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 에세이는 『빼앗긴 자들』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 ‘어슐러 K. 르 귄의 「빼앗긴 자들」에 나오는 새로운 유토피아 정치학」에 서문으로 쓴 글이었어요. 전 이 책에 실린 논의 대부분이 대단히 지적이고 전문적일 뿐만 아니라 친근하고,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감정도 이용한다는 사실에 좀 놀랐어요.
저 역시 아이디어 자체에 대해 악감정은 없어요. 저도 결국엔지식인인 걸요. 하지만 아이디어가 교훈이 되거나, 독선이 되거나, 그냥 의견이 되면 성가시죠. 제가 맞서려고 애쓰던 건『빼앗긴 자들』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에요. 그 작품이 유독 아이디어밖에 없는 것처럼 다뤄지긴 하지만, 제가 반대한 건 SF를 포함해 모든 문학을 지적으로만 분석하려 드는 경향이에요. 문학을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라거나 "저자의 메시지는 뭘까?" 같은 질문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잖아요. (격분의 한숨을 내쉰다) 어떤 예술이든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는 언어적 사고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 안에서 벌어지는다른 것도 비평에 포함해야만 해요. 어떤 소설이나 시도 분명한 한 가지 의미만으로 환원할 순 없어요. - P98

이런 사고방식은(디킨스는 그 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다뤘어요)아이의 성장 전체에 손상을 입혀요. 상상력이란 우리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니까요. 상상력을 아끼거나 방해하거나 업신여기는 건 끔찍한 짓이고, 무엇에 대해서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어리고 성장 중인 정신에는 특히 해로워요. 아이들은 상상하고, 상상과 실제를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전 아이들이 대부분의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별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이들은 동화를 알아요. 그리고 거짓말도 알 때가 많아요. 어쨌든 이성과 상상, 둘 다 훈련이 필요하지요. 몸을 움직일 때처럼 이성과 상상도 운동을 해야 해요. 지금도 합리적인 사고는 어느정도 훈련하지만, 상상력은 미국의 교육에서 점점 설 자리를잃고 있어요. 이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에요. - P101

「사용 설명서」 중에서시인이 대사로 지명됩니다. 극작가가 대통령으로선출됩니다. 새로 나온 소설을 사려고 건설노동자들이 사무장들과 같이 줄을 섭니다. 어른들이 전사원숭이들, 애꾸눈 거인들, 그리고 풍차와 싸우는 미친 기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길잡이와 지적인 도전을 찾습니다. 문해력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글쎄요, 어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상상력이란 보통 TV가 고장 났을 때나 쓸모 있을지 모르는 뭔가로 간주되거든요. 시와 희곡은 실제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소설은 학생과 주부,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읽는 겁니다. 판타지는 어린아이와 모자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고요. 문해력이란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는 거랍니다! 저는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는 엄지의 유용성을 넘어설 정도죠.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미국만은 아니에요. 유럽 문학도 포함이죠. 문제는 우리가 예전처럼 다른 동물들과 어울려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난200년간 관계가 엄청나게 달라졌죠. 예전에는 동물들에게서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삶의 일부였고, 밭에서 함께 일하는동료로서나 식량 공급원으로서, 양털 공급원으로서 인간의복지에 꼭 필요한 존재였죠. 지금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까마득한 거리에 두고 얻어요. 지금은 다른 동물과 한방에 있지도못하는 사람들이 있죠. 100년 전이었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전 정말 모르겠어요. 아마 그 상황을 어떻게든좋아하거나 아니면 참는 수밖에 없겠죠. 요새 아이들은 인간외에 다른 생물은 만져본 경험도 없이 성장해요. 우리가 소외된 건 당연하죠. 우린 지구상에 다른 생물이라곤 존재하지도않는다는 듯이 도시에 살 수 있어요. 사람들이 무관심해지고,
종 하나쯤은 멸종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놀랍지 않아요. 우린 계속 다른 존재를 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요.
전 동물을 다루는 문학과 어린이책 같은 문학이 그들과 최소한의 접촉이라도 하기 위한 창의적인 방법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아주 중요하고요. 그렇지만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문학계 사람이 많진 않아요. 문학계 사람들은 동물을 다룬다면 감상적인 이야기일 거라고 추측해버리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감상주의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나쁜 죄악이라고 생각해요. - P104

「책 속의 짐승」 중에서


왜 대부분의 아이와 많은 어른은 진짜 동물과 동물에 대한 이야기 양쪽에 반응하고, 우리의 지배 종교와 윤리들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이라고만 보는 존재들에게 매혹되고 또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할까요. 산업사회에서는 예전처럼 우리와 일하지도 않고, 그저 우리 식량의 원재료나 우리에게 이득이 될과학 실험 대상, 동물원과 TV 속 자연 프로그램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진기한 존재들, 우리의 심리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두는 애완물일 뿐인데?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동물 이야기를 주고 동물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는 건, 우리가 아이들을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열등한 존재로, 정신적인 ‘원시‘인으로 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린 애완동물과 동물원과 동물 이야기들을 어린이가어른으로, 배타적인 인류로 발전하는 길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보는 거죠. 지성도 없고 무력한 아기에서 시작해서 지적인 성숙과 지배의 영광을 획득하기까지 거쳐야 할 사다리쯤으로요. 존재의 대 사슬만물이 가장 낮은 무생물부터 가장 높은 신까지 계층적으로 연결되어질서를 이룬다는 개념이라는 계통 발생의 단계를 반복하

는 개체 발생이랄까요.
하지만 그 아이가 찾는 건 뭘까요. 아기 고양이를보고 흥분하는 아기, 「피터 래빗』을 또박또박 읽는여섯 살짜리 블랙 뷰티』를 읽으면서 우는 열두 살짜리라면? 문화 전체가 부정하는데 그 아이는 알아차리는 게 무엇일까요?

네이먼

그 후에 작가님은 "우리는 세상을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소유물만으로 축소했지만, 그 세상에 맞게 태어나지는 않았다"고하셨죠. 마치 비극적인 공포소설 같네요. 우리가 어떤 세상을만들어놓고서, 우리에게 잘 맞지 않고 우리 스스로만을 이야기하는 그 세상에 대한 문학을 만들다니요.



르 귄


우리가 그 세상에 살도록 맞춰지기는 했죠. 하지만 그 세상은우리가 살 수도 있을 세상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일부예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공포소설 느낌은 덜하고 실존적인 실수라는 느낌이 더해지니까요. - P109

사라지는 할머니들 중에서


예외
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경우는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아주 잦다. 표준은 남성이다.
여성은 표준의 예외, 표준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이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그녀가 예외임을 보여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않는다. 어떠한 ‘컬트‘의 대상이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마음을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이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

로가 기념비적으로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후대의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의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르 귄


오, 데이비드. 그건 완전 벌집을 쑤시는 질문이에요. 사람들은 수십 년째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죠.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는가? 제 아버지는 인류학자였고 이 질문과 정면으로 부딪쳤어요. 이해하려는 시도는언제 동의 없는 가져다 쓰기가 되어버리는가? 이 문제는 물론 백인이 인디언 권은 당사자들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이유에서 ‘북미 원주민‘이라는 표현보다 인디언이라는 표현을 고수했다의 목소리로 쓸 때 극심하게 눈에 띄었죠. 페니모어 쿠퍼 19세기 작가로, ‘개척자』 『모히칸족의 - P116

최후』 『대평원』을 포함해 5개의 소설을 엮은 ‘가죽 스타킹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리즈는 특히 백인과 인디언의 관계를 그린다 때부터요. 그 작가들은, 당시에는 문학적인 목소리가 없었지만 분명 자기들만의구술 문학과 자기들만의 목소리와 자기들만의 견해가 있었던인디언들의 목소리를 멋대로 가져다 썼어요. 인디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죠. 다 백인들을 통해 해석되어야 했어요.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요. 여자들에게 문학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목소리가 없었던 수천 년 동안은 남자들이 여자를 대변했죠. 그것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하지만 좋아요, 그렇다고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다는 데까지정치화해버리면, 난장판이 되어버려요.  - P117

그러다 보면 아무도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해야 하니까요. 이게 다른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되면 또 꼬이지만요. 물론 다른 동물에게 목소리는 없죠. 원래 그렇게 타고났고, 우리처럼언어를 쓰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린 어느 정도까지 대변할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정도까지밖에 안 돼요. 그렇다고 우리가 동물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동물에게감정이 없어서라거나, 우리가 동물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동물이 생각을 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행동과학자들처럼 굴 필요는 없죠.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처럼,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할필요는 없어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는 다른 존재의마음을 상상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상대를 멋대로 이용하지 않도록, 매 걸음을 아주아주아주 조심해야죠.  - P117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반으로 추론할때도 많은데, 사실 그게 애트우드의 SF가 하는 일이죠. 지구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 특히 정치적인 방식을 가져다가 그걸 기반으로 추정한 미래를 그리면서 끔찍한 가정, "세상에, 이렇게 되고 말 거야"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지만 사실 그건오래된 SF 기법이에요. 왜 자기 작품이 SF라고 불리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몇 가지 이유를 상상하기가 어렵진 않죠. 분명히 출판사에서도 애트우드가 ‘장르 작가‘라고불릴까 봐 싫어할 테고요. 잘 팔리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런 우둔한 이유에 영향받기에는 너무 영리하고 복잡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게 서로를 좋아하는 작가들로서 우리가 계속 나누는 대화에 가끔 굉장한 불편을 초래하죠. 그냥, 제가 SF를 쓸 때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내가SF를 쓴다는 것도 안다고만 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전 그 작품에 다른 이름이 붙게 하지 않을 거라는 말도요. 다만 그건 제가 SF를 쓰지 않을 때도 똑같아요. 제가 ‘SF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SF가 아닌 작품을 SF라고 불러주는 것도 원치 않아요.
이런 범주가 개인적으로 제게는 아주 많이 중요하거든요. 전언제나 애트우드의 책을 리뷰할 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언제나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하죠애트우드는 나중에스스로가 SF를 쓴다는 점을 시인했고, 르 귄과 이 문제를 두고 주고받은 대화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 P124

진지한 문학에 대하여밤중에 뭔가가 그녀를 깨웠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그런데 누구지? 왜 신발이 젖었지? 비는 오지 않았는데, 저기, 다시 그 무겁고 젖은 발소리다. 하지만 몇 주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는데, 폭염만 계속됐는데, 갑갑한 공기와 곰팡이 냄새, 아니 썩은 내인가, 아주 오래된 살라미 아니면 초록색이 되어버린 간 소시지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썩은 내. 아, 또다. 삑삑 소리가 나는 느린 발걸음, 그리고 썩은 냄새가 더 강해졌다. 뭔가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썩어가는 살을 뚫고 나온 발꿈치뼈가 부딪치는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건 죽었는데, 죽었단 말이야! 저주받을 셰이본 다른 진지한 작가들과 힘을 합쳐 그것의 오염된 손길에서 진지한 문학을 구하기 위해 묻어놓았더니 그걸 무덤에서 끌고 나왔어. 그 텅 빈 데다 뾰루지투성이인 얼굴, 썩어가는 눈동자의 무감각하고무의미한 눈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셰이본 그 바보는 뭘 한다고 생각한 거야? 진지한 작가들과 진지

한 비평의 끝없는 의식들에 관심도 안 둔 거야? 공식적인 추방 의식들에 반복된 저주, 심장을 관통하고 또 관통한 말뚝들, 신랄한 비웃음, 무덤 위에서끝도 없이 춘 엄숙한 춤들에 하나도 관심을 안 뒀어? 그 작자는 야도 Yaddo, 뉴욕의 예술가 커뮤니티의 순결을 보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사이파이와 반리얼리즘 소설을 구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도못 한 거야? 코맥 매카시는, 비록 터무니없이 애매한 어휘를 훌륭하게 사용해대는 걸 빼면, 그의 책에있는 모든 것이 홀로코스트 이후에 나라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다룬 많고 많은 초기 SF 작품들과 놀랍도록 흡사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사이파이 작가라곤 할 수 없다는 걸, 코맥매카시는 진지한 작가고 그러니까 정의상 장르를 쓴다는 품위 떨어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야? 셰이본은 어떤 미친 멍청이들이 퓰리처상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주류‘라는 말의성스러운 가치를 잊어버렸단 말이야? 아니다. 그녀는 삑삑 젖은 발소리를 내며 침실까지 들어와서 이제는 그녀를 굽어보는 그 물건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로켓 연료와 크립토나이트슈퍼맨의 고향 크립톤에서 온 물질로, 슈퍼맨의 힘을 약화한다의 악취가 풍기고, 세찬바람 속 황야의 낡은 저택처럼 삐걱거리며, 뇌는 과일처럼 속에서부터 썩어가고, 두 귀에서 작은 회색

세포들을 뚝뚝 흘리는 그 물건을 하지만 그녀의 주목을 요구하는 그 물건의 힘은 강력하고, 그 물건이손을 뻗자 그녀는 반쯤 썩은 손가락 하나에 낀 타는 듯한 금반지를 보았다. 그녀는 신음했다. 어떻게그 물건을 그렇게 얕은 무덤에 묻고는, 버려두고 그냥 걸어올 수가 있었을까? "더 깊이 파요, 더 깊이파!" 그렇게 외쳤건만, 그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자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꼭 필요한 다른 진지한 작가와 평론가들은 지금 어디 있나? 그녀의 『율리시스』 책은 어디있을까? 침대 옆 협탁 위에는 독서등을 받치는 데쓴 필립 로스 소설책 한권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얇은 책을 들어 끔찍한 골렘히브리 신화에서 사람의 형상을하고 움직이는 존재. 현대 판타지에서는 종종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흙 인형이나 괴물을 가리킨다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그걸로는 부족했다. 필립 로스도 그녀를 구할 순 없었다. 괴물이 비늘 덮힌 손을 그녀에게 얹자 반지가타는 석탄처럼 그녀를 지졌다. 장르가 그녀의 얼굴에 시체의 입김을 불어넣자 그녀는 지고 말았다. 그녀는 더럽혀졌다. 죽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그녀는이제 결코 문예지 집필 의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혜자


일생을 연기에 바친 배우는 시청자와 관객의 마음만이 아니라 시대의마음을 사로잡는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면서 모두의 희망과 아픔과 욕망이 그녀를 통해 경이롭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찬탄을 받는 스타가 되지만 그만큼 그녀는 거대한 고독과 허무 속에 놓인다. 그리고 그고독과 허무가 토대가 되어 스크린 속에 또 다른 얼굴로 재탄생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김혜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부터 배우를 꿈꾸었으며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길」을 본 후 젤소미나 같은 역을 마음에 품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 KBS 공채 탤런트 1기에 합격했으나 자신의 연기에 실망해 이내 그만두고, 도망치듯 떠나 결혼해 첫아이를 낳고육아에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스물일곱 살 때 연극으로 다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의 대표적인 극단 ‘실험극장‘에서 연기의 기본부터 다시 배웠으며, 열망에 훈련을 더한 시기를 거쳐 ‘민중극장‘, ‘자유극장‘ 등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연극계의 신데렐라‘ 로 떠올랐다. 이후 1969년 개국한 MBC에 스카우트되어 본격적으로TV 드라마에 출연하며 수많은 배역으로 살아왔다.
「전원일기」 「모래성」 「겨울 안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뭐길래] [엄마의 바다] [여 ]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엄마가 뿔났다] ]청담동살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 [우리들의 블루스」등 10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19 그리고 80」 「셜리 발렌타인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주인공 역을 했으며, 영화로는 「만주」 「마요네즈」 「마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비록 현실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더라도 그 사이에서 바늘귀만 한 희망의 빛이 보이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연기를 하는동안 살아 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보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1966년제2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MBC 연기대상,
KBS 연기대상, 마닐라 국제영화제, 부일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 등에서수차례 수상했으며,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대상 4차례, 여자최우수연기상 4차례를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것은 연기밖에 없습니다. 배우나 정치인이나 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자고 하는 것인데, 정치보다는 연기를 통해 줄 수 있는희망이 더 크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나는 배우가 훨씬 더 좋습니다.
하지만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이 많습니다. 나이가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잠이오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수준은 나날이 높아져 가는데 정치인들은 왜 맨날 그 모양일까요? 무식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조건 어거지를 쓰고 선동을 해서 국민을 갈라치기해한쪽의 표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국민이 몹시 불편해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불안해한다는 걸. - P353

우리가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를 논하기 전에 정말 이 사람들이 나라를 생각하나, 이 사람들이 정말 통치 철학이 있는 사람들인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자신이 저지른 짓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패거리들이 모여 그 거짓말을 옹호합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 패거리끼리 나눠 먹으면서 나라를 망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가장 저질 드라마를 - P353

보는 것 같습니다.
배우는 훌륭한 대본이 있어야 빛이 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본도 형편없고 출연진도 형편없습니다. 그냥 삼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 철학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런걸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초보 작가가 써도 저렇게 쓰지는 않습니다. 비서들이고 측근들이고 다 있는 사람들이, 나랏돈으로 월급 주는 보좌관이 아홉 명이나 된다는 이들이 형편없는 드라마를 매일 쓰고 있고, 형편없는 대사를 매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연기밖에 모르는 국민이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식할 수가 있고, 저렇게까지 생각이 없을 수가 있나.
보는 사람이 창피할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얼굴 들고 다니는 거보면 수치심도 없고 부끄러움을입니다. - P354

문제는 저 드라마를 안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국민의 미래가 달린 일이니까. 더구나 피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행세하는 자들이니까 더욱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돈으로 밥 먹고 헛소리하는 것은 자유이니까 뭐라 할 수 없지만, 다 국민 돈을 물쓰듯 쓰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보기 싫은데 안 볼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이 나라에 태어난 숙명일까요?
뛰어난 영화, 뛰어난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감동을 주는 예술입니다. 관객을 매혹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나 - P354

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하는 대사가 관객을 창피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감동과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선동하고 거짓말하고, 자신이 한 일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되지도 않는 연예인과 소위 작가라는 자들까지 가세해편가르기를 부추깁니다. 코미디에 빗대는 이들도 있는데, 그것은 코미디라는 장르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사악한 코미다를 하는 자들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 P355

그러면서도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는 게 나는 너무 감사합니다. 곧 망할 것 같은데 이렇게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 국민이성실하게 살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침에 보면 출근길에 그렇게차가 막히는데도 매일 출근하고,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그런사람들의 힘 덕분입니다. 그 마음이 합쳐져서 나라가 지탱되고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큼 머리가 있고, 지성이있고, 철학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정치를 겪고 전쟁을치르면서 진정한 애국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문회나
"국정감사 같은 것을 보면 유치해서 볼수가 없습니다. 저들은절대로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봐 줄 수가 없는 하류인생들입니다. 정당정치가 패거리 정치라는 의미는 아닐 텐데, 웃기는 게 아니라 슬픔 뿐입니다. - P355

사람이 근본은 있어야 합니다. 설령 가난하게 자랐어도 사람의 근본을 잃지 않은 사람이 정치에 나서야 합니다. 국민들은계속 마음이 허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누가 옳은가,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바로 서고 앞으로 나아가나, 이러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하는 짓을 보면 ‘나도 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저럴래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나만 그런 걸까요? 눈 가지고 귀 가진 사람은 정치인이라는 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세운 나라인데, 얼굴 두꺼운 인간들이자기 패거리들의 권력 유지만을 위해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저 정도는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면서본 가장 무능력하고 질 낮은 사람들입니다. 기회주의적이고 후안무치한 연기를 하는 데는 대종상 감입니다. - P356

리젯 우드워스 리스라는 시인이 쓴 ‘삶에 대한 작은 찬가‘라는 시를 벽에 붙여 놓고 가끔씩 소리내어 읽습니다.


살아 있음이 기쁘다. 하늘의 푸르름이 기쁘다.
시골의 오솔길이, 떨어지는 이슬이 기쁘다.
개인 뒤엔 비가 오고 비온 뒤엔 햇빛난다.
삶의 길은 이것이리, 우리 인생 끝날 때까지.
오직 해야 할 일은 낮게 있는 높이 있든
하늘 가까이 자라도록 애쓰는 일.


나는 살구꽃 필 때가 좋습니다. 커다란 나무에 조그만 꽃들이 자욱하게 서려서 멀찌감치 서서 보면 분홍색이 연하게 떠오릅니다. 한 2, 3일 행복하게 해 주고 나서, 우리가 모르는 미풍에도 후룩 집니다. 무게도 안 느껴질 듯한 자그마한 새가 앉아도 떨어집니다. 눈송이보다 더 가벼운, 손톱만 한 나비들이 내려오는 것처럼, 그리고 곧이어 라일락이 한창입니다. 담 밖으로가지가 나도록 라일락을 많이 심었습니다.  - P364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다똑같은 현상이 일어날까요? 세상에서가장 아름다운 사람도,
볼품없는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 이게 나이를 먹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약간 슬프기도 하고 약간 기쁘기도 합니다.
밤에 잠을 푹 안 자서 그런지 불안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쓸쓸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밀려드는 감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며 대본을 쓰고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그 불안감을 밀어냅니다. - P366

 ‘끝나는 날까지 단정하게 살리라.‘라고 피곤하고 귀찮아서 흐트러져 있고 쓰러져 있다가도 ‘아니야, 누가 보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도 단정하게 사는 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 하면서 힘을 내어 일어납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싶습니다.
배우는 속옷도 잘 갖춰 입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사고가 나거나 갑자기 죽었을 때 병원이나 사람들이 내몸을 수습해줄 때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귀찮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를 단정히 합니다.
- P367

이제는 실수하면 만회할 기회가 별로 없는 나이입니다. 매일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삽니다. 배우로서 마지막 생을 잘끝마치고 싶습니다. 인생 고비 때마다 ‘이만하면 감사하다‘며나를 다독였습니다.
배우는 죽지 않으면 연기해야 합니다. 누구도 내 역할을 대체할 수 없으니까. 링거 맞고 촬영장에 나간 적도 수없이 많고, 빙판에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병원에서 녹화했습니다. 대중에게 늘 그리운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소망입니다. 연기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 연기하는 것,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 두 가지만으로도 벅찹니다. 둘 다 잘마무리하고 싶습니다. - P370

늙어 가는 사람은 늙음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김남조 시인의 이 시를 좋아합니다. ‘자책과 놀며‘라는 제목의시입니다.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자책한다
나태와 안일 그 피부병을
자책한다

이다지 감미로운 - P370

시간 죽이기를
자책한다

미지근한 온도
희석된 긴장
절망보다도 무개성한 허탈을
자책한다

달력엔
자책의 날짜들만 잇달아
숙달 외길을 달리는
자책 취미를
자책한다

많지 않은 세월에
자책과 노느라
나의 밤낮이 바쁘다
하여 바쁘게
자책한다 - P371

그리고 저녁이 옵니다. 3층 내방 창문 너머로 저녁이 오는풍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옅은 색조의 어둠이 점점 짙어져 가면서 나중에는 나무들도 꽃들도 그 어둠에 몸을 맡깁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연약하고, 또 강하게.
나를 깨우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연기할 때가 아니면 이렇게 늘쩍지근하고 게으른 사람인데, 그럴 때마다 내 생각을깨우쳐 주고, 자극을 주는 분들이 있어 왔습니다. "김혜자, 일어나!" 하고 말해 주는 것 같은 이들이 나를 정신나게 하고움직이게 하는 사람들이 살다 보면 알게 됩니다. 고비고비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살게 했구나 하는 것을. ‘아, 정말 기가 막힌다. 신은 나만 보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어떻게 굽이굽이마다 고마운 사람들을 보내 주셨을까?‘ 하고 깨닫습니다. 내가 일부러계획을 한 것도 아닌데, 나를 생각해 주고 끊임없이 일을 하게해 주는 사람들, 살아야 할 이유를 갖게 해 준 그 사람들이 얼 - P372

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인생은 기억할 단 하루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많은 아름다운 기억들로 빛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생을 살았다생각합니다. 나는 참 축복받은 배우이구나 합니다. 언제까지가나의 삶일지는 모르지만, 남은 삶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실하고 아름답기를 바라봅니다. 그리 해 주시기를 신께 기도하며 창을 닫습니다. - P373

김혜자


일생을 연기에 바친 배우는 시청자와 관객의 마음만이 아니라 시대의마음을 사로잡는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면서 모두의 희망과 아픔과 욕망이 그녀를 통해 경이롭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찬탄을 받는 스타가 되지만 그만큼 그녀는 거대한 고독과 허무 속에 놓인다. 그리고 그고독과 허무가 토대가 되어 스크린 속에 또 다른 얼굴로 재탄생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김혜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부터 배우를 꿈꾸었으며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길」을 본 후 젤소미나 같은 역을 마음에 품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 KBS 공채 탤런트 1기에 합격했으나 자신의 연기에 실망해 이내 그만두고, 도망치듯 떠나 결혼해 첫아이를 낳고육아에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스물일곱 살 때 연극으로 다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의 대표적인 극단 ‘실험극장‘에서 연기의 기본부터 다시 배웠으며, 열망에 훈련을 더한 시기를 거쳐 ‘민중극장‘, ‘자유극장‘ 등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연극계의 신데렐라‘
로 떠올랐다. 이후 1969년 개국한 MBC에 스카우트되어 본격적으로TV 드라마에 출연하며 수많은 배역으로 살아왔다.
「전원일기」 「모래성」 「겨울 안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뭐길

‘엄마의 바다 「여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엄마가 뿔났다」청담동살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 우리들의 블루스」등 10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19 그리고 80」 「셜리 발렌타인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주인공 역을 했으며, 영화로는 「만주」 「마요네즈」 「마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비록 현실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더라도 그 사이에서 바늘귀만 한 희망의 빛이 보이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연기를 하는동안 살아 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보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1966년제2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MBC 연기대상,
KBS 연기대상, 마닐라 국제영화제, 부일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 등에서수차례 수상했으며,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대상 4차례, 여자최우수연기상 4차례를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삼십 대 끝자락이던 때, 혜자 님과 산으로 들로 긴 여행을 다녔습니다. 영화 ‘마더」촬영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덕분이었는데, 그만큼 저나 촬영감독, 프로듀서 모두 아름다운 로케이션 찾기에 한껏 욕심을 낸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완성된영화를 보았을 때, 모두가 단번에 깨닫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 최고의 풍광은 무엇보다도 혜자 님의 얼굴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카메라는 점점 더 혜자 님의 커다란 두 눈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는것을. 그 신비로운 두 눈을 통해 그분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라는 식의 상투적인표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 그분의 두 눈이 어떻게 시네마스코프의 드넓은 캔버스를 집어삼켜 버리는지 카메라를 통해 생생히 지켜보았습니다. 경이로웠습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칭송해 온 혜자 님의 명연기에 대해 제가 굳이 어떤 말을덧붙일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그 놀라운 섬광 같은 순간들이 필름에 담겨지기도 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맨눈으로 목격했다는 것은 저에게 분명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혜자 님의 눈빛에 어울리는 맑고 깊은 이야기를 써낼 수 있기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 봉준호(영화감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품을 선택할 때는, 그 여자가 지금 현실이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희망의 빛이 보이는 역을 했습니다. 보는 사람들을절망에 빠뜨리는 역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삶에 절망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내가 맡은 역으로 그 절망을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절망적이어도 저 멀리 희망이 보여서 비집고 나올 수 있는 그런 역을 했습니다. 형편없는 몰골의 역이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 여자에게 희망이 기다리고 있나?‘
그것을 따졌습니다.
누구나 날개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날개는 누가 달아 주지않습니다. 내 살을 뚫고 나올 뿐입니다. 내 어깨에서 얼마나 아프게 나왔겠는가, 그 날개. 등가교환과 같은 것입니다. 날개깃이살을 뚫을 때 얼마나 아프겠는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이되고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뚫고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 P138

하지만 모든엄마는 나의 일부가 확대된 것입니다. 「겨울 안개」는 암에 걸려가족들 사랑 속에 죽는 엄마였고, 「사랑이 뭐길래」는 호랑이같은 남편 밑에서 쥐여사는 엄마였습니다. 장미와 콩나물은무식하지만 경우 바른 엄마였습니다. 그리고 마더」는 아들을보호하기 위해 모성이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차갑고 텅 빈 엄마였습니다.
「전원일기」 덕분에 나는 많이 성숙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원일기」가 내 인생에 나타나 준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잠깐의 배역을 맡았던 사람들이든 끝까지 함께한 연기자들이든, 최불암 배우나 고두심 배우, 김수미 배우든모두가 내 연기 인생을 관통한 만남이었고, 최고의 만남이었습니다. 나를 포함해 그들 모두가 지금도 양촌리에 가면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또 어떤 때는, 우리가 이 다음에 죽으면 어딘가에서 다 모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함께 다시 만나 이번 생에서 우리가 한 「전원일기」를 이야기하면서, 그때 참 행복했다고 웃으며 말할 것 같습니다. - P147

그래서 내가 대발이 엄마 역을 맡고, 점잖은 역은 윤여정 배우가 맡았습니다. 윤여정 배우는 뛰어난 연기자라서 그 역을훌륭하게 해 냈습니다. 나는 참으로 신에게 감사합니다. 얼마나나에게 이 역저역을 시키셨는지.
감정적으로는 김정수 작가의 작품이 더 순해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김정수의 작품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연기자로서는 단연 김수현 작가의 작품을 선호했습니다. 김정수 작가도 당연히 작가이니까 극단적인 면이 있지만, 그이는 그것을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표현됩니다. 김수현 작가는 박박 긁고, 할퀴고, 몸서리쳐지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두 여자가 막상막하입니다. 두사람 덕분에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생각하면 배우로서 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여자입니다. - P212

나에게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며 모든 것입니다. 배우는
"이만큼 하면 됐다.‘거나 ‘이 정도면 성공했다.‘라고 멈춰서는 안됩니다.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서 해야 합니다. - P213

나, 아들, 딸, 또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그 사람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죽을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 다정했을 것이고, 한 가지라도 더 신경 써 주었을 것입니다. 걱정도 덜 끼치고, 떠날 때 내 염려 안 하도록 자립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죽으리라는 생각을 어떻게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바보 같은가요? ‘어, 정말 이 사람이 이제 세상에 없네.
하고 느끼게 할 줄 몰랐습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떠났을 때 충격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하고.
그런데 남편 문상을 온 사람 중에 무좀 양말을 신고 온 이가있었습니다. 슬픈 와중에도 그 발가락 모양이 어찌나 우습던지울면서 얼굴을 가린 채 웃었습니다. 인생은 그만큼 부조리의연속입니다. - P220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가끔 사람들로부터 ‘저렇게까지 세상물정을 모를 수 있나?‘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들 임현식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그런 일들로 내가 속상해하고 있을 때 아들이 뒤에 와서 나를 가만히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순진한지는 아빠랑 나만 아는데…. 아빠는저세상으로 떠나고, 우리 엄마 어떡하나.…."
정말 그랬습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뒤에서 희생한 다른 이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정자까지 좋은곳은 없습니다. 내가 남편에게도 잘했고, 아이들에게도 너무나좋은 엄마였고, 그리고 연기도 빼어나게 잘했다? 그런 건 있을수 없습니다. 나는 배우로서 살아온 것 말고는 모든 부분에서부족한 여자였습니다. - P221

내 아들 임현식에게도 온통 용서받을 일뿐입니다. 내가 낳은아들인데도 온전히 첫번째 순위로 놓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언제나 첫 번째였습니다. 내가 대본을 생각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으면 아들은 "엄마 주위에 담이 쳐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갈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고. 그래서 아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옷을 붙잡고 떼쓰는 일을 나한테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대본만 들면 내 방에 들어가서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얼마나 쓸쓸하게 컸을까요? 아들이 커 가면서 어떤 고민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꿈을품고 있는가를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들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엄마이지만 그런 말을 할 상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미안합니다. - P222

나는 혼자 가만히 있는 시간이 그냥 멍하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본 속 여자가 머릿속에 가득이었습니다. 날마다 그러했기 때문에, 어린 딸이 배 아프다고 하면 "아가, 이리 와." 하고 안아 주었지만, 대본 속 역할을 생각하듯이 그만큼 온 마음을 다해 대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이 된 딸은 나를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아이들을 낳긴 낳았지만 내가 하는 배역을 더 많이생각하느라 아이들에게 전력투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라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생에 감사합니다. 나는 그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천성적으로없는 사람입니다. 내 딸 임고은이 언젠가 내 대본 뒤에 써 놓은글이 있습니다.
‘나는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해. 나도 엄마 같은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어‘ - P223

사람들은 내가 현모양처인 줄로만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살림도 못하고, 대본만 받으면 그날부터 대본 속 인물이되어 버려서 식구들은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배우이니까 당연하다고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배우로서 잘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가족에게 남긴 자잘한 상처들이 흐지부지 묻히지 않도록 가족에게 상처를주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떳떳하지 못하면정말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나를 배우로 인정해 주는 가족의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연기에 집중하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 P224

어떤 이는 나에 대해 ‘김혜자는 자신을 비워 내고 캐릭터를받아들인다기보다 언제나,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게 비어 있다. 마치 일상이 없고 늘 배우로만 사는 사람처럼, 아니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사는 집을 옮겨갈 뿐 현실적 인물이 아닌것처럼 배우로 존재한다.‘라고 썼습니다(대중문화전문기자 홍종선), 나 스스로도 대본을 외고 연기를 하는 것 외에는 모든 면에 부족하고 의지박약인 자신이 싫은 적도 많았습니다. 배우가아니었으면 신이 보시기에도 아무 데도 쓸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부족한 여자이기 때문에 신이 좋은 남편을 붙여 주었고, 착한 아들과 딸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많은 사람을 용서하고 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한테 용서를 빌 만큼 잘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못한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에게든 신에게든 내가 다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 P225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연기하면서, 늙는다는 것은 슬프고서글픈 일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늙으니까 기억도 깜빡거리고, 자식들은 엄마를 약간 바보 취급합니다. 마음대로 빨리 죽어지지도 않고, 살아서 신나는 일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1926~2022)이 96세를 일기로 세상 떠난 뉴스를 보면서, 나랏일로 바빴겠지만 그래도 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들이 이런저런 일들로 논란거리가되고, 며느리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불행하게 죽는 것까지 다봐야만 했으니까.
자식들은 왜 그렇게 부모에게 야단을 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야단치는 말투입니다. 이드라마에서도 막내아들 민호(이광수)가 나에게 소리를 버럭버 - P249

럭 지르는 것이 서글펐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도 아들동석이 엄마인 나에게 그렇게 하는데, 그럴 때면 이 사람들이실제로 배우인 내가 싫어서 그렇게 악을 쓰나 하는 바보 같은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나는 작가들을 옛날부터 존경했습니다. 물론 김정수, 김수현,
노희경 작가처럼 잘 쓰는 작가를 작가들은 어떻게 다 알까? 늙도록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이 먹은 사람의 심정을이렇게 잘 알까? 실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맡은 역은 치매에 걸리는 슬픈 역이지만, 잘 쓰는 작가라서 믿고 했습니다. - P250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를 위한 선택이긴 하나 병든 사람들과 함께 그런 식으로 죽어 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회에서 회자는 요양원을 탈출합니다. 치매에 걸린 희자는 새벽에 정아에게 전화를 걸어 요양원으로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고부탁합니다.
"너는 죽더라도 길 위에서 죽는다고 했지. 정아야, 나도 그러고 싶어. 감옥 같은 좁은 방 말고."
어찌 보면 우리 모두 길 위에 선 삶입니다. 아니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우린 다 인생이라는 기로에 서 있는 쓸쓸한 방랑자‘인지도 모릅니다. ‘죽더라도 길 위에서 멋지게 죽을거야‘라고 선언하며 희자와 정아는 호기롭게 차를 몰고 떠나지만, 요실금 때문에 차를 세워야만 합니다. - P254

「디어 마이 프렌즈」를 하면서 다른 배우들 연기 보는 재미도컸습니다. 정아 역은 ‘나문희 이상 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매번 감탄하며 봤습니다. 윤여정 배우는 말할것도 없습니다. 극 중에서 그녀가 맡은 충남이 나이 어린 교수들에게 "니들이 지은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니들 스스로 니들가치를 모른 거라고 할 때, 그리고 고두심 배우가 아픈 엄마에게 "나 속 썩이려고 병원 안가시냐?"고 악다구니 쓸 때, 말 그대로 ‘연기의 신들‘이 느껴졌습니다. 박원숙 배우가 드라마 속에서 옛 연인과 재회하는 장면은 잠깐이지만 그간의 세월이 느껴 - P254

졌고, 주현 배우는 얼렁뚱땅하는 것 같지만 다 표현합니다. 신구 배우는 이 드라마에서 처음 같이했는데, ‘정말 잘하는구나.
내가 신구 배우를 이제야 처음 만난 걸 보면 아직 연기해야 할게 한참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원래 막장이야."라고 모두가 외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정 사진을 재미 삼아 찍습니다. 엄마 친구들의 이런 다양한 삶을 알게 된 박완은 마지막에 말합니다.
다만 소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좀 더 오래 가길,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게 조금 더 오래 가길" - P255

PD저널의 방연주 객원기자라는 분은 「디어 마이 프렌즈」를보고 리뷰에 노벨문학상을 탄 쉼브르스카의 시를 인용했습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 중에서).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 인생에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희경 작가가 한 말처럼,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젊은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치열함을 살고 있는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
과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희망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영향 미치는 아 - P256

름다운 작품을 하는 게 꿈인 내게 참으로 감사한 작품입니다.
인생이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국 사랑임을 다시 느꼈습니다.
언제까지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도 하면서 즐거운, 그런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디어마이 프렌즈」를 만난 것이 연기자로서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배우로서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tvN이 20대에서 40대를 타깃으로 한 케이블 방송임에도 「디어 마이프렌즈」는 케이블과 종편을 통틀어 8주 연속 동시간대 시청률 1위 자리를 지켰으며, 역대 tvN 프로그램 중 시청률 5위의 기록을 세우며 한국드라마의 소재와 다양성을 확대시킨 수작으로 남았다. 한국방송비평상드라마부문 대상,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작가상, YWCA가 뽑은 좋은TV프로그램상 대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드라마 작품상, 백상예술대상TV부문 극본상을 수상했다.) - P257

노희경은 그만큼 무서운 사람입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계획대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씁니다. 그리고 대사가 매우 신랄합니다. 가슴을 콕콕 찌릅니다. 뾰족한 것으로 그냥 찌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아팠지?" 하고 만져 줍니다.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모르지만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사람입니다. 조금 쌀쌀맞은 작가인데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이유입니다. - P268

노희경 작가는 보는 이의 심장을 할퀴는 것 같은 대사를 씁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 날이 서 있어 보입니다. 똑똑하고, 냉정하고, 개성 뚜렷하고, 어느 면에서는 싸가지 없고,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배우의 목을 조르거나 손목을 물어 버린 적도 있다는 말까지 들릴 만큼 독특한 작가입니다. 신랄하게 대사를전개하다가도 마지막에는 가슴이 미어질 만큼 아프게 합니다.
어느 작가와도 다른 작가입니다. 혼자 저쪽에 서 있는 들풀 같은 사람, 그것이 그녀에 대해 내가 느낀 것입니다.
며칠 전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선생님, 다시는 힘들게 연기하지 마세요."
그래서 내가 답했습니다.
"누가 노희경 씨에게, ‘그리 빼빼 마른 중학생같이 되면서까지 글 쓰지 말아요‘ 한다고 그렇게 되겠어요? 언제나 그렇게 되면서까지 쓰겠지요." - P268

아는 사람이 나에게 동영상을 하나 보내 주었는데, 영상 속에서 수탉이 온 힘을 다해 울다가 지쳐서 기절해 쓰러집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납니다. 그 수탉이 너무나도 우리 두 사람,
노희경 작가와 나 같아서 그 영상을 그녀에게도 보내 주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뽑아내고 소리를 지르다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 있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 P269

만지고 나서 나를 꼭 껴안고 아이처럼 한없이, 한없이 움니다. 그것은 지문에 없습니다. 이병헌 배우가 잘 하겠지 하고안 써 놓은 것 같습니다. 자세히 써 있는 장면들도 있지만 그장면에는 써 있지 않습니다. 배우는 오직 연기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에 그렇게 하라고, 그전 장면들에서는 이병헌 배우가더 못되게 굴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이병헌 배우의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사랑한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없이 내 어머니 강옥동 씨가내가 좋아했던 된장찌개 한 사발을 끓여놓고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난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난 내 어머니를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이 내레이션이 더 가슴 아프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간 것은 이병헌 배우의 진심 어린 열연 때문이었습니다. - P2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앤딩 내레이션
[이남규, 김수진] p112, 113


자신이 70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혜자는 씩씩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하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엄마 옆에 앉아서 날마다 느끼는 자신의 변화를 고백합니다.
"그냥 궁금했어. 여기서 얼마나 더 나빠질까. 요즘 아침마다일어날 때 좀 놀라. 하루가 다르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어젠 분명 저기까지 걸었는데 오늘은 숨이 가빠. 앞으로 얼마나 더 나빠지는 건가 궁금해서……. 화장실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못 간다며, 늙으면 나도 좀 더 차례차례 늙었으면 받아들이는게 쉬웠을까 싶은 거지 그냥."
그러자 엄마가 말합니다.
"다시 애기 때로 돌아가라는 거라고 생각하면 단순해져.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인 살 수 없는 때로 돌아가는구나, 그런."
‘드라마가 마지막으로 향해 갈 때 혜자는 말합니다. - P103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 불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 기억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무섭습니다."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모든 꿈이 과거형이 되어 버린준하(남주혁)가 젊은 혜자(한지민)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동 국물 위에 뜬 기름띠를 보면서 무지개 떴다며 혜자는 호들갑을 떱니다.  - P104

여기까지 오는 데 참으로 오래 걸렸습니다.
연기라는 세상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바보라
가볍게 휙 떠나올 수 없었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거겠지요.
이 길에서 자꾸만 나의 지난 일들이 겹쳐집니다.
하늘이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80을 눈앞에 둔 내 인생의 길 끝에서
나는 내 꿈 앞에 서 있습니다.

광고에서 이 내레이션이 끝나고, 저쪽 하늘에서 이쪽 하늘까지 펼쳐진 오로라를 바라봅니다. ‘나를 믿고 걸어갑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읽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곧 나자신의 말이기도 합니다.  - P108

나이가 들면 그렇습니다. 손이 바쁘고 주변이 어수선해집니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많아집니다.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고 있지, 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부산스럽고 수선스러웠지만, 그 자리에 있던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때 - P111

론 불행하고 때론 행복하다는 것을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할지라도 그래도 살아서 좋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대본을 쓴 이남규, 김수진 작가에게 허락을 받아 이곳에도옮겨 놓습니다. 내레이션 녹음을 위해 수십 번 읽고,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위해서도 여러 번 반복해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좋은 글입니다. - P112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 P112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P113

셜리 발렌타인」 단순히 갇힌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여성이 이혼한 친구의 제의로 그리스 해변으로 떠나는 이야기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연극이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여자를 통해 인간의 의미 없는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셜리는 누구나 조금씩 닮은 보통 여자입니다. 나에게도 셜리의 모습이 조금은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마음속은 잘고도 깊은 상처로 금이 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여러 꿈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꿈과는 전혀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꿈을 잃은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 그것이 이 연극의 매력입니다. 특히 여자가 끝부분에서 자신만 불행한 게 아니라남편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깨닫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눈자체가 커진 것입니다. - P122

어"
상처투성이가 된 셜리는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날마다 자기 생각만 하던 여자가눈을 뜬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게 되는행복한 결말입니다.
안락한 현실로부터 탈출해서 자기를 찾는 게 진짜 인생을사는 것이 아닐까? 그냥 편안하게 안주해 버리면 삶의 모든 시간을 소모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상처를 입더라도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던가는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것들을 셜리 발렌타인」은 일깨워 줍니다. 셜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혼자가 되면서 자기를 찾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좀 더 단순하고 혼자가 되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꿈꾸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그것은 인생의 낭비이니까. - P123

나는 매니저도 없고, 소속사도 없습니다. 누가 나를 매니지먼트해 주는 사람도 없고, 의상을 챙겨 주는 코디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다 책임져야 합니다. 또 그래야만 한다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그냥 나 혼자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작품에 들어가면 내가 맡은 역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구현해 내야만 하는 인물이니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조언을 해 줄 때도 있지만,
누가 매번 내 옆에서 길잡이가 되어 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늘 ‘나만큼‘ 해서 카메라 앞에 나갔습니다. 그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2021~2022년 배우 김혜자와 나눈 긴 시간에 걸친 대면 및전화 인터뷰, 구술,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평생을 써 온 일기 형식의 글들, 신문 방송 등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기사 등을 토대로 편집자가 초고를 만들고, 저자가 다시 기억과 사실을 수정하고 추가하는 방식으로 원고가 완성되었다. 조명 눈부신 드라마와 직사각형의스크린에서 걸어 나온 인간 김혜자와의 특별한 만남을 기대해 본다.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며 모두 반대했지만 아버지(김혜자의 부친 김용택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2호 경제학박사이며, 미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명한 배우의 한마디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다. 찰리 채플린을 봐라. 웃기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그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아니? 좋은 배우가 되거라.
좋은 배우가 되면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세상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라.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라."
내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는 높은 연단에 서서 많은 군중 - P11

의 박수를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 옆에 놓인 어항속에
‘예쁜 빨간색 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박수는 어항을 향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혜자는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 박수를 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금붕어가 한 마리라 외롭겠다 하셨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그저 국어 시간이면 책 잘 읽는 정도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부모의사랑이나 간섭을 모르고 살아서 어려서부터 웬만한 일들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별히 예뻤다거나 뛰어난 재주꾼도 못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이나교사들이 내게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 P12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화를 봤습니다. 수업 시간이 왜 그렇게 지루했던지, 학교가 끝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감옥에서 풀려난기분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영화관에 가서도 보았고, 텔레비전의AFKN(1957년부터 1996년까지 송출된 주한미군방송)에서 틀어주는 흑백영화로도 보았습니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 없으면 영상만으로도 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바 가드너, 라나 터너, 오드리 헵번, 진피터스, 마릴린 먼로, 앤박스터, 잉그리드 버그먼, 데보라카,
진 시몬스……. 이런 여배우들의 얼굴 표정에서부터 발끝 움직이는 것까지 내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조그만가슴을 설레게 한 남자 배우는 로버트 테일러, 조셉 거튼, 제임스 메이슨, 게리 쿠퍼, 로런스 올리비에, 타이론 파워, 클라크 게이블이었습니다. - P13

내가 맡은 배역이 아무리 인생의 속박에서 고통받는 역이라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그것이 내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삶의 밑바닥을 헤매어도 그곳에 희망이 있나, 그 희망을 연기할 구석이 있나, 내일의이야기가, 혹은 그다음이 보이는가? 끝없는 절망 속에서 이 여자가 그냥 죽음을 선택해 버리나? 그렇지 않고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어디엔가 있나? 그것을 찾고 그것을 연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속으로 "잘 가." 하고말했습니다. 강수연이 생전에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늙어서 집으로」에 나오는 할머니 같은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를 빛낸 배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에게 연기할 수있는 좋은 배역이 있었어야 했는데…… - P19

배우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에게는 유일한 빛이고 희망입니다. 또한 그것이 배우가 세상에 줄 수 있는 희망의빛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수연에게 모든 것이 너무 일찍 왔고일찍 가 버렸습니다. 갓 스무 살 넘은 나이에 세계적인 무대(베니스 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타고, 너무어려서 월드스타가 되고 나니 아무것이나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작품이 있어야 배우로서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고민하고, 설레고, 한 장면을 백 번 넘게 연습해 보고……. 그것이 배우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배우는 살아 있다고 느낌니다. 그것이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가슴 설레는것이 있을 때 삶이 은총으로 빛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로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삶이되는 것입니다. 삶이 뒤엉키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더라도 배우는 자신이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P20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전해 받고 또다시 죽음에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에대해 생각했습니다. 배우를 살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존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은 슬픕니다. 어렸을 때 영화제에서 상타지 않고 평범한 주부 역할도 하고, 세계적인 배우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여성으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에 강수연에게 너무 큰 것이 왔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엾어서,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 「집으로」의 할머니같은 역을 하고 싶다 했는데.......
그래도 멋있어, 강수연 배우답게 갔구나. 그곳에서 만나. - P21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몰입의 순간들을 많이 가진 것입니다.
어떤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반쯤은 몽유병자처럼흉내만 내면서 살아가는 나를 잘 아시는 신이 내가 몰입할 수있도록 계속해서 작품들을 내 앞에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면흐릿한 불씨처럼 존재하던 나는 뜨거운 불로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 P23

키키 키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게 몰입하는 순간 인생의 허무와 고통, 슬픔, 갈등, 부질없는 생각들을 다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나자신이 되고 어느 때보다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토록 부족한 인간인데 나를 배우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 생활을 정말로 그만둘 때가 되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대사처럼 외웁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은매 순간순간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 P25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행주 냄새가 납니다. 그분이 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2004년 오래된미래 간)에 추천사를 써 주신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혜자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나라도 저럴 수밖에 없다고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내가, 아니 모든 여편네들이 쓴 것처럼오싹해질 때가 있다. 저런 연기의 깊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혹시 드라마 밖에서의 그녀는 힘이 다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는 건 아닐까, 궁금해하곤 했다.‘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나를 보신 것입니다. 평소에 나 널브러져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마 그분도 그런 거겠지. 소설한편 완성하고 나면 그러시겠지? 우린 같은 ‘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입니다. - P37

이제는 슬픈 이야기도 웃으면서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펑펑 울고, 심각한 장면은 내내 힘주며 했습니다. 그것이지난날의 연기였다면, 연기를 계속하면서 배운 것은 힘을 빼때 정말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힘을 빼는 게 더어렵습니다.
「눈이 부시게」에서 ‘등가교환‘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수(손호준)가 자고 있을 때 인터넷 방송 채팅방에 들어온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장면에서는 정색하고 말하면 안 됩니다. "니네들 그렇게 살다가 나처럼 된다." 이 말을장난처럼 툭 던져야 합니다. 무방비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졸고 있다가 잠결에 들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 P40

그 대사를 한 백 번쯤 연습했습니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내 귀중한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얻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등가교환의 법칙입니다. 운이 좋았다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나는 이해력도 부족한 사람이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꿈에서도맨날 대본이 나올까요.
어느 날 걸레질을 하면서, 오늘이 내가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결혼을 하는 날이라고 혼자 상상했습니다. 이제 시작했겠네,
지금쯤 식장에 걸어 들어가겠지. 그러면서 걸레질하는데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지금 어떻게 눈물을 떨어뜨리고 무슨 표정을 짓는지 스스로 살피고 있었습니다.
기억하려고 굳이 안 해도 그런 것들이 저장됩니다. - P41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연기가 있습니다. 촛대 훔친 장 발장을회개하게 해 준 신부님 같은 역입니다. 너무나도 나쁜 사람을변화하게 해 주는 할머니역할을 해보고싶습니다. 어디로 가서 살 수도 없는 흉악범입니다. 도망다니다가 다 쓰러져 가는집, 살 만한 집이었는데 오래되어서 폐허가 되어 가는 집에서들리는 피아노 소리 때문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낡은풍금이나 피아노로 감동적인 곡을 치는 할머니, 나 혼자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런 역을 하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습니다. - P41

그래서 요즘에 99세 할머니가 피아노 독학으로 배우는 유튜브를 많이 봅니다. 이 할머니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혼자 하시는데, 나는 피아노 선생님도 있고 다 갖춰 놓고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열망은 가득합니다. 피아노를잘 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연기 외에는 실천이 부족합니다. 종종 후회합니다. 10년만 일찍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한 곡 정도는 멋있게 연주할 수 있을 텐데, 그때 잠깐 시도했다가 다시 놓은 것을 후회합니다.
나는 직업란에 ‘탤런트‘라고 쓰는 사람을 보면 무심결에 ‘아,
저이는 저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놀랍니다. 아주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해 와서 그런지 나는 연기가 직업이라고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직업이라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합니다. 「마더」의 엄마가 아들 도준(원빈)한테 "너는 나야" 하듯이 연기는 나입니다. 숨 쉬는 것처럼. - P42

옛날에 내가 열심히 외우고 무대에서 했던 대사를 다시 읽으면 그때의 나로, 그때의 내 감정으로 휙 하고 건너갑니다.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할 때는 또 지금까지의 어떤 고정관념에 따른 연기가 아니라, 가령 ‘절망‘ 같은 것을 대사에 의해서가아니라 발목의 관절이 딱 꺾인다거나 뒤로 나자빠지는 동작 등으로 표현해야 해서 그것을 고심했습니다. 연극 작품들이 그렇게 내면 연기를 키워 주었습니다. 연기를 하면서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6년 만에 다시 임신을 해서 입덧으로 다른 음식은 못 먹고 매일 딸기만 먹으며 살았습니다. 연출 선생님이 무대 뒤에서 북을 쳐 줍니다. 막이 오르면 나는 신이 오릅니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 방황하는 여인이 되어 울고 웃고 하다 보면 - P53

그대로 나 자신의 일처럼 빠져들어 갑니다. 애인과 남편의 공모로 죽임을 당하는 나...….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막이 내립니다. 땀에 흠뻑 젖어 흡사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는 딸기를 몇 개 집어먹고 또다시 저녁 공연을 위해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
함께 KBS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배우들이 브라운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텔레비전 연속극이 활발해지자 무대 연기도 하나둘 그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4년 동안 연극에 몰두하며 살다가 다시 KBS TV에 나갔지만, 이미 정상의길을 걷고 있는 동기 탤런트들을 보면서 심한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커져 가는 그들을 의식하면 화제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내면적인 연기가 더 중요한 거야‘ 하면서 자꾸만 초라해져 가는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 P54

신은 절대로 내가 경험한 삶이 그냥 없어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주 우울한 생각을 했든, 너무 슬픈 생각을 했든, 치졸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했든, 그 모든 것이 내가 역을 맡을 때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과 감정들이 연기에 다 투영되었습니다.
내 마음속이 그토록 뒤범벅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모릅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좋은 학교에 다니며 순탄한 삶을 산 것처럼보이지만, 내 마음속 회오리가 있기에, 복잡한 심리가 있기에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우에게는 어떤 경험도 나쁜경험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이겨 냈으면 말입니다. 아주 거지같이 살아도 그것도 좋은 것이고, 나쁜 남자를 만나 살아도그것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다 좋은 경험입니다. 배우로서는. - P57

슈베르트가 ‘내일 아침엔 깨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일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좋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작품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끝나면 매번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늘 삶의 한쪽에 죽음이 함께했습니다. 신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허무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다음 작품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돈과명예가 아니라 그 천성적인 허무가 나에게는 연기생활에 더욱전념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죽음을 생각하지만사람들은 내 연기에서 위로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살아, 네 힘으로 살아 네 힘을 다해, 죽지 마라는 결심이 나를 살게 했습니다. - P59

또 하나의 대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춘이지만 현실은백수였던 스물다섯 살의 혜자가 70대가 되어서야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잠방(인터넷 방송 진행자가 자는 모습을 보여 주는 수면 방송)을 하는 영수(손호준)와 그것을 보고 있는 영수TV 시청자들을 보고 혜자가말합니다
"늙는거 한순간이야. 너희들 이딴 잉여 인간 방송이나 보고있지? 어느 순간 나처럼 된다.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늙어버릴 줄"
극 중 대사만이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나도몰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어 버릴 줄 준비할 시간도 없이 누구나 갑자기 늙어 버린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곧 시간이기 때문에,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