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어떤 이름이든 나무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 나무는 회색 수피가 매끄러웠고, 하나로 곧게 뻗은 기둥 끝엔 우산살처럼 둥글게 휜 가지가느긋하게 자라 있었다. 보리차차는 공원에 가면 꼭 그 나무 밑동에 대고 오줌을 쌌다. 보리차차가 나무를 돌며 꼼꼼하게 냄새를맡았기에 우리는 그 옆에 서서 나무의 잘생긴 풍모를 봤다. 시간이 흐른 뒤, 나 혼자 그곳에 갔을 때 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잿빛기둥이 되어 쉬고 있었다. 갈색 깃털의 새가 악보의 음표처럼 나뭇가지를 오르내렸다. 나는 근처의 흙이나 돌멩이에 보리차차의흔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나무와 그 나무가 뿌 - P9

리 내린 땅, 할머니와 내가 보리차차를 앞세우며 걷던 공원의 오솔길, 그 풍경 어딘가에 보리차차의 오줌이 스며든 자국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똥은 없겠지. 똥은 늘 우리가 배변봉투에 담아서가져갔으니까. 하지만 고불거리는 털 오라기나 콧방울에서 나오는 숨, 담홍색 젤리 같은 혓바닥에서 떨어지는 침방울, 높고 빠르게 짖는 소리.. 그게 무엇이든 보리차차의 일부가 산의 한 부분이 되어 여전히 내 곁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부르면 의심이 달려오던 보리차차. - P10

"말은 항상 느리죠. 생각에 비하면 언제나 느려요."
그러니 마음놓고 말하라며 레인코트가 우유수염의 팔에 닿을듯 말 듯 자신의 손을 올렸다. 우유수염의 표정에서 S자 곡선이그려지는 듯했다. 우유수염은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듯 손등을 뺨에 갖다댔고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레인코트는 우유수염이 무엇을 찾는지 알아챘다.
"혹시 이응을 찾는 거라면."
레인코트의 말에 우유수염의 얼굴이 밝아졌다. 레인코트는2층 발코니에 이응이 있지만 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작동을 멈춰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랑하는 기색 없이 이곳에서 하는 이응의 탁월함을 말했다. 풀과 흙 냄새를 맡으며 개울물소리와 함께 이응을 하면 발가벗고 빗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도시의 폐쇄된 공간에서 하는 이응과는 자극의 차원이달라서 한번 하고 나면 한동안 이응 생각이 안 날 만큼 에너지가충전된다고. - P19

할머니, 이 사람은 슬퍼할 자격이 있어? 울어도 돼?
할머니는 팬티를 갈아입는 인간이란 함부로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뫼르소는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울지 않고 카페오레를 마신 거라고.
나는 카페오레 대신 오미자물을 마셨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 대신 빵빵해진 아랫배로 변기에 앉아 소변을 봤다. 할머니는내가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면 오미자물을 주면서 달랬다. 다울어버리지 말고 울고 싶은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울고 싶은 자신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런 복잡한 설명을 들으면서 차갑고 새콤한 오미자물을 마시면 내 슬픔은 어리둥절한 눈을 한 채 나에게서 멀어졌다. 할머니는 나를 욕실로 데려가 울고 싶지만 울음 - P31

이 떠나간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손에 물을 묻힌 다음 슬퍼서 흘러내릴 것 같은 내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했다. 홍 홍! 나는 수건을 목에 두르고 앉아 내 콧방울을 움켜쥔・할머니의 손가락에 콧물을 풀었다. 향긋한 로션을 바른 다음 할머니의 배를 빼고 누우면 꾸루루 꽐꽐 꾸루루 꽐꽐 멧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줄줄 나는 거야. 하나도 안 아프고 하나도 안 슬퍼."
내게 오미자물을 주며 울지 말라던 할머니는 녹내장 증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전자의 주둥이와 유리병 입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오미자물을 바닥에 흘렸고, 물을 흘린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보리차차도 눈가에 눈물 자국이 생겼다. 송곳니가 약해져 딱딱한 음식은 잘 먹지 못했고 개가 먹을 수 있는 우유를 주면 코코아빛 입가에 우유 수염을 만들었다. - P32

할머니의 손을 따라 뺨이 뭉개지고 나면 할머니는 턱받이처럼 목에 두른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얼굴이 맑게 다시 생겨나는 기분. 그리고 나의 애처로운 강아지 보리차차는 아무리 내가 잘 말려줘도 털에 스민 물기를 세차게 흔들어 털어냈다. 머리, 몸통, 꼬리를 세 방향으로 비틀어 몸을 말렸다. 그러고선 날듯이 네발로 점프해 자기의 방석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잃어버린 화살은 모두 내 안에 있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레인코트가 떨며 신음하는 나를 더 세게끌어안았다. 끝없이 애정을 갈망하는 강아지처럼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응 안에서 오래 포옹했다. 속옷을갈아입어야 하는 몸으로 다른 몸에게 안겼다. 레인코트, 당신의 이름은 무슨 색이죠? 나는 묻고 싶었지만, 입속의 말들이 소리로나오지 않았다. 옛이응의 ‘호‘가 아닌, 지금 나를 가득 채우는 이 느낌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다. 더 깊은 품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 P46

만약 미래의 어떤 기술이 우리의 삶을 좀더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건 우리로 하여금 그 기술이 탄생하기 이전의 삶을 다시 한번 더 충실히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는 정보를 배열하는 방식인데, 그 정보란 것이 인간에겐 뇌에 입력된 과거의 기억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자기의 삶에서 그 어떤 것도 돌이켜 추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현재를 지각할 수도 없고, 기억이란 재료를 혼합해 내일을 꿈꿀 수도 없을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신기술은 우리의 지난 삶을 위해, 우리를 다시금 어린아이로 돌려보내 또 한번 배우고 자라나게 하기위해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 P51

이 소설은 이런 길들을 거쳐 저에게 왔습니다. 저를 깨우치게한 책들과 나무가 자라 있는 풍경, 그 안에 머무는 개와 새들이 제가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떠올리고픈 이미지입니다. 그 기억을 따라 저는 넘어지고 발을 헛디디며 틈과 오류로 가득한 ‘이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기억은 ‘ㅇ‘이란 글자의 생김새처럼 저를 지나쳐 또다른 곳으로 굴러갑니다. 부디 이 소설이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굴러가 자신만의 이응을 그려내는 누군가에게 잘 썩은 낙엽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등돌리고 선 듯한 절망에 빠진다 해도, 그 이응 안에서 자기 자신만은스스로를 꽉 안아주면 좋겠습니다. - P53

수영장 천장에서 빛이 쏟아진다. 형광등에도 타나 많이 탔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들을 물이 밀어낸다. 물속과 물 밖. 시끄러움과 고요함. 오늘은 끝까지 가볼래요?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 가요. 희주와 주호는 실랑이를 한다. 희주가 먼저 간다.
주호가 뒤따른다. 물이 흔들리고 물이 휜다. 딱 그만큼 몸이 흔들리고 몸이 휜다. 떠오르는 몸. 가라앉는 몸. 물을 밀어내는 만큼밀려가는 몸. 밀어내는 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 두 사람은 손안에들어오는 물을 만진다. 움켜쥔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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