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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세트 - 전15권 ㅣ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평점 :
로마인 이야기 12~15권을 읽고
“1992년에서 2006년 까지 매년 한 권씩 15권을 15년 동안” 작가는 로마인 이야기1권 서문에서 그렇게 각오를 밝혔고 그렇게 했다.
나는 로마인이야기를 읽기 시작한 것이 1998년이었고 마친 것이 2013년, 읽는 데에도 그와 같은 15년이 걸린 이 시리즈를 마친 소회가 각별하다.
98년, 세계의 전부였던 책방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잔액마저 누군가에게 완전히 털린 것을 실감하던 그 비장한 날들 로마인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세상은 바야흐로 난분분 벚꽃이 피었다 지던 봄날이었지만 오층짜리 낡은 아파트 월세의 작은 방에 스스로 갇혀 지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작은 언니의 손에 이끌려 지하상가 더 좁은 곳에서 김밥, 우동을 팔기 시작 했다. 먹고 살아야 했고 최소한 일이 필요했으니.(언니는 그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한다. 그러나 그곳은 삶의 새로운 학교였고 나는 그곳에서 세상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좀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니 언니는 자랑스러워해도 되는데.......^^)
그곳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호객행위를 했고 점차 넉살도 늘어갔지만 여전히 격리 수감 중이었다. 스스로 유폐를 풀 때 까지 세상과의 유일한 면회는 차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동안 가난한 허기를 채우는 떠나는 영혼들과 책이 전부였을 것이다. 차츰 시간이, 사람들이, 책이 황폐한 심경을 치유해줬고 용기를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걷는 여정도 길어졌다. 걸으면서 성장했다. 날 선 모서리들이 햇볕아래서 바람결을 따라 둥글어지기 시작했고 그 길 위에서 세상의 많은 책들에게 위무를 받았다.
그렇게 로마인 이야기와 함께 한 15년, 여전히 두어군데 옮기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밥상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누가 믿든 말든 배고픈 이들에게 정성스런 밥 한 그릇을 내어다 주는 아주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떤 15년이 위대한지는 자명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위대한 15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잘난 체하는 버릇이 생겼다. 부끄럽게도 꽤 오래 그랬던 것 같다. 조금 모자란다 싶거나 묘사가 서투르다 싶으면 가차 없이 글쓴이를 무시하면서 ‘안 써서 그렇지 내가 쓴다면 발가락으로도 이 정도는 쓰겠다 뭐’ 하는 생각이 그랬다.
활자에 목마른 시절,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고 심지어 순정만화, 할리퀸 로맨스문고, 통속소설로 치부되는 온갖 로맨스 소설들, 무협지, 선데이 서울류의 잡지들, 영화대본들까지.
그 과정에서 스스로 안목도 생겼고 나름 좋아하는 작가, 문체, 장르들이 터득되었던 것인데....... 스스로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 어떤 글이든, 그것이 무슨 장르이든 시작을 해서 완성하기까지의 과정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뼈저린 순간들이 담겼다는 것을. 그래서 이젠 어떤 책에든 겸손해지게 된다. 감사하면서 읽게 된다. 문장부호 하나하나들까지 거기에 숨은 의미를 읽으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감동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 그녀의 끈질긴 노력과 탐구, 인간에게의 접근은 그 긴 시간 몰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도시국가 로마의 탄생에서부터 천년동안의 존재감이 역사로서만 아니라 문화, 이념, 정치, 책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방대한 철학서이자 교훈서였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생들이 그렇듯이 혈기왕성한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하다. 성장하는 로마도 그러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꿋꿋하고 멋진 지도자와 아우구스투스라는 착실한 지도자가 확고하게 굳혀둔 제국을 지키는 황제들이 있었던 시절의 로마는 빠르게 읽힌다.
그러나 쇠퇴기, 노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읽어내는 일은 몰락해가는 오빠를 바라보는 일처럼 안쓰럽고 안타깝고 애통하다. 마침내 완전한 멸망 앞에서도 악다구니처럼 발버둥치는 치열한 동작들은 페이지를 더디게 넘기게 했다. 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에서부터 15권 로마 세계의 종언까지는 힘들게 마친 읽기였다.
읽는 동안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읽으면서 노년의 자신을 떠올리게 되어서다. 어느 사이 끝을 향하고 있는 때가 되어서도 끝인지 모르고 과거에 매여 살아온 날들이 섬뜩하게 다가 온 것이다. 그래, 마무리를 준비하는 여정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우리라. 끝끝내 권력의 한 줌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악착같을수록 추하게 몰락해 갈 것이다.
끝을 인정하자.
언젠가는 끝이 온다.
어떤 끝이든.
놓을 것은 놓아 버리자.
로마인 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가 대단해지는 건 그 지점이다. 천년 제국의 역사가 우리 생의 모습과 닮았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결국 역사는 미래인 것이다. 개인의 역사도, 국가의 역사도.
다시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긴 시간을 건너뛰어서 앞부분을 봐야 했던 곳들이 많아 아쉬웠으니.
다시 읽어야 할 책 목록이 늘고 있다.
책 읽는 방식도 책 선택 목록도 바뀌고 있다는 반증이다. 다독을 겨냥한 속독에서 정독 쪽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읽은 부분을 읽고 또 읽고. 꼭꼭 씹어 먹는다.
신중해지고 있다.
낡아간다.
늙어간다.
책읽기는 관찰이고 성찰이다.
삶도 그러하다.
내 삶 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그러하고 사물이나 풍경이나 자연을 대하는 관찰자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성찰 또한 다르다.
다시 읽고 나서는 예전과 얼마나 다른 느낌일지 궁금하다.
로마인 이야기는 끝에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열어 보인다.
로마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지중해는 이제 로마인의 ‘내해’(Mare internum)가 아니었다. 다른 종교와 다른 문명 사이에 가로 놓인 경계선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면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까지 가는 시간은 로마에서 파리에 가는 시간보다 짧다. 하지만 공항을 나오면 다른 문명권에 왔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문명이 더 우수하고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미술관에 가서 로마시대의 조각상이나 모자이크를 감상하거나, 교외에 나가서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 로마 시대 유적 앞에 서면, 로마의 포로 로마노나 콜로세움에 갓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고대에는 지중해 남쪽과 북쪽이 같은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양쪽이 분리 된 것은 7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연결 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로마인 창조해낸 로마 세계는 아니다.
로마 세계는 지중해가 ‘내해’가 아니게 되었을 때 소멸했다. 지중해가 양쪽을 연결하는 길이 아니라 양쪽을 갈라놓는 경계선으로 변했을 때 로마 세계는 사라져버렸다.
그후 지중해는, 사라센 해적의 내습을 알려주어 사람들을 산으로 도망치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토레 사라체노’(사라센 탑)가 절벽 위에는 반드시 서있는 바다가 되었고, 십자군 병사들을 태운 배가 동쪽으로 항해하는 바다가 되었다.
서기 1,000년이 지날 무렵에는 동방의 이슬람 세계와 활발하게 교역하는 이탈리아의 해양도시국가들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의 배가 오가는 바다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후에는 고대의 부흥과 인간의 권리 회복을 기치로 내건 르네상스의 바다가 되어간다.
성한 자는 반드시 쇠하고, ‘제행’(res gestae)은 무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이치라면, 후세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것을 배웅하는 것이 인간 노력의 집적이기도 한 역사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