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을 끝낸 뒤 한잔의 흑맥주 괭이 세워 놓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도 여자도 큰 맥주잔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과일 달린 가로수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노을 짙은 석양 젊은이들 다감한 속삭임으로 차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불현듯 나타나는
ㅡ이바라기 노리코, 6월」 - P47
현대 일본의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6월」. 내가 이시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반세기도 더 지난 옛날이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이 시에 그려진 ‘유토피아‘(그것도 노동하는 남녀의 유토피아)의 이미지에 매료당했다. "과일 달린 가로수들이 늘어선 거리는 바로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조선 민중이 그리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나 모국 유학 중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당한 형(서준식)에게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을 넣어 주었더니, 형은 이 시에 각별한 애착을 느낀 듯 직접 이 시를 번역해 옥중에서 쓴 편지에 적어 보냈다. 가장 험악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이 ‘유토피아‘의 이미지가 한국 옥중의 젊은이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 소식을 당시 일면식도 없던 시인에게 전했더니, 그는 굳이 내가 사는 교토까지 찾아와 주었다. 처음 만난 그 사람은 산뜻했다. - P48
이바라기 노리코는 1926년생이다. 초기 작품에 「내가 가장예뻤을 때」라는 게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거리는 파괴되어 쓰레기로 뒤덮였다. 나는 멋쟁이가 될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노래하는 시다. 그러나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힌 한탄의 노래는 아니다. 봉건제와 군국주의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홀로 서려는 여성의 눈부심, ‘폐허에 내리비치는 빛‘이 - P48
라 할 만한 광휘로 가득하다. 그 뒤 세상은 바뀌어 많은 동료 시인(특히 남자들)이 무기력한 현실 긍정 쪽으로 돌아선 상황에서도 이바라기는 한평생 그 광휘를 잃지 않았다. 1975년 10월 31일 쇼와 ‘천황‘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전쟁 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런 "언어의 기교에 대해서는, 나는 문학 방면은 별로 연구한 바가 없어 (...) 대답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했다. 제국의 절대권력자이자 전쟁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천황이 타국과 자국의 무수한 사람을 죽음으로몰고 간 전쟁에 대해 "언어의 기교"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책임을 교묘하게 얼버무린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랍게도 일본의 거의 모든 일본 지식인, 언론은 이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바라기 노리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 P49
전쟁 책임에 대해 묻자 그 사람은 말했다 그런 언어의 기교에 대해 문학 방면은 별로 연구한 바가 없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거무칙칙한 웃음 피토하듯 내뿜다, 멈추고, 또 내뿜었다 ㅡ「사해파정四海波靜」에서 - P49
만년의 이바라기는 한국어를 독학해 윤동주 같은 조선의 시인을 일본 독자에게 소개하는 한편으로 일본 사회의 급속한 우경화를 개탄했다. 1999년 73세에 낸 시집 『기대지 않고는 ‘히노마루(국기)·기미가요(국가)‘의 법제화가 강행되던 중 출판된 것이다.
더 이상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아 속속들이 배운 것은 그것뿐 (...) 기댄다면 그것은 의자 등받이뿐
ㅡ「기대지 않고」에서 - P50
2006년 2월, 시인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나는(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사망 통지서까지 준비해 놓고 홀로 떠나간 것이다. 지금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6월」이 노래한 유토피아의 이미지는 오히려 냉소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을까"....... 지금은 저 유토피아의 빛과 시인의 산뜻했던 뒷모습을 상기해야 할 때다. - P50
그때로부터 거의 1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계는 조금도나아지지 않았음을 통감한다. 지금 우리는 핵전쟁의 늪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으며 이를 저지할 어떤 방법도 없다. 세계사의시계가 한 세기 정도 되돌아가 버린 듯하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글을 쓰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럴 때내가 떠올리는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 파울 첼란Paul Celan(1920~70), 장 아메리Jean Amery (1912~78),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87)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 선배‘들이다. 그 ‘선배‘들은 하나같이 인간성이 지닌 외면하고 싶은 추악함과, 그럼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숭고함에 관한 깊은 고찰을 남기고는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 나는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를 정의할 때 이런 의미를 넣어도 좋겠다고 몰래 생각해 본다. 디아스포라는 일부 지식인은 ‘인간성이라는 심연까지 도달하는 말들을 남기고 자살하는 존재이다. - P56
엔지니어였던 프리모 레비의 아버지는 푸줏간 진열장 앞에 서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유대교 계율에 반하는 햄이나 소시지 같은 돼지고기 가공육을 사곤 했다. 그럴 때면 셈이 맞는지 눈금이 새겨진 로그자로 검산했기 때문에 동네 푸줏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말리아 할머니"는 레비의 할머니다. 한창때 뭇 남성을 "애끓게 하던" 그녀는 젊어서 혼자가 되었지만 나이를 더 먹은 뒤 늙은 기독교도 의사와 재혼했다. 하루건너 유대교예배당인 시나고그와 기독교 교구 교회에 번갈아 다니며 80세가 넘어 세상을 떠났다. "바르바파르틴‘은 ‘보나파르트 아저씨‘ 라는 뜻으로, 나폴레옹이 잠깐 가져다준 유대인 해방을 기리기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아저씨‘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아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개종을 하고 기독교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떠난다. 이렇듯 다채롭게 펼쳐지는 매우 기괴하면서도 사랑스럽기도 한 초상화들... 유대인들이 계율을 어기고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하고 기독교도와 결혼한다. - P57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결과,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유대인의 신분 해방이 실현되지만, 불과 수십 년이지나 그들은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대홍수에 휩쓸리게 된다. 레비가 생생하게 그려 낸 모습은 그 대홍수 이전의 이야기다. 유머가 넘치는 추억담인 동시에, 비통한 묘비명이기도 하다. ‘후배‘인 나도 쓸 수 있을까. 재일조선인 사이에서 늘 주고받는 농담 중에 ‘모든 재일조선인은 소설 한 권 쓸 만큼의 사연을가졌다."라는 말이 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지만 가혹한 역사에 떠밀려 온 재일 디아스포라 개개인에게는 그만큼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살아 있다는 뜻이리라. 물론 실제로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내게도 인생을 마무리하기전 내 가족과 친척, 지인들의 ‘초상‘을 글로 그려 내 남기고 싶은욕구가 있다. 디아스포라는 고향, 국가, 가족, 혈통 같은 허구의관념에 믿음을 두지 않기에, 적어도 작품으로 자기의 흔적을 새겨서 남기고자 하는 어려운 희망을 품는 것이다. - P58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불법체류‘란 국가가 마음대로 단정해 놓은 정의다. 예를 들어 지금 우크라이나의 경우를 보자. 그땅에서 태어나 그 땅의 말을 쓰며 살아온 사람들은 한때 오스만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었고, 그 후로는 ‘소련인‘이었다. 그러고는 우크라이나인이 되었다가 지금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찢겨 있다. 본인은 ‘이동‘하지 않았지만 위로부터 국가가 차례차례 자의적으로 선을 긋고 나누어서로 싸우게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다. 내 이모부는 남한의 탈영병, 고모부는 북에서 온 인민군 소년병이었다. 두 사람이 어디선가 총탄을 주고받았다고 해도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있으며, 이는 ‘조선‘ 민족의 역사에서도 오히려 흔하디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모부는 누구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그 과정을 겪으며 허무하다고 할 만큼 현실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처세술을 몸에익혀야 했다. 전 세계의 많은 디아스포라가 그러했다. - P63
‘근대적‘인 사상의 소유자인 아버지가 부르주아적 입신 출세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데 비해 ‘봉건적‘인 어머니는 자신과 자식의 인간성을 외부와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또 저항했다. 이런 ‘민중과 여성‘의 관점에서 깊은 사색을 통해 자국의 역사를 반성하며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시모다는 생각한 것이다. 이 서술은 나에게 내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감개를 품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일본, 한국, 독일, 아니 세계 어디에서든 어머니들은 그렇듯 필사적으로 아이를 감싸 안아 왔다. 콜비츠의 <희생>은 그런 어머니들에 대한 찬가다. 단, 나에게는그처럼 어머니를 칭송하는 것에 대한 주저와 고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식이자 남자인 내가 어머니를 두 번 이용하고 착취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콜비츠를 그저 ‘감동적‘으로 소비하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이시모다 쇼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억은커녕 호전적인 야만의 목소리가 전 사회에 넘쳐흐른다. "일본을 되찾자."라고 외치는 아베 신조 정권은 지금 불법적인 - P119
‘헌법 해석‘을 통해 자위대가 미군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그런 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로서 정권이 항상 거론하는 것 중 하나가 ‘한반도(조선반도) 유사‘ 사태라는 상정이다. 즉 일장기를 내건 일본군이 또다시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고 조선 민족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일을 상정하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기지가 몰려 있는 오키나와의 사람들도 막대한 희생을 치를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는 관심이 저조하지만, 오키나와에서는 헤노코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이 경탄할 만한 집념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오키나와인들 자신은 물론 한국인, 나아가 동아시아 민중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쟁이다. - P120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74세의 콜비츠는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그림 8)를 제작했다. 그 자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여자(늙은 여인)는 자식들을 제 외투 속에 품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넓게 팔을 벌려 소년들을감싸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ㅡ이 요구는 <두 번 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율법이다. 명령이다." 케테 콜비츠의 이 ‘명령‘을 오늘날에 전하는 사키마미술관. 기지에 머리를 들이밀듯 들어선 그 모습은 평화를 위한 투쟁의선두에 내걸린 깃발처럼 보였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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