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제까지 시에 관한 글들을 모은 세 권의 책(『여성이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들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체시학‘이라 부를 수 있겠다고 언젠가 생각한 적 있습니다. 몸에게서 이름과 인종과 피부 색깔과 취향과 그 모든 것을 제거한 몸, ‘돼지‘의 시학이지요. 나중에 그 돼지를 ‘여자짐승‘
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가려움과 갈증과 배고픔과 결핍의 비명과 갈망이 제 몸의지금이고 직감이듯이 시의 직감도 그와 같지요. 지금의직감으로, 그 모든 것을 떨군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저는 시를 감지하지요. - P18

황인찬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시를 감지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선생님의 시는 항상 몸에 대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 시에서 무의식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 또한 바로 그 몸에 대한 깊은 천착에 의한 것이 아닐까 헤아려보게 됩니다. 돼지의 시학이 결국 폭력과 죽음을 통해서, 즉 육체성의 무력화를통해서 드러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생각되는데요. 선생님의 세계에서 죽음이란 몸과 참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자서전』 역시 죽음을 탐구하는 작업이었고요.
원래는 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이어가려 했지만, 죽음을 함께 짚어가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쭙고 싶은데요. 선생님의 시에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 P19

김수영 시인의 「눈」에서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김수영이 생각한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김수영은 왜 젊은 시인에게 "눈더러 보라고" 기침을 하고 "가슴의 가래"를 뱉으라 했을까요? 저는 김수영이 죽음을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같은 상태라 지각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영이 생각하기에죽음을 잊어버린 젊은 시인은 시인이 아니었지요. 그러니죽음을 잊어버리지 않은 시인은 눈에게 살아 있다고, 아 - P20

지 죽지 않았다고, 죽음으로 살아 있다고 마음껏 말해야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김수영에게는 죽은 자야말로 시인이고, 가래를 뱉을 수 있는, 죽음으로 산 자였지요. 저는아주 오래전에 김수영론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그때 저는 레퍼런스 없이 제 생각만으로 논문을써서 제출했습니다. 그러자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강렬하게 레퍼런스를 100개 이상 달아오지 않으면 통과를 시켜주지 않겠다 해서 기호학을 가져다가 도식적으로 김수영시를 분해했습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김수영이 참으로 형식적인 시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산이 참 정확했습니다. 일상어를 쓰는 시적 혁명을 도모했지만, 시 안에서의 형식은 참으로 도식적이었습니다. 저는그가 시에서 주로 ‘생활, 죽음, 자유, 혁명, 고독‘을 다루고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 논문의 챕터를 나누었습니다.
시를 쓸 때마다 김수영은 ‘생활, 죽음, 자유, 혁명, 고독‘의반대편에 위치한 구절과 에피소드 들을 도식적으로 배열했어요. - P21

사실 저는 죽은 자의 죽음이 아니라 산 자의 죽음을 쓴 것입니다. 저는 살아서 바리공주의 여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바리공주처럼 저의 죽음인 저의 바깥을 왕복하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왕복하면서 만난, ‘나의 죽음‘을 포함한 죽음의 존재들은 몇 인칭일까요? 저의 죽음을 ‘나‘라고 부를수 있을까요? ‘나‘가 유령 화자로 말을 시작하자 제 죽음은 인칭을 특정할 수 없는 ‘너(희)‘가 되었어요. 저는 제가죽은 후 ‘나‘라는 단독 자아로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죽음은 ‘나‘를 ‘나 아닌 것‘으로 만들 겁니다. ‘나‘
는 아마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지 않을 겁니다. ‘나‘가 죽은그곳에, ‘내‘가 여럿이 된 그곳에 그 시들이 ‘나‘를 기다리 - P24

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화자인 ‘너(죽음)‘는 인칭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제죽음의 인칭은 몇 인칭일까 자주 생각해봤어요. 아마 육인칭이나 칠인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를 쓰는 것자체가 일인칭에서 육인칭이나 칠인칭으로 건너갔던 순간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 P25

바람이 창문 아래서 두려움에 떤다.
바람은 침묵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가만히 있어, 소리치는 침묵은 어떤 나라 같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빛 아래 드넓은 운동장엔 아무도 없다.
다 치료받으러 갔다.
평평하고 광활한 운동장, 그러나 그 안은 스텐처럼 싸늘하다.
바람은 합창단에 가입했다 쫓겨난다.
바람의 목소리는 나무 꼭대기에 붙은 나뭇잎 두 개를 떨게 할 만름 높이 올라갈 수 있지만
탁자의 잔들이 모조리 깨질 만큼 예리하지만 음정이 계속 틀리는 바람, 박자를 못 맞추는 바람. 악보를 못 읽는 바람.
두 옥타브 올라갔다가 세 옥타브 떨어지는 바람. - P26

바람이 다리를 떤다. 바람이 창문을 떤다.
바람은 긴장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기분이 잘 상한다.
바람의 불안이 극도로 커진다. 교실의 전등이 모두 흔들린다.
바람이 미술치료 시간에 그려놓은 밤바다를 보라. 물결치는 수억만의 머리카락을 보라.
전봇대가 윙윙 운다.
입술 밖으로 전류가 흐른다.
싸늘한 운동장이 벌벌 떤다.
바람에게 누가 귓속말하나 보다.
바람은 흰 이빨 블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가지런한 문장들을 견디지 못한다. - P27

바람이 어디선가 험한 메시지를 받아온 사람처럼 포효한다.
바람에게 최면을 걸어야겠다.
바람에게 수면치료를 해야겠다.
바람은 바람들과 파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이 집에 도착하니 바람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바람을 입관하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더욱 심해진다.
펼쳐진 영혼처럼 울먹인다.
귓속말로 명령을 계속 받는가 보다.
바람 속에 몇백의 아이가 들어 있다. 바람은 그 아이들하고만 얘 - P27

기한다. 그 아이들하고만 산다.
바람은 다중인격이다.
바람은 구강애호증이다.
바람에게 공갈젖꼭지를 물려야겠다.
바람에게 진정제를 놔줘야겠다.
바람의 두 팔을 결박해야겠다.
바람은 상담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밖에만 있지 않다.
바람은 꿈 분석을 싫어한다.
바람은 빙 둘러앉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 P28

바람은 걸레 같은 가면 아래서
회오리치는 무의식의 대륙들과 만나는 걸 싫어한다.
거대한 풍선처럼 천천히 부풀어 오르다가 의자 모서리에 찔려 터진다. 통곡한다.
저물녘 붉은 물감을 칠한 바람이 폭발한다. 몇 시간째 데굴데굴구르며 회오리친다. 번개 친다.
바람에게서 바람이 뽑혀나가며 지르는 비명.
바람은 자유연상을 못 견딘다.
연상의 끝에는 꼭 무시무시하게 일어서는 밤바다가 있다.
바람은 일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육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관에 못이 쳐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유골함도 견디지 못한다. - P28

바람은 견디지 못한다.


- 「바람의 장례」 전문 「피어라 돼지』 - P29

당시에 저는 문학동네 온라인 지면에 시도 아니고 산문도아닌 ‘시산문‘이라 스스로 명명한 글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다시는 그 글들을 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온세상을 향하여 이 나라가 저 생때같은 아이들에게 한 짓을보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있는 어른이라니, 참으로 저 자신이 수치스러웠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에게 참으로 나쁜 짓을 많이 해왔습니다. 시인이란 인간은 원래 무턱대고 무한한 자유를 동경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시의 목적을 정치적 운동에 두지 않더라도 어느 시인이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이 그 현장에 가서 생일시를 쓰고, 지금도 끊임없이 낭독회를 열고, 학생들 가족과 연대해 책을출간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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