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정원

서울대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렌느2대학에서 공연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공연예술이론 및 예술학일반을 가르치며, 변호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비평을 쓴다.
가끔 사진을 찍고 노래 부른다.

뒤늦게 쓰인 비평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 작품에 대한 것일 수도, 전혀 아닌 것일 수도 있는 글을. 그충동을 따르지 못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박사 논문이라는 거대한 산이 여타의 사유와 문장을 가로막던 시절. 대체로 많은 날들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누워 보냈음에도 피차 버려질 그 시간에 일어나 다른 글을 쓸 수는 없던. 그게 산에 대한 예의이자 책무이던 날들.

그러는 동안 아마도 생이 유예되었다. 밖은 소용돌이였으나 나의 작은 방 문을 닫으면 고요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시간을 벌었다. 현재적 휘말림이 아닌, 어지러운 춤이 아닌 방식으로 저 소용돌이와 다시 관계 맺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관망할, 애도할 거리가 생길 때까지. 그러나 거리라는 말은 내가 적을두고 있는 공연예술이라는 장르에 얼마나 생소한 것인지. 나는 얼마나 나의 직업을 배반하며 지냈던 것인지.
왜냐하면 공연예술은 시간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존재 방식이 시간에 기대고 있어,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 작품을 다 본 순간 그것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며, 기억도 금세 바스라진다. 그러므

로 대개 공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가쁜 호흡으로 이루어진다. 흐릿해지기 전에, 영영 지워지기 전에. 그러나 아무리 현재적이어도 그 글쓰기는 공허를 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글은 독자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문학 비평이나 영화 비평을 읽는 것처럼 공연 비평을 읽지 않는다. 글을읽다 흥미로울 경우 뒤늦게 찾아볼, 작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당신은 내가 본그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묘사하는 나의 문장은당신에게 기어코 낯설 것이다. 나의 흥분은 기이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독서를 계속할 인내를 품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유예의 시절에, 나는 나를 가슴 뛰게 한많은 공연을 기꺼이 기억의 무덤 속으로 넘겨 보냈다. 충분히희미해진 뒤에, 말하자면 독자에게만큼 내게도 작품이 비실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글을 쓰기 위해서, 독자와는 조금 더가까워지고, 작품과는 한없이 멀어진 채로, 이제는 발생을 멈춘 것들을 끝내 뒤돌아보기 위해서 많은 것이 지나간 뒤에,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이 책에는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년 동안 프랑스에

살면서,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두 해 반을 더 보내면서 품었던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보았던 무대, 걸었던 풍경, 만났던 사람, 못 지킨 죽음, 읽었던 말들과 불렀던 노래가 담겨 있다. 이는 그 모든 지나간 것들에 대한 뒤늦게 쓰인 비평이다.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 유예되고 간직되었던. 어쩌면 삶도 한 편의 공연처럼 흘러가면 그만이기에.
이제 한 시절이 덮였으니 문득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어째서 어떤 슬픔은 발화됨으로써 해소되는지. 나는 그것이 늘 슬펐다. 그러나 그럼에도 말이 되지 못하고 남는 것들이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모국어로만, 침묵으로만 호명되는 것들. 그러니 나는 아마도 다시 침묵 속으로 평생을 배워도 다알지 못할 세계의 아픔에게로,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그아픔을 들여다보는 친애하는 예술에게로 모든 것을 빚진, 아름다움에게로.

2021년 10월
목정원

극장이라는 공간은 오묘하다. 실시간으로 눈앞에 펼쳐지는가상의 세계를 만나러 우리는 그곳에 간다. 몇 시간짜리 허구를 기꺼이 함께 용인하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곳. 지구 위에는내가 사랑하는 극장들이 몇 있고, 사랑을 촉발시킨 것은 대체로 거기서 마주한 허구의 세계였다. 나는 아름다운 가상을 만난 곳에서, 그 공간을 또한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가상은 실제의 공간 속에 기입됨으로써만관객과 만나게 된다. 적어도 지금껏 공연예술이라 일컬어진것들의 역사는 저 질서를 파기한 적 없다. 피터 브룩이라는 연출가는 그의 저서 『빈 공간에서 누군가 그곳을 가로지르고,
누군가 그를 지켜본다면, 모든 공간은 극장이 될 수 있다고썼다. 요컨대 무대가 성립되려면 최소한 한 명의 배우와 한 - P11

명의 관객이 필요하며, 그들의 현전이 파문을 일으킬, 공간이 필요하다.
이때 공간이란 어떤 종류여도 관계없다고 브룩은 덧붙였지만, 나는 언제고 궁금했다. 모든 빈 공간은 어떤 모양으로비어 있는가. 세상에 같은 공간은 없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고유하게 만날 것인데, 거기 어떤 모퉁이가 있어, 당신은 어디로들어오고, 나는 어디를 응시할 것인가. 빈 공간은 다시 또 어떤 빈 공간들로 나뉘고, 당신은 어디서 넘어질 것인가. 우리는어떻게 접힐 것인가. 당신의 춤은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 P12

제일 먼저 우리는 책상과 의자를 치워 공간을 비웠다. 그리고 거기 서서 우리가 속한 그곳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수업을 하러 강의실에 들어가면 먼저는 그 일을 하라고 위그가 말했다. 가만히 서서 공간을 감각하는 일. 이제 곧 이야기가 번질, 나의 목소리가 울려나올 그곳. 이때 공간을 감각한다는것은 그 공간 속에 존재하는 나를 잊지 않는 일이다. ‘내가 여기 있어.‘ 그것을 느끼는 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러나 존재는 몸이라는 물성을 입고 있기에 단지 바라봄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하여 다음으로 우리가 한일은 공간 속을 걸어보는 일이었다.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눈으로 인사하면서,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는 채로, 각자가 바닥에 그리던 보이지 않는 곡선들. 편재하는 공간을 몸으로 익히는 동안 다시 그 속에서 무수히 발생하던 새로운 공간들의 결. - P13

특별히 재밌었던 건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한 연습을 한일이었다. 강단에 선 상황에서는 저 둘을 잘 조율하는 능력이필요할 거라고 위그가 말했다. 한두 사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청중을 존중하며 모두에게 발화하되, 판단에 따라어떤 순간에는 특정 지점에 눈길을 돌려 주의를 환기시킬 수있어야 한다는 것. 특수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보편으로 돌아가고, 보편을 보는 사이 포착된 특수를 제때 주목할 수 있는, 일종의 유희를 원활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3

공연을 보고 나와 해질 무렵의 강변을 걸으며, 나는 함께 있던 친구에게 그라프롱의 수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떠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떠나보내기 위해 공간 속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배웠노라고. 이제 어디에 살며 무슨 일을하더라도 제일 먼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홀로 직립을 연습할수 있다고. 그날 마침 나는 극 중 에우리디케가 입은 것과 비슷한 검정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죽음으로부터 걸어 나올 때 그의 손에 쥐인 채 땅에 끌리던, 죽은 몸을 감쌌던 흰 베일과 닮은 천 가방을 들고 있었다. 친구는 신이 나서 내게 강가의 잔디 위를 걸어보라 하고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생은 고통이고 죽음만이 안식일지라도, 생을 향해 걸어나가는 일, 그 걸음을 흉내 내자 문득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저 기분이 되살아났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같았다. 누구라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을 두려워 않고. - P18

누군가 내게 파리에서 무엇을 하였나 묻는다면 나는 그저 존재하는 일을 했다 하겠다. 공간 속에 서거나 앉거나 누워, 세계를 전부 감각했으므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몸을 마침내 연마했노라고, 그럼에도 거기 남아 있는 얼굴을 한 번만더 보고 싶었다고.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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