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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p39 인민
이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빛이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몸보다 에너지를 더 멀리 전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던 그 밤에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 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 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p69 영수
영수가 서거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았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울음소리 속에서 나도 울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끊어질 듯 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곧 숨이 막혀 죽을 것처럼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문득 나의 사유가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비통함이 나를 어쩌지는 못했다. 이상한 울음소리가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소리 내어 울고 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틀림없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서 한꺼번에 울부짖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유머였다. 나는 이처럼 풍부하고 다채로운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전 세계 모든 품종의 동물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 경연을 벌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104 독서
나는 매번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따라 어디론가 갔다. 겁 많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그 작품의 옷깃을 붙잡고 그 발걸음을 흉내 내면서 시간의 긴 강물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따스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위대한 작품들은 나를 어느 정도 이끌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혼자 걸어가게 했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나는 그 작품들이 이미 영원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08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죽음은 서늘한 밤이다”라는 하이네의 시구를 읽게 되었다. 그러자 오래전에 사라진 유년의 기억이 내 전율하는 마음속에서 순간적으로 되살아났다.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맑고 뚜렷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 기억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만일 문학에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다. 하이네가 쓴 시가 바로 내가 유년 시절 영안실에서 낮잠을 잘 때의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p137 글쓰기
여러 해가 지나 중국의 비평가들은 나의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아는 한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나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 출판되자 미국의 한 문학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나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 농담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이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밍웨이도 아는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았나보군요.”
농담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인생은 종종 이렇다. 때로는 단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장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단점이 되기도 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자면 “좋은 일이 변해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이 변해 좋은 일이 된다.”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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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나요?”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바로 ‘글쓰기’ 덕분이었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p147
지금의 나는 이미 27년이라는 글쓰기 경력을 갖고 있고 이제는 ‘나는 글쓰기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 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더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또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p148
지나치게 많은 답변은 답변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이 내게 말해 주었다. 진정한 답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가운데 하나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진정한 대답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제 나는 또다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강점이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한 가지 생각을 고집스럽게 믿어왔다. 한 사람이 성장해 온 과정이 그의 일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그림이 바로 이때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마치 복사기처럼 한 장 또 한 장 개인의 성장에 계속 복사되는 것이다. 그가 자라 성인이 된 뒤 성공한 사람이 되었건 실패한 사람이 되었건, 위대한 사람이 되었건 평범한 사람이 되었건,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이 가장 기본적인 그림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데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림 전체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많이 바꾸고 어떤 사람들은 조금 밖에 바꾸지 못한다.
p202 차이
사회형태의 각도에서 볼 때, 문화대혁명 시기는 아주 단순한 시대였던 데 비해 오늘날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복잡한 시대이다. 마오쩌둥이 말한 “우리는 적이 반대하는 것을 옹호해야 하고 적이 옹호하는 것을 반대해야 한다.”라는 한마디로 문화대혁명 시대의 기본적인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이처럼 흑백이 분명한 시대였다. 적은 영원히 착오를 범하고 우리는 영원히 정확하다는 것이 그 시대의 인식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적이 정확할 때가 있고 우리도 틀릴 때가 있지 않을까 하고 물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 이후에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훌륭한 고양이다.”라고 한 덩샤오핑의 말이 오늘날 변화한 시대의 기본적 특징을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이 한마디는 마오쩌둥의 사회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중국 사회에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온 사실, 즉 잘못된 것과 정확한 것은 항상 같은 사물 안에 존재하며 서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동시에 이 한마디는 중국의 경제발전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논쟁을 종식시켜주기도 했다. 이리하여 중국은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 시대로 접어들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우리는 항상 “사회주의의 풀을 뜯어 먹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은 먹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중국에서 우리는 이미 어떤 것이 사회주의이고 어떤 것이 자본주의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풀과 싹 둘 다 똑같은 식물일 뿐이다.
때로는 하나의 단어가 갖고 있는 함의가 단순한 상태에서 복잡한 상태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회 변화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차이’가 바로 그런 단어다.
p353 후기
이런 느낌은 내 뼛속 깊이 새겨졌고, 그 뒤로 내 글쓰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이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화, 그의 작품은 ‘허삼관 매혈기’만 읽어보았다. 그 책은 소재의 강렬함은 두고라도 읽는 동안 몰입했고, 아주 오래전임에도 가끔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형제’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뤄둔 소설인데 엉뚱하게도 산문집을 택하게 된 것이다. 우선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제목에 끌렸고 (편집자는 성공했다.) 중국이라는 다 알 것 같기도, 전혀 모를 것 같기도 한 나라의 잘나가는 동시대의 작가가 쓰는 현대 중국의 모습이 궁금했고 노란색 표지가 이 산문집을 선뜻 고르게 했다. (나는 왜 노란색이면 홀려들 듯이 혹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책 읽기를 마친 지금, 최근 다시 읽은 루쉰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와 김산. 님웨일즈의 ‘아리랑’과 함께 읽으면서 비슷한 시절의 중국, 조선, 일본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시절뿐 아니라 21세기의 중국을, 젊은 중국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가 ‘독서’에서 쓴 그대로 그는 책을 읽는 동안은 물론이고 읽고 난 여운이 남은 지금도 나를 중국으로 이끌고 갔던 것이다. ‘문화 대혁명’의 격변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근세를 살아가는 모습은 그곳이나 우리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삶은 민족이나 국가의 다름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 사람이 성장해온 과정이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는 같이 일하는 조선족들에게서 보는 뜨악하게 만드는 행동들을 약간은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시절을 살아남은 이들의 처세술이 아닐까? 특히 위화조차 짐작하지 못한 소수민족으로 살아남기 위한.
나의 주관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생각한다. 소통되지 않는 편협한 판단으로 누구를 평가하는 일이 마오의 사상과 다를 게 없다는 섬뜩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책을 읽는 것은 생각의 확장이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가깝게 만나는 일이다.
열 개의 단어는 인민人民, 영수領袖, 독서閱讀, 글쓰기寪作, 루쉰魯迅, 차이差異, 혁명革命, 풀뿌리草根, 산채山寨, 홀유忽悠다.
열 개의 단어로 현재의 중국을 다 알 수는 없을 테지만 특별하지는 않아도 이런 시도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타고난 이야기꾼이 풀어나가는 글이었기에 가능했을 음험하고, 동굴 속 같이 큼큼해서 도저히 다가서지지 않던 중국이라는 나라를, 아니, 중국 사람들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위화는 탁월했다.
이런 시대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김수영도 그런 글을 썼는데. 아름다운 우리 말 열 개던가, 그랬던 거 같다. 열 개의 단어, 그가 얘기한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니 문득 써보고 싶어진다. 나한테는 어떤 열 개의 단어가 생겨 나올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오래 읽힌 (진도가 안 나가는) 무거운 주제들이 나중엔 쉬워졌다. 그 변화의 계기가 무엇이었나? ‘아리랑’의 영향이었다.
제주에서도 남이섬에서도 화성에서도 나는 언제부터인지 어린아이부터 노인들에 이르는 전방위 계층의 중국 사람들의 소란 속에 묻혀있어야 했다. 그들 사이에 서서 무섭게 몰려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시끄러워서만은 아닌 당당한 저들의 행보에서, 일방적인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하는 중국 정부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해서다. 그들을 알고 그들을 읽어야겠다. 이제 그 첫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