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194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출항제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 《동두천》, 《머나먼 곳 스와니》, 《물 건너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 「길의 침묵」 「바다의아코디언 파문 꽃차례」 등을 펴냈다. 소월시문학상·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 대산문학상 •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으면서도 김명인은 어렸을 적 바다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에게는 서울도, 세계도 바다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40년도 더 넘게 그 바다에서 꿈을 낚아 왔다. 시인 김명인은 세상의 바다에서 꿈을 낚는 어부다. 긴시력(詩歷)을 되돌아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그 꿈을 꽃이라고 불러본다. 한 번도 활짝 피어본 적이 없지만 변함없이 오랫동안 목표가 되고 근원이 되어 준 그꽃이 자신의 등을 조금 더 밀어 달라고 시인은 간절하게 기도한다. 바다의 가없음에 익숙한 김명인은 사람이 염하여 거둔 죽음이나 자연이 스스로 뼈를 바로 하여 보듬은 죽음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김명인에게 죽음과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쓰디쓴 사랑은 시의 핵심일 뿐 아니라 존재의 핵심이다. 김명인은 언제나 공포와 불안, 고통과 환희, 그리고 무엇보다 권태를 헛된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가차 없는 바다에 직면하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리얼리즘이다. 김명인의 시를 속속들이 규정하고 있는 비극적 정직성은 한국시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준엄한 리얼리즘의 정_김인환(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교수)신에 근거하고 있다.
안개 ㅡ송천동 그 해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들은 헛간 같은 데다 여자를 그렸다 낯붉힌 여자 애들이 총무에게 달려가고 함께 벌 서도 꿈적도 않던 아이 너는 두꺼비같이 불거진 눈두덩에 긁힌 상처 속에서 숨긴 손칼을 꺼내 기둥에다 던지기도 하면서
그 여름 위에 흠집을 만들었다 불볕쏟아지던 속을 걸어 가을이 가서 바라보면 배고픔조차 견딜 수 없던 긴 날들 지나자 너는 방죽을 따라 힘없이 맴돌기도 하였다 추위 다가와 날마다 더 먼 곳 싸돌던 다리 아래거지들은 천막을 걷고 떠나가버렸고 어느 날 잠깨니 개울물 소리는 - P13
올올이 내 머리칼마다 부딪치며 흘러 이 세상 꿈 아닌 또 다른 새벽 한기에도 웅크리면 허기 속을 더듬어 너는 어느새 무밭에 엎드려 있었다 십일월 손끝보다 매운 바람을 가르며 기차는 달려가고
되살아나는 무서움 살아나는 적막 사이로 먼 듯 가까운 곳 어디 다시 개짖는 소리 쫓아와 움켜쥐면 손바닥엔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잡혔다 일어서서 힘껏 내달리면 나보다 항상 한 걸음 앞서도 너 또한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한 송천 그 어둠을 휘감고 흐르던 안개
우리는 떠났다 들기러기 방죽 따라 낮게 흐르는 여울을 건너면 저무는 들길 모두 밤인데 어느 눈발에 젖어 얼룩지는 마음만큼이나 어리석게 그 세상 속에도 좋은 일들이 - P14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믿음이 만드는 부질없는 내일 속으로 우리들은 힘들게 빠져나가면서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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