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내 누이는 나에게 스물아홉을 건너기 전에는 첫시집을 묶지 말라고 했다.
스물아홉. 그녀에게, 나에게, 비탈에 선 낱낱의 나무들에게, 꽉찬열을 향해 가는 가파른 고갯길인 그 아홉은 어떤 의미였을까.
열아홉에 대관령이 아팠고 스물아홉에 침묵한 바다가 아팠다.
그 스물아홉부터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이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의 통과제의 같은 것이었을까. 시로 풀어내기엔 너무 습하거나 달뜬 것들, 혹은 너무 메마른 것들의 나신을별판 쪽으로 밀어올려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청춘이 내 의식에 남긴 빛과 그림자의 환한 구멍들에 대해, 그리고 나는 내 벗은 영혼을 심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우리의 자유, 나와 우리의 평화는 어떤 속삭임으로 영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누구나 스물아홉의 강을 건넌다. 건너왔다. 누구나 ‘홀로‘ 스물아홉의 강을 건넌다. 건너왔다. 홀로 건널 수밖에 없는 강이므

로 이 글쓰기가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위로를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 나에게 선물한다.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해가는 과정의 편린들이며 내가 당신과 만날 수 있기를 열망한 소망의 흔적들. 그리고 이제야 간신히, 나는 나의 운명을 사랑할 줄 알게 된 것이며 운명을 반역하는 운명이 모든 삶의 틈새에서 어떻게 스스로의호흡을 여닫는지 들여다볼 그림자 하나를 지니게 된 것이다.
목숨이 허락된다면, 또다른 아홉 즈음에 이르러 나는 또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어떤 통과제의의 기록을 남기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사랑한 늙은 나무에게, 자신의 주름 속에서 날마다 젊어지는 바람에게 물에게, 이 글들이 욕된 것이 아니기를.
여리고 귀하고 눈물겨운 것들, 내가 사랑한 당신들께, 산 것들의 위대한 남루 앞에 이 책을 바친다.

2002년 3월 김선우

도동 항구에 내립니다. 훅, 전신으로 끼쳐오는 바람, 바닷길 내내 마음의 오장육부를 드나들던 숨소리가, 징글징글하고 사무치게 뼛속을 밝히던 숨소리가놀랍게도 일시에 화르륵 걷힙니다. 육지로부터 따라온 숨소리를 마술처럼 걷어내며 내 온몸에 가득 들어서는 바람, 손끝, 발끝, 머리카락 한올에 이르기까지 온몸 구석구석에서 소용돌이치며 이 섬의 바람이 내 몸을 허공에 띄웁니다. 돌연 나는 인간의 말을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해지고, 말의 문법을 버린 야인처럼 자유로워집니다.
바람 속에서, 나는 문득 중얼거립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 - P12

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항구에 발을 디디는 순간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문득 떠올라온 것은, 그것이 카잔차키스의 말이기 이전에 바람의 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대로 자신을 던지며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싸우는 바람. 그러면서 점점 투명해지고 점점 더 가벼워져서 저 단단한 섬대나무의 속살에까지 스며드는 바람. 스며들었다가 어느 순간 유쾌하게 폭발하며 나무들을 가볍게 띄워올리는 바람. 나는 그리스인이기 이전에 크레타인이다,라고 말하는카잔차키스의 마음을 이 섬에 와서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카잔차키스가 사랑했던 크레타 섬에도, 오로지 이 섬의 것이다.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 P13

울릉도의 바람. 그것은 이 섬의 모든 귀퉁이로부터 자신의 길을 엽니다. 그 바람은 오각형의 단단한 별을 닮은 이 섬이 처음빚어질 때, 그러니까 한 이천오백만년 전쯤 신생대의 어느 시기에 바닷속에만 갇혀 있기가 지루해진 바람족(族)들이 한바탕 축제를 벌이듯 와글거리며 바닷속 깊은 곳으로부터 화산을 터뜨려 올렸을 그때부터 한번도 이 섬을 떠나지 않은 듯한 바람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는 바람이며 늙으면서 날마다 젊어지는 바람입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바닷속으로부터 솟구쳐오른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들여다보며환희에 젖는 아름다운 관능의 바람입니다. 그러니 먼 훗날, 이 - P13

섬이 당신을 불러 무연히 이곳에 발디디게 되었을 때, 지도나관광안내판 앞에서 서성거리지는 마세요. 다만 온몸의 구멍들을 활짝 열어놓고 바람에게 길을 물으세요. 마음이 갈피를 잃고부대끼는 가슴뼈 깊숙한 곳으로부터 귓불의 미세한 솜털들까지 바람 속에 나부끼게 그저 놓아두십시오. 다만 그렇게 바람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당신은 저동항에 있을 것이고 내수전 밤바다에, 천부와 황토구미에, 나리분지와 성인봉 꼭대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 P14

흔히들 섬을 일컬을 때 고립과 고독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나는 이 섬에서 지극히 고독해진 땅의 지극한 풍요로움을 만납니다. 나는 떠돌면서 유목을 꿈꾸는 자이지만 이 섬의 사람들은 동해의 고도에 정주해 있으면서 이미 아름다운 유목민들입니다. 철따라 다른 이름의 바다생물들이 찾아들고 울릉국화 울릉양지꽃 섬노루귀 섬현호색 섬백리향 섬바디 섬말나리꽃이 철따라 피어납니다. 울릉도 말고는 다른 어느 곳에도 없는 자생식물이 마흔일곱 가지나 된다는군요. 봄이면 명이나물 취나물 참나물 등 온갖 산나물과 약초들이 지천인 산에는 향나무 솔송나무 너도밤나무 섬개야광나무 섬잣나무 동백나무 섬댕강나무들이 철따라 다른 빛깔의 수액을 뿜어올릴 터. 시시각각 변하는 산빛과 바닷빛과 하늘빛과 바람의 빛깔을 이윽히 바라만 보아도 유목의 나날은 흥성스러울 듯합니다. - P16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일에 길들여진 육지의 인간들이 남긴 쓰레기들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몇천톤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부두가 만들어진다는 소문, 골프장과 스키장이 만들어진다는 소문, 이런 소문들이 두렵습니다. 벌써 이 섬의 자생식물인 섬개야광나무는 울울한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며 섬백리향 군락지에는 자생하는 백리향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이어도‘라고 하는 이 섬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비경을 보고자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얻어가야 할 가장 그윽한 것은, 자연의 섭리를 섬기고 그 섬김의 힘으로 스스로 평화로움을 얻는 공경의 마음일 것입니다. 훗날 이 섬이 당신을 부르거든, 온몸으로파도에 흔들리며 뱃길이 자주 묶이는 작은 배를 타십시오. 그렇게 어렵게, 귀하고 낮은 마음으로 발디뎌야 하는 ‘섬김‘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만, 바람에게 길을 물으십시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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