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내 친구 영란과 익명의 영란

                         

                                       공선옥의 소설 [영란 (뿔, 2010)]을 읽고

   

   

  목포에 가본 적이 있던가. 없다.

  아니, 있다. 홍도에 가느라 거쳐 갔고, 제주를 배를 타고 갈 때, 완도를 가느라, 해남을 가느라, 진도를 가느라 거쳤던 곳인데 정작 목포에 머문 시간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가본 적이 없는 게 맞다. 내게 목포는 그런 곳이다. 익숙하고 친숙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영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런 목포처럼 내 친구 영란이도 그렇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책을 덮으며 문득했다. 영란이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슬픔의 사람’인 친구의 ‘슬픔’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지 ‘슬픔’을 돌보 적이나 있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책, 익명성 속의 ‘영란’은 그 책을 덮을 때의 묵직함만큼이나 듬직해졌다. 무게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무겁고, 슬픔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슬프고, 눈물이 나지 않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공선옥, 처음 만난 서른 언저리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이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작품에 따라 기대치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를 반복하여도 새로운 책을 써내면 은근 기대하면서 사게 되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중 포함되어있다. 일테면 [유랑 가족]은 좋았는데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2%쯤 부족했다. 사건을 많이 벌려놓고 마무리에 쫓기는 드라마들처럼 끝이 조급했다.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속의 진솔한 글이 좋은데 [수수밭으로 오세요]는 너무 억지스러웠다. 그래도 첫 소설집[피어라 수선화]의 넘치는 생기와, [마흔에 길을 나서다]의 다양한 밑바닥 이웃들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이고, 신산한 삶을 꾸려가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미사여구 없이 날 것으로 살아있는 그녀만의 글을 좋아한다.

  첫 작품부터 일관되게 끌고 가는 가족, 다양한 작품 속에 어떤 식으로 조합된 가족이든지 그 안에서 좌충우돌, 해피엔딩을 꿈꾸는 우리 이웃들의 소박한 소망을 모성으로 생생하게 담아 놓는 그녀에게 감탄한다.

   

 

  ‘영란’은 슬픔과 사랑의 이야기다.

  ‘나’의 옛집과 그 집에 피어나던 장미와 그 장미 그늘 아래서 사랑을 나누고 살던 ‘나’가 사고로 아들을 잃고 그 여파로 남편을 잃고 빵과 막걸리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말조차도 잃어가던 어느 날, 남편 선배의 친구이자 소설가인 정섭을 만난다. 갑작스런 친구의 부음을 전해들은 그는 홀로 남겨두면 위태로울 ‘나’를 데리고 목포로 간다. 그리고 둘은 헤어져 버린다. ‘나’는 무심결에 따라 들어간 목포의 ‘영란여관’, 그곳에서 ‘나’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수옥이와 한 때의 사랑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할머니, ‘나’를 보며 가슴이 두근대는 ‘완규’를 만나 ‘영란’으로 살아간다. ‘영란’으로 살면서 다시 부활하는 가족, 아니 식구라는 표현이 맞겠다. 작가에게 훈훈한 가족은 밥상을 같이 나누는 ‘식구(食口)’일 것이다. 어려울 때 더운 찌개 냄비에 서로 숟가락을 담그며 나눠먹는 밥이거나 술의 뜨거움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설움도 따라 내려가면서 위장을 따뜻하게 해주리라.  그 희망을 어렸을 때 먹어본 ‘병어찜’ 한 냄비로 받아들었다. 내 친구 영란이도, 익명의 영란이도 그 밥상에 함께였으면 좋겠다. 맛있겠다. 

   

 

  책을 펴면 앞에 있든 뒤에 있든 ‘작가의 말’을 처음 읽는다.

  “나는 ‘지금 슬픈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내치지 않기를 바란다.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슬픔을 방치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다. 내 글의 독자들이 슬픔을 돌보는 동안 더 깊고 더 따스하고 더 고운 마음의 눈을 얻게 된다면,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더욱 굳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슬픔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으로서, 많이 기쁠 것이다.”

   

 

  또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생긴 버릇이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게 된다. 아마도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폈는데 여린 연필로 그어진 밑줄이 그 책을 읽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의 흔적으로 읽혀 반가웠고, 다시 새로운 감동의 파장을 전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고가는 말들은 거침이 없이 활달하다. 그 여자를 생각했다. 실은 이곳에 오는 내내 그 여자 생각만 났다. 한마디 하는데도 남아 있는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겨우겨우 입을 열긴 열지만 그렇게 힘들여서 하는 말들이, 곧잘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말이 되어 버리곤 했던 여자. 그런 여자가 이렇게 거침없고 활달한 말씨를 쓰는 사람들 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도 자꾸만 자꾸만 그 여자가 아직 이곳 목포에 있는 것만 같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어, 먼 데 시선을 두고 정처 없이 항구의 낯선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것만 같다. 한 ‘슬픔의 사람’이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 여자의 슬픔 때문에 정섭은 지금 울고 싶다. 한 여자의 슬픔이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차박차박 걸어와 나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노크했다는 것을 정섭은 이제야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속상해서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여정은 어쩌면 그 여자, 한상준의 아내를 찾는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 여자를 찾으면 우선 신발부터 사 신기고 싶다고 정섭은 생각한다. 석 달 전, 그 여자와 함께 목포에 오던 날, 그 여자가 신고 있던 빨간 비닐 슬리퍼가 정섭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p93

   

 

  [사람들은 큰 산에 오르든, 작은 산에 오르든, 언제나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섭도 오직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어떤 한 가지 목적만을 목표로 삼게 되면 목표 이외의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들리지 않고 소홀하게 된다는 것을 정섭은 예전에 알지 못했다. 표지판에 씌어 있는 소요정이 그 소요(逍遙)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인생에서 목표를 향해 ‘돌진’ 하는 시간 외에 아무 목표도 없이 그저 ‘소요’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목포에서의 소요가 찢긴 내 삶에 새살을 돋게 할 수 있을까.] p104

    

 

  [이쪽 사람들이 위쪽 사람들보다 훨씬 개방적인 품성인 것 같았다. 윗사람한테 존대어를 쓰지 않는 게, 예의가 없다기보다 내가 당신에게 내 마음을 주고 싶다는 의미로 느껴지는 것은 그 개방적이고 정다운 태도 때문일 것이었다. 그런데, 또 특이한 것은 윗사람한테나, 아랫사람한테나, 공히 자네라는 호칭을 쓴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은 공통적으로 상대를 높이는 호칭이라는 것도 정섭은 처음 알았다. 호준이나 호준의 친구 영대가 형 친구인 정섭에게 어이, 자네는 왜그런가,라고 했을 때도 그것은 전혀 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의를 갖춘 정다운 태도인 것이다. 똑같은 말을 아랫사람한테 했을 대도 그렇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것을 이해 못해 호준이나 영대가 자신에게 어이, 자네,라고 했을 때, 기분이 상한다기보다 좀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목포 사람들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법을 깨친 이후로는 자신한테서도 이따금 자네,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존칭은 아니지만 예의를 갖춘 정다운 호칭, 자네.] p124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자네’ 이 호칭 때문에 곤욕을 치룬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래서 잃어버리고 산, 존칭은 아니지만 예의를 갖춘 정다운 호칭, 자네.

   

 

  [그녀의 힘겨움을 덜어주거나 이해해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의를 갖춘 이별을 하지 못해서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뒤늦었지만, 정중한 이별의 말을 할 수 있는 때가 올까.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온대 해도 그때 하는 이별의 인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또 한 사람, 황망한 이별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여자를 연민하는 것으로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려는 수작인가. 그러나, 그저 아팠다. 자신이 아프니, 다른 이의 아픔이 비로소 아프게 다가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내 살이 아리니 다른 이가 아려하는 것도 눈에 보였다. 위로받고 위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저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아픔이 타인의 아픔에 조응하는 이 낯선 경험이 그러나 정섭은 위로가 되었다. 위로를 바란 것도 아닌데, 그녀를 생각하며 아파하고 있는 순간에 제 가슴속 통증 위로 도포되는 어떤 안식의 약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면, 그때에야 아주 오래전, 남루한 현실 속에서도 싱그럽고 빛나던 한때들을 편한 마음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p129

  이런 시절도 있었다. 날마다 날마다 아프다고, 죽을 것 같다고 엄살을 매달고 살던 이십 대 후반 덜컥, 다치고 나서야, 치명적으로 아프고 나서야, 다른 이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생에게 겸손해졌다.

   

 

  [세상을 살면서 아무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권리는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권리가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기는 하지만, 누구나 누군가의 아픔을 감당할 수도 없지 않은가.] p171

   

 

  ["나도 얼마 전까지는 엄마랑 내가 독하지 못한 것이 그렇게 아쉽고 속상하드라고. 근데, 이제 안 그래. 안 그런당게. 울 엄마가 그래도 참 좋게 살아왔구나. 한 번쯤, 독한 맘먹고 험한 말이라도 한번 하고 패악질이라고 해도 좋고 하여간, 악이라도 한번 써봤으면 싶다가도, 결국은 아무한테도 해 끼치지 않은 우리 엄마가 잘살았구나 싶어. 나도 다른  누구보다 나를 원망하고 살았는데, 이젠 내가 그래도 잘살았구나, 싶은 게, 내가 남한테 당하긴 했어도 남한테 해 끼친 것은 없구나, 싶어서. 내가 바보 같긴 해도 참 고운 사람이다, 생각하기로 했지. 그러니까, 그제사 내가 나한테 고맙고 내가 막 이뻐지고…… 그러더라고.”

  인자가 말하는 동안 싸락눈처럼 흩날리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인자 엄마가 문틈으로 눈 구경을 하듯이 나는 인자의 말소리 사이사이로 문득문득, 눈송이로 가득한 아득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힘은 없어도 그래도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니까.”

  누가 상 줄 것도 아닌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나 자신을 탓하면서, 자신을 미워하면서, 자신을 자기가 원망하면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도 살아야하니까, 결국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자신을 자기가 예뻐해 주는 것, 그뿐이더라고.

  “안 그러면 지가 어쩔 것이여. 그려, 안 그려?”] p200

   

 

  [ "나 그때 많이 행복했다.”

  “언제요?”

  “니가 야, 이 나쁜 놈들아 , 우리 오빠 잡아가지 마,라고 했을 때.”

  총총히 멀어지는 오빠를 향해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데 한순간, 울컥, 했다. 내가 오빠를 부르며 울었던 때가 떠올라서이기도 했지만, 지나가는 길에 여동생이 일하는 곳에 ‘그냥’ 들른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왔다. 그 울컥, 했던 순간들 때문에 나는 ‘나의 무정한 의붓오빠’를 미워할 수가 없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고 바로 그런 순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끝끝내 미움보다는 사랑을 선택하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p235

  

 

  [그것이 생명이 가진 힘임을. 생명은 태동할 때도 눈물겹고 살아갈 때도 눈물겹고 소멸할 때도 눈물겹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눈물이 없이는, 그 어떤 생명도 생겨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고 소멸되지 않을 것 같다. 복숭아꽃잎이 뚝 떨어져 내릴 때, 내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실은 눈물이 출렁이는 순간임을 나는 알겠다. 바람이 건듯 불 때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실은 내 눈물이 흩날리는 순간임을. 내 사랑들이 남긴 눈물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듯이, ] p261

  어쩌면 좋은 글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각자가 느끼는 공감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공감할 수 있을 때 몰입도 가능하니까.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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