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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ㅣ 창비시선 40
곽재구 지음 / 창비 / 198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기차는 정해진 길로 보성, 능주, 화순.......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지명들을 지나가고 창에 묻은 이마에서는 점점 해가 거두어집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남평역입니다. 곽재구의 시‘사평역에서’의 그곳,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의 그곳이면서도 동시에 그 어느 곳도 아닌 그냥 남평역. 이 곳을 꼭 지나보고 싶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울렁울렁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요, 남평이 제 고향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기를 한번인가 두 번, 지나쳐갔을 뿐입니다. 남평에서 역은 멀리 있습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여기에 와서 막차를 기다리거나 막차를 타보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막차를 기다리고 타면서 살아왔어도, 여기에 역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곳입니다.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뾰족한 양철지붕의 낡은 역사, 두런두런 서있는 나무들, 잘 가꾼 화초들 사이로 배롱나무 꽃이 핀 예쁜 간이역입니다. 아무도 기차를 기다리지 않고 내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남평역’ 이라는 지명이 벗겨져가는 나무 팻말과 근처의 나직한 산들을 눈에 담습니다. 어디쯤 만삭의 한 여인이 볕바른 봄날, 몸을 풀었던 산이 있을 것입니다. 오후 한시 남평역에 도착하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그 여인의 아이에게 시간을 주었다는데 지금의 기차는 조용히 역을 떠납니다. 이제는 누구도 기적소리로 시간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낳던 여인의 나이를 훌쩍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여기를 지나갑니다. 속은 여전히 울렁울렁합니다. 여인과 아이를 연결한 탯줄이 산자락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립니다.
뜨거운 이마를 차창에 얹자 지나버린 풍경을 감추듯 9월의 저녁이 살포시 내려와 있습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의 [사평역 에서] 중에서---
소리는 멀어집니다. 사평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평역은 사라져도 사평역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입니다. 여인과 아이의 끈, 탯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