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전화보다 좋은 것은 오래오래 생각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편지로 하는 버릇이 있다. 영원히 증거로 남아도 좋을 얘기만 써보자, 하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이야기를 잘 풀어준다. 글쎄요......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거나, 먼산만 바라보거나,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거나 할 수 없는백지 앞에서 상대방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가끔 그렇게 옛날의 감각으로, 아주 오래 모니터 앞에 앉아 이메일을 쓴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이렇게 쓸까, 아니면 저렇게 쓸까, 고민하며 몇 분을 보내버릴 때가 있다. 글쓰는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편지를 쓰던 습관 탓이지 싶다. 오래된 노래가 좋은 까닭은, 혹시 오래된 마음이 좋아서일까? - P119
어떤 슬픔이나 고통은 곧이곧대로 말하려 하다가는 말하는 사람의 몸뚱이를 으스러뜨려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가슴에 눌러두면 시름시름 앓게 될 테니, 방법은 하나다. 리듬에 맞춰 노래하는 것.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 이렇게 인생을 넘어가는구나. 이토록 깊은 슬픔과 리듬 사이의 서늘한 낙차 속에서, 그저 흔들리며 넘어가는구나. 케이프 베르데의 민델로 항구에서 태어난 세자리아 에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를 아홉 살 때 잃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선술집들에서 노래하며 성장했다고 한다.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끊기지 않는 가난 후에 프랑스에서 음반을 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근원을 달래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맨발로 노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발벗은 마음의 자유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뻐근해진다. 가사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전달되는 이 노래. 리듬 속에 몸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이라는 게 워낙에 흔들리는 것임을, 그러니 너무 슬퍼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 - P124
음을 어느 틈에 서늘히 알게 되는 노래.
대학에 다닐 때 잠깐 풍물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북을 둘러메고 지쳐서 간신히 행군을 따라가고 있는 나에게 선배가 다가와 말했던 기억이 난다. 힘들면 무릎을 더 꺾어서 흥을 내봐. 춤을 춘다고 생각해. 가락을 타봐. 그러면 오히려 안 힘들어. 그 말대로 해보자 정말 힘이 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유난히 지치고 마음 둘 데 없을 때 이 노래를 듣게 되는 것도 아마 비슷한 까닭일 게다. 막막하던 마음으로 흥겨운 기타 소리, 타악기의소리, 코러스들의 목소리, 깊고도 낮은 그녀의 목소리가 스며들어오면, 잠들어 있던 생명이 서서히 요동치며 꿈틀거린다. 살 거야. 살아야지. 살고 싶어. 춤추고 싶어. 더 무릎을 꺾어야지. 더 리듬을 타야지. 더 부딪혀야지. 더 껴안아야지. 더 담대하게 무너져야지. - P125
12월의 이야기
눈물도 얼어붙네 너의 뺨에 살얼음이
내 손으로 녹여서 따스하게 해줄게 내 손으로 녹여서 강물 되게 해줄게
눈물도 얼어붙는 12월의 사랑노래
가족과 함께 내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80년 1월이었다 (26일이라는 날짜도 기억한다). 서울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넓고 춥다‘는 것이었다. 유리창의 성에 얼어붙은 길. 딱딱 소리치며 이가 부딪히는 추위. 그것들은 아마 나에게 서울의 인상이자 삶의 인상이 되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겨울만 되면 필요 없는 새 스웨터를 사고 싶어지는 건,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자 따뜻함에 대한 갈망 탓인지도 모르겠다. - P130
나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내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있어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외로울 때도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음ㅡ 음ㅡ - P138
저기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었구나.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 숨을 골라가며, 하나씩 세며 걸으니 모두 스물두 그루였다. 흰 우듬지, 흰 줄기, 흰 가지, 반짝이는 잎잎의 푸른 잎사귀들. 살아 있다는 것이 벅차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너무 벅차 오히려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거라고했다던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더 이상 나무를 보지 못하는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겨울날 뼈대를 드러내고 하늘을 향한 활엽수들, 봄날 연푸른 잎을 돋워내는 나무들. 그 줄기와 가지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그 잎사귀의 빛과 소리를 그 꽃과 냄새를 열매의 빛과 맛을. 우리가 가장 나약할 때, 가장 지쳤을 때, 때로 억울하거나, 서럽거나 후회할 때, 가장 황폐할 때,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나무는 그자리에 있다. 땅속 캄캄한 곳에서부터 잔뿌리들로 물줄기를 끌어올려 잎사귀 끝까지 밀어올리며, 그러니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때로 이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고요한 몸, 더욱 고요한 눈길로 이들을 떠올리기 위해서라도. 어느날 거울을 보았을 때, 내 그을린 얼굴 대신 한 그루 낮고 푸른 나무가비칠 때까지. - P142
더 읽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픈 것은, 그의 운명을 미리 알기 때문입니다. 그가 동경에 가고자 하나 관의 허락을 못 받으면 마음이놓이고, 기어이 동경에 오고 말았소‘라고 하는 편지에서는 숨을 멈추게 됩니다. 하루하루 말라가며 저녁의 발열과 각혈, 가솔린 냄새로인한 구토를 견디는 대목은 그가 곧 죽을 것임을 내가 알기에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는 아직 모르나 나는 날짜까지 알고 있는 그의 미래말입니다. 한 달쯤만 있다 돌아가야겠소, 라는 다짐도, 돌아갈 수 없소 ㅡ 이대로는 결코, 라는 다짐도 부질없이 안타깝습니다. 밖으로 나오면 마음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도처에서 그의 독백이 들리는 듯합니다. 짐짓 괜찮은 척 김기림의 안부를 묻고, 얼마 전시작했다는 배구가 재미있느냐며 너스레를 하고, 저녁에 듣고 온바이올린 연주에 대해 평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처절하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와주오. 제발 이리 와주오. - P176
카페 왈츠에서 곡들을 추리며 빼게 된 노래의 가사들은 더러 어두웠습니다. 차라리 우물 속처럼 아주 어두우면 그 어둠에 빛이 어리기도 할 텐데, 어떻게 보면 설어두운 노래들이었습니다. 빼면서는 조금아쉬웠지만 이제는 잘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의 글들도, 같은 마음으로 많이 덜어내며 썼습니다. 저는 제 운명을 미리 알지 못하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빛을 던지는 것뿐일까요. 아주 찬란한 빛이 아니라 해도 어슴푸레한, 빛의 어린아이 같은 무엇이라 해도…… 오직 생의 가운데에만 있는 무한한기쁨이, 어렴풋한 따스함으로라도 제 서툰 노래들에 배어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의미 없는 바람이라는 걸. 하지만 바로 그 의미 없음으로써만 가까스로 살아남는 바람이라는 걸..... 이젠 조금은 알 것 같아서요.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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