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누구나 똑같이 한 세트의 동기를 갖는다고 생각해 버리고는, 그게아니면 괴물이라고 하지."
- 조지 엘리엇, ‘다니엘 데론다』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때는, 둘 다 단순히 혐오하는 얼굴을 보고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지요, 우리는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로 우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겁니까……?"
-나치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리스가 늙은 볼셰비키 모스토프스코이에게, 바실리 그로스만, 삶과 숙명』

"자유는 무거운 짐, 영혼이 짊어져야 할 거대하고 이상한 짐이다……. 당연히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선택이며, 그런 선택은 어려울 수 있다."
- 어슐러 K 르귄, 아투안의 무덤

죽은 사람에게만 석상이 허락되건만, 나는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석상을 하사받았다. 이미 화석이 된 것이다.
이 석상은 내가 세운 무수한 공적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라고, 헌사에서 말했는데 이를 대독한 사람은 비달라 ‘아주머니‘였다. 윗사람들의 지시로 대독을 맡은 비달라 아주머니는 하나도 고맙지 않은 눈치였다. 내 안에 있는 겸손을 모조리 끌어올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밧줄을 잡아당겨 수의처럼 나를 덮은 천을 걷었다. 펄럭이는 천이 땅에 떨어지자 내가 거기 서 있었다. 여기 아르두아 홀에서는 환호성을 올리지 않지만 얌전한 박수 소리는 좀 났다. 나는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 P11

석상이 대개 그렇지만 내 석상도 실물보다 크고 근래의 내 모습보다 젊고 날씬하며 훨씬 나은 모습이다. 어깨를 젖히고 똑바로 서 있고 휘어진 입술에 확고하지만 선한 미소를 띠고 있다. 나의 이상주의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헌신적 의무감, 모든 장애를 불사하고 전진하려는 결단을 표현하고자 시선은 우주의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그러나 아르두아 홀 정문에서 나오는 오솔길 옆 음침한 나무와 덤불속에 묻혀 있으니 하늘에 행여 뭐가 있더라도 내 동상의 눈에 보일리가 없다. 우리 ‘아주머니‘들은 주제넘게 굴면 안 된다. 심지어 돌의 형상이 되어서도, - P12

나의 왼손을 꼭 쥔 여자아이는 일고여덟 살쯤 되었고, 신뢰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내 오른손은 옆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의머리에 얹혀 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베일로 가리고 갈망이나 감사, 둘 중 하나로 읽을 법한 표정으로 눈을 들어 위를 본다. 우리 ‘시녀‘ 중 한 사람이다. 내 뒤로는 ‘진주 소녀‘ 한 명이 선교사업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고 서 있다. 내 허리를 감은 벨트에 걸린 물건은 테이저건이다. 이 무기를 보면 내 실패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좀 더 효율적이었다면 저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목소리에 깃든 설득력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전체 군상으로 보면 대단한 성공작은 아니다. 너무 바글바글하다.
내가 좀 더 강조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는 건 다행이다. 이 늙은 여성 조각가는(수십 년째 참된믿음을 지켜 온 사람이다.) 열렬한 신심을 강조하기 위해 눈알을 툭 튀어나오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그조차 안 됐을 수도 있다. 그 여자 - P12

가 제작한 헬레나 ‘아주머니‘ 흉상은 흡사 광견병에 걸린 몰골이고,
비달라 아주머니 흉상은 갑상선항진증 환자 같고, 엘리자베스 ‘아주머니‘의 흉상은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석상 개막식에서는 조각가는 초조해했다. 자기가 표현한 내 모습이 충분히 보기 좋았나? 과연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걸까? 내가 기분이 좋다는 티를 내줄 것인가? 천이 벗겨지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도 측은지심을 아예 모르는 위인은 아니다.
"아주 실물과 흡사하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게 9년 전 일이다. 그후로 내 석상은 풍상에 닳았다. 비둘기들이 나를 장식하고 이끼가 내 축축한 틈새에 싹을 틔웠다. 참배자들이내 발치에 헌물을 두고 가는 일이 많아졌다. 다산을 비는 달걀,
만삭을 상징하는 오렌지, 달을 뜻하는 크루아상, 빵 종류는 무시하지만(보통은 비를 맞아 엉망이다.) 오렌지는 챙겨 호주머니에 넣는다.
오렌지는 정말 상큼하다. - P13

아르두아 홀 도서관 관내 나만의 성역에서 이 글을 쓴다. 우리 땅전역을 휩쓴 열광적인 분서(焚書) 이후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도서관이다. 앞으로 반드시 도래할 도덕적으로 순수한 세대를 위한 청결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과거의 피 묻은 지문을 싹지워 버려야만 했다. 이론은 그랬다.
그러나 피 묻은 지문 중에는 우리가 찍은 것도 있고, 이런 자국은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무수한 유골을 파 - P13

묻었다. 다시 파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단지 당신의 계몽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미지의 독자여, 지금 당신이 읽고 있다면 이 원고는 적어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미망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게는 영영 독자가 없을지 모른다. 아마도 나에 대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오늘은 이 정도의 집필이면 충분하다. 내 손은 아프고, 내 허리는쑤시며, 밤마다 마시는 뜨거운 우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장광설은 감시 카메라를 피해 은닉처에 숨겨 둘 것이다. 나는 감시 카메라들이 어디 있는지 안다. 내 손으로 설치했으니까. 이렇게 조처해두긴 했으나 여전히 내가 무릅쓰는 위험은 잘 안다. 글쓰기는 위험할수 있다. 어떤 배반이, 어떤 탄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르두아홀 내부에도 이 원고를 손에 넣고 기뻐할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잠깐 기다려, 나는 소리 없이 그들에게 충고한다. 훨씬 나빠질게야. - P14

이런 점에서 사령관 인형은 내 아버지 카일 ‘사령관‘ 같았어요. 아버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착하게 굴었느냐고 묻고는 휙 사라졌어요. 차이가 있다면 사령관 인형은 서재 안에서 뭘 하는지 볼 수있지만(컴퓨토크와 서류 더미를 가지고 책상에 앉아 있었죠.) 현실의 아버지가 뭘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는 거였어요.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는 건 금지였거든요.
아버지가 그 안에서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들 했어요. 남자들이 하는 중요한 일들은 너무 중요해서, ‘종교‘ 과목을 맡은 비달라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뇌가 작아서 큰 생각을 못 하는 여자들이 관여할 게 아니라고 했어요. 고양이한테 크로셰 뜨기를 가르치려드는 거나 마찬가지야라고 ‘공예‘ 선생님 에스테 아주머니가 말하면우리는 왁자하게 웃었어요, 아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에요!
고양이는 하물며 손가락도 없잖아요!
그래서 남자 머릿속에는 손가락 같은 게 있다는 거야. 다만 여자애들한테는 없는 손가락이고, 그러니까 전부 설명이 되는 거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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