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하층의 경비원 배치 사무실 앞에 빈 예술품 운송 상자들이 쌓여 있다. 1층의 무기와 갑옷 전시관 바로아래에 있는 사무실이다. 놓여 있는 운송 상자들은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커다란 박스처럼 생긴 것도 있고, 캔버스처럼폭은 넓고 두께가 얇은 것도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위풍당당하고, 옅은 색의 가공하지 않은 원목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져서 희귀한 보물 혹은 이국적인 야수까지도 담아 운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 보인다. 근무복을 입고 출근한 첫날, 이 견고하고 낭만적인 물건들 곁에 서서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너무 강렬하게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 P13

그녀가 평범한 철제 문을 밀어 열자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 흑백 세상에 갑자기 색이 입혀지듯 환상 같은 〈톨레도 풍경Heworlado(스페인의 도시 톨레도를 묘사한 엘 그레코티El Greco의 대그는 그리스 출신이자 스페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표현적인 회화로 명성을 얻었다 - 옮긴이)이 우리를 마주한다. 감탄할 시간은 없다. 아다가 걸어가는 속도대로 플립북을 넘기듯 그림들을 스쳐 지나가며 수세기를 넘나든다. 그림의 내용은 신성과 세속을 오가고, 배경은 스페인이었다가 프랑스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였다가 다시 이탈리아가 된다. 마침내 우리는 높이가 2.5미터에 달하는 라파엘로의 대작 <성좌에앉은 성모자와 성인들 Macdonna and Child Enthroned with Saints> (라파엘로 특유의 우아한 색감과 대칭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 <콜론나 제단화있다. ‘지저분하도록‘
Pala Coleter)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옮긴이)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 P14

"여기가 첫 근무지인 C구역이야." 아다가 말한다. "우리는 10시까지 여기에 서 있어야 해. 그다음은 저기. 11시에는 저쪽 A구역으로 갈 거야. 조금씩 돌아다니거나 서성거리는 건 괜찮지만 친구, 우리 자리는 여기야. 명심해. 자, 그다음에는 커피를 마시러 갈 거야. 여기가 당신의 전속 근무지지? 옛 거장의 OldMaster Paintings(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에는 "European Paintings"
으로 소개되고 있다-옮긴이) 전시실."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 운이 좋은 거야." 그녀는 계속 말을 잇는다. "결국에는 다른 곳으로도 배정받게 되겠지. 고대 이집트 전시실에 서 있다가 갑자기 잭슨 폴록으로 보내질 수도 있고. 하지만 처음 몇달간은 당신을 여기로 배치할 거야. 나중에는, 흠, 아마 근무일의 60퍼센트 정도만 여기서 일하게 될 테지. 여기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그녀는 발을 두 번 구른다. "나무 바닥이라 발이 덜 피곤할 거야.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날 믿어. 나무 바닥에서 열두 시간 근무하는 건 대리석 바닥에서 여덟 시간 근무하는 거랑 동급이야. 여기서 열두 시간 근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발이 거의 아프지도 않을 거야." - P15

이어지는 순찰 구역은 13세기와 14세기 이탈리아의 그림뿐만 아니라 바로 옆 커다란 전시실의 프랑스혁명 시기 그림들까지 아우른 곳이라 우리는 역사의 타임라인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돌아다니면서 때때로 아다는, 필요하긴 하지만 능력은 자신보다 한수 아래로 치는 감시 카메라와 경보기의 위치를 알려준다. 인간 노동자들을 더 대단하다고 여기는 그녀는 우리 경비원들과 거의 맞먹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곳의 숨은 조연들을열거하는 데 더 열을 올린다. 관리인, 우리의 노조 형제자매, 진통제를 나눠주는 간호사, 한 달에 하루밖에 쉬지 않는 계약직 엘 - P20

리베이터 관리인, 은퇴했거나 비번일 때 미술관에 상주하는 소방관 두 명, 무거운 작품을 옮기는 인부, 더 섬세한 작품들을 다루는 전문 아트 핸들러, 목수, 페인트공, 목공 기술자, 엔지니어, 전기 기술자, 조명 기술자 그리고 우리가 비교적 덜 마주치게 되는 큐레이터와 보존 연구원, 경영진까지.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롭지만, 나는 우리가 1300년경에 그려진 두초 Duccio 의 <성모와 성자Madonna and Child〉로부터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없었다. 오전 내내 어떤 그림과도 마주 서서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없던 터라 나는 4500만 달러라고 알려진 이 그림의 가격을화제 삼아 아다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아다는 내가 그런 저속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슬퍼할 뿐이다.  - P21

몇 과목밖에 듣지 않았던 미술사 강좌는 학부 수업 중 가장설레는 시간들이었다. 강의실의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웅웅거리며 살아나면 스크린 위로 성당들, 이슬람 사원들,
궁전들과 같은 세상의 모든 웅장함이 딸깍 딸깍 딸깍 소리를내며 튀어 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은 초크 그림이 백 배로부풀어 올라 초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밝은 스크린 위에서 고요히 진동하는 더 정적인 순간도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겸손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벽화 청소 작업에 참여하셨던 교수님께 수업을 받을 때면 마치 내가 촉망받는 학자가 되어 그 현장의 작업대 위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 P31

하지만 형인 톰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면서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8개월동안 나에게 현실세계란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병실과 퀸스에 있는 방 하나짜리형의 아파트가 전부였다. 졸업 후 뉴욕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서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준 것은 그런 조용한공간들이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서 있고 싶었다. - P32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메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몇 년이 흐른 후 전시실 하나하나를 섭렵하면서 모두 세어본 결과 정확히는 8496명이었다. 전시관을 크게 확장한 다음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숫자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배경에 나오는 아기 천사, 투우장의 관객, 개미 크기의 곤돌라 사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모두 셀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그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많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해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 P37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 내 시선이 페르메이르가 즐겨 그렸던 조용한 집안 풍경으로 가서 멈춘다. 뺨을 손으로 받치고 졸고 있는 하녀 (<잠든 하녀 A Maid Asleep〉, 잠든 인물을 둘러싼 일상 속의 물건들이 정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절묘한 작품 - 옮긴이)가 보이고, 그 뒤로는 잘 정돈되고 텅 빈 듯한 집 안의 모습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빛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 P41

이 작품은 너무나 아름다운 침묵의 시와도 같아서 앞에 선 내 기분까지 거기에 함몰되어버린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인간 아도니스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아마빛 금발의 비너스와 여신의 품을 거부하고 위험 가득한 속세로 돌아가려는 자신만만한 젊은이 아도니스 둘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고를 수가 없다. 나도 티션이 본 고대의 시를 읽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있다. 아도니스는 죽고 비너스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져 그의흐르는 피에서 붉은 아네모네 꽃이 피어나도록 한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은 ‘바람에서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아직 관람객이 없는 시간,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시실 안을 걷다가 티션의 또 다른 작품을 발견한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보다 훨씬 작고 덜 알려진 작품이다. 티션이젊었을 때 그린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Man)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 P44

히커리 로드의 빨강 벽돌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찍은 스냅 사진들도 많다. 낙엽 더미 위에서 뛰고, 생일 케이크를 먹고, 침대 위에서 씨름을 하는 모습들. 포착된 그 모든 순간과 수많은 기억은 낡아진 사진들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릴 듯 위태롭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친 총합은 그보다 훨씬 큰 것, 바로 톰에 관한 기억을 만들어내서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기억은 티션의 초상화와 매우 비슷하다.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이미지 말이다.
오늘의 첫 방문객이 도착한다. 나는 경비원이 서 있기에 좋은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