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어느 화랑의 내부를 천천히비추어 나갔다. 특이하게도 그 화가의 작품은 모두 바위를 정으로 쏜 질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사람이든 나무든,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은 모두 그러한 바탕에만 그려져 있었다. 그 화가는 아마도 외로움을 많이 탔거나 가족을 잃어 본 경험이 있는 듯했다. 왜냐하면 그 화가의 작품은 모두 우리가 흔히가족이라고 하는 범주에 드는 사람들의 모습만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외로움이 얼마나 깊었으면, 화폭 위에 가족의 구성원들만 그려 놓았을까? 그의 그림은 어느 것 하나 얼굴만 그려져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소품일지라도 카메라는 그의 그림 속 인물은 모두 전신이 다 그려져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보여 주었다. 그에게 가족은 얼굴, 그것만이 아니라 몸뚱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 P31
특이한 점은 나무 그림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나무를 그릴 때는 벗은 모습만 그렸다. 잎사귀가 무성하게 달린 나무는 찾아볼수 없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벗은 나무처럼 외로움을 무척 탔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은할 수 없이 옷을 걸치게 했지만, 나무에까진 그럴 필요가 없어벌거벗은 그대로 두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벌거벗은 나무는 화가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을 헐벗은 채 견뎌내야 하는 나무. 그렇다고 사람들의 모습이 나무의 모습보다 화려하거나 번잡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의 서있는 모습 또는 앉아 있는 모습. 사람들의 외로움을 나타내기엔얼굴보다도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전신의 모습이 더 적당하다고 화가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 P32
그러나 나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어쩌면 변화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것은 어차피 받아들여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디선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부인 듯한 남녀가 다투는 소리였다. 이 밤에 저 부부는 뭐가어긋나서, 생활이 어떻게 자신들을 속여서 다투는 것일까? 문득그 다툼 소리가 낯설지 않고 아주 익숙한 소리로 느껴졌다. 저 소리……. 부부가 살 비비며 사는 부부가 조금 뒤틀리고헝클어지고 뒤집어지고 어긋난 일이 있다고, 잠자리를 박차고일어나 한밤중에 너 죽고 나 죽자며 싸우는 저 소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밤엔 저 소리가 오히려 정겹다. 저 소리, 저소리가 정겹다. - P37
십년 전, 한창 피어나는 여고 2학년 때, 5월 어느 날이었어요. 우리가 살던 이 도시에 난리가 났어요. 사람들은 순박하기 짝이없었는데 서울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어요. 여기 사는 우리를 모두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설마 설마 했어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높은 사람들이 법을 어겨 가며 자리다툼하면서 나라를 어지럽히기에 우린 그러지 말라고 모여서 떠든죄밖에 더 있느냐. 그런데 오히려 우리를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여기 사람들은 모두 흥분했지요. 아주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 때 나라는 몹시 어지러웠어요. 그런데도 높은 사람들은 나라를 바로 다스릴 생각은 않고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둥 오히려큰소리였어요. 그래서 우린 일어났지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의사 표현 정도로만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친 거예요. - P110
그 때 전 무얼 했냐구요? 여고 2학년이면 얼마나 꿈이 많았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보고 교복을 입은 채로 시민군 차에 올라탔어요. 그러고는 주먹밥 당번을 했지요. 주택가에서 아줌마들이 만들어 놓은 주먹밥을 시내로 나르는 일을 맡았는데, 그 일이 웬만큼 몸에 밴 어느 날 검문소 부근의 갈림길에서 총 소리가 나더군요. 본능적으로 차 바닥에 엎드렸지만, 제가탄차 운전사가 총에 맞아 차가 뒤집히고 저는 길 옆 도랑에 팽개쳐졌어요. 나중에 보니 제가 가슴에 총을 맞았더라구요. 그래도 모진 것이 사람 목숨이라, 그 때 죽지 않고 도랑 둑을 타고 벌벌 기어 나와 이렇게 살았지요. 몇 번씩 죽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안 되더군요. 치료하느라 일 년 가까이 누워 있던 병원의 간호사 언니가 잘해 줘서 저도 간호사가 되기로 했어요. 여고 남은 기간 어찌어찌마치고 나서 간호보조원 양성소에 들어갔지요. - P111
이에서 시체로 발견됐어요. 대학생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괴심에다 친동생인 제가 이렇게 된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정신분열이 일어났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만 거예요. 그런데 오빠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어요. 웅덩이는 어른이 빠져 죽을 만큼 깊지도 않은데다가, 오빠가 약을 먹었다는 흔적도없었거든요. 나중에 들으니까 오빠가 시내 중심가의 분수대에올라가 만세를 부르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오빠의 죽음은 일단 정신질환을 앓는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어요. 그 때 신문은 이렇게 썼지요. ‘집 나온 정신 질환 대학생 변사체로 발견, 음주 후 실족사로 추정‘이라고요. - P116
저는 갑자기 이 도시가 거대한 정신과 병동처럼 느껴졌어요. 무딘 사람들만이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마음이섬세한 사람이라면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정신과병동 말이에요! 좀더 강하고 좀더 질겨야 살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강하고 질기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갑갑하고 너무 막히고 너무 닫혀 있는 세상이에요. 하지만 이런 생각만 하고 앉아 있을수도 없었어요. 병실에서는 언제나 또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 P117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 그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하는데아직 그것까지 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사랑을 배신하거든요…." 나는 이 대목에서 걸려 넘어졌다.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나. 그런데 아가씨는 그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건좀 이상하다. 그건 좀 이상하다! 원수는 깔아뭉개서 끝까지 쳐부숴야 한다. 다행히 아가씨도 아직은 그들까지 사랑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내 팔을 훔쳐간 원수들에게 수배령을 더욱 단단히 내렸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아가씨의 오른쪽 가슴을 훔쳐 간 원수들에 대한 수배령까지 내렸다. 아가씨는 원수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지만, 내가 아는 사랑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없다. 그놈들을 찾아 내서 원래대로 모든 것을 돌려 놓고 혼내주리라. 혼내주리라! - P119
나는 이제야 보고한다. 너무나 많이 쏘다니고, 너무나 자연스레 나를 내주고, 너무나힘있게 나를 던졌던 그 도시, 그 거리.아니, 이 도시, 이 거리에내가 평범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이제 다시 낯설지 않게 되었다는 뒷얘기와 함께. 그리고 나는 덧붙여 알려 준다. 이젠 누구든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또 나는 분명히 힘주어 말한다. 나는 지렁이보다 구렁이보다 바퀴벌레보다 쥐보다 더 큰 힘으로 살고 싶다고. 화해는 그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 ?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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