1939년 10월 말에 공표된 두 가지 질서에 따라야 했는데, 하나는 앞으로 모든 치안은 독일 경찰이 책임진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떤 행동이든 독일과 독일인의 이해에 반하는 행동을 한 폴란드인은 독일 경찰이 그를 즉결처분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프랑크는 폴란드인들이 이내 "폴란드에 미래 따윈 없음"을 깨닫고 독일인들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 P227

보여주로기의 관점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폴란드의 모든 것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되어야 했다. 히틀러가 쓴 대로, 독일은 "반드시 이 용납할 수 없는인종적 성분들을 봉쇄해 다시는 그들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거나 아니면 지체 없이 이를 없애 깨끗한 땅을 그 동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1938년 10월 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새로운 책무를 맡겼다. 이미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의 수장이었던 힘러는 이제 "게르만족의 지배를 확고히 할 제국 정치위원"으로서 인종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바로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을 쓸어버린 뒤 그 자리를 독일인으로 채워넣는 것이었다.
힘러는 이 기획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만만치않은 일이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인의 땅이었고, 폴란드에는 소수민족이라고 부를 만큼의 독일인도 없었다.  - P233

이런 식으로 스타로빌스크의 폴란드인 수감자 3739 명이 살해당했다. 유제프 찹스키의 지인과 친구들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찹스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식물학자, 임신한 아내에게 자신의 두려운기색을 숨기려 애쓰던 경제학자, 자신이 드나드는 카페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일로 이름난 바르샤바의 어떤 의사, 희곡과 소설을 외워사람들에게 암송해주던 한 중위, 유럽연합의 가능성에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하던 변호사, 이외에도 모든 기술자, 교사, 시인, 사회복지 - P245

사, 기자, 의사, 군인들이 있었다. 전부 이곳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오직 찹스키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그는 다른 수용소에 있던 몇몇 사람과 함께 또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마침내 살아남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1939년에서 1940년에 소련이 폴란드인 수용소를 설치하는 코젤스크의 옵틴수도원을 무대로 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꼽히는 이 결정적 장면은 젊은 성자와 수도원의 대심문관이 신이라는 존재 없이 도덕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를 두고 나눈 이야기다.
만약 신이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1940년, 소설 속의 이대화가 실제로 바로 그 장소에서 이뤄졌다. 수도원을 책임지던 수도승 몇몇은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심문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이들은 바로 저 질문에 대한 소련의 대답을 몸소 보여주는 자들이었다. 소련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이 사라진 이곳에서만이 인간의 진짜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반대로 여러 폴란드 장교는 비록 의식하진않았지만 이와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어떤 짓도 허용되는 이곳에서는 신이야말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안식처다. 그들은 수용소를예배당으로 여겼으며, 또 그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 P246

말로 앞으로 있을 스탈린주의의 엄청난 문명적 탈바꿈의 징조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수도원 대심문관의 자리를 현실에서 이어받은 코셀스크 심문관들의 우두머리는 이를 아주 섬세하게 포착했는데, 그의 표현처럼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의 문제였다. 결국 소련은 자신들의 것을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동부 폴란드에 소련이 쏟아부은 비용과 자행한 행동들에 대한 비난 역시 아주 간단한 대꾸로무마시킬 수 있었다. ‘지금 그 지역이 어느 나라 땅이지?‘ 수용소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소련 문명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십 년 뒤 당시 그들의 말쑥하고 깔끔한 모습과 자부심을 떠올렸던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농부들의 기억에서처럼, 그들은 여느소련인들처럼 살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적어도 이토록 갑작스레 또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소련인들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이 다른소련인들과 마찬가지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었다. 여러 폴란드 장교는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군인들보다 더 강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미 무기를 빼앗긴 터였으며, 보통 두 사람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다른 한 사람에게 사살당해 누구도 그 시신을찾을 수 없을 법한 장소에 묻혀 있었다. 이로써 그들은 비로소 소련역사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소련인과 함께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영원한 침묵으로 말이다.  - P248

수감자들은 학살 장소로 끌려가면서 트럭 밖으로 노트나 일기장을 던졌는데,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 가족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이것은 일종의 폴란드식풍습이었던 터라 그들이 지나간 길에서는 쉽사리 수많은 노트를 찾아볼 수 있었다. 소련의 세 수용소에 있던 죄수들과 달리 이 노트의주인들은 자신들이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코젤스크,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빌스크에 갇혀 있던 이들도 수용소를 떠날 때 버스 밖으로 노트를 던지기도 했으나 그곳에는 소련이 우리를어느 장소로 보내는지 모르겠다" 등의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과 독일의 차이였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동쪽의 소련은 몇몇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전체적으로 비밀스러운일 처리를 바랐다. 이와 달리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의 독일은 신중한 일 처리를 원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심지어 그러려던 때조차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했다. - P264

AB 악치온의 희생자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을 스스로, 혹은 가족들이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하고자 애썼다. 죽음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저마다 죽음을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에치스와 하브로프스키는 "폴란드땅을 적신 피는 폴란드를 더 강하게 하리라. 자유롭고 위대한 폴란드의 복수를 키워내리라"라고 적었다. 자신을 심문하던 자들을 비난했던 리샤르트 슈미트는 이와 달리 어떤 앙갚음도 없기를 바랐다. "아이들에게 복수하라 말하지 마시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니 마리안 무신스키는 그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모두 사랑해." - P265

AB 악치온으로 죽어간 이들 중 몇몇은 앞서 소련에 포로로 끌려간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소련과 독일이 대 폴란드 엘리트 정책을 서로 비슷하게 맞추거나 조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상이된 이들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소련은 계급투쟁 혹은 계급전쟁이라는 구실을 대 자신들의 체제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독일 역시 열등한 인종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긴 했으나 어찌됐든 새로 얻은땅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양국의 정책은매우 유사한 모습을 띠었다. 차이라면 그에 동반되는 강제이주 그리고 대량학살이 더 많고 적은의 정도 차이뿐이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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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의 두 ‘혁명‘, 집단화와 기근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 가려져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독일의 나치화를 보고 실망한 많은 유럽인은 모스크바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개러스 존스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권력을 강화하던 1933년 초반, 두 체제를 모두 목격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1933년 2월 25일,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날아감으로써 신임 독일 수상과 함께 비행기를 탄 최초의 언론인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유럽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존스는 ‘나의 투쟁』을 읽었고, 독일 정복, 동유럽 식민화, 유대인 말살이라는 히틀러의 야망에 대해 감을 잡고 있었다. 이미 수상이었던 히틀러는 제국 의회Reichstag의 해산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다음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자신의 재임 기 - P119

간을 늘리고 독일 의회에서 나치당이 차지하는 자리도 더 넓히려 했다. 존스는 신임 수상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을 처음에는 베를린에서, 나중에는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느낀 것은 "순수한 원시적 숭배‘였다.‘
그 뒤 모스크바로 떠남으로써, 존스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독재 정권이 막 시작된 땅에서 "노동 계급이 독재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존스는 두 체제 간의 중요한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는 새로운 체제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조직적인 거대한 폭력을 구사하는 강력한 경찰 기구를 바탕으로,
일당 독재국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존스가 목격하고보고했듯이,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은 시민 수만 명을 총살하고, 수십만 명을 추방하며, 수백만 명을 아사 직전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스탈린은 사회 계급과 민족을 기준으로 소련 시민 수만 명을 추가로 사살할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은 1930년대 히틀러의 역량을 훨씬 넘어서 있었고, 어쩌면 당시의 히틀러로서는 그렇게 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 P120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기근을 자신의 선거운동에 활용해,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되기에 앞서 분노를 유발하는 이데올로기 정치 문제가 되게끔 만들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상대로 분노를 터뜨리며, 우크라이나 기근을 마르크스주의의 폐단을 증명하는 증거로사용했다. 1933년 3월 2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 집회에서 히틀러는 "전 세계의 곡창지대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외쳤다. 단 한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만으로 히틀러는 소련에서의 떼죽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호자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부시켜버렸다. 히틀러의 평가를 전적으로 거부 또는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거짓과 진실의 묘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은 기근에 대한 히틀러의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뒤섞여 있던, 좌파 정치에 대한 그의 비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 P122

1932년 하반기와 1933년 초반, 자신이 일으킨 대재앙이 지속되는와중에 스탈린이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국제 노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소련 인민의 끔찍한 고통과 떼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다. 독일 국내정치에서 이 노선은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더 열심히 지지토록 하는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련 기근의 중대한 몇 달은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각적인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독일공산주의자들 덕분에 나치는 중산층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사무직과 자영업자도 사회민주당보다는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래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나치당의 지지율보다 더 컸다.
그러나 두 정당은 스탈린의 노선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었다.  - P123

스탈린 경제 정책의 진정한 결과를 당시 해외의 보도인들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히틀러는 독재자로서 시행한 최초의 정책 중에서 재분배에 관심이 쏠리도록 치밀하게 의도했다. 소련의 기아가 절정으로치닫던 순간, 독일은 유대계 시민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1933년3월 5일 선거에서 승리한 후,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계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불매운동은 다가오는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가장 손해를 보게 될 사회 계층이 어디인지보여주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농민이었지만, 독일에서는 유대인이었던것이다. 실제로는 나치 지도자와 나치 준군사 조직들의 엄격한 관리의 산물이었으나, 불매운동은 유대인 착취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분노‘에 따른 산물인 양 묘사되었다.
이 점에서 히틀러의 정책은 스탈린의 정책과 비슷했다. 소련 지도자는 소련 변방에서의 혼란이, 그리고 부농의 제거가 진정한 계급 전쟁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 모두 같은 정치적 결론을 내렸다. 필요한 재분배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려면 국가가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124

1934년 6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선포된 인터내셔널의 새노선에 따르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 문제가아니었다. 대신 소련과 세계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캠프에서 널리 좌파 세력을 결집하기로 했다. 계급투쟁을 엄격히 수행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부상하는 파시즘으로부터 문명을 구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때문에 유명해진 단어인 파시즘을 소련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패의 결과물로 제시했다. 파시즘의 확산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종식을 의미했던 한편, 소련에 대한 파시즘의 극심한증오(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는 소련과 여타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소련 수호를 위해) 다른 자본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 P130

인민 전선은 소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인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성공을 누렸다. 최고의 승리는 파리에서 거뒀는데, 이곳에서 인민 전선 정부는 1936년 5월 실제로 집권에성공한다. (에리오의 급진당을 포함한) 좌익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했고,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이 총리가 되었다. 승리를 거둔 선거 연합의 일원인 프랑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의회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투표 결과는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프랑스 외교정책을 소련에 우호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인민전선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좌파가 거둔 승리로 간주되었다.  - P131

스페인에서는 정당 연합이 인민 전선을 형성했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7월에는 극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정부는 저항했고, 그 결과 스페인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 문제였지만, 인민 전선에 대한 이념적 적들이 참전했다. 소련은 1936년 10월 궁지에몰린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베를린과 로마의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은 유럽 내 소련 정책의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몇 달 동안 주요 소련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 P132

‘스페인을 돕자!‘는 위험에 빠진 공화국 편에서 싸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구호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이 민주주의 편에 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통찰력이 뛰어난 유럽 사회주의자의 한 명이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 좌파를 제압하려는 스페인 내 스탈린주의자들의 행동에 경악했다. 그의 통찰처럼, 소련은 무기와 함께 정치 행위까지 수출했다. 스탈린의 스페인 공화국 지원에는 대가가 따랐다. 스페인 영토에서 파벌 싸움을 벌일 권리를 준 것이다. 스
"탈린의 숙적인 트로츠키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멀리 떨어진 멕시코로추방당하긴 했지만), 공화국을 지키던 수많은 스페인 사람은 스탈린의 - P132

소련보다는 트로츠키라는 개인에게 더 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 선전물은 스페인의 트로츠키파를 파시스트로 낙인찍었고,
그들을 ‘반역죄‘로 사살하고자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이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 P133

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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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12년 집권과 소련의 74년 집권은 분명 우리가 세계를 평가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은 나치의 범죄가 역사적으로도 보기드물 정도로 심각했다고 여긴다. 이는 히틀러 스스로가 실제 이상으로 성과를 신봉한 것과 묘한 대응을 이룬다. 또 다른 사람들은 스탈린의 범죄가 비록 그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이는 역사가 오직 한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따라서 어떤 정책을 쓰든 그 방향과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모두 정당하다는 스탈린의 믿음을 일깨워준다. - P21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세우고 다져진 역사 없이는, 우리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아직도 우리를 그들의 올가미에 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기초란 뭐가 될까? 이 연구는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성사를 포괄하고 있지만, 사용하는 기본 연구 방법은 단순하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 실제로는 허구로든 블러드랜드는 정치적 지역이 아니다. 유럽의 가장 살인적인 체제들이 가장 막대한 살육을 저지른 곳. 그저 그뿐일 따름이다. - P21

역사는 유럽의 과거사를 국민 단위에서 나누고, 그 단위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면서 종종 이지적이고도 용감하게 지켜져왔다. 하지만 어느 한 집단의 학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무리 잘 하더라도1933년에서 1945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의 과거사를 완벽하게 안다고 해도, 그들이 겪은 굶주림의 원인을 알아낼 수는 없다. 폴란드 역사를 착실하게 익혀도 왜대숙청 시기에 그토록 많은 폴란드인이 죽어가야 했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벨라루스의 과거사를 연구한다 해도 그토록 많은 벨라루스인이 포로수용소와 대빨치산 전역에서 숨져가야 했던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유대인들의 삶을 연구하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원인은 설명할 수 없다. 한 집단에 벌어진일은 종종 다른 집단에 벌어진 일과 비교했을 때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시작일 뿐이다. 나치와 소련 체제 역시 그 지도자들이 이땅들을 어떻게 장악하려 애썼는지, 그리고 이들 집단을 어떤 관계에놓고 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 P23

오늘날 20세기의 대량학살이야말로 21세기에도 가장 중대한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는 널리 합의가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블러드랜드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단학살은 유대인의 역사를 유럽사에서 떨어뜨려놓고, 동유럽의 역사도 서유럽의 역사와 구분 짓게끔 한다. 살육이 국가 민족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론적인 구분에 영향을 준다.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가 사라진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말이다. 이 연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하나로, 유대인사와 유럽사를 하나 - P22

로, 각 국민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다. 희생자와 집행자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행에 개입된 이데올로기와 실행 계획을 따지고, 그런 만행이 벌어지게 만든 체제와 사회를 분석한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지도자들이 내린 명령으로 살육당한 사람들의 역사다.
희생자들의 고향 땅은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었고, 그 땅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 온통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 P23

나치와 소련 체제의 기원, 그리고 그들이 왜블러드랜드에서 만나게되었는지의 기원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 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옛 대륙 제국들을 무너뜨리는 한편, 새로운 제국에 대한 꿈을 일으켰다. 황제들의 왕조 통치 방식을 국민 주권에 의한 통치라는 약하디약한 개념으로 바꿔놓았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명령에 따라 싸우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목적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 ‘조국을 위하여‘였다. 그 조국이란 이미 수명을 다했거나, 이제 막 태어나려 하는 것이었건만. 새 국가들은 거의 무에서부터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민간인 집단이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옮겨지거나 말살되었다. 10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정권에 의해 학살되었다. 독일계 주민과 유대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거주지에서 멀리 이동했다.  - P27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경제를 조각내버렸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살아 있던 유럽의 성인은 생전에 두번 다시 그만큼의 자유무역이 복구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런 유럽인의 대부분은 그 전 시대 수준의 번영을 다시는 누려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간단히 말해서 두 진영의 무력 충돌이었다. 한쪽 진영에는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동맹 제국")가, 반대 진영에는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미국("협상 제국")이 있었다. 1918년 협상 제국의 승리는 3대 유럽 대륙 제국인 합스부르크, 독일, 오스만의 종말을 가져왔다.  - P28

레닌은 평화를 얻은 대신 러시아 제국의 서쪽 변방이던 곳들을 독일의 식민 지배 아래 내주었다. 그러나 물론, 독일 제국도 폭압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나머지와 함께 곧 쓰러져버릴 테니 별문제는 아니라고 볼셰비키는 믿었다. 그때가 되면 러시아와 다른 혁명 세력은 그들의 새 질서를 서쪽으로, 지금 빼앗긴 땅의 훨씬 너머까지 퍼뜨릴 수있으리라.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서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패배를 그리고 독일 내에서의 노동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중부와 서부 유럽의 좀더 산업화된 땅에서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다른마르크스주의자들의 러시아 혁명을 정당화한 것이다. 1918년 말과1919년에는 레닌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1918년 가을,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 영국, 미국에게 확실히 패배했다. 그리고 패배하지는 않았으되 그들의 새로운 동쪽 땅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독일 혁명가들은 집권을 위해 산발적인 시도를 벌이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거저먹었다. - P31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히틀러가 여느 독일 민족주의자와 달랐던 점은 그다음에 품었던 그의 생각에 있었다. 모든 독일인을하나로 모은 독일을 세우고, 폴란드를 정복한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 P38

쓸어버리고, 소련을 무너뜨린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는 폴란드와 소련 모두에 우호적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여느 독일인보다 더 극단적인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감추었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에는 처음부터 이 파멸적인 비전이 나타나 있었다. - P39

소련의 민족들은 새로운 공산주의적 이미지로 재탄생해야 했다. 농민은 정복당할 때까지 살살 달래졌다. 볼셰비키는 지방의 농민들과 일시적으로 타협했지만 이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의 잠시 동안만이었다. 새 소련 체제는 농민들이 지주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보유하고 시장에 상품을 내다 파는 일을 허용했다. 전쟁과 혁명의 결과 초래된 파괴로 심각한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위해 곡물을 요구했다. 1921년에서 1922년까지 수백만 명이 굶주림이나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죽었다. 볼셰비키는 이 경험으로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깨달았다. 그러나 일단 이 갈등기가 끝나고, 볼셰비키가 승리했을 때, 그들은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인민에게 평화와빵을 약속했으며,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그 두 가지를 헐값으로 제공해야만 했다. - P41

대공황의 도래는 스탈린이 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해 한 말을 입증해주는 듯 보였다. 1929년 10월 7일의 ‘검은 목요일‘에 미국의 주식시장은 붕괴되었다. 1929년 11월 7일, 이날은 볼셰비키 혁명 12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스탈린은 스스로의 정책으로 소련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시장에 대한 사회주의 경제의 대안을 강조했다. 그는 1930년이면 "위대한 전환이 이뤄지는 해가 될 것이라고, 집단화가 안정과 번영을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때쯤이면 옛 농촌 지역은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 그리고 혁명은 여러 도시에서 완성되리라. 프롤레타리아는순화된 농업노동자들이 생산한 식량을 기반으로 부쩍 성장해 있으리라. 그들 노동자는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사회를 창출할 것이며, 강력한 국가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리라. 스탈린은 근대화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듯이, 스스로의 권력욕 역시실현되게끔 했다. - P45

1933년, 민주주의에 대한 소련과 나치식 대안은 단순한 토지개혁따위는 하지 않겠다(실패한 민주 국가들은 그마저 이뤄내지 못했지만)는그들의 입장이 어떤 성과를 내놓느냐에 달려 있었다. 서로 그토록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문제의 핵심 중 하나가 농업 부문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과감한 국가 개입에 있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했다. 국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새로운 유형의 정치체제를 뒷받침하게 될 것이었다. 1928년스탈린의 5개년 경제계획이 시작된 이래 공공연해진 스탈린식 접근법은 집단화였다. 소련 지도자들은 1920년대에 농민들이 번영하도록놔두었으나, 1930년대 초부터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농민이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집단농장을 만들어냈다. - P51

히틀러와 스탈린은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 권좌에 올랐으나, 그들의 혁신 비전은 그 둘 사이에 놓인 모든 땅에 걸쳐 있었다. 그들이 통제하려는 유토피아는 우크라이나에서 겹쳤다. 히틀러는 1918년에 독일이 잠시 지배했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식민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직후에 자신의 혁명을 우크라이나에서 실행한 스탈린은 그 땅을 히틀러와 거의 같은 시각에서 바라봤다. 그 농토와 농민은 현대산업국가를 만들기 위해 최대한 쥐어짜야할 대상이었다. 히틀러는집단화가 형편없는 실패로 끝날 거라고 보며, 이는 또한 소련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스스로는 독일인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함을 추호도 의심치않았다 - P53

그곳은 그들이 기존 경제학의 법칙을 깨뜨릴 수 있게 해주는 땅이자, 그들의 나라를 궁핍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줄 땅,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대로 유럽 대륙을 바꿔나가게 해줄 땅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림과 그들 권력의 성패는 온통 우크라이나의 기름진 땅과 그곳의수백만 명의 농업노동자에 기대고 있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인들은사상 최대의 인위적 기근 때문에 수백만 명씩 굶어 죽었다. 그것은우크라이나의 특별했던 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1941년에는 히틀러가 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의 손에서 빼앗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식민지 건설을 위해, 먼저 유대인들을 총살하고 소련군 포로들을 굶겨 죽이기 시작했다. 스탈린 일파는 그들 스스로의 국가를 식민지화했으며, 나치는 점령한 소련의 우크라이나를 식민지화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권좌에 있었던 세월 동안, 블러드랜드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또한 다른 유럽 지역, 나아가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 P54

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 - P62

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그의 정책은 수만 명을 처형으로, 수십만 명을 탈진으로 죽게 했고, 수백만명을 굶주림의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공산당 내부의 반발을 우려하긴 했지만, 스탈린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재능과 총독들의 자발적인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를 만든다고 주장하는관료 체제가 있었다. 그 미래는 공산주의였다. 중공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집단농장이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사회의 최대 집단인 농민을 통제해야 하는 공산주의 말이다. - P63

강제추방은 계속되었고, 집단화도 진행되었다. 1930년 후반과1931년 초반에는 약 3만2127가구가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추가로추방당했는데, 1년 전 첫 번째 추방 물결에서 쫓겨난 사람과 비슷한숫자였다. 농민은 굴라크에서 탈진해 죽거나 집과 가까운 곳에서 굶어 죽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후자가 낫다고 여겼다. 추방당한친구와 가족의 편지가 간혹 검열을 피해 도착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이런 조언을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여기 오지 마 우린 여기서 죽어가고 있어. 숨거나 차라리 거기서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긴 오지 마." 어느 공산당원의 생각처럼, 집단화에 굴복한 우크라이나 농민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사라지느니 집에서 굶주리는 쪽을 선택했다. 1931년 집단화가 마을 전체 차원이 아닌 가구별로 세세히 진행되면서, 저항은 더 어려워졌다. 필사적인 방어를 유발하는기습도 없었다. 연말이 되자 새로운 접근법이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농지의 약 70퍼센트가 집단화되었다. 이로써 1930년3월 수준에 다시 도달했으며, 이번에는 그 수준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 P75

1932년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외부의 안보 위협도 없고 내부의 도전 세력도 없으며, 자신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아도 된 상태에서, 스탈린은 소련령 우크라이나주민 수백만 명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민이 가해 - P89

자이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순전한 적대적 태도를 택했다. 굶주림은카가노비치에 대한 계급투쟁이었고, 스탈린에 대한 민족주의 투쟁이었다. 오로지 굶주림만이 방어 수단이 되는 투쟁,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농민에 대한 지배를 과시하고 싶었고, 심지어 그런 태도가 요구하는 극심한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르티아 센의 말처럼 굶주림이란 "부여되는 것이며, 식량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은 식량 부족이 아닌 식량 배급이었고,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스탈린이 결정했다. - P90

이 최후의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마는데, 살인을 실행하는 이들은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 활동가의 기억에 따르면, 그해 봄 그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봤다. 여자와 아이들은 배가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창백하며, 숨은 쉬지만 눈빛은 공허하고생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광경을 봤음에도 정신이나가거나 자살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여전히 나는 - P95

믿고 싶기에 믿었을 뿐이다." 다른 활동가들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두려움이 많았던 게 분명했다. 그 전해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모든서열에서 숙청자가 나왔다. 1933년 1월, 스탈린은 당 지도부를 장악하고자 심복을 보냈다. 더 이상 당에 대한 믿음을 내보일 수 없던 공산주의자들은 안에 있는 모든 이를 파멸로 몰아넣는 ‘침묵의 벽‘을 이루었다. 그들은 저항하는 자는 숙청당하며, 숙청당한다는 것은 곧 그들 자신이 처형하는 사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임을 알고있었다. - P96

굶주림은 반란 대신 도덕의 부재, 범죄, 무관심, 광기, 무기력,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을 불러왔다. 농민들은 수개월 동안 형언할 수 없는고통을 겪었는데, 워낙 길고 악랄한 고통인 탓도 있었지만 사람들이너무 약하고, 가난하며, 대체로 문맹이라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하지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생존자들 가운데는 그 일을 기록한 사람들도 있다. 한 생존자는 농민이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죽고, 죽고, 또죽었다"고 회상했다. 죽음은 느리고, 굴욕적이며, 넘쳐흐르고, 흔해빠진 일이었다. 품위 있게 굶어 죽는다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페트로 벨디는 죽음을 예감한 날 안간힘을 써서 고향마을을 기어다녔다. 다른 마을 주민들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자신을 매장하러 묘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낯선 이들이자신의 몸을 구덩이까지 끌고 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기 무덤을미리 파두었지만, 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시체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다른 무덤을 팠고, 몸을 누인 다음, 죽기를 기다렸다. - P97

1933년에는 소비에트 시민 약 14만2000명이 추가로 굴라크로 이송당했는데, 대부분은 굶주리거나 티푸스에 걸린 상태였고, 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식량을 찾아 헤맸다. 굴라크에는 건강 상태가 나은 자에게는 음식을 주고 약자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었고, 추방자들은 이미 배고픔 때문에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일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굶주린 포로들이 야생 식물과 쓰레기를먹어 스스로 중독 상태가 되자, 수용소 관료들은 태죄를 걸어 그들을 처벌했다. 1933년 굶주림 및 관련 질병으로 수용소에서는 최소한6만7297명이 죽었고 특별 정착지에서는 24만1355명이 사망했는데,
대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이나 최북단으로 가는 오랜 여정에서 수천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시체는 기차에서 꺼내 바로 매장했고, 이름과 숫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 P99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들은 주인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빵 한 조각만 달라고 구걸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 위에, 목욕탕과 헛간 안에 수많은 시체가 있었다. 배고프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길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경찰이 그들을 일으켜주었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두고말았다. 4월 말, 나는 수사관과 함께 헛간을 지나다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시체 수거를 위해 경찰과 의사를 불렀는데, 그들은 헛간 안에서 다른 시체를 찾아냈다. 두 시체 모두 굶어 죽어 있었고, 폭력의 흔적은 없었다. 우크라이나 교외 지역은 식량을 다른 소련 지역으로 공출한 상태였으며, 이제는 그에 따른 결과, 즉 굶주림을 굴라크로 공출하고 있었다. - P100

살아남으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버텨내야 했다. 1933년 6월, 한 여의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그녀가 아직 식인종이 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 편지를 네가 볼 때쯤이면 어떨지 모르겠어"라고 밝히고 있었다. 착한 사람부터 먼저 죽어갔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몸을 파는 일을 끝내 하지 않은 사람들 말이다. 시체 뜯어먹기를 못내 거부한 사람들도 죽어야 했다. 식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부모들은자식들이 보는 가운데 죽어갔다. 1933년의 우크라이나에는 고아가넘쳐났고, 때로는 사람들이 그들을 거두었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없는 판에는 낯선 이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해줄 게 별로 없었다. 사방에 거적때기나 담요를 덮어쓴 소년 소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은 자기 배설물을 먹으며 죽음을 가다리고 있었다. - P103

식인은 생명과 맞먹는 무게의 터부다. 그래서 지역사회는 그런 처절한 생존 방식에 대한 기록을 없애서 자신들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 했다. 우크라이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식인 이야기를 쉬쉬하려 안달이다. 그러나 1933년 우크라이나의 식인 행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시 소련 체제의 성격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굶주림은 식인 행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목구멍으로 넘길 곡식 낟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어지자, 우크라이나에도 식인 행위가 찾아왔다. 입에 댈 수 있는 게 사람의 살코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P104

어느 소련공무원이 이탈리아 외교관에게 귀띔하기로는 "우크라이나의 인종적구성은 그때 이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찍이 카자흐스탄에서 좀더극적으로 이뤄졌던 인종 구성의 변화가 우크라이나에서도 일어났다.
어느 쪽이든 대러시아계 사람들에게 유리한 변화였다"
1930년대 초, 소련과 그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숨졌을까? 결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믿을 만한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은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보여준다. 예를 들어 키예프의 공공보건기구 기록에는 그 지역에서1933년 4월에만 49만3644명이 굶어 죽었다고 적혀 있다. 한편 지역행정 단위들은 기아 사망자 기록을 내기 두려워했고, 결국 아무것도남기지 않았다. 국가에서 사망자를 파악하려 할 때 접촉할 수 있는대상은 매장 팀원들일 뿐일 때가 많았으며, 그들도 자신들의 일을 일일이 기록해놓고 있진 않았다. - P107

우크라이나의 농업사회 구조는 검사, 압박, 착취의 과정을다 거쳤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소련 전역의 캠프들 사이에서 죽거나 능욕당하거나 흐트러뜨려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죄의식과 무력감에, 때로는 변절과 식인 행위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수십만 명의고아가 소련의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계라고 할 수없었다. 적어도 그들을 탄생시킨 우크라이나 가족과의 끈이나 우크라이나 농촌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마음의 의지가지를 잃어버렸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당시 소련에 있으면서 그 기근 사태를 목격한 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국가적 비극이 아니라 인도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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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계급, 인종 혹은 식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얽혀 있는 방식은선의로 풀어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문제만은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현실적 토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라면 성,
인종, 계급의 구분선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좀 더 강한 ‘자매애‘나 국제적 연대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 P59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측면의 구분에 대해, 새로운 페미니스트동에서는 다양한 경향으로 구분하고 이름을 붙이는 시도가 계속 되어 왔다. 그래서 어떤 경향은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혹은 ‘맑스주의자 페미니즘‘, 또 다른 이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렸다. 대변자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서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으로 불리기도 했다. 내가 볼 때 이렇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페미니즘이 정말 무엇이고, 누구를 대변하며, 그 기본원칙, 사회에 대한 분석과 전략 등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잘 이해하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이런 꼬리표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이 운동을 주로 밖에서 바라보면서 통속적인 기존의 범주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 P59

이는 특히 구조적 기능주의와 역할이론에서 잘 볼 수 있다. 역할이론이 자본주의 아래서 가부장적 핵가족을 온존시키기 위한 이론적틀이라고 하는 비판 없이, 많은 페미니스트가 역할이론을 강조하고있다. 성역할의 정형화를 강조하면서 성차별적이지 않은 사회화를 통해 이런 성역할의 전형을 변화시켜 ‘여성문제‘를 풀어가려는 것은 구조적기능주의자의 분석을 강화해주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더 깊은 뿌리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다. 남녀 문제를 성역할의 정형화와 사회화의 문제로 규정함으로서 이는 곧 이데올로기적차원으로 넘어가게 되고, 문화적 문제가 된다. 이 문제의 구조적 뿌리는 여전히 안 보이는 것으로 남게 되고, 자본축적과의 관계 역시 여전히 가려져 있게 된다. - P62

기존의 사회이론 혹은 페러다임에 ‘여성문제‘를 ‘추가하려는 이런모든 시도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반란의 진정한 역사적 추진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페미니스트 반란은 자본주의가 가장 최근의 - P62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징후로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체제로서의 가부장제혹은 가부장적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모든 이론은 ‘문명화된 사회의 패러다임 내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런 사회 모델을 기필코 극복해야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페미니즘이 이런 이론들에 그저 덧붙거나, 이론들 속의 어느 망각된 지점을 찾아 맞춰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이론의
‘맹점들‘을 채우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우리의 문제, 우리의 분석은 이런 사회 모델 전체를 문제로 삼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는 적당한 대안 이론들을 아직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P63

그러나 우리의 비평은 그런 빈틈을 먼저 다루기 시작했고, 점점 더깊이 파헤쳐 나가서, 우리가 ‘우리의 문제, 말하자면,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남녀 관계가 ‘자연‘이나 식민지‘와 같은 ‘숨겨진 대륙‘ 같은 것과체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와 있다. 점차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다. 여성이 어쩌다가 ‘잊혀지고‘, ‘무시되고, ‘차별받는 것이 아니며, 남성만큼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아니고, 몇몇 소수집단들 중 하나일 뿐인 것이 아니며, 다른 보편적이론이나 정책이 ‘아직‘ 수용하지 못한 ‘특수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보편인가에 대한 혹은 무엇이 ‘특수‘인가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에서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각 사회에서 생명을 생산해내는 실제적 근원인여성이 어떻게 ‘특수성‘의 범주로 규정될 수 있는가? 따라서 이들 모든이론 속에 내재한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주장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가 아직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 P63

대부분의 여성은 희생자를 돕거나 법적 개혁을 가져오는 일에 주력하게 되지만,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른바 문명화된 사회라고 하는 허물을 벗기고 감추어진 잔인하고 폭력적인 근간을 드러나게 해준다. 페미니스트 혁명의 깊이와 폭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면, 많은 여성이 주저하면서 자신이 경험해 온 것을 모른 체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하는 엄청난 일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기된 역사적 문제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이 문제들은 역사의 의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합당한 답변을 찾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해치는 것이아니라 한층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재건하는 데 일조하도록 해야 한다. - P64

그러나 이런 퇴행 전략은 좀 더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들에 대한정치적 선언일 뿐이다. 서구 경제들은 이를 보통 ‘노동의 유연화‘라고불러 왔다. 여성이 이런 전략의 직접적인 표적이 된다. 생산과정과 서비스직의 합리화, 컴퓨터화, 자동화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인해 여성은 ‘공식 부문‘에 있는 임금이 높고, 자격을 갖춘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안정된 직장에서 쫓겨나는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따뜻한 난로가 있는 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여성이 쫓겨 들어간 곳은 별 자격 없이도 접근할 수 있는 낮은 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세계였다.  - P66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인간의 성과 섹슈얼리티가 순전히 자연적이고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여성의 혹은 남성의 몸이 순전히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도 없었다(2장 참조).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이었다. 인간 생리는 모든 역사를 통해 다른 인류와 그리고 외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성도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이다. - P81

그러나 성과 젠더를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함으로서, 사람들 사이의 성적 차이를 해부학적 문제로 혹은 ‘물질적 문제‘로 다루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시 문을 열어주게되었다. 물질로서의 성은 과학자의 대상이 되어, 과학자의 의도에 따라 분해되고 분석되고 조작되며 재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정신적 가치가 성에서 분리되어 젠더의 범주에 갇히게 되면, 지금까지 성과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둘러싸고 있었던 금기들이 쉽게 벗겨질 수 있다. 이 영역은 생물공학과 재생산 기술, 유전공학과 우생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사냥터가 될 수 있다 - P81

자신의 몸과의 관계, 자신의 몸에 대한 무지, 피임과 관련한 문제 등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가장 친밀하고 개인적이며 개별화된 경험들을 사회화하고 그럼으로써 정치화하기 시작했다. ‘몸의 정치‘는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저개발국가에서도 신여성운동을 촉발하는영역이 되고 있다. 이렇게 남녀관계의 사적이고 분리된 영역을 정치적영역으로 규정함으로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을만들어냄으로서, 부르주아 사회의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 대한 구조적 구분에 도전했다. 이는 동시에 통상적인 ‘정치개념에 대한 비판을의미하기도 했다(Millet, 1970). ‘몸의 정치‘는 페미니스트가 의도적이고전략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몸의 정치‘는 우리 사회에서 남녀관계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억압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정한 이슈에 대해 서구 사회의 여성 대중이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성장해 나온 것이다.  - P83

페미니스트운동이 성차별적 폭력의 다양한 징후들을놓고 진행될수록, 여성은 모든 민주주의 헌법이 선언하고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 중 일부, 특히 신체가 해를 입지 않을 불가침의 권리가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모든여성은 이런 남성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라고 하는 암울한 사실과 힘과 교양을 갖춘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여성의 이런 기본권들을 보장할수 없다는 막막한 현실을 접하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는 여성해방을위한 투쟁에서 국가가 동맹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품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근대 민주주의의 문명화된‘ 사회에서 노골적인 폭력이 사라졌다고 하는 모든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사회에서 자주 찬미는 ‘평화‘가 사실은 여성에대한 일상적이고 직간접적인 공격에 기초한 것임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깨닫기 시작했다. 독일 평화운동에서 페미니스트는 이런 슬로건을만들었다. ‘가부장제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전쟁이다‘ - P87

몸의 정치 차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여성은 말하자면 초기 여성운동이 희망했던 것과는 반대되는교훈을 배웠다. 공공영역에 여성이 참여하고, 참정권을 얻고,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폭력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가부장적 남녀관계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차별적 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운동이 진행되면서 개별 남성의 명백한 ‘사적‘ 침해와 가족, 경제, 교육, 법, 국가, 대중매체, 정치 등 ‘문명사회‘의 중심 제도와 기둥들‘ 사이의 조직적인 관련에 대한 여성의 인식도 높아졌다.  - P87

‘일인칭 정치‘라는 개념, 대의정치의 거부,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을 분리하는 것에 대한 거부, 사적 영역의 정치화 등은 나중에서독에서 시민발의운동, 대안운동, 생태운동, ‘기초-민주주의‘를 주된정치 원칙의 하나로 삼았던 녹색당과 같은 여러 신사회운동이 계승했다. 반관료주의, 서열을 따지지 않는 활동, 중앙 집중의 배제와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활동의 강조 등 페미니스트운동의 여러 조직 원리들은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여타 사회운동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다.
신페미니스트운동은 통일된 프로그램과 완성도 높은 이론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항상 관계하고 있는 사적 영역과 자신의 몸과 관련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남성 지배에맞서는 반란을 시작하면서 이는 고유의 역동성과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대다수 사람들이 처음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사회 구조 깊숙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치운동으로서 페미니스트운동은 오늘날 다른 어느 사회운동보다도 더 광범한 반향을 낳는다. - P95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구분을 근본적으로 넘어설 때에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지극히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유명한 자본 임금노동관계와 동일하지 않으며, 자본주의는 계속 팽창하는 성장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식민지 범주들, 특히 여성, 다른 민중, 그리고 자연과같은 식민지 범주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 점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전 세계 페미니스트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창출한,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모든 구분, 특히 노동의 성별 구분과 국제적 구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구분의 실상을 밝히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민지적 구분에 대한 강조는 다른 관점에서도 꼭 필요하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페미니스트는 비판적 과학자와 생태주의자와 함께 서구 과학과 기술의 이분법적이고 파괴적인 패러다임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 P104

뉴에이지 페미니스트와 생태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여러 페미니스트가 자신들에게 ‘동양의 정신‘과 ‘치료‘ 를 향유할 수 있는 사치를 제공하면서도 착취가 이루어지는 진짜 식민지에 대해 눈과 마음을 여는 것이 꼭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총체적패러다임이 새로운 정신주의나 의식운동에 불과하게 된다면, 이 패러다임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착취의 세계적 체제에 대항하여 이를 분명히 규정하고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생산의 다음 단계를 정당화시켜주는 선도적 운동으로 정리되고 말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차나 냉장고와 같은 수준 낮은 물질 상품들을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종교, 치료, 우정, 영성 등과또 폭력과 전쟁 상품 등에 집중할 것이며, 물론 그 과정에서 ‘뉴에이지‘ 기술들을 충분히 활용하게 될 것이다. - P105

나는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신페미니스트운동이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체제적 성격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는 과정에서재발견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여성의 착취와 억압의 역사적·사회적 측면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생물학적 해석의 여지는 ‘남성 지배‘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덜 열려 있다. 역사적으로 가부장 체제들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에의해 발전되었다. 가부장 체제들은 보편적으로,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 P109

독립성이 여성 속에서 인간적 본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독립성은 위에서 서술한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독립성은 여성이 혼성의 혹은 남성위주의 조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자신만의 분석과 프로그램과 방법을 통해 고유의 독자적인 조직을 세우려고 주장하면서 발전시킨 투쟁 개념이기도 하다. 독립 조직은 알다시피, 모든 ‘대중운동‘에 대해 조직,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에서 항상 우위를 주장해왔던 전통적인 좌파 조직에 맞서면서 특히 강조되었다. 이런의미에서 페미니스트의 독립성에 대한 주장은 여성문제와 여성운동을 어떤 다른 외관상 좀 더 보편적인 주제나 운동 아래 수렴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여성의 독립적인 조직은 독립된 힘의기초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운동의 질적으로 다른 특질과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 P115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운동 내에서도, 다양한 하위 운동들, 예를 들면 레즈비언운동 등이 등장했다. 또한 제3세계 페미니스트운동이 발전하면서 이런 원칙이 강조되기도 했다. 여성운동에는 중앙도 없고, 서열도 없고, 공식적이고 통합된이데올로기도 없고, 공식 지도부도 없다. 따라서 다양한 자발적 활동과집단의 독립성은 운동 내에서 진정으로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역동성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다. - P116

육체는 운명anatomy is destiny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에서 나타난 것처럼, 생물학적 결정론은 음으로 양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뿌리 깊은 방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위해 싸우는 여성은 생물학적 결정론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남녀사이의 불평등하고 서열적이며 착취적인 관계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분석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분석의 도구인 기본 개념과 정의가 생물학적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기때문이거나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 P120

자연, 노동, 성별노동분업, 혹은 가족, 생산성 등은 우리 분석에서 중심적인 기초 개념들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 속에 내재한 이데올로기적경향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이들 개념을 사용한다면, 문제가 분명해지기보다 더욱 모호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불평등이나 착취적 관계들을 타고난 - P120

것, 혹은 사회적 변화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고 설명할 때 너무 자주사용되어 왔다. 여성은 이 용어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데 이용될 때 특히 의심해야 한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여성의 몫은 흔히 여성의 생물학적 혹은 ‘자연적 기능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여성의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여성의 생리활동의 연장선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가사와 육아는 출산했다는 사실과 연결된 것으로, ‘자연‘이여성에게 자궁을 주었다는 사실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산을포함한 생명을 생산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노동이 인류가 자연과 의식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즉 진정한 인간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의 활동으로, 즉 식물과 동물을 의식 없이 생산해내고 이 과정에 대해 통제하지 않는 자연의 활동으로 보인다. 여성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여성 자체의 자연성까지 포함하여, 자연의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광범한 영향을 미치고있다. - P121

생물학적으로 오염된 자연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신비화된 것은지배와 착취, (남성)인류의 (여성)자연에 대한 지배관계이다. 이런 지배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여성에게 적용된 다른 개념들에도 내재해 있다.
노동 개념을 보자.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물학적 규정 때문에,
여성의 출산과 육아, 그리고 다른 가사노동들은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 개념은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생산적 노동,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여성도 그런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을 하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개념은 보통은 남성 혹은 가부장적 경향과 함께 사용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여성은 전형적으로는 가정주부로, 즉 노동자 - P121

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노동의 수단은, 다시 말해서 노동개념에서 암시적으로 생산을의미하는 신체는 손과 머리이다. 여성의 자궁이나 가슴은 그 범주에끼지 못한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에서 다르게 규정된다. 인간의 신체 자체도 진정으로 ‘인간적인‘ 부분(머리와 손)과 자연적‘ 혹은 순전히 ‘동물적‘ 부분(생식기, 자궁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구분이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남성의 성차별주의 때문이라고할 수는 없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수단으로 직접 사용될 수 있고, 혹은 기계와 곧 연결될 수 있는 인체의 부분에만 관심이 있다. - P122

노동 개념에 숨겨져 있는 불균형과 생물학적 편향으로 지적할 수있는 또 다른 예는 광범하게 퍼져있는 성별노동분업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일들을 단순하게 배분하는 것처럼보이지만, 남성의 일은 진실로 인간적인 것(즉, 생각하고, 합리적이며, 계획되고, 생산적인 것 등등)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여성의 일은 다시금 기본적으로 ‘타고난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은폐하고 있다. 성별노동분업은 그 규정에 따르면,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활동‘ 사이의 구분으로 바꿔 쓸 수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남성노동자(즉, ‘인간)과 여성노동자(즉, ‘자연) 사이의 관계가 지배관계, 심지어 착취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숨기고 있다. 여기서 착취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구적인 분리와 서열화가 일어났으며, 소비자가 스스로는 생산하지 않으면서, 생산자의 생산품과 용역을 착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평등한 공동체였다면 생산자가, 세대를 달리해서라도, 결국은 소비자가 되었을 것이다. - P122

마찬가지로 애매한 생물학적 논의가 지배적 힘을 발하는 곳은 가족 개념과 관련한 부분이다. 이 개념이 유럽중심적이고 비역사적 방식으로 일반화되어 사용되면서 핵가족이 남녀관계들을 전체적으로 제도화하는 기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구조로 제시되었다. 또한 이 개념은 이 제도의 구조가 서열이 있고 불평등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있기도 하다. ‘가족 내의 동반자의식 혹은 민주주의‘라는 말은 이 제도의 본색을 가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생물적‘ 혹은 ‘자연적‘ 가족과 같은 개념은 특히 이런 비역사적인가족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이성 간의 성관계와 핏줄을 통한 자녀의 출산을 의무적으로 결합한 것에 기초한 개념이다.
몇 가지 중요한 개념에 내재해있는 생물학적 경향에 대해 이렇게간단히만 살펴보아도 이런 편향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체계적으로드러내는 것이 꼭 필요함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편향들이 불균형하고착취적인 사회적 관계들, 특히 남녀 사이의 관계들을 은폐하고 신비화시키고 있다. - P123

진화론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엥겔스는 이 아주 초기의 시기를 원시시대라고 해서 인간의 실제 역사와 분리시켰다. 엥겔스는 인간의 실제 역사는 문명과 함께 시작된다고 보았다. 역사는 충분히 성숙한 계급과 가부장적 관계와 함께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엥겔스는 인류가 어떻게 원시시대에서 사회의 역사 단계로 뛰어 오르게 되었는지에 답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는 변증법적인 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아직 완전히 역사시대로 들어오지 않은 원시 사회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진화의 법칙이 사유재산과 가족과 국가의 등장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 P130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과정의 산물이다. 역사적 단계 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다르게 규정되어 왔다. 이런 규정은 각 시대의 주된 생산양식에 기초해 있다. 이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유기적인 차이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물을 전유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역사 속에서 여성과 남성은 자신의 몸에 대해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모계사회에서 여성성은 모든 생산성의 사회적패러다임으로, 생명 생산의 주된 활동 원리로 해석되었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어머니‘는 오늘날의 의미와는좀 다르다.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모든 여성은 사회적으로 가정주부로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로 규정되고, 모성은 이 가정주부 신드롬의 부분이 된다.  - P136

이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볼 수 있으며, 사회적 상호작용 혹은 협동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은 첫 번째 생산수단일 뿐 아니라 첫 번째 생산력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몸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이에 따라 외부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는 동물과 다르게 생산적이다. 몸을 생산력으로 전유하면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는 광범한 결과들을 낳았다.
여성의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 외부 자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들 자체까지 포함한 자연에 대해 갖는 대상관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몸 전체를, 즉 손이나 머리만 아니라몸 전체를 통해 생산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몸을 통해여성은 아이를 생산하고, 이 아이의 첫 번째 음식도 생산한다. - P137

그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 여성과 같은 방식의 생산성을 경험할 수없다. 남성 몸의 생산성은 외부적 수단, 즉 도구의 중재 없이는 드러나지 못한다. 반면에 여성의 생산성은 도구 없이도 드러난다. 남성이 새로운 생명의 생산에 기여하는 것, 이는 항상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여는 도구를 통해 외부 자연에 작용한 오랜 역사적 과정과 이 과정에 대한 숙고 끝에만 나타나게 된다. 남성이 자신의 자연적 몸에 대해 가진 인식과 자신을 바라보는 인상은 외부 자연과 상호작용하는다양한 역사적 형태와 이런 작업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남성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인식, 즉 생산자로서의 인식은기술의 발명과 통제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구가 없다면, 남자man는 사람MAN이 아니다. - P144

남성의 성기와 남성이 다양한 시대 다양한 생산양식 속에서 발명해 온 도구 사이의 유사성을 연구하는 것은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것이다. 우리 시대 남성이 남근을 스크루드라이버(남성은 여성을 스크루‘라고 한다), ‘망치‘, ‘서류철‘, ‘총‘ 등으로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역항 로테르담에서는 남성의 성기를 ‘무역‘이라고 부른다. 이런 용어는 남성이 자연, 여성,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남성의 마음속에는 노동도구와 노동 과정, 그리고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 인식이 밀접히 연관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 P14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의 기술이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 계속 생산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성은 새로운 것을 생산했다. 한편, 사냥 기술은 생산적이지 않았다. 사냥에 적절한 도구는 다른 생산적 활동에 사용될 수 없었다. 돌도끼는 달랐지만, 활과 화살과창은 기본적으로 파괴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들은 동물을 죽이는 데만 사용되지 않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었다.
바로 이런 사냥 도구의 성격이 이후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들뿐 아니라 남성의 생산성이 더욱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기를 제공하는 사냥꾼이 공동체의 영양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그런 발전이 나온 것은 아니다. - P153

이런 비생산적이고 약탈적인 전유양식은 인간 사이의 모든 착취관계의 역사에서 패러다임이 되었다. 주된 메커니즘은 자율적인 인간 생산자를 타인을 위한 생산의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것, 혹은 그들을 타인을 위한 ‘자연 자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부장적 패러다임의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부장제는 지구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가부장적이었던 사회들에서 발전했다. 유대인, 아리아인(인도인과 유럽인), 아랍인, 중국인,
그리고 이들 각각의 거대 종교들 속에서 발전했다. 이들 문명들, 특히유대-유럽계 문명의 성장과 보편화는 정복과 전쟁에 기초한 것이다.
유럽이 아프리카의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가 약탈적인 유럽인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이는 또한 원시공산주의, 바르바리 Barbary상부 지역, 봉건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이르는 모든곳의 역사를 단선적이고 보편적인 과정으로 보는 개념은 가부장제에대한 우리의 분석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62

그러나 ‘자연화‘ 과정은 식민지 전체와 노동계급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여성 또한 자연으로, 자본가 계급의 후계자를 낳고 키우는 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성을 ‘야만적‘ 자연의 일부로 보았던 반면에, 부르주아 여성은 ‘길들여진 자연으로 보았다. 부르주아 여성의 섹슈얼리티, 그들의 생산적 자율성만이아니라 생식력은 부르주아 남성에 의해 억압받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부르주아 여성은 생계를 남성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여성이 길들여지고 남편의 소득에 의존하는 가정주부로 변모하는 것은자본주의 아래 성별분업의 모델이 되었다. 이는 여성, 모든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통제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은 여성의 가정주부화과정과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영역인 가정과 가족은 ‘자연, 사적이고 길들여진 자연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공장은 공적이고 사회적(‘인간적‘)인 생산의 공간이 되었다. - P167

마녀사냥은 여성의 성과 재생산 행위를 통제하는 직접적인 훈련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고, 여성의 생산성보다 남성 생산성의 우월성을 수립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녀사냥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적 자연의 사악함(악sin은 자연nature과 동의어이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성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만족할 줄 모르며, 언제나 정숙한 남성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이 아직은 성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심지어 성욕이 없는 존재로, 즉 19~20세기에 간주되었던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여성의 섹슈얼한 행위는 정숙한남성, 즉 재산의 상속자인 후손을 식별할 수 있도록 여성을 통제하고싶어 하는 남성에게는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자신의 딸과아내의 정숙을 지키는 것은 남성의 의무였다. 여성은 ‘자연‘이고 ‘악‘이기 때문에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다. 여성은 영원한 소수자가 되었다. - P169

오직 남성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인이 되고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자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기 위해, 남성은 구타나 다른 폭력적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Bauer, 1971). 여성의 사악한본성에 대한 모든 직접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은 여성에게서 다른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기능에 대한 자율성을 앗아가려는 목적과 경제 정치 문화적 영역에서 남성의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목적에 부합했다.
성적 자율성은 경제적 자율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성 치료사와 산파를 마녀로 내몰고 비난하면서 남성 의사가 전문직화되었던 사례는 여성 생산 활동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가장 일목요연하게보여준다. - P170

이 ‘문명화 과정‘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여성은 한 남성을 위한 가정주부이거나 자본가를 위한 임금노동자로, 혹은 둘 다로 훈련되었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에게 사용된 실제적 폭력을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내면화했다. 그들은 이를 자진해서 한 것으로, 사랑으로 규정했다. 자기억압에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였다(Bock/Duden, 1977). 이런 자기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적 이데올로기적소품을 교회, 국가, 가족이 제공했다. 여성은 노동과정의 조직(노동현장에서 가정을 분리하는 것), 법, 경제적으로 이른바 ‘부양자‘ 남성에게의존하는 것을 통해 이 제도에 구속되었다. - P170

이런 착취적이고, 쥐어짜내는,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자연에 대한대상관계는 가장 먼저 남성과 여성, 남성과 자연 사이에서 수립되었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다른 모든 가부장적 생산양식의 모델로 남았다. 자본주의는 이를 가장 정교하고 가장 보편화된 형태로 발전시켰다." 이 모델의 특성은 생산과정과 생산품을 통제하는 이들 자신이 생산자가 아니라, 전유자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른바 생산성은 타자 - 결국은 여성 - 생산자의 존재와 종속을 전제로 한다. 월러스틴이말한 것처럼, ‘.... 잔혹하게도, 노동력을 낳는 이들이 식량을 기르는이들을 부양하고, 이들은 다른 원료를 생산하는 이들을 부양하고, 또이들은 공업 생산에 관련된 이들을 부양한다‘(Wallerstein, 1974:86.
여기서 월러스틴이 빼놓은 것은 이들 모두가, 이 과정 전체를 결국은무기를 통해 통제하고 있는 비생산자들을 부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패러다임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비생산자가 다른 이들이 생산한 것을 전유하고 소비(혹은 투자)한다는 사실이다. 사냥꾼- 남성은기본적으로 생산자가 아니라, 기생자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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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Maria Mies, 1931~

독일 쾰른대학 사회학과 교수이다.
오랜 기간 인도에서 작업하였고,
1979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사회과학연구원〉에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60년대 말부터 여성운동과 여성연구를 활발히 해오고있다. 페미니스트, 환경과 세계 개발문제에 대해 여러 책과논문들을 써 왔다. 주요한 관심은 방법론과 경제학에서대안적 접근방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1993년 가르치는일에서 퇴임한 뒤부터, 여성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아틱(Attac)의 여성 네트워크인 〈페미니스트아탁>의 회원이다. 저작으로 인도여성과 가부장제』(Indian Women and Patriarchy, 1980), 『에코페미니즘』(창비, 2000, 공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동연, 2013, 공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등이있다.

옮긴이 최재인Jaein Choi, 1966~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19세기 후반 아프리카계미국인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여성과인종, 계급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서양여성들 근대를 달리다』(공저), 여성의 삶과 문화』(공저),『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역사인식』(공저), 동서양 역사 속의다문화적 전개양상』(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아름다운외출』, 『유럽의 자본주의』, 『히스토리』(공역) 등이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축적이 나의 주된 이론적 작업이기 때문이기도하고, 1986년에 했던 생각의 대부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 자연에 대한 폭력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왔다. 이런 폭력의 형태는 내가 1986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더 가학적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세계적 차원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폭력의 결과로는 기후 변화를 개선할 수 없고, 지구의 자원고갈과 원자력으로 인한 오염을 회복시킬 수가 없음을 오늘날 우리는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패러다임은 끝없는 자본축적을 추구하는데, 이는 진보와 "좋은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 P5

내가 오래전에 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몇 가지가 좀 더 추가되었을 뿐,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뭘 더 말해야 하는가.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더 악화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이 책이 나온 이래 24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내 분석이 여전히 유효한가? 나는 이전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고, 이 파괴적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방법에대해서도 여전히 같은 비전과 전망을 갖고 있는가? - P5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보면, 가난한 국가나 부자 국가나 상관없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지 않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혀 평등하지 않다. 왜 그런가? 몇몇 여성이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국가나정부의 수장이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목표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체제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에 여성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많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 체제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된 여성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성차별적·가부장적 문화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1980년 무렵 유럽과 미국의 페미니스트는 왜 여성의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자본가나 남성에게 여성의 노동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짜의 선의" 혹은 "사랑의 노동"이었다. 가정주부는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완전히 경제적으로 의존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임금을 받지 않으며, 그녀의 노동시간은 계산되지 않고, 의료보험도, 노령연금도 없다.  - P6

동시에 내 친구들과 나는 식민지민과 자연이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본은 그들의 "생산"을 아주 적은 비용으로 전용했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나 멕시코 같은 국가에서 젊은 여성은 서구 시장에 공급할 의류 등을 세계에서 가장 싼 임금을 받고 생산했다. 이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여성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가치가낮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방글라데시처럼 가난한 국가에서도 여성 노동은 더 저렴하다. 이곳에서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다. 오늘날 이런 심한 착취는 폭력 및 가장 잔혹한 노동환경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노동환경은 그들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최근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의류공장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화재가 이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화재로 수천 명이 사망했는데, 그 대부분이 어린 여성이다. 이런 생산관계로 이익을 챙기는 자는 대기업, 유명한 국제기업이며, 이 중에는 한국 기업도 있다. 이회사들은 국제노동기구의 노동법도 의식하지 않는다.  - P7

오늘날 사실상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는 세계적 자유시장이 빈곤을 없애고,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와계급 사이의 불평등을 없앨 것이며, 자본재와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세계를 개방하겠다고 설교한다. 신경제 주창자들은 "신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해 공정한 경쟁의 장을 창출할 것"이라는 공약을 내놓았다. 신자유주의의 주요 원리는 세계화, 자유화, 사유화, 일반 경쟁이다. 이런 원리는 국가가 자국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이를 이윤을 추구하는 초국적 기업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새로운 원리는 노동권, 환경보호법, 여성과 아동의 보호, 노동 안정성, 일자리 안정성 등을 포기하게 만든다.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철도, 우편, 전화통신 등 중요한 서비스업들이 사유화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경제원리는 세계적 합의 아래 자리를 잡았고, 세계무역기구WTO는 이런 합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 P9

나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단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체제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체제는 최소한 5천년의 역사를가진 것으로 전 세계의 모든 ‘위대한 문명들과 문화들을 관통하며 조직했다.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여성이 함께 했던 ISS의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 과정에서도 이 체제의 역사적 유구함과 지리적광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체제가 여러 문화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일부는 다른데보다 좀 더 잔인하다. 이는 구조상 지금도 여전하다. 이 프로그램의 학생들이 이를 이해해 가면서,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다. "문화는 다르지만, 투쟁은 함께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문제는기원과 다양함에 상관없이 보통의 시공간을 곧장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해주면서, 동시에 이런 문제를 던져 준다. ‘이런 반여성적인 체제를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P18

이런 현상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는 통념과 다르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자본의 축적 또는 지속적인 성장은 거대한 인간적 그리고 인간 이외의 요소들이 식민화되는 조건 아래에서나 가능했다. 여성,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자연과 사람과 토지가 지금까지의 주된 식민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축적과정의 지하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다. 우리는 빙산의 비유를 사용했다. 자본과 임금노동이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보이는 일각이었다. 여기서 임금노동은 국민총생산에 포함되고, 노동계약으로 보호받는 노동이다.
그러나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만들어 낸 생산은 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 P23

한 페미니스트가 쓴 책이 남성의 주목을 받기까지는 어느 정도의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남성이 읽기 시작하자 여기에서도 평가는 거부 아니면 찬사로, 극단화되었다. 분명히 이 책은 독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감정과 신념을 건드렸고, 이에 반응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당혹‘Betroffenhein을 만들어냈다. 내가 운동 초기부터 당혹이라는 용어를사용한 것은 페미니스트 연구와 일반적으로 실증주의적 주류 연구의무관심하고 관여하지 않는 태도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독일어 ‘당혹‘Betroffenheit은 영향을 받고 관심을 둔 상태만이 아니라, 고심하면서 무언가 하려는, 행동하려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이 책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 P24

선진공업화된 사회들에서 사는 사람들은 음식이 여전히 땅에서나오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토지가 식량 생산과 식량 안보의 기초라는 사실을 잘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토지는 ‘저개발국가들에게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개발‘ 사회에서도 토지에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다른 충분히 성장한 경제 모델을 보지 않는 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패러다임을 꿈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 그들 자신의 창의성과 에너지를 발달시켜 줄 과정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된 집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안정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나는 자급적 삶에 대한 전망이 더 나은 대안이며, 이 대안은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을 선진공업화된 세계의 사람들에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고있다. 대안은 없다는 티나TINA 증후군에 사로잡히는 대신, 하늘에서떨어지는 초인을 기다리거나 기술을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여기며 기다리는 대신, 자급적 삶이라는 대안SITA, Subsistence Is The Alternative[자급이 대안이다)을 가능한 지향점으로라도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P35

여성해방운동은 생태운동, 대안운동,
평화운동 등 가장 광범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또한 가장 논란이 많은 신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그 존재 자체에서부터 민중속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생태문제‘, ‘평화이슈‘, 제3세계의 종속 문제에 대해서는 침착하게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토론을 이끌어갈 수 있어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남성과 그리고 많은 여성이 늘 지극히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각각의 개인에게 이는 민감한 이슈이다. 이는 여성운동이 다른 운동들처럼 국가나 자본가 등 외부의 적이나 기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 남성과 여성 사이의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직접 민중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 P46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이를 피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남녀관계의진정한 본질을 스스로 인식해가는 것은, 돈벌이와 권력놀음과 욕망이 난무하는 냉정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지대로 남아있는 마지막 섬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스트는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한 침묵의 공모를 과감하게 깨뜨리려는 이들이고, 이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은 이들이다. 그러나 이런 남성 지배 체제에 ‘성차별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일정한 이름을 부여하며 목청을 높이는 것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양면성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분열을 강화시킬 뿐이다. - P47

대신 서구와 비서구 여성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크게 강조된다. 오늘날 이런 식민 관계는 국제노동분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 관계는 백인 페미니스트의 의식에서도 종종 사라지곤 한다. 이 백인 여성의 삶 수준은상당 부분 온존하고 있는 식민지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백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도 이를 종종 망각한다. 이들이 ‘흑인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고 해서 이들이 자동적으로 흑인 세계에 사는 이들과 한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Amos &Parmar, 1984 참조). 흑인 여성 역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따라, 식민지와 계급을 따라 구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계급 구분은 성과 인종을 논할 때 자주 망각된다. 현 시점에서 ‘흑인‘, ‘갈색‘ 혹은 ‘황색‘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지키는 이들에게 큰 희망이다. ‘흑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 중 일부는 ‘백인 세계‘에 사는 일부 백인 여성보다. 그리고 특히 백인 세계와 흑인 세계에 사는 대다수의 흑인 여성보다 나은 삶 수준을 누리기도 한다. 우리가 도덕주의와 개인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표면 아래를 보는 것, 성적·사회적·국제노동분업의 상호작용을 물질적이고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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