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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전10권 세트 - 반양장본 ㅣ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조정래의 '한강'을 읽고-
'강물은 흐른다'
이 단순한 문장이 한강을 읽는동안 내내 나를 따라 흐르며 유장한 물 굽이를 보여주었다.
철교를 지나는 전철 안에서 붉은물이 잠기는 한강을 본적이 있었다. 그전까지 그냥 강이던 한강이 그렇게 도도하게 아름다운 강이며, 내가 좋아하는 북한강도 한강이고 신륵사앞을 너르게 흘러가던 그 유장한 남한강물도 한강이며, 서울이 아름다울 수 있는것은 한강과 북한산을 가져셔란 것을 시린 차창에 이마를 박고 생각했었던 그 때의 기억이 새삼 떠오르고, 내가 본 많은 강들과 물들과 그것들이 흘러가는 길을 생각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임에도, 우리는 꼭 그러지만도 않은 많은 징후들을 겪으며 살아온 세월이 한강 속에는 있다. 역사의 질곡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배고프고 처절한 넋이 한강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우리는 물을 떠나 살수없고 모든 문명도 강을 따라 발전해왔다. 강은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성이기도 하고 한강은 우리에게 더욱 그렇다.
한강에는 산업발전이라는 명분에 묻혀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떠돌고, 가족을 위해 희생한 많은 누이들의 눈물이 보태져 흐르고, 가슴을 치는 울분에 술을 마시던 많은 이의 분노도 담겨있고, 최루탄의 매운 눈물도 같이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한강이다.
세상 어떤 강을 한강에 비유할 수 있으랴!
라인강도 한강이 아닌 것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시대, 우리사회, 우리민족의 강.
그 한강에는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땀과 눈물과 피울음이 섞여서 같이 흘러가는 것임을 절절하게 느끼면서 한강에 빠져지낸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첫 장을 펴든 것은 기차 의자와 객차사이 바닥에 앉아서 였다.
고향을 등지고 야간 완행열차에 겨우 비집고 서울로 향하는 유일민 형제와 천두만 사이에 끼여 앉은 형국으로 그렇게 한강을 읽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8년이 지났지만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굶는날이 많아지자 사람많고 일많은 서울이 날품팔이를 하더라도 낫겠지 싶어 가족을 두고 집을 나선 천두만이기도 하고, 어짜든둥 배워야 한다고 이를 옹구려무는 엄마의 손을 놓고 설운 걸음을 떼는 일민 형제기도 하다.
어디 그들 뿐이랴!
인생의 막다른 곳에서 새꿈을 꾸려고 간호원이 되어 독일에간 김광자이기도 하고, 공장으로 차장으로 맥주홀로 옮겨가다 기치촌 골방에서 죽어간 나복녀이기도 하고, 잘나가는 아버지 덕에 한껏 멋을 내고 센치한 감성과 시원시원한 성품을 가진 멋진 여성 강숙자이기도 하고, 살아남기위해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는 이경열 기자이기도 하고, 고시패스만이 지상의 목표고 하늘로 오르는 줄 사다리기임에 그 사다리를 타기위해 몸부림치는 이규백, 김선오이기도 하다.
어지로울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이 모두 우리의 이웃이고 또다른 자신의 모습이고 모두 주인공인 한강속의 그 시절을 살아왔다.
독립과 이념을 지나 배고픔이 주는 원초적 갈망과 번번한 좌절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산다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더 쉬울거 같은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내가 몸으로 부대끼고 살아내야할 내 삶이 한강속 모든 사람들의 삶인 것이다.
바로 나, 내가 살아갈 세상이 거기 있었다.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현실로서의 내 삶의 다른 모습이 다양하게 거기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읽던 박정희 위인전이며, 교과서에서 달달 외우던 현대사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처음 알았을 때도, 세상에 대한 냉소는 덜 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으로 양반이었던 사람은 계속 양반으로 남고, 식민치하에서 기득권은 해방된 나라에서도 여전히 기득권이고, 지금까지도 거의 그러하고, 교과서에 실린 많은 작가 시인들이 친일 문학인 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현대사의 여러 질곡에도 여전히 지식인으로 대우 받는 세상이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론 무서웠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반복하여 보여주는 순환의 고리가 무섭기 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상징된 젊은 여성, 강금실 법무장관을 받아드리고 곤혹스럽게 집단 항변하는 수 많은 김선오 검사들의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하는 현실임에 위안을 삼는다. 구속되는 또다른 박준서를 보면서 다시는 강기수나 남재구 같은 인간이 권력의 핵심에 살아남지 않은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희망을 건진다.
천상 농사꾼인 천두만이 땅을 가져 농사꾼으로 돌아갈 수 있었듯이 연좌제의 사슬을 끊고 유일표 형제도 당당히 자신의 재능을 펴고 살아갈 그런날도 머지않았음을 꿈꾸어 본다.
아직 우리의 작가는 화약 내음이 남아있는 광주로, 오늘의 우리 있기까지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성지가 되어버린 광주로 우리를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 마무리를 보여 줬는데...
그의 시선을 따라 아리랑 한의 고개를 넘어왔고, 저 험준한 백아산, 태백산맥을 넘었으며, 유장한 강물을 따라 걸어 왔으니 다시 기차에 올라, 광주 그곳으로 가려 한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를 패자들의 삶과 기록으로 아우르며, 그 시절을 사는 사람들의 진한 피내음 속에도 희망을 건져 올리는 혜안을 작가는 갖고있다.
그의 시선에 동승한 나의 걸음은 더욱 깊어지고 시선은 더욱 아득하게 넓어지리라.
가치관이 흔들리는 혼돈의 시대에 작가의 역량과 책무를 가슴 서늘하게 흠모하면서 내 가슴에도 유장한 물 굽이의 강물이 흘러가기를 기대 해본다.
가슴을 지나온 강물이 머리로 손끝으로 퍼져 저 까마득히 먼 바다에 닿기를.
우리의 한강물이 대륙들의 먼지도 정갈하게 씻어 주기를.
그렇게 강물은 흘러 가기를...
2003. 3. 17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