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놓치다 애지시선 6
손세실리아 지음 / 애지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음 호수

               손세실리아          현대시학 2005년 6월호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물의 침묵


                이 규리          詩評 2005년 가을호


  물에도 길이 있고 눈이 있고 구멍이 있다. 물이 몸인 까닭이다. 몸을 지닌 물은 몸짓으로 말을 대신한다. 때때로 속삭이는가하면 크게 고함치기도 하고 다정한가 하면 완고하게 말문을 닫기도 한다.

  지난 겨울, 나는 여러 차례 금호강가에 내려갔었다. 물은 몸이 아주 차가워져 있었고 내심 뭔가에 골똘해 있었다. 그렇게 몸이 차가와진 물은 어떤 사유에 닿아 있는지 좀체 기척을 내지 않더니 어느 날 급기야 말문을 닫아버렸다. 투명한 비닐 랩을 척 덮어놓은 듯한 강은 일거에 스스로의 몸을 닫아걸고 묵언정진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돌아앉아버렸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나는 강물의 침묵하는 소리를 듣고자 했다. 침묵이란 말없음이 아니라 고요함이다. 그리고 소리내며 흐를 때 보지 못했던 물의 또 다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얼음 호수’를 읽으며 지난 겨울 얼어버린 강과 그 강 앞에서 느꼈던 차디찬 단절의 의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윽하게 아름다웠던 고용의 기운에 대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몸과 호수, 소요와 침묵의 관계가 화자와 대상과의 거리 내에서 사유되고 있는 시이다. 즉, 물이 얼음이란 장치를 가지자 그것이 하나의 경계가 되었고 경계에서 바라보는 삶과 죽음의 거리, 혹은 소요와 침묵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구멍이 기능하는 몸이란 살아있는 몸이다. 구멍은 호흡하며, 공급하며, 배출하며, 바깥과의 소통으로 삶을 지속한다. 몸으로서의 구멍의 역할은 죄다 “틀어막고","생각까지 걸어 닫”고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렸지만 화자는 지금껏 소요뿐이었던 자신의 삶을 성찰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염’하다와 뒤에 나오는‘封’하다란 말이 좋은 짝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염’하다를 한자어 [殮]로 썼더라면, 아니면 뒤에 올‘封’해를 한글로 썼다면 통일성을 줄 수도 있었겠다.)

  염이란 죽은 이의 몸을 씻은 다음 온몸의 구멍을 막고 수의를 입혀 염포로 묶는 일, 즉 염습이라고 하는 이것은 죽음의 의식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의미는 죽음보다는 일체의 세상일로부터 분리되어 소요한 세상을 잠시 떠나 보고자하는 의미로 작용한다. ‘殮’해 버린 정도의 고립, 단절 속에서 시인이 찾고자 한 것은 침묵에 이르는 고요가 아닐까. 시인이 스스로 ‘시인의 시화(詩話)’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자신의 안에 자신의 호수를 지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이가 차는 것은 고요일시 분명하다.

  언어를 발견하는 것은 언어 속이 아니며 침묵을 발견하는 것은 침묵 속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언어를 발견하는 일은 침묵속이며, 침묵을 발견하는 일은 언어 속이라는 가정은 매우 타당하다. 앞서 이야기한 얼어버린 강이 물 속에서 얼마나 많은 언어를 감추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얼어버린 강은 죽음의 강이 아니라 휴면의 강이다. 강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으며 작은 물고기들과 물이끼며 플랑크톤이 살아있다. 호수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이 얼어붙은 호수에서 발견한 언어는 온통 소요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발견이며 그 발견이 곧 언어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얼음이라는 장치, 얼음이라는 장애물로 인하여 시인은 하나의 경계에 눈 뜬다. 그리하여 시인은 세상과의 거리를 가지며 그 거리로서 자신과 삶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봉(封)’해 봄으로써 대상을 더 잘 볼 수 있으며 자신마저도 더 잘 보게 된다. 따라서 ‘封’한다는 숨은 의미는 ‘개봉(開封)’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마저도 열어둘 수 있다는 변증법적 결과에 도달한다. 수도자들이 ‘동안거 하안거(冬安居, 夏安居)’에 드는 것도 일정한 거리 바깥에서 자신과 세상과 삶의 이치를 보고자 하는 수행 방법에 다름 아니다.

  “사나흘”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시를 좀 상투적으로 하고 있다. 자신을 ‘봉(封)’해버리는 일이나 살아온 날들의 소요를 절감하는 성찰의 언어로 보면 그러하다. 더구나 “완벽히 봉(封)”하는 과정의 기간으로서 상정한 “한 사나흘”은 사고의 의심을 불러오게 한다. 물론 사나흘 아니라 단 서너 시간도 죽어볼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이지만 사유의 타성적인 습관이 “한 사나흘”에 이어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행, 첫 단어 “없다”는 중복된 설명에 불과하며 화자의 의도를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이 시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있으며 돌연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애매성의 입장에서 다의적 해석을 요하기도 하는데, 지금까지의 관념적이고 사유적인 분위기를 아무것도 아니게 정말 ‘엄살’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 ‘염’하고 ‘봉(封)’한데 이어 죽음 운운하는 화자 스스로의 삶에 대한 쓴웃음일 수도 있겠다.

  호수나 강은 얼었다 녹는 일은 반복할 테고 침묵이나 소요도 결국 삶이 지속되는 동안 반복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잘 얼고 잘 녹을 수 있는 삶이야말로 어떤 가치보다 우선할 것이며 그 가운데 시인의 언어 역시 적절히 얼고 녹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성찰이 어디 있으랴. 시인이 그린 꽁꽁 언 얼음 호수를 한 바퀴 휘 돌아나온 듯한 느낌이다.




손세실리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http://blog.naver.com/soncecil

이규리 경북 문경 출생. 1995년 [현대 시학]으로 등단. 시집[앤디워홀의 생각]이 있음. 

시인들이 함께 만드는 계간지 시평 (詩評) www.sipyung.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