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말하기가 말수에 달려 있다고는생각하지 않는다. 말수 적은 나의 ‘어른‘ 친구들이 그 증거다. 나는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그 ‘적은말‘을 내게 들려주는 것이 늘 고맙다. 솔직히 말수 적은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늘 실패한다. 그런 것은 타고나는 모양이다. 대신 이따금 그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조용한 어린이였겠지. 오해를 받아 속상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는 괜찮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익숙한 고요함 속에서 자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말수가 적은 어린이도 괜찮을 것이다. - P42

어린이에게 친구는 더욱 절실하다.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이 문제를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 어린이에게 있어 친구란 ‘만나서 노는 존재‘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학습에 차질이 생기거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에 비해 급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친구 대신 가족과 놀 수도 있고, TV를 보거나 게임을하면서 놀 수도 있으니 친구를 못 만나는 것쯤은 덜 걱정해도 되는 것일까? 어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꼭 평생 친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어린이의 친구 관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까?
어린이에게 친구란 단순한 ‘놀이 대상‘이 아니다. 경험과 지식수준이 비슷한 사람, 학교생활 같은 중대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비슷한 사람이다. 친구들끼리는 비슷한 것을 알고 비슷한 것을 모른다. 자기들만 아는 순간과 농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매 형제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친구와는 나눌 수 있다. 어린이가 ‘친구‘와 놀고 싶은 건 그래서다. - P48

"녹색 어머니 하시는 분들이 힘드실 것 같다. 그런데도 아침에 인사를 해주시면 기분이 좋다."
"나는 오늘 꿈이 하나 더 생겼다. 녹색 어머니를 하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남자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나도 아이들한테 인사를 잘 해줘야겠다."
로운이가 본 녹색 어머니들도 나의 지인처럼 반갑게 아이들을 맞이해주었나 보다. 어른들의 격려가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만들었나 보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보듯이, 어린이도 어른을 본다. 이웃과 이웃으로서.
이따금 어린이한테 잘 해주고 싶어도 주변에 어린이가 없어서 그럴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을 만난다. 우리가 실제로 이웃을 못 만나서 ‘이웃 어른‘이 될 기회가 적어진다면 동네의 범위를 점점 더 넓게 잡자. 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어린이 이웃을 환대하면 좋겠다. 그냥 어른끼리도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면 좋겠다. 어딘가에 ‘세상이 이런 곳이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어린이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가올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이 많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 P64

국립중앙박물관의 좋은 점을 세 가지 말해보겠다. 첫째, 로고가 아름답다. 이 로고는 직선으로만 표현되었는데, 박물관의 외관을 담백하고 기품 있게 표현한 선들이 멋있다. 둘째, 앞마당 전경이 시원스럽다.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는마음도 얼마간 넓어지게 마련이다. 움직임도 커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린이들은 반드시 뛰게 된다. 셋째, 어린이가 많다. 정책이나 실제 상황은 어떤지 몰라도 이 공간이 어린이를 환영한다는 건 확실하다. 어린이만큼 이 문제에 민감한 사람은 없는데, 어린이가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상형토기와 토우장식토기‘ 전이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모처럼 모르는 어린이를 많이 보았다.  - P74

나는 그림일기 숙제를 싫어하는 어린이였다. 그림 부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림 칸은 글 칸보다 훨씬 넓은데 어떻게 채워야 할지 늘 막막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도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소풍을 가서 돗자리를 펴고 친구들과 배를 깔고 누워 놀던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일기에 그린 그림은 내가 봐도 영 어색했다. 엎드린 사람을 어떻게 그린담? 어쩔 수 없이 그림을 지우고 단체 사진 찍는 장면으로 바꾸었다. 글도 그에 맞추어 써야 했다. 내가 실제로 말하고 싶은 것을 담을 수 없어서 속이 상했다. 글로 쓰면 되는데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않았다. - P81

글과 그림에 대해, 언어와 비언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물론 독서교실 수업은 언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게 마련이고, 글쓰기와 말하기가 우리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데 유용한 도구인 것도 사실이다. 내 역할은 어린이가 그 일을 자기 힘으로 해낼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언어로 정리된 내용만을 중요하게 여기거나 유일한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일기의 ‘글‘ 부분을 난감해하는 어린이가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을 글쓰기의 전 단계 정도로만 생각해온 것이다. - P82

어린이는 창작자이기도 하고 감상자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독서 수업이 결국 문화 예술 교육의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책 자체가 언어를 매개로한, 문화 예술의 산물이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문화 예술은 세상을 배우는 길인 동시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고, 맥락을 이해하고, 다른 감상자를 만나는 것. 어린이 자신이 창작자가 될 때도 그렇게 전달되는 작품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 문화 예술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창의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 P83

서는, 무엇이 창의적인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의 것들을 배워야 한다. 비윤리적이거나 사회적 합의에 어긋나는 것을 창의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표현의 기술을익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한번, 창작은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창의성이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키는지 실감할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평범한 낱말이 ‘시‘ 안에서 새롭게 쓰인 것을 볼 때 어린이는 은유와 함축성 등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어린이가 세계를 이해하는데 새 지평이 열린다. 언어만의 강력한 힘을 알게 되는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만이 보여주는 세계가 있고, 춤만이 자극하는 감각이 있고, 그림만이 전달하는 감정이 있다. 그렇게 어린이들이 각자의 무한한 세계를 만든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 P84

학교 바깥에서 도서관이 책을 공공의 자산으로 관리하듯이, 문화 예술의 다른 영역에서도 모든 어린이에게 열려있고 다가가기 쉬운 길이 많아지면 좋겠다. 어린이에게는 공연과 전시, 일상적인 교육을 아우르는 공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어린이가 스스로 진지한 창작자가 되어보고 감상자, 비평가도 되었으면 좋겠다. 평생 예술 안에 머무는 시민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문화 예술의 공공 교육을 생각할 때 내가 기대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어린이 세대와 다른 세대의 교류다. 우리는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감각과 표현을 배우기도 할 것이다. 신선함에 즐거울 때도 있고 낯설어 놀랄 때도, 심지어 걱정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동료 시민인 어린이의 세계를 만나고 싶다. 언어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면서 우리의 세계는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문화 예술 교육은 결국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 P85

아동은 표현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말이나 글, 예술 형태 또는 아동이 선택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경과 관계없이 모든 정보와 사상을 요청하며 주고받을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13조 제1항


어린이가 쓰고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을 먹고 입고자는 것만큼 시급한 문제로 고민하면 좋겠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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