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의 두 ‘혁명‘, 집단화와 기근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 가려져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독일의 나치화를 보고 실망한 많은 유럽인은 모스크바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개러스 존스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권력을 강화하던 1933년 초반, 두 체제를 모두 목격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1933년 2월 25일,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날아감으로써 신임 독일 수상과 함께 비행기를 탄 최초의 언론인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유럽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존스는 ‘나의 투쟁』을 읽었고, 독일 정복, 동유럽 식민화, 유대인 말살이라는 히틀러의 야망에 대해 감을 잡고 있었다. 이미 수상이었던 히틀러는 제국 의회Reichstag의 해산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다음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자신의 재임 기 - P119

간을 늘리고 독일 의회에서 나치당이 차지하는 자리도 더 넓히려 했다. 존스는 신임 수상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을 처음에는 베를린에서, 나중에는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느낀 것은 "순수한 원시적 숭배‘였다.‘
그 뒤 모스크바로 떠남으로써, 존스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독재 정권이 막 시작된 땅에서 "노동 계급이 독재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존스는 두 체제 간의 중요한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는 새로운 체제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조직적인 거대한 폭력을 구사하는 강력한 경찰 기구를 바탕으로,
일당 독재국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존스가 목격하고보고했듯이,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은 시민 수만 명을 총살하고, 수십만 명을 추방하며, 수백만 명을 아사 직전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스탈린은 사회 계급과 민족을 기준으로 소련 시민 수만 명을 추가로 사살할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은 1930년대 히틀러의 역량을 훨씬 넘어서 있었고, 어쩌면 당시의 히틀러로서는 그렇게 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 P120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기근을 자신의 선거운동에 활용해,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되기에 앞서 분노를 유발하는 이데올로기 정치 문제가 되게끔 만들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상대로 분노를 터뜨리며, 우크라이나 기근을 마르크스주의의 폐단을 증명하는 증거로사용했다. 1933년 3월 2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 집회에서 히틀러는 "전 세계의 곡창지대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외쳤다. 단 한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만으로 히틀러는 소련에서의 떼죽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호자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부시켜버렸다. 히틀러의 평가를 전적으로 거부 또는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거짓과 진실의 묘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은 기근에 대한 히틀러의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뒤섞여 있던, 좌파 정치에 대한 그의 비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 P122

1932년 하반기와 1933년 초반, 자신이 일으킨 대재앙이 지속되는와중에 스탈린이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국제 노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소련 인민의 끔찍한 고통과 떼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다. 독일 국내정치에서 이 노선은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더 열심히 지지토록 하는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련 기근의 중대한 몇 달은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각적인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독일공산주의자들 덕분에 나치는 중산층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사무직과 자영업자도 사회민주당보다는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래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나치당의 지지율보다 더 컸다.
그러나 두 정당은 스탈린의 노선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었다.  - P123

스탈린 경제 정책의 진정한 결과를 당시 해외의 보도인들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히틀러는 독재자로서 시행한 최초의 정책 중에서 재분배에 관심이 쏠리도록 치밀하게 의도했다. 소련의 기아가 절정으로치닫던 순간, 독일은 유대계 시민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1933년3월 5일 선거에서 승리한 후,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계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불매운동은 다가오는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가장 손해를 보게 될 사회 계층이 어디인지보여주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농민이었지만, 독일에서는 유대인이었던것이다. 실제로는 나치 지도자와 나치 준군사 조직들의 엄격한 관리의 산물이었으나, 불매운동은 유대인 착취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분노‘에 따른 산물인 양 묘사되었다.
이 점에서 히틀러의 정책은 스탈린의 정책과 비슷했다. 소련 지도자는 소련 변방에서의 혼란이, 그리고 부농의 제거가 진정한 계급 전쟁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 모두 같은 정치적 결론을 내렸다. 필요한 재분배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려면 국가가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124

1934년 6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선포된 인터내셔널의 새노선에 따르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 문제가아니었다. 대신 소련과 세계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캠프에서 널리 좌파 세력을 결집하기로 했다. 계급투쟁을 엄격히 수행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부상하는 파시즘으로부터 문명을 구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때문에 유명해진 단어인 파시즘을 소련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패의 결과물로 제시했다. 파시즘의 확산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종식을 의미했던 한편, 소련에 대한 파시즘의 극심한증오(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는 소련과 여타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소련 수호를 위해) 다른 자본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 P130

인민 전선은 소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인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성공을 누렸다. 최고의 승리는 파리에서 거뒀는데, 이곳에서 인민 전선 정부는 1936년 5월 실제로 집권에성공한다. (에리오의 급진당을 포함한) 좌익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했고,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이 총리가 되었다. 승리를 거둔 선거 연합의 일원인 프랑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의회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투표 결과는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프랑스 외교정책을 소련에 우호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인민전선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좌파가 거둔 승리로 간주되었다.  - P131

스페인에서는 정당 연합이 인민 전선을 형성했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7월에는 극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정부는 저항했고, 그 결과 스페인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 문제였지만, 인민 전선에 대한 이념적 적들이 참전했다. 소련은 1936년 10월 궁지에몰린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베를린과 로마의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은 유럽 내 소련 정책의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몇 달 동안 주요 소련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 P132

‘스페인을 돕자!‘는 위험에 빠진 공화국 편에서 싸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구호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이 민주주의 편에 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통찰력이 뛰어난 유럽 사회주의자의 한 명이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 좌파를 제압하려는 스페인 내 스탈린주의자들의 행동에 경악했다. 그의 통찰처럼, 소련은 무기와 함께 정치 행위까지 수출했다. 스탈린의 스페인 공화국 지원에는 대가가 따랐다. 스페인 영토에서 파벌 싸움을 벌일 권리를 준 것이다. 스
"탈린의 숙적인 트로츠키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멀리 떨어진 멕시코로추방당하긴 했지만), 공화국을 지키던 수많은 스페인 사람은 스탈린의 - P132

소련보다는 트로츠키라는 개인에게 더 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 선전물은 스페인의 트로츠키파를 파시스트로 낙인찍었고,
그들을 ‘반역죄‘로 사살하고자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이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 P133

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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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12년 집권과 소련의 74년 집권은 분명 우리가 세계를 평가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은 나치의 범죄가 역사적으로도 보기드물 정도로 심각했다고 여긴다. 이는 히틀러 스스로가 실제 이상으로 성과를 신봉한 것과 묘한 대응을 이룬다. 또 다른 사람들은 스탈린의 범죄가 비록 그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이는 역사가 오직 한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따라서 어떤 정책을 쓰든 그 방향과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모두 정당하다는 스탈린의 믿음을 일깨워준다. - P21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세우고 다져진 역사 없이는, 우리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아직도 우리를 그들의 올가미에 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기초란 뭐가 될까? 이 연구는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성사를 포괄하고 있지만, 사용하는 기본 연구 방법은 단순하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 실제로는 허구로든 블러드랜드는 정치적 지역이 아니다. 유럽의 가장 살인적인 체제들이 가장 막대한 살육을 저지른 곳. 그저 그뿐일 따름이다. - P21

역사는 유럽의 과거사를 국민 단위에서 나누고, 그 단위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면서 종종 이지적이고도 용감하게 지켜져왔다. 하지만 어느 한 집단의 학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무리 잘 하더라도1933년에서 1945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의 과거사를 완벽하게 안다고 해도, 그들이 겪은 굶주림의 원인을 알아낼 수는 없다. 폴란드 역사를 착실하게 익혀도 왜대숙청 시기에 그토록 많은 폴란드인이 죽어가야 했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벨라루스의 과거사를 연구한다 해도 그토록 많은 벨라루스인이 포로수용소와 대빨치산 전역에서 숨져가야 했던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유대인들의 삶을 연구하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원인은 설명할 수 없다. 한 집단에 벌어진일은 종종 다른 집단에 벌어진 일과 비교했을 때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시작일 뿐이다. 나치와 소련 체제 역시 그 지도자들이 이땅들을 어떻게 장악하려 애썼는지, 그리고 이들 집단을 어떤 관계에놓고 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 P23

오늘날 20세기의 대량학살이야말로 21세기에도 가장 중대한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는 널리 합의가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블러드랜드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단학살은 유대인의 역사를 유럽사에서 떨어뜨려놓고, 동유럽의 역사도 서유럽의 역사와 구분 짓게끔 한다. 살육이 국가 민족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론적인 구분에 영향을 준다.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가 사라진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말이다. 이 연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하나로, 유대인사와 유럽사를 하나 - P22

로, 각 국민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다. 희생자와 집행자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행에 개입된 이데올로기와 실행 계획을 따지고, 그런 만행이 벌어지게 만든 체제와 사회를 분석한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지도자들이 내린 명령으로 살육당한 사람들의 역사다.
희생자들의 고향 땅은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었고, 그 땅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 온통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 P23

나치와 소련 체제의 기원, 그리고 그들이 왜블러드랜드에서 만나게되었는지의 기원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 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옛 대륙 제국들을 무너뜨리는 한편, 새로운 제국에 대한 꿈을 일으켰다. 황제들의 왕조 통치 방식을 국민 주권에 의한 통치라는 약하디약한 개념으로 바꿔놓았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명령에 따라 싸우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목적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 ‘조국을 위하여‘였다. 그 조국이란 이미 수명을 다했거나, 이제 막 태어나려 하는 것이었건만. 새 국가들은 거의 무에서부터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민간인 집단이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옮겨지거나 말살되었다. 10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정권에 의해 학살되었다. 독일계 주민과 유대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거주지에서 멀리 이동했다.  - P27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경제를 조각내버렸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살아 있던 유럽의 성인은 생전에 두번 다시 그만큼의 자유무역이 복구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런 유럽인의 대부분은 그 전 시대 수준의 번영을 다시는 누려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간단히 말해서 두 진영의 무력 충돌이었다. 한쪽 진영에는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동맹 제국")가, 반대 진영에는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미국("협상 제국")이 있었다. 1918년 협상 제국의 승리는 3대 유럽 대륙 제국인 합스부르크, 독일, 오스만의 종말을 가져왔다.  - P28

레닌은 평화를 얻은 대신 러시아 제국의 서쪽 변방이던 곳들을 독일의 식민 지배 아래 내주었다. 그러나 물론, 독일 제국도 폭압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나머지와 함께 곧 쓰러져버릴 테니 별문제는 아니라고 볼셰비키는 믿었다. 그때가 되면 러시아와 다른 혁명 세력은 그들의 새 질서를 서쪽으로, 지금 빼앗긴 땅의 훨씬 너머까지 퍼뜨릴 수있으리라.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서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패배를 그리고 독일 내에서의 노동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중부와 서부 유럽의 좀더 산업화된 땅에서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다른마르크스주의자들의 러시아 혁명을 정당화한 것이다. 1918년 말과1919년에는 레닌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1918년 가을,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 영국, 미국에게 확실히 패배했다. 그리고 패배하지는 않았으되 그들의 새로운 동쪽 땅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독일 혁명가들은 집권을 위해 산발적인 시도를 벌이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거저먹었다. - P31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히틀러가 여느 독일 민족주의자와 달랐던 점은 그다음에 품었던 그의 생각에 있었다. 모든 독일인을하나로 모은 독일을 세우고, 폴란드를 정복한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 P38

쓸어버리고, 소련을 무너뜨린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는 폴란드와 소련 모두에 우호적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여느 독일인보다 더 극단적인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감추었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에는 처음부터 이 파멸적인 비전이 나타나 있었다. - P39

소련의 민족들은 새로운 공산주의적 이미지로 재탄생해야 했다. 농민은 정복당할 때까지 살살 달래졌다. 볼셰비키는 지방의 농민들과 일시적으로 타협했지만 이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의 잠시 동안만이었다. 새 소련 체제는 농민들이 지주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보유하고 시장에 상품을 내다 파는 일을 허용했다. 전쟁과 혁명의 결과 초래된 파괴로 심각한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위해 곡물을 요구했다. 1921년에서 1922년까지 수백만 명이 굶주림이나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죽었다. 볼셰비키는 이 경험으로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깨달았다. 그러나 일단 이 갈등기가 끝나고, 볼셰비키가 승리했을 때, 그들은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인민에게 평화와빵을 약속했으며,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그 두 가지를 헐값으로 제공해야만 했다. - P41

대공황의 도래는 스탈린이 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해 한 말을 입증해주는 듯 보였다. 1929년 10월 7일의 ‘검은 목요일‘에 미국의 주식시장은 붕괴되었다. 1929년 11월 7일, 이날은 볼셰비키 혁명 12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스탈린은 스스로의 정책으로 소련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시장에 대한 사회주의 경제의 대안을 강조했다. 그는 1930년이면 "위대한 전환이 이뤄지는 해가 될 것이라고, 집단화가 안정과 번영을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때쯤이면 옛 농촌 지역은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 그리고 혁명은 여러 도시에서 완성되리라. 프롤레타리아는순화된 농업노동자들이 생산한 식량을 기반으로 부쩍 성장해 있으리라. 그들 노동자는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사회를 창출할 것이며, 강력한 국가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리라. 스탈린은 근대화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듯이, 스스로의 권력욕 역시실현되게끔 했다. - P45

1933년, 민주주의에 대한 소련과 나치식 대안은 단순한 토지개혁따위는 하지 않겠다(실패한 민주 국가들은 그마저 이뤄내지 못했지만)는그들의 입장이 어떤 성과를 내놓느냐에 달려 있었다. 서로 그토록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문제의 핵심 중 하나가 농업 부문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과감한 국가 개입에 있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했다. 국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새로운 유형의 정치체제를 뒷받침하게 될 것이었다. 1928년스탈린의 5개년 경제계획이 시작된 이래 공공연해진 스탈린식 접근법은 집단화였다. 소련 지도자들은 1920년대에 농민들이 번영하도록놔두었으나, 1930년대 초부터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농민이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집단농장을 만들어냈다. - P51

히틀러와 스탈린은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 권좌에 올랐으나, 그들의 혁신 비전은 그 둘 사이에 놓인 모든 땅에 걸쳐 있었다. 그들이 통제하려는 유토피아는 우크라이나에서 겹쳤다. 히틀러는 1918년에 독일이 잠시 지배했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식민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직후에 자신의 혁명을 우크라이나에서 실행한 스탈린은 그 땅을 히틀러와 거의 같은 시각에서 바라봤다. 그 농토와 농민은 현대산업국가를 만들기 위해 최대한 쥐어짜야할 대상이었다. 히틀러는집단화가 형편없는 실패로 끝날 거라고 보며, 이는 또한 소련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스스로는 독일인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함을 추호도 의심치않았다 - P53

그곳은 그들이 기존 경제학의 법칙을 깨뜨릴 수 있게 해주는 땅이자, 그들의 나라를 궁핍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줄 땅,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대로 유럽 대륙을 바꿔나가게 해줄 땅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림과 그들 권력의 성패는 온통 우크라이나의 기름진 땅과 그곳의수백만 명의 농업노동자에 기대고 있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인들은사상 최대의 인위적 기근 때문에 수백만 명씩 굶어 죽었다. 그것은우크라이나의 특별했던 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1941년에는 히틀러가 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의 손에서 빼앗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식민지 건설을 위해, 먼저 유대인들을 총살하고 소련군 포로들을 굶겨 죽이기 시작했다. 스탈린 일파는 그들 스스로의 국가를 식민지화했으며, 나치는 점령한 소련의 우크라이나를 식민지화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권좌에 있었던 세월 동안, 블러드랜드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또한 다른 유럽 지역, 나아가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 P54

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 - P62

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그의 정책은 수만 명을 처형으로, 수십만 명을 탈진으로 죽게 했고, 수백만명을 굶주림의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공산당 내부의 반발을 우려하긴 했지만, 스탈린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재능과 총독들의 자발적인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를 만든다고 주장하는관료 체제가 있었다. 그 미래는 공산주의였다. 중공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집단농장이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사회의 최대 집단인 농민을 통제해야 하는 공산주의 말이다. - P63

강제추방은 계속되었고, 집단화도 진행되었다. 1930년 후반과1931년 초반에는 약 3만2127가구가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추가로추방당했는데, 1년 전 첫 번째 추방 물결에서 쫓겨난 사람과 비슷한숫자였다. 농민은 굴라크에서 탈진해 죽거나 집과 가까운 곳에서 굶어 죽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후자가 낫다고 여겼다. 추방당한친구와 가족의 편지가 간혹 검열을 피해 도착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이런 조언을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여기 오지 마 우린 여기서 죽어가고 있어. 숨거나 차라리 거기서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긴 오지 마." 어느 공산당원의 생각처럼, 집단화에 굴복한 우크라이나 농민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사라지느니 집에서 굶주리는 쪽을 선택했다. 1931년 집단화가 마을 전체 차원이 아닌 가구별로 세세히 진행되면서, 저항은 더 어려워졌다. 필사적인 방어를 유발하는기습도 없었다. 연말이 되자 새로운 접근법이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농지의 약 70퍼센트가 집단화되었다. 이로써 1930년3월 수준에 다시 도달했으며, 이번에는 그 수준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 P75

1932년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외부의 안보 위협도 없고 내부의 도전 세력도 없으며, 자신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아도 된 상태에서, 스탈린은 소련령 우크라이나주민 수백만 명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민이 가해 - P89

자이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순전한 적대적 태도를 택했다. 굶주림은카가노비치에 대한 계급투쟁이었고, 스탈린에 대한 민족주의 투쟁이었다. 오로지 굶주림만이 방어 수단이 되는 투쟁,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농민에 대한 지배를 과시하고 싶었고, 심지어 그런 태도가 요구하는 극심한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르티아 센의 말처럼 굶주림이란 "부여되는 것이며, 식량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은 식량 부족이 아닌 식량 배급이었고,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스탈린이 결정했다. - P90

이 최후의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마는데, 살인을 실행하는 이들은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 활동가의 기억에 따르면, 그해 봄 그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봤다. 여자와 아이들은 배가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창백하며, 숨은 쉬지만 눈빛은 공허하고생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광경을 봤음에도 정신이나가거나 자살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여전히 나는 - P95

믿고 싶기에 믿었을 뿐이다." 다른 활동가들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두려움이 많았던 게 분명했다. 그 전해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모든서열에서 숙청자가 나왔다. 1933년 1월, 스탈린은 당 지도부를 장악하고자 심복을 보냈다. 더 이상 당에 대한 믿음을 내보일 수 없던 공산주의자들은 안에 있는 모든 이를 파멸로 몰아넣는 ‘침묵의 벽‘을 이루었다. 그들은 저항하는 자는 숙청당하며, 숙청당한다는 것은 곧 그들 자신이 처형하는 사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임을 알고있었다. - P96

굶주림은 반란 대신 도덕의 부재, 범죄, 무관심, 광기, 무기력,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을 불러왔다. 농민들은 수개월 동안 형언할 수 없는고통을 겪었는데, 워낙 길고 악랄한 고통인 탓도 있었지만 사람들이너무 약하고, 가난하며, 대체로 문맹이라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하지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생존자들 가운데는 그 일을 기록한 사람들도 있다. 한 생존자는 농민이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죽고, 죽고, 또죽었다"고 회상했다. 죽음은 느리고, 굴욕적이며, 넘쳐흐르고, 흔해빠진 일이었다. 품위 있게 굶어 죽는다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페트로 벨디는 죽음을 예감한 날 안간힘을 써서 고향마을을 기어다녔다. 다른 마을 주민들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자신을 매장하러 묘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낯선 이들이자신의 몸을 구덩이까지 끌고 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기 무덤을미리 파두었지만, 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시체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다른 무덤을 팠고, 몸을 누인 다음, 죽기를 기다렸다. - P97

1933년에는 소비에트 시민 약 14만2000명이 추가로 굴라크로 이송당했는데, 대부분은 굶주리거나 티푸스에 걸린 상태였고, 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식량을 찾아 헤맸다. 굴라크에는 건강 상태가 나은 자에게는 음식을 주고 약자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었고, 추방자들은 이미 배고픔 때문에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일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굶주린 포로들이 야생 식물과 쓰레기를먹어 스스로 중독 상태가 되자, 수용소 관료들은 태죄를 걸어 그들을 처벌했다. 1933년 굶주림 및 관련 질병으로 수용소에서는 최소한6만7297명이 죽었고 특별 정착지에서는 24만1355명이 사망했는데,
대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이나 최북단으로 가는 오랜 여정에서 수천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시체는 기차에서 꺼내 바로 매장했고, 이름과 숫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 P99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들은 주인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빵 한 조각만 달라고 구걸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 위에, 목욕탕과 헛간 안에 수많은 시체가 있었다. 배고프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길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경찰이 그들을 일으켜주었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두고말았다. 4월 말, 나는 수사관과 함께 헛간을 지나다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시체 수거를 위해 경찰과 의사를 불렀는데, 그들은 헛간 안에서 다른 시체를 찾아냈다. 두 시체 모두 굶어 죽어 있었고, 폭력의 흔적은 없었다. 우크라이나 교외 지역은 식량을 다른 소련 지역으로 공출한 상태였으며, 이제는 그에 따른 결과, 즉 굶주림을 굴라크로 공출하고 있었다. - P100

살아남으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버텨내야 했다. 1933년 6월, 한 여의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그녀가 아직 식인종이 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 편지를 네가 볼 때쯤이면 어떨지 모르겠어"라고 밝히고 있었다. 착한 사람부터 먼저 죽어갔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몸을 파는 일을 끝내 하지 않은 사람들 말이다. 시체 뜯어먹기를 못내 거부한 사람들도 죽어야 했다. 식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부모들은자식들이 보는 가운데 죽어갔다. 1933년의 우크라이나에는 고아가넘쳐났고, 때로는 사람들이 그들을 거두었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없는 판에는 낯선 이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해줄 게 별로 없었다. 사방에 거적때기나 담요를 덮어쓴 소년 소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은 자기 배설물을 먹으며 죽음을 가다리고 있었다. - P103

식인은 생명과 맞먹는 무게의 터부다. 그래서 지역사회는 그런 처절한 생존 방식에 대한 기록을 없애서 자신들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 했다. 우크라이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식인 이야기를 쉬쉬하려 안달이다. 그러나 1933년 우크라이나의 식인 행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시 소련 체제의 성격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굶주림은 식인 행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목구멍으로 넘길 곡식 낟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어지자, 우크라이나에도 식인 행위가 찾아왔다. 입에 댈 수 있는 게 사람의 살코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P104

어느 소련공무원이 이탈리아 외교관에게 귀띔하기로는 "우크라이나의 인종적구성은 그때 이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찍이 카자흐스탄에서 좀더극적으로 이뤄졌던 인종 구성의 변화가 우크라이나에서도 일어났다.
어느 쪽이든 대러시아계 사람들에게 유리한 변화였다"
1930년대 초, 소련과 그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숨졌을까? 결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믿을 만한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은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보여준다. 예를 들어 키예프의 공공보건기구 기록에는 그 지역에서1933년 4월에만 49만3644명이 굶어 죽었다고 적혀 있다. 한편 지역행정 단위들은 기아 사망자 기록을 내기 두려워했고, 결국 아무것도남기지 않았다. 국가에서 사망자를 파악하려 할 때 접촉할 수 있는대상은 매장 팀원들일 뿐일 때가 많았으며, 그들도 자신들의 일을 일일이 기록해놓고 있진 않았다. - P107

우크라이나의 농업사회 구조는 검사, 압박, 착취의 과정을다 거쳤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소련 전역의 캠프들 사이에서 죽거나 능욕당하거나 흐트러뜨려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죄의식과 무력감에, 때로는 변절과 식인 행위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수십만 명의고아가 소련의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계라고 할 수없었다. 적어도 그들을 탄생시킨 우크라이나 가족과의 끈이나 우크라이나 농촌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마음의 의지가지를 잃어버렸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당시 소련에 있으면서 그 기근 사태를 목격한 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국가적 비극이 아니라 인도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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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계급, 인종 혹은 식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얽혀 있는 방식은선의로 풀어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문제만은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현실적 토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라면 성,
인종, 계급의 구분선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좀 더 강한 ‘자매애‘나 국제적 연대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 P59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측면의 구분에 대해, 새로운 페미니스트동에서는 다양한 경향으로 구분하고 이름을 붙이는 시도가 계속 되어 왔다. 그래서 어떤 경향은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혹은 ‘맑스주의자 페미니즘‘, 또 다른 이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렸다. 대변자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서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으로 불리기도 했다. 내가 볼 때 이렇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페미니즘이 정말 무엇이고, 누구를 대변하며, 그 기본원칙, 사회에 대한 분석과 전략 등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잘 이해하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이런 꼬리표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이 운동을 주로 밖에서 바라보면서 통속적인 기존의 범주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 P59

이는 특히 구조적 기능주의와 역할이론에서 잘 볼 수 있다. 역할이론이 자본주의 아래서 가부장적 핵가족을 온존시키기 위한 이론적틀이라고 하는 비판 없이, 많은 페미니스트가 역할이론을 강조하고있다. 성역할의 정형화를 강조하면서 성차별적이지 않은 사회화를 통해 이런 성역할의 전형을 변화시켜 ‘여성문제‘를 풀어가려는 것은 구조적기능주의자의 분석을 강화해주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더 깊은 뿌리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다. 남녀 문제를 성역할의 정형화와 사회화의 문제로 규정함으로서 이는 곧 이데올로기적차원으로 넘어가게 되고, 문화적 문제가 된다. 이 문제의 구조적 뿌리는 여전히 안 보이는 것으로 남게 되고, 자본축적과의 관계 역시 여전히 가려져 있게 된다. - P62

기존의 사회이론 혹은 페러다임에 ‘여성문제‘를 ‘추가하려는 이런모든 시도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반란의 진정한 역사적 추진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페미니스트 반란은 자본주의가 가장 최근의 - P62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징후로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체제로서의 가부장제혹은 가부장적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모든 이론은 ‘문명화된 사회의 패러다임 내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런 사회 모델을 기필코 극복해야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페미니즘이 이런 이론들에 그저 덧붙거나, 이론들 속의 어느 망각된 지점을 찾아 맞춰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이론의
‘맹점들‘을 채우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우리의 문제, 우리의 분석은 이런 사회 모델 전체를 문제로 삼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는 적당한 대안 이론들을 아직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P63

그러나 우리의 비평은 그런 빈틈을 먼저 다루기 시작했고, 점점 더깊이 파헤쳐 나가서, 우리가 ‘우리의 문제, 말하자면,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남녀 관계가 ‘자연‘이나 식민지‘와 같은 ‘숨겨진 대륙‘ 같은 것과체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와 있다. 점차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다. 여성이 어쩌다가 ‘잊혀지고‘, ‘무시되고, ‘차별받는 것이 아니며, 남성만큼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아니고, 몇몇 소수집단들 중 하나일 뿐인 것이 아니며, 다른 보편적이론이나 정책이 ‘아직‘ 수용하지 못한 ‘특수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보편인가에 대한 혹은 무엇이 ‘특수‘인가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에서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각 사회에서 생명을 생산해내는 실제적 근원인여성이 어떻게 ‘특수성‘의 범주로 규정될 수 있는가? 따라서 이들 모든이론 속에 내재한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주장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가 아직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 P63

대부분의 여성은 희생자를 돕거나 법적 개혁을 가져오는 일에 주력하게 되지만,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른바 문명화된 사회라고 하는 허물을 벗기고 감추어진 잔인하고 폭력적인 근간을 드러나게 해준다. 페미니스트 혁명의 깊이와 폭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면, 많은 여성이 주저하면서 자신이 경험해 온 것을 모른 체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하는 엄청난 일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기된 역사적 문제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이 문제들은 역사의 의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합당한 답변을 찾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해치는 것이아니라 한층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재건하는 데 일조하도록 해야 한다. - P64

그러나 이런 퇴행 전략은 좀 더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들에 대한정치적 선언일 뿐이다. 서구 경제들은 이를 보통 ‘노동의 유연화‘라고불러 왔다. 여성이 이런 전략의 직접적인 표적이 된다. 생산과정과 서비스직의 합리화, 컴퓨터화, 자동화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인해 여성은 ‘공식 부문‘에 있는 임금이 높고, 자격을 갖춘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안정된 직장에서 쫓겨나는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따뜻한 난로가 있는 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여성이 쫓겨 들어간 곳은 별 자격 없이도 접근할 수 있는 낮은 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세계였다.  - P66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인간의 성과 섹슈얼리티가 순전히 자연적이고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여성의 혹은 남성의 몸이 순전히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도 없었다(2장 참조).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이었다. 인간 생리는 모든 역사를 통해 다른 인류와 그리고 외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성도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이다. - P81

그러나 성과 젠더를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함으로서, 사람들 사이의 성적 차이를 해부학적 문제로 혹은 ‘물질적 문제‘로 다루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시 문을 열어주게되었다. 물질로서의 성은 과학자의 대상이 되어, 과학자의 의도에 따라 분해되고 분석되고 조작되며 재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정신적 가치가 성에서 분리되어 젠더의 범주에 갇히게 되면, 지금까지 성과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둘러싸고 있었던 금기들이 쉽게 벗겨질 수 있다. 이 영역은 생물공학과 재생산 기술, 유전공학과 우생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사냥터가 될 수 있다 - P81

자신의 몸과의 관계, 자신의 몸에 대한 무지, 피임과 관련한 문제 등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가장 친밀하고 개인적이며 개별화된 경험들을 사회화하고 그럼으로써 정치화하기 시작했다. ‘몸의 정치‘는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저개발국가에서도 신여성운동을 촉발하는영역이 되고 있다. 이렇게 남녀관계의 사적이고 분리된 영역을 정치적영역으로 규정함으로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을만들어냄으로서, 부르주아 사회의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 대한 구조적 구분에 도전했다. 이는 동시에 통상적인 ‘정치개념에 대한 비판을의미하기도 했다(Millet, 1970). ‘몸의 정치‘는 페미니스트가 의도적이고전략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몸의 정치‘는 우리 사회에서 남녀관계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억압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정한 이슈에 대해 서구 사회의 여성 대중이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성장해 나온 것이다.  - P83

페미니스트운동이 성차별적 폭력의 다양한 징후들을놓고 진행될수록, 여성은 모든 민주주의 헌법이 선언하고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 중 일부, 특히 신체가 해를 입지 않을 불가침의 권리가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모든여성은 이런 남성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라고 하는 암울한 사실과 힘과 교양을 갖춘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여성의 이런 기본권들을 보장할수 없다는 막막한 현실을 접하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는 여성해방을위한 투쟁에서 국가가 동맹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품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근대 민주주의의 문명화된‘ 사회에서 노골적인 폭력이 사라졌다고 하는 모든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사회에서 자주 찬미는 ‘평화‘가 사실은 여성에대한 일상적이고 직간접적인 공격에 기초한 것임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깨닫기 시작했다. 독일 평화운동에서 페미니스트는 이런 슬로건을만들었다. ‘가부장제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전쟁이다‘ - P87

몸의 정치 차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여성은 말하자면 초기 여성운동이 희망했던 것과는 반대되는교훈을 배웠다. 공공영역에 여성이 참여하고, 참정권을 얻고,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폭력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가부장적 남녀관계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차별적 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운동이 진행되면서 개별 남성의 명백한 ‘사적‘ 침해와 가족, 경제, 교육, 법, 국가, 대중매체, 정치 등 ‘문명사회‘의 중심 제도와 기둥들‘ 사이의 조직적인 관련에 대한 여성의 인식도 높아졌다.  - P87

‘일인칭 정치‘라는 개념, 대의정치의 거부,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을 분리하는 것에 대한 거부, 사적 영역의 정치화 등은 나중에서독에서 시민발의운동, 대안운동, 생태운동, ‘기초-민주주의‘를 주된정치 원칙의 하나로 삼았던 녹색당과 같은 여러 신사회운동이 계승했다. 반관료주의, 서열을 따지지 않는 활동, 중앙 집중의 배제와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활동의 강조 등 페미니스트운동의 여러 조직 원리들은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여타 사회운동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다.
신페미니스트운동은 통일된 프로그램과 완성도 높은 이론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항상 관계하고 있는 사적 영역과 자신의 몸과 관련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남성 지배에맞서는 반란을 시작하면서 이는 고유의 역동성과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대다수 사람들이 처음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사회 구조 깊숙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치운동으로서 페미니스트운동은 오늘날 다른 어느 사회운동보다도 더 광범한 반향을 낳는다. - P95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구분을 근본적으로 넘어설 때에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지극히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유명한 자본 임금노동관계와 동일하지 않으며, 자본주의는 계속 팽창하는 성장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식민지 범주들, 특히 여성, 다른 민중, 그리고 자연과같은 식민지 범주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 점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전 세계 페미니스트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창출한,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모든 구분, 특히 노동의 성별 구분과 국제적 구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구분의 실상을 밝히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민지적 구분에 대한 강조는 다른 관점에서도 꼭 필요하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페미니스트는 비판적 과학자와 생태주의자와 함께 서구 과학과 기술의 이분법적이고 파괴적인 패러다임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 P104

뉴에이지 페미니스트와 생태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여러 페미니스트가 자신들에게 ‘동양의 정신‘과 ‘치료‘ 를 향유할 수 있는 사치를 제공하면서도 착취가 이루어지는 진짜 식민지에 대해 눈과 마음을 여는 것이 꼭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총체적패러다임이 새로운 정신주의나 의식운동에 불과하게 된다면, 이 패러다임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착취의 세계적 체제에 대항하여 이를 분명히 규정하고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생산의 다음 단계를 정당화시켜주는 선도적 운동으로 정리되고 말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차나 냉장고와 같은 수준 낮은 물질 상품들을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종교, 치료, 우정, 영성 등과또 폭력과 전쟁 상품 등에 집중할 것이며, 물론 그 과정에서 ‘뉴에이지‘ 기술들을 충분히 활용하게 될 것이다. - P105

나는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신페미니스트운동이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체제적 성격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는 과정에서재발견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여성의 착취와 억압의 역사적·사회적 측면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생물학적 해석의 여지는 ‘남성 지배‘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덜 열려 있다. 역사적으로 가부장 체제들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에의해 발전되었다. 가부장 체제들은 보편적으로,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 P109

독립성이 여성 속에서 인간적 본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독립성은 위에서 서술한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독립성은 여성이 혼성의 혹은 남성위주의 조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자신만의 분석과 프로그램과 방법을 통해 고유의 독자적인 조직을 세우려고 주장하면서 발전시킨 투쟁 개념이기도 하다. 독립 조직은 알다시피, 모든 ‘대중운동‘에 대해 조직,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에서 항상 우위를 주장해왔던 전통적인 좌파 조직에 맞서면서 특히 강조되었다. 이런의미에서 페미니스트의 독립성에 대한 주장은 여성문제와 여성운동을 어떤 다른 외관상 좀 더 보편적인 주제나 운동 아래 수렴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여성의 독립적인 조직은 독립된 힘의기초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운동의 질적으로 다른 특질과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 P115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운동 내에서도, 다양한 하위 운동들, 예를 들면 레즈비언운동 등이 등장했다. 또한 제3세계 페미니스트운동이 발전하면서 이런 원칙이 강조되기도 했다. 여성운동에는 중앙도 없고, 서열도 없고, 공식적이고 통합된이데올로기도 없고, 공식 지도부도 없다. 따라서 다양한 자발적 활동과집단의 독립성은 운동 내에서 진정으로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역동성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다. - P116

육체는 운명anatomy is destiny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에서 나타난 것처럼, 생물학적 결정론은 음으로 양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뿌리 깊은 방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위해 싸우는 여성은 생물학적 결정론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남녀사이의 불평등하고 서열적이며 착취적인 관계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분석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분석의 도구인 기본 개념과 정의가 생물학적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기때문이거나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 P120

자연, 노동, 성별노동분업, 혹은 가족, 생산성 등은 우리 분석에서 중심적인 기초 개념들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 속에 내재한 이데올로기적경향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이들 개념을 사용한다면, 문제가 분명해지기보다 더욱 모호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불평등이나 착취적 관계들을 타고난 - P120

것, 혹은 사회적 변화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고 설명할 때 너무 자주사용되어 왔다. 여성은 이 용어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데 이용될 때 특히 의심해야 한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여성의 몫은 흔히 여성의 생물학적 혹은 ‘자연적 기능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여성의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여성의 생리활동의 연장선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가사와 육아는 출산했다는 사실과 연결된 것으로, ‘자연‘이여성에게 자궁을 주었다는 사실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산을포함한 생명을 생산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노동이 인류가 자연과 의식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즉 진정한 인간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의 활동으로, 즉 식물과 동물을 의식 없이 생산해내고 이 과정에 대해 통제하지 않는 자연의 활동으로 보인다. 여성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여성 자체의 자연성까지 포함하여, 자연의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광범한 영향을 미치고있다. - P121

생물학적으로 오염된 자연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신비화된 것은지배와 착취, (남성)인류의 (여성)자연에 대한 지배관계이다. 이런 지배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여성에게 적용된 다른 개념들에도 내재해 있다.
노동 개념을 보자.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물학적 규정 때문에,
여성의 출산과 육아, 그리고 다른 가사노동들은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 개념은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생산적 노동,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여성도 그런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을 하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개념은 보통은 남성 혹은 가부장적 경향과 함께 사용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여성은 전형적으로는 가정주부로, 즉 노동자 - P121

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노동의 수단은, 다시 말해서 노동개념에서 암시적으로 생산을의미하는 신체는 손과 머리이다. 여성의 자궁이나 가슴은 그 범주에끼지 못한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에서 다르게 규정된다. 인간의 신체 자체도 진정으로 ‘인간적인‘ 부분(머리와 손)과 자연적‘ 혹은 순전히 ‘동물적‘ 부분(생식기, 자궁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구분이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남성의 성차별주의 때문이라고할 수는 없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수단으로 직접 사용될 수 있고, 혹은 기계와 곧 연결될 수 있는 인체의 부분에만 관심이 있다. - P122

노동 개념에 숨겨져 있는 불균형과 생물학적 편향으로 지적할 수있는 또 다른 예는 광범하게 퍼져있는 성별노동분업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일들을 단순하게 배분하는 것처럼보이지만, 남성의 일은 진실로 인간적인 것(즉, 생각하고, 합리적이며, 계획되고, 생산적인 것 등등)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여성의 일은 다시금 기본적으로 ‘타고난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은폐하고 있다. 성별노동분업은 그 규정에 따르면,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활동‘ 사이의 구분으로 바꿔 쓸 수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남성노동자(즉, ‘인간)과 여성노동자(즉, ‘자연) 사이의 관계가 지배관계, 심지어 착취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숨기고 있다. 여기서 착취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구적인 분리와 서열화가 일어났으며, 소비자가 스스로는 생산하지 않으면서, 생산자의 생산품과 용역을 착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평등한 공동체였다면 생산자가, 세대를 달리해서라도, 결국은 소비자가 되었을 것이다. - P122

마찬가지로 애매한 생물학적 논의가 지배적 힘을 발하는 곳은 가족 개념과 관련한 부분이다. 이 개념이 유럽중심적이고 비역사적 방식으로 일반화되어 사용되면서 핵가족이 남녀관계들을 전체적으로 제도화하는 기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구조로 제시되었다. 또한 이 개념은 이 제도의 구조가 서열이 있고 불평등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있기도 하다. ‘가족 내의 동반자의식 혹은 민주주의‘라는 말은 이 제도의 본색을 가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생물적‘ 혹은 ‘자연적‘ 가족과 같은 개념은 특히 이런 비역사적인가족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이성 간의 성관계와 핏줄을 통한 자녀의 출산을 의무적으로 결합한 것에 기초한 개념이다.
몇 가지 중요한 개념에 내재해있는 생물학적 경향에 대해 이렇게간단히만 살펴보아도 이런 편향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체계적으로드러내는 것이 꼭 필요함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편향들이 불균형하고착취적인 사회적 관계들, 특히 남녀 사이의 관계들을 은폐하고 신비화시키고 있다. - P123

진화론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엥겔스는 이 아주 초기의 시기를 원시시대라고 해서 인간의 실제 역사와 분리시켰다. 엥겔스는 인간의 실제 역사는 문명과 함께 시작된다고 보았다. 역사는 충분히 성숙한 계급과 가부장적 관계와 함께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엥겔스는 인류가 어떻게 원시시대에서 사회의 역사 단계로 뛰어 오르게 되었는지에 답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는 변증법적인 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아직 완전히 역사시대로 들어오지 않은 원시 사회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진화의 법칙이 사유재산과 가족과 국가의 등장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 P130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과정의 산물이다. 역사적 단계 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다르게 규정되어 왔다. 이런 규정은 각 시대의 주된 생산양식에 기초해 있다. 이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유기적인 차이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물을 전유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역사 속에서 여성과 남성은 자신의 몸에 대해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모계사회에서 여성성은 모든 생산성의 사회적패러다임으로, 생명 생산의 주된 활동 원리로 해석되었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어머니‘는 오늘날의 의미와는좀 다르다.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모든 여성은 사회적으로 가정주부로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로 규정되고, 모성은 이 가정주부 신드롬의 부분이 된다.  - P136

이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볼 수 있으며, 사회적 상호작용 혹은 협동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은 첫 번째 생산수단일 뿐 아니라 첫 번째 생산력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몸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이에 따라 외부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는 동물과 다르게 생산적이다. 몸을 생산력으로 전유하면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는 광범한 결과들을 낳았다.
여성의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 외부 자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들 자체까지 포함한 자연에 대해 갖는 대상관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몸 전체를, 즉 손이나 머리만 아니라몸 전체를 통해 생산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몸을 통해여성은 아이를 생산하고, 이 아이의 첫 번째 음식도 생산한다. - P137

그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 여성과 같은 방식의 생산성을 경험할 수없다. 남성 몸의 생산성은 외부적 수단, 즉 도구의 중재 없이는 드러나지 못한다. 반면에 여성의 생산성은 도구 없이도 드러난다. 남성이 새로운 생명의 생산에 기여하는 것, 이는 항상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여는 도구를 통해 외부 자연에 작용한 오랜 역사적 과정과 이 과정에 대한 숙고 끝에만 나타나게 된다. 남성이 자신의 자연적 몸에 대해 가진 인식과 자신을 바라보는 인상은 외부 자연과 상호작용하는다양한 역사적 형태와 이런 작업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남성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인식, 즉 생산자로서의 인식은기술의 발명과 통제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구가 없다면, 남자man는 사람MAN이 아니다. - P144

남성의 성기와 남성이 다양한 시대 다양한 생산양식 속에서 발명해 온 도구 사이의 유사성을 연구하는 것은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것이다. 우리 시대 남성이 남근을 스크루드라이버(남성은 여성을 스크루‘라고 한다), ‘망치‘, ‘서류철‘, ‘총‘ 등으로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역항 로테르담에서는 남성의 성기를 ‘무역‘이라고 부른다. 이런 용어는 남성이 자연, 여성,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남성의 마음속에는 노동도구와 노동 과정, 그리고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 인식이 밀접히 연관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 P14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의 기술이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 계속 생산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성은 새로운 것을 생산했다. 한편, 사냥 기술은 생산적이지 않았다. 사냥에 적절한 도구는 다른 생산적 활동에 사용될 수 없었다. 돌도끼는 달랐지만, 활과 화살과창은 기본적으로 파괴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들은 동물을 죽이는 데만 사용되지 않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었다.
바로 이런 사냥 도구의 성격이 이후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들뿐 아니라 남성의 생산성이 더욱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기를 제공하는 사냥꾼이 공동체의 영양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그런 발전이 나온 것은 아니다. - P153

이런 비생산적이고 약탈적인 전유양식은 인간 사이의 모든 착취관계의 역사에서 패러다임이 되었다. 주된 메커니즘은 자율적인 인간 생산자를 타인을 위한 생산의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것, 혹은 그들을 타인을 위한 ‘자연 자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부장적 패러다임의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부장제는 지구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가부장적이었던 사회들에서 발전했다. 유대인, 아리아인(인도인과 유럽인), 아랍인, 중국인,
그리고 이들 각각의 거대 종교들 속에서 발전했다. 이들 문명들, 특히유대-유럽계 문명의 성장과 보편화는 정복과 전쟁에 기초한 것이다.
유럽이 아프리카의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가 약탈적인 유럽인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이는 또한 원시공산주의, 바르바리 Barbary상부 지역, 봉건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이르는 모든곳의 역사를 단선적이고 보편적인 과정으로 보는 개념은 가부장제에대한 우리의 분석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62

그러나 ‘자연화‘ 과정은 식민지 전체와 노동계급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여성 또한 자연으로, 자본가 계급의 후계자를 낳고 키우는 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성을 ‘야만적‘ 자연의 일부로 보았던 반면에, 부르주아 여성은 ‘길들여진 자연으로 보았다. 부르주아 여성의 섹슈얼리티, 그들의 생산적 자율성만이아니라 생식력은 부르주아 남성에 의해 억압받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부르주아 여성은 생계를 남성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여성이 길들여지고 남편의 소득에 의존하는 가정주부로 변모하는 것은자본주의 아래 성별분업의 모델이 되었다. 이는 여성, 모든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통제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은 여성의 가정주부화과정과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영역인 가정과 가족은 ‘자연, 사적이고 길들여진 자연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공장은 공적이고 사회적(‘인간적‘)인 생산의 공간이 되었다. - P167

마녀사냥은 여성의 성과 재생산 행위를 통제하는 직접적인 훈련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고, 여성의 생산성보다 남성 생산성의 우월성을 수립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녀사냥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적 자연의 사악함(악sin은 자연nature과 동의어이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성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만족할 줄 모르며, 언제나 정숙한 남성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이 아직은 성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심지어 성욕이 없는 존재로, 즉 19~20세기에 간주되었던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여성의 섹슈얼한 행위는 정숙한남성, 즉 재산의 상속자인 후손을 식별할 수 있도록 여성을 통제하고싶어 하는 남성에게는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자신의 딸과아내의 정숙을 지키는 것은 남성의 의무였다. 여성은 ‘자연‘이고 ‘악‘이기 때문에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다. 여성은 영원한 소수자가 되었다. - P169

오직 남성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인이 되고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자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기 위해, 남성은 구타나 다른 폭력적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Bauer, 1971). 여성의 사악한본성에 대한 모든 직접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은 여성에게서 다른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기능에 대한 자율성을 앗아가려는 목적과 경제 정치 문화적 영역에서 남성의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목적에 부합했다.
성적 자율성은 경제적 자율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성 치료사와 산파를 마녀로 내몰고 비난하면서 남성 의사가 전문직화되었던 사례는 여성 생산 활동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가장 일목요연하게보여준다. - P170

이 ‘문명화 과정‘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여성은 한 남성을 위한 가정주부이거나 자본가를 위한 임금노동자로, 혹은 둘 다로 훈련되었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에게 사용된 실제적 폭력을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내면화했다. 그들은 이를 자진해서 한 것으로, 사랑으로 규정했다. 자기억압에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였다(Bock/Duden, 1977). 이런 자기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적 이데올로기적소품을 교회, 국가, 가족이 제공했다. 여성은 노동과정의 조직(노동현장에서 가정을 분리하는 것), 법, 경제적으로 이른바 ‘부양자‘ 남성에게의존하는 것을 통해 이 제도에 구속되었다. - P170

이런 착취적이고, 쥐어짜내는,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자연에 대한대상관계는 가장 먼저 남성과 여성, 남성과 자연 사이에서 수립되었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다른 모든 가부장적 생산양식의 모델로 남았다. 자본주의는 이를 가장 정교하고 가장 보편화된 형태로 발전시켰다." 이 모델의 특성은 생산과정과 생산품을 통제하는 이들 자신이 생산자가 아니라, 전유자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른바 생산성은 타자 - 결국은 여성 - 생산자의 존재와 종속을 전제로 한다. 월러스틴이말한 것처럼, ‘.... 잔혹하게도, 노동력을 낳는 이들이 식량을 기르는이들을 부양하고, 이들은 다른 원료를 생산하는 이들을 부양하고, 또이들은 공업 생산에 관련된 이들을 부양한다‘(Wallerstein, 1974:86.
여기서 월러스틴이 빼놓은 것은 이들 모두가, 이 과정 전체를 결국은무기를 통해 통제하고 있는 비생산자들을 부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패러다임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비생산자가 다른 이들이 생산한 것을 전유하고 소비(혹은 투자)한다는 사실이다. 사냥꾼- 남성은기본적으로 생산자가 아니라, 기생자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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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Maria Mies, 1931~

독일 쾰른대학 사회학과 교수이다.
오랜 기간 인도에서 작업하였고,
1979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사회과학연구원〉에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60년대 말부터 여성운동과 여성연구를 활발히 해오고있다. 페미니스트, 환경과 세계 개발문제에 대해 여러 책과논문들을 써 왔다. 주요한 관심은 방법론과 경제학에서대안적 접근방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1993년 가르치는일에서 퇴임한 뒤부터, 여성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아틱(Attac)의 여성 네트워크인 〈페미니스트아탁>의 회원이다. 저작으로 인도여성과 가부장제』(Indian Women and Patriarchy, 1980), 『에코페미니즘』(창비, 2000, 공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동연, 2013, 공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등이있다.

옮긴이 최재인Jaein Choi, 1966~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19세기 후반 아프리카계미국인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여성과인종, 계급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서양여성들 근대를 달리다』(공저), 여성의 삶과 문화』(공저),『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역사인식』(공저), 동서양 역사 속의다문화적 전개양상』(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아름다운외출』, 『유럽의 자본주의』, 『히스토리』(공역) 등이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축적이 나의 주된 이론적 작업이기 때문이기도하고, 1986년에 했던 생각의 대부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 자연에 대한 폭력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왔다. 이런 폭력의 형태는 내가 1986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더 가학적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세계적 차원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폭력의 결과로는 기후 변화를 개선할 수 없고, 지구의 자원고갈과 원자력으로 인한 오염을 회복시킬 수가 없음을 오늘날 우리는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패러다임은 끝없는 자본축적을 추구하는데, 이는 진보와 "좋은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 P5

내가 오래전에 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몇 가지가 좀 더 추가되었을 뿐,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뭘 더 말해야 하는가.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더 악화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이 책이 나온 이래 24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내 분석이 여전히 유효한가? 나는 이전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고, 이 파괴적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방법에대해서도 여전히 같은 비전과 전망을 갖고 있는가? - P5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보면, 가난한 국가나 부자 국가나 상관없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지 않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혀 평등하지 않다. 왜 그런가? 몇몇 여성이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국가나정부의 수장이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목표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체제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에 여성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많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 체제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된 여성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성차별적·가부장적 문화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1980년 무렵 유럽과 미국의 페미니스트는 왜 여성의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자본가나 남성에게 여성의 노동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짜의 선의" 혹은 "사랑의 노동"이었다. 가정주부는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완전히 경제적으로 의존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임금을 받지 않으며, 그녀의 노동시간은 계산되지 않고, 의료보험도, 노령연금도 없다.  - P6

동시에 내 친구들과 나는 식민지민과 자연이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본은 그들의 "생산"을 아주 적은 비용으로 전용했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나 멕시코 같은 국가에서 젊은 여성은 서구 시장에 공급할 의류 등을 세계에서 가장 싼 임금을 받고 생산했다. 이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여성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가치가낮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방글라데시처럼 가난한 국가에서도 여성 노동은 더 저렴하다. 이곳에서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다. 오늘날 이런 심한 착취는 폭력 및 가장 잔혹한 노동환경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노동환경은 그들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최근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의류공장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화재가 이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화재로 수천 명이 사망했는데, 그 대부분이 어린 여성이다. 이런 생산관계로 이익을 챙기는 자는 대기업, 유명한 국제기업이며, 이 중에는 한국 기업도 있다. 이회사들은 국제노동기구의 노동법도 의식하지 않는다.  - P7

오늘날 사실상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는 세계적 자유시장이 빈곤을 없애고,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와계급 사이의 불평등을 없앨 것이며, 자본재와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세계를 개방하겠다고 설교한다. 신경제 주창자들은 "신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해 공정한 경쟁의 장을 창출할 것"이라는 공약을 내놓았다. 신자유주의의 주요 원리는 세계화, 자유화, 사유화, 일반 경쟁이다. 이런 원리는 국가가 자국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이를 이윤을 추구하는 초국적 기업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새로운 원리는 노동권, 환경보호법, 여성과 아동의 보호, 노동 안정성, 일자리 안정성 등을 포기하게 만든다.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철도, 우편, 전화통신 등 중요한 서비스업들이 사유화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경제원리는 세계적 합의 아래 자리를 잡았고, 세계무역기구WTO는 이런 합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 P9

나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단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체제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체제는 최소한 5천년의 역사를가진 것으로 전 세계의 모든 ‘위대한 문명들과 문화들을 관통하며 조직했다.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여성이 함께 했던 ISS의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 과정에서도 이 체제의 역사적 유구함과 지리적광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체제가 여러 문화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일부는 다른데보다 좀 더 잔인하다. 이는 구조상 지금도 여전하다. 이 프로그램의 학생들이 이를 이해해 가면서,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다. "문화는 다르지만, 투쟁은 함께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문제는기원과 다양함에 상관없이 보통의 시공간을 곧장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해주면서, 동시에 이런 문제를 던져 준다. ‘이런 반여성적인 체제를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P18

이런 현상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는 통념과 다르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자본의 축적 또는 지속적인 성장은 거대한 인간적 그리고 인간 이외의 요소들이 식민화되는 조건 아래에서나 가능했다. 여성,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자연과 사람과 토지가 지금까지의 주된 식민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축적과정의 지하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다. 우리는 빙산의 비유를 사용했다. 자본과 임금노동이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보이는 일각이었다. 여기서 임금노동은 국민총생산에 포함되고, 노동계약으로 보호받는 노동이다.
그러나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만들어 낸 생산은 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 P23

한 페미니스트가 쓴 책이 남성의 주목을 받기까지는 어느 정도의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남성이 읽기 시작하자 여기에서도 평가는 거부 아니면 찬사로, 극단화되었다. 분명히 이 책은 독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감정과 신념을 건드렸고, 이에 반응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당혹‘Betroffenhein을 만들어냈다. 내가 운동 초기부터 당혹이라는 용어를사용한 것은 페미니스트 연구와 일반적으로 실증주의적 주류 연구의무관심하고 관여하지 않는 태도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독일어 ‘당혹‘Betroffenheit은 영향을 받고 관심을 둔 상태만이 아니라, 고심하면서 무언가 하려는, 행동하려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이 책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 P24

선진공업화된 사회들에서 사는 사람들은 음식이 여전히 땅에서나오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토지가 식량 생산과 식량 안보의 기초라는 사실을 잘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토지는 ‘저개발국가들에게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개발‘ 사회에서도 토지에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다른 충분히 성장한 경제 모델을 보지 않는 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패러다임을 꿈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 그들 자신의 창의성과 에너지를 발달시켜 줄 과정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된 집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안정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나는 자급적 삶에 대한 전망이 더 나은 대안이며, 이 대안은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을 선진공업화된 세계의 사람들에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고있다. 대안은 없다는 티나TINA 증후군에 사로잡히는 대신, 하늘에서떨어지는 초인을 기다리거나 기술을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여기며 기다리는 대신, 자급적 삶이라는 대안SITA, Subsistence Is The Alternative[자급이 대안이다)을 가능한 지향점으로라도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P35

여성해방운동은 생태운동, 대안운동,
평화운동 등 가장 광범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또한 가장 논란이 많은 신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그 존재 자체에서부터 민중속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생태문제‘, ‘평화이슈‘, 제3세계의 종속 문제에 대해서는 침착하게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토론을 이끌어갈 수 있어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남성과 그리고 많은 여성이 늘 지극히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각각의 개인에게 이는 민감한 이슈이다. 이는 여성운동이 다른 운동들처럼 국가나 자본가 등 외부의 적이나 기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 남성과 여성 사이의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직접 민중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 P46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이를 피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남녀관계의진정한 본질을 스스로 인식해가는 것은, 돈벌이와 권력놀음과 욕망이 난무하는 냉정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지대로 남아있는 마지막 섬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스트는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한 침묵의 공모를 과감하게 깨뜨리려는 이들이고, 이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은 이들이다. 그러나 이런 남성 지배 체제에 ‘성차별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일정한 이름을 부여하며 목청을 높이는 것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양면성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분열을 강화시킬 뿐이다. - P47

대신 서구와 비서구 여성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크게 강조된다. 오늘날 이런 식민 관계는 국제노동분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 관계는 백인 페미니스트의 의식에서도 종종 사라지곤 한다. 이 백인 여성의 삶 수준은상당 부분 온존하고 있는 식민지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백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도 이를 종종 망각한다. 이들이 ‘흑인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고 해서 이들이 자동적으로 흑인 세계에 사는 이들과 한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Amos &Parmar, 1984 참조). 흑인 여성 역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따라, 식민지와 계급을 따라 구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계급 구분은 성과 인종을 논할 때 자주 망각된다. 현 시점에서 ‘흑인‘, ‘갈색‘ 혹은 ‘황색‘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지키는 이들에게 큰 희망이다. ‘흑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 중 일부는 ‘백인 세계‘에 사는 일부 백인 여성보다. 그리고 특히 백인 세계와 흑인 세계에 사는 대다수의 흑인 여성보다 나은 삶 수준을 누리기도 한다. 우리가 도덕주의와 개인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표면 아래를 보는 것, 성적·사회적·국제노동분업의 상호작용을 물질적이고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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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의 첫 장을 읽으면, 아니 아무 곳이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으면,
야심찬 두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의 비이성적인 타락 행위에 전율하며 내용에 빠져들 것이다. (...) 흥미진진하고, 놀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희생자가 쓴 일기,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신문기사, 개인의 편지 등에서 수없이 추려냈다. (…) 스나이더는 이런 단편적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 경고 섞인 고발을 하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풀어나간다.
_<킨들 데일리포스트>




지은이 티머시 스나이더 Timothy Snyder

1969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 중유럽 및 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현재 예일대학 역사학과교수이며, 빈 인문학 연구소 종신 연구원, 미국 홀로코스트기념관 양심위원회 위원이다. 런던정경대, 바르샤바 유럽대학 등에서 강의한다. 2000년대까지 주로 역사학자로 활동해왔지만 2010년대 들어 정치, 보건, 교육 분야에 관심을기울이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으며, 2020년 페이스북을모니터링하는 독립 단체 ‘리얼 페이스북 오버사이트 이사회‘ 멤버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시카고트리뷴』 『네이션」 「뉴욕리뷰오브북스』 『타임스리터러리서플먼트」 「뉴리퍼블릭」 등에 기고 중이다.
주요 저서로 한나아렌트상(2013)을 수상하고 2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피에 젖은 땅과 블랙 어스Black Earth』가있다. 스나이더는 두 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동유럽의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히틀러와 스탈린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제시한다. 또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악마성의구현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파괴된 지대에서 국적을 박탈당한 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무차별 학살극으로 그린다. 새롭게 발견된 광범위한 문서와 증언에 기초한 이 책들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20세기의 비극에 대해 완전히 새롭고충격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최근 저서로 트럼프 집권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폭정On Tyranny』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바 있다. 그 밖의 저서로 토니 젓과 공저한 20세기를 생각한다Thinking the Twentieth Century』, 러시아, 유럽, 미국 정치를 분석한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TheRoad to Unfreedom』 등이 있다.
랠프월도에머슨상, 라이프치히 도서상, 미국문예아카데미문학상, 카지미에시모차르스키 역사상, 프라킨 국제문학상,
안토노비치상 등을 수상했고, 카네기 펠로십을 받았다.

스나이더는 1930년에서 1945년까지 발트해 연안국들, 벨라루스,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탈린의 인위적 기근에서1945년 죽음의 행진, 그리고 대규모 인종 청소까지 수많은 유혈이 빚어진 이 경계지역들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아집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입었다.
_앤터니 비버, 텔레그래프, ‘올해의 책‘

우크라이나 기근,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대숙청, 소련 포로들의 의도적 아사, 전후의 인종 청소, 이 모든 일에 대해 스나이더는 같은 현상의 다른 면들을 드러냈고,
이로써 큰 기여를 했다. 다른 이들처럼 나치의 잔혹함이나 소련의 잔혹 행위를 따로 연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본 것이다. 스나이더는 이 두 체제를 면밀히 비교검토하기보다 두 체제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들은 서로 더 잔혹해지도록 부추겼고, 그에 따라 각각 저지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집단 학살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_앤 애플바움, 「뉴욕리뷰오브북스」

자국의 역사를 꽤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스나이더의 통찰과 비교·대조의 놀라움 앞에서는 전율하게 된다. 스나이더의 꼼꼼하고 의미심장한 책은 ‘스탈린이 더 나쁘냐, 히틀러가 더 나쁘냐‘ ‘소련의 우크라이나 학살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중 뭐가 더 중대한 범죄냐‘ 같은 무미건조하고 정치관이 일쑤 개입되는 물음에명확하고 통렬한 해답을 준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 배경을 설명하고, 기록한다. 두전체주의 제국은 사람을 숫자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들의 죽음을 더 나은 미래로가는 필연적인 단계로 간주했다. 스나이더의 책은 어떤 일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동정심과 공정성, 그리고 통찰을 더해 설명해낸다._이코노미스트』

의도적인 집단 학살, 그 하나하나의 공포가 생생히 드러난다. (・・・) 스나이더는 희생자, 집행자, 증인들 개개인의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이야기를 더욱 설득력 있게 끌어간다. 뉴욕타임스북리뷰』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동유럽에서 1400만 명이 학살당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사이의 유럽은 어디서, 어떻게, 왜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를 기록했다. 이를 들여다보면 현대 유럽과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나이더는 중대한 공헌을 한 가지 했다. 그는 죽어간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아준 것이다. 그들을 단지 희생자로만 치부한 것이 아니라.
뉴리퍼블릭』 편집자들이 뽑은 2010년 최고의 책

티머시 스나이더의 연구는 세세하고 완전하다. 그의 서술은 힘이 넘친다. 스나이더는 독일과 소련의 대량학살을 들여다보며, 핵무기가 나타나기 전 20세기에 자행된 총력전이 얼마나 사악한 것이었는가를 제대로 파헤친다. 그 필수적인 작업은이제껏 터부로 남아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대부분의 전쟁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도 승자가 한 것이 대다수다. 외교와군사 작전은 대체로 서방 국가들이 주도한 것처럼 혹은 미국·영국·소련이라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동맹국들이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활약한 것처럼 그려진다. 그과정에서 홀로코스트는 전쟁과 별개의 이야기이며, 대량학살과 인류의 비극이라는 차원에서 접근된다. 『피에 젖은 땅』은 그런 관점을 뒤흔들어놓는다. () 스나이더는 이 책의 여러 목적 가운데 하나로, 더 광범위한 유럽 분쟁의 맥락에서 홀로코스트에 접근하려 했다. 그것은 곧 그 의미의 복원이었다. 상당한 논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어떤 역사가도 시도 못 할 과제이지만, 유대인들의 고난을 평가절하하는 일 없이 ‘피에 젖은 땅」은 나치의 학살 기계, 그 전모를 포착해냈다.
월스트리트저널」

히틀러와 스탈린이 어떻게 서로의 범죄를 가능케 하고, 발트해와 흑해 사이의 땅에서 1400만 명의 목숨을 앗을 수 있었는가? 예일대학의 역사학자가 필생의 작품으로 써낸 이 책은 읽고 또 읽을 가치가 있다._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

분명 우리는 모두 알아야 한다. 모두 이해해야 한다. 모두 실감해야 한다. 스나이더의 책은 막대한 상세 자료와 소름 끼칠 만큼 노골적인 묘사로, 이 암울하지만 투명한 폭로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시대에 관한 한 이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데이비드 덴비, 「뉴요커」

이 놀랍고 가슴 아픈 역사책은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숨져간 1400만 명의 학살을 다룬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만이 아니었다. 330만 명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강제한 기근으로 숨졌고, 많은 폴란드의 엘리트 또한 숙청되었다.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 다수는 히틀러에 의해 굶어 죽었다._
파이낸셜타임스』

의도적 대량학살에 있어 히틀러와 스탈린은 아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범죄에 대해 우리는 오랫동안 많은 지식을 쌓아왔지만, 그 성격과 정도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면도 있다. 적어도 이 두 거물 독재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다. 우리는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폴란드와 러시아 서부에서, 그리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서 벌어진최악의 공포를 미처 알지 못했다. 따라서 티머시 스나이더는 「피에 젖은 땅에서20세기 중반 유럽이 겪은 악몽을 제대로, 확실하게 제시해보려 했다.
_인디펜던트』 ‘올해의 책‘

꼼꼼하게 조사 연구를 했고 (・・)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고쳐주는 『피에 젖은 땅』은 너무나 큰 가치를 지닌 책이다. (・・・) 역사 지리학에 있어서 강력하고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애덤 호치실드, ‘하퍼스매거진」

수백만 명의 동유럽인이 독일과 소련, 유럽사 최악의 살인 정권들 사이에 갇혔다.
그들의 이야기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놀라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 『피에 젖은땅은 훌륭한 필치와 명료성과 뛰어난 가독성을 갖춘 책이다. 이 책은 놀라운 최신의 통계 자료도 많이 갖추고 있는 한편, 심금을 울리는 개인사도 담고 있다. (・・・)그중 일부는 익숙하지만, 대부분은 새롭다. 스나이더는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홀로코스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만큼 동유럽을 새롭게 바라보는 중요 인물이다 () 스나이더는 새로운 사고와 조사 결과를 산더미처럼 제시한다. 그 다수

가 처음 보는 것들이다. 참으로 대단한 학술적 연구이며, 여러 신화의 파괴이자 유럽 역사를 새롭게 다시 보는 시작점일 수밖에 없다. "뉴스테이츠먼,

티머시 스나이더의 책은 대단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잔혹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연대기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나 새롭게 구축해내고, 그리하여 이 역사적 사건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_주이시 포워드』 2010년 5대 논픽션‘

「피에 젖은 땅」의 첫 장을 읽으면, 아니 아무 곳이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으면,
야심찬 두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의 비이성적인 타락 행위에 전율하며 내용에 빠져들 것이다. () 흥미진진하고, 놀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희생자가 쓴 일기,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신문기사, 개인의 편지 등에서 수없이 추려냈다. (…) 스나이더는 이런 단편적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 경고 섞인 고발을 하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풀어나간다.
_<킨들 데일리포스트>

"살았어, 이젠 살았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황량한 들판을 비틀비틀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이렇게 외쳤다. 소년의눈에 들어온 먹을거리.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었다. 들판의 밀은남김없이 징발된 뒤였다. 그 무자비한 물자 징발은 유럽의 집단학살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때는 1933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의도적으로 기아의 늪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그 소년은 결국 죽었다. 우크라이나 동포 300만 명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하에서 그녀를다시 만날 거야." 어느 소련 젊은이는 자기 아내를 생각하며 이렇게말했다. 그 말은 들어맞았다. 그는 그녀 다음 순서로 총살되었고, 그녀와 함께 묻혔다. 스탈린의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다른 70만명과 함께였다. "그놈들은 내 결혼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어느 폴란드 장교의 일기는 이렇게 중단되는데, 1940년에 그가 소련 - P5

비밀경찰의 손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무렵, 폴란드를 동시 침공한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에게 희생된 20만폴란드인의 한 사람이었다. 1941년 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서, 어느 열한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낡은 일기장에 마지막 말을 이렇게다. "이제 타냐만 남았어." 히틀러가 스탈린을 배신하고,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농성 끝에 굶어 죽은 400만 명의 소련인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여름, 이번에는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가벨라루스에서 아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죽기 전에 인사해. 나 무서워. 그들이 아이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던지고 있어."
그녀 외에도 독일군이 가스나 총탄으로 죽인 유대인은 500만 명 이상이었다. - P6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 그 희생자들이 쓰러져간 땅,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른다.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세력을 굳히던 시기(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1941), 독소 전쟁(1941~1945) 동안, 사상 초유의 대학살이 이들 지역을 덮쳤다.
희생자들은 주로 유대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발트 연안국인들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었다. 1400만명이 겨우 12년 동안, 1933년에서 1945년까지 학살되던 때는 히틀러 - P6

와 스탈린 둘의 집권기였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의 조국이 전쟁터가 되었다고 해도, 그들은 전쟁보다는 잔혹한 정책 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상 최악의 살육전이었다. 그리고 참전 군인들의대략 절반이 바로 이곳, 블러드랜드에서 쓰러졌다. 그렇지만 1400만명의 희생자 가운데 전사한 병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아무도 무장하지 않은 채였고, 대개 모든 재산을 몸에 걸칠 것조차 빼앗긴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 - P7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지켜봤던 독일계 유대인 대부분은 천수를 누렸다. 독일계 유대인 16만5000명을 학살한 일은 분명 끔찍한 범죄이지만, 유럽 유대인 전체가겪은 비극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의 3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1941년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야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아낸다‘는 히틀러의 비전이 유럽 유대인의 가장 큰 두 분파와 연결되었다. 그의 유럽 유대인박멸의 꿈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유럽 땅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이 홀로코스트를 들여다보면, 독일은 더 많은 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히틀러는 유대인들만 없애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와 소련이라는 나라도 아예 뿌리 뽑기를 원했고, 그 지배 계층을 박멸함은 물론, 수천만 명의 슬라브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도 학살하려 했다. 만약 독일의 소련 침략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그 첫 겨울철에 3000만 명의 민간인이 굶어 죽었을 것이고, 수천만 명이 추방 혹은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이 계획이 실현되진 않았지만, 독일의 동방 점령 정책의 근간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했다.  - P8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을 꺾었고, 그리하여 스탈린은 수백만 명으로부터의 감사와 함께 전후 유럽 질서에서 중요한 축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저지른 대량학살은 히틀러의 그것과 맞먹는 규모다. 그리고 비전시 학살만 따져보면 한수위일 정도다. 소련을 방위하고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스탈린은1930년대에 수백만 명의 아사와 75만 명의 총살을 지휘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타국민을 죽인 정도에 전혀 뒤지지 않을 강도로 자국민을 죽였다. - P9

이 책은 한 정치적 대량학살의 이야기다. 1400만 명의 희생자는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의 4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갔다. 또 20만 명은 1939년에서 1941년사이, 즉 독일과 소련이 ‘동맹국으로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던 시기에 죽었다. 1400만 명의 학살은 때로 경제 계획의 일환이었거나 혹은경제 문제 때문에 가속이 붙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결코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일은 아니다. 스탈린은 1933년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히틀러도 그보다 8년 뒤,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300만 명이상이 죽었다.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 P10

블러드랜드는 유럽 유대인이 살던 땅 모두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의제국이 차지하려 했던 모든 땅, 베어마흐트와 붉은 군대가 싸운 모든땅,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와 독일의 친위대ss가 힘을 집중시켰던 모든 땅이 피로 물들었다. 떼죽음이 일어난 땅은 대체로 블러드랜드에 포함된 땅이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의 정치 지형에서, 블러드랜드는 폴란드, 발트 연안,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그리고 소련의서쪽 변경지대를 의미했다. 스탈린의 죄악은 흔히 러시아에 지은 죄악으로 여겨지며, 히틀러의 죄악 역시 독일에 대한 죄악으로 불린다.
그러나 소련의 가장 심한 만행은 비러시아 변경지대에서 저질러졌고,
나치 역시 독일 바깥에서 살육의 대부분을 자행했다. 20세기의 공포는 집단수용소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대다수를 낳은 곳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다.
대량학살의 장소와 방식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는 우리가 20세기의 공포를 보는 시각을 오도한다. - P12

1940년대에 시안화수소는 살충제로 쓰이고 있었다. 일산화탄소는 내연기관에서 만들어졌다. 소련과 독일은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던 기술인 내연기관, 철도, 화약무기, 살충제, 철조망 등을 써서 대량학살을 했다.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엔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명 한 명이 다르게죽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 P16

그 엄청난 숫자에 질려,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개인성을 생각못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그녀의 레퀴엠』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요. 하지만 명부는 사라졌고, 아무 데서도 볼 수 없군요." 역사학자들의 수고 덕분에, 우리는 명부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동유럽의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덕분에, 그들의 마지막을 다룬 문서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희생자들이 남긴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놀랄 정도다. 가령 키예프의 바비 야르에서 나치에게 생매장될 구덩이를 스스로 파야 했던 젊은 유대인여성의 회상, 빌뉴스 근처 포나리에서 마찬가지로 죽어간 사람의 말,
트레블린카에서 살아남은 수십 명의 증언도 있었다. 우리는 애써 수집된 뒤 묻혔다가 다시 발견된 바르샤바 게토"의 문서보관소도 봤다.
1940년 카틴 숲속에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총살된 폴란드 장교들의 시신과 함께 남긴 일기장들도 찾아냈다. 그해에, 독일군의 살육 과정에서 생매장되려고 실려가던 폴란드인들이 버스에서 던진 쪽지들도 찾아냈다.  - P17

소련과 나치 체제를 비교하며 1951년에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그 실재성 자체가 "그런 체제들이 비전체주의적 세계 속에서 이어진다는 데 근거한다"고 썼다.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도 1944년 모스크바에서 같은 말을 더 쉬운 표현으로 남겼다. "여기서는 사람이 진실과 거짓을 판정한다. 진실이란 그저 힘의 조성물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힘의 구도에 저항하는 진짜 역사일까?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역사 자체를 쥐고 흔들려 했다. 소련은 마르크스주의 국가였고, 그 지도자들은 역사의 ‘과학자로 자처했다. 국가사회주의는 전면적인 변혁의 종말론적 버전이었고, ‘의지‘와 ‘인종‘이야말로 과거의 유산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실행에 옮긴 근거였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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