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휩쓸려 간다. 부유물처럼, 물이 거세나 잔잔하냐에 따라 때로는 순하게, 때로는 격하게.

보지 못하는가?
인간이란 뭘 원하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찾으면서,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려는 듯,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는 걸.
루크레티우스


날마다 새로운 공상을 품고, 날씨가 변하면 기분도 덩달아움직인다.

주피터가 세상에 보내는 다채로운 빛줄기들을 따라,
인간의 생각도 그와 함께 변하나니.
호메로스 - P14

플라톤은 「법률」에서, 공공의 비판이나 피치 못할 숙명적인불행,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치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아니라 겁이 많아 비열하고 유약한 탓에 자기와 가장 가깝고 가장친한 자,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운명의 흐름을 빼앗은 자는수치스럽게 매장하라고 명한다.
게다가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견해는 가소롭다. 왜냐하면결국 그것이 우리의 존재요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고상하고 풍요로운 존재를 지닌 것들은 우리를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우리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자기를 미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별난 병(病), 다른 피조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병이다.  - P45

이 역시 우리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치한 생각이다. 그런 욕망의 결실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 욕망자체가 자기모순, 자가당착이니까. 사람에서 천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저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천사가 된 것에서 아무 득도 보지 못한다. 그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누가 자기를 위한 이 변화를 느끼고 즐길 것인가?

한 존재가 불행과 고통을 느낄 수 있으려면,
그 불행이 닥치는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어야만 하므로.
루크레티우스 - P46

1573년이나 1574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에세에서 몽테뉴는, 초기 에세에서 다룬 죽음과 병에 대한 그 자신의 강박관념, 삶을 위협하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해 고대 철학자들이 수행했던 고행을 상기시킨 뒤, 1569년 또는 1570년 초에 겪은ㅈ낙마 사고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그 체험을 에세 쓰기의 목적, 방법, 의미와 연결시킨다. 제목에 쓰인 ‘exercitation (연습, 수련, 훈련)‘은 고대의 철학집단과 그리스도교 등의 종교 집단이 진리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삼은 어려운 논전, 고행 수행 등에 쓰인 옛 단어이다. 몽테뉴는 고대 철학이 설정한 거의 초인적이며 일면 가학적인 수행을 지칭하던 이 단어를 보편적 ‘인간조건‘을 지닌, ‘보잘것없고 광채 없는‘(『에세 3」 2장) ‘나‘의 인생을 참되고 가치있게 만들기 위한 ‘자기 탐구‘를 지칭하는 단어로 삼는다. 그 실행이 글쓰기였고,
그 글쓰기의 형태가 곧 ‘에세‘이므로, exercitation, 같은 뜻으로 보다 흔히 쓰인exercice, exercer, 그리고 essai는 글쓰기라는 하나의 행위 안에서, 구별하기 어려울만큼 동시에 수행되는 수련이라 하겠다. "이 글은 영광이나 칭송을 바라기 어려운 일종의 수련(exercitation)이요, 이름을 낼 만한 것이 못 되는 일종의 시작
(composition)이다." (『에세 2』 17장)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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