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열金秀烈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산문집으로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 등이 있다.

□ 시인의 말


얼마 전
가까운 벗들과 이덕구 산전을 찾았다
아직 복수초는 피어 있지 않았다.

동자석을 벗 삼은 무덤을 지나
길 아닌 길로 접어든다.

에둘러진 낮은 돌담
벌러진 솥단지

이름 없이 스러진,
아직 순을 틔우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큰절 올리고
상왜떡으로 음복을 한다.

이것들 죄다 마음에 품고 산을 내린다.

2006년 봄
제주에서 김수열

김수열의 시는 참 따뜻하다.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처럼 마음을 녹인다. 그는 아픈 이야기도 편하게 한다. 눈물 나는 이야기도 담담하게 한다. 웃으며 읽다가 눈가에 눈물 어리게 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도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진솔하게 말한다. 목소리에 공연히 힘주지 않고 담백하게 말한다.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평범하고(只是常), 참맛은 담백한 데 있다."고 하는데 김수열의 시가 그렇다. 곰삭을 대로 곰삭은 삶에서 우러난 깊은 맛을 지닌 시들이다.
도종환(시인)

유도화油挑花


너를 보내고 돌아오는 공항로에
독성 강한 꽃 낱낱이 만개했다
그길 천천히 지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저들이 서둘러 고개 숙인다

아,
내 안에
이렇게 지독한 사랑이 숨어 있다니! - P11

지삿개에서


그립다는 말도
때로는 사치일 때가 있다
노을구름이 산방산 머리 위에 머물고
가파른 바다
漁火 점점이 피어나고
바람 머금은 소나무
긴 한숨 토해내는 순간
바다끝이 하늘이고
하늘끝이 바다가 되는 지삿개에 서면
그립다, 라는 말도
그야말로 사치일 때가 있다

가냘픈 털뿌리로
검은 주검처럼 숭숭 구멍 뚫린
바윗돌 거머쥐고
휜 허리로 납작 버티고 선
갯쑥부쟁이 한 무더기! - P12

해장국


열불나면 걷잡을 수 없는 거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쯤이면
날계란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거라
김칫국물 정도로는 턱도 없는 거라
그럴 때면 막걸리나 한 잔 하면서
가만 놔둬야 하는 거라
그러면

씩씩거리다가도
제 스스로 몸 낮추고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는 거라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라

사랑도 그런 거라
분노도 다 그런 거라 - P16

건강보조식품 판매원


칠순 훌쩍 넘긴 나이에도
당신은 어스름에 집을 나서
출근부에 도장 찍습니다
이 나이에 꼬박꼬박 도장만 찍어도
기본급을 주는 일자리가 어디 있냐며
약상자 바리바리 싸들고 회사문을 나섭니다

한때 계모임 했던 친구네 집
사돈에 팔촌까지 이미 한 순배 돌고 돌아
더는 갈 곳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에 침발라 낡은 장부 뒤적입니다
고생 접고 편히 사시라 해도
성한 몸뚱어리 놨다 어디 쓰냐며
단호하게 손사래칩니다
몇 상자 팔아야 남는 이문으로는
글쓴답시고 술담배에 절어 사는
자식놈, 키토산도 먹이고 - P32

가진 것 없는 시부모 만나 맞벌이하는
며느리, 하이폴렌도 먹이고
손주녀석, 비타칼슘도 먹이고

마음만 종종걸음일 뿐
마땅히 갈 데 없고 오라는 데는 더욱 없습니다
온종일 발품에도 허탕치고
해거름 등지고 집에 들어
뜨는 둥 마는 둥 저녁상 물리고
집채만한 은행빚 무게에 겨워
애벌레처럼 오그라든 채 잠자리에 드는
당신 - P33

정뜨르 비행장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
반백 년전
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
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
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
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
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
육중한 몸뚱어리로 짓이길 때마다 다시 죽고
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 - P91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 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
눈감고 창밖을 외면하는 것 - P92




고희 넘긴지 오래인 어머님은
텃밭에 시를 쓰신다
골갱이 들고 고랑을 파 이랑 만드신다
배추도 심고 무도 심고
주둥이 깨진 독에서 삭힌 오줌으로
잎 키우고 꽃 피우신다

노란배추꽃엔 노란 나비
하얀 무꽃엔 하얀 나비

오늘도 텃밭에 앉아
한땀 한땀 정성으로 시를 쓰신다
行間에서 字間까지 완벽하다
퇴고가 필요치 않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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