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수요일(5월 5일)쯤이었다. 철수한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외출하게 된 극소수의 행인들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몸을 웅크리고 살금살금움직였다. 총알이 날아들지 않는 람블라스거리 한복판의 어떤장소에서는 몇 사람이 텅 빈 거리를 향해 신문을 사라고 소리쳤다. 화요일에는 무정부주의자의 신문인 솔리다리다드 오브레라가 전화교환소 공격을 <극악무도한 도발>(어쨌든 그런 의미였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수요일에는 분위기가 바뀌어 모두들 생업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 지도자들도 똑같은 메시지를 방송으로 내보냈다. 전화교환소가공격을 받을 무렵 무방비 상태이던 통일노동자당 신문 《라 바탈랴》의 사무실도 치안대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라 바탈랴》는 다른 장소에서 인쇄되어 적은 부수가 배포되었다. 그 신문은 모두들 바리케이드에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촉구했다. 사람들은 갈등을 일으켰다. 일이 도대체 어떻게돌아갈지 불안하게 생각했다. 아직 바리케이드를 떠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모두들 의미 없는 싸움에 싫증을 냈다. 이 싸움에서는 어떤 현실적인 결론도 나올 수 없음이 명백했다. - P177
전면적 내전이란 곧 프랑코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의미했다. 모두들 이 점을 걱정하였다. 내가 사람들 이야기를통해 추측해 본 바로는, 당시에 전국노동자연맹 조합원들은 오직 두 가지만을 바라고 있었다―사실 처음부터 두 가지만 바랐다. 즉 전화교환소의 반환과 혐오스러운 치안대의 무장해제였다. 만일 헤네랄리테에서 이 두 가지 요구 사항과 식량으로폭리를 취하는 짓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하면, 바리케이드는 두시간 내에 철거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헤네랄리테는 굴복할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흉흉한 소문들이 돌았다. 발렌시아 정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기 위해 6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5천 명의 무정부주의자와 통일노동자당 병력이 아라곤 전선을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 소문들 가운데 첫번째 것만이 사실이었다. 관측탑에서는 나지막한 잿빛 군함들이 항구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선원 출신인 더글러스 모일은 그것이 영국 구축함같다고 했다.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영국 구축함들이었다. - P178
그 건물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며 보낸 그 지루하고 악몽 같은 저녁이 기억 난다. 우리는 정문에 강철셔터를 내리고, 건물개조 공사를 하다 남은 석판으로 그 뒤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어 무기를 점검했다. 맞은편 폴리오라마 지붕에 있는 소총 여섯 자루를 빼면 스물한 자루의 소총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자루는 불량이었다. 총알은 소총마다 쉰 발 정도씩 돌아갔고, 수류탄도 몇 십 개 있었다. 그 외에는 피스톨과 리볼버 몇 자루밖에 없었다. 일이 터질 경우 여남은 명이 카페 모카를 공격하겠다고 자원했다. 주로 독일인들이었다. 물론 새벽에 지붕에서 기습 공격을 시도해야만 했다. 수적으로는 우리가 열세였으나 사기는 더 높았다. 설사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는다 해도 우리는 상대편 건물 안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건물 안에는 초콜릿 몇 조각 외에 식량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물 공급도 차단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 P179
나는 기분도 몹시 나쁜데다가, 예순 시간 정도 잠도 제대로못 잔 탓에 몹시 지쳤다. 늦은 밤이었다. 사람들은 아래층 바리케이드 뒤의 바닥에 흩어져 자고 있었다. 위층에는 소파 하나가들어가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응급 치료소로쓸 작정이었다. 물론, 건물에서는 요오드나 붕대를 찾을 수가없었다. 아내는 혹시 간호사가 필요할까 해서 호텔에서 우리 건물로 내려와 있었다. 나는 소파에 누웠다. 모카를 공격하기 전에 삼십 분이라도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격을 하다가 죽을수도 있었다. 피스톨 때문에 무척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허리띠에 찬 피스톨이 등허리를 계속 찔러댔다. 그 다음에 기억나는것은 아내가 내 곁에 서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며 잠을 깼다는것이다. 날이 환했다. 간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인민전선 정부는 통일노동자당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수도도 끊기지않았다. 거리에서 간헐적으로 총소리가 들리는 것 외에는 모든것이 정상적이었다. 아내는 차마 나를 깨우지 못하고, 앞쪽 어느 방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서 잤다고 했다. - P180
나도 지붕의 내 위치로 돌아갔다. 역겨움과 격분이 강렬하게돌려왔다. 이런 사건에 참여하게 되면 미약하나마 스스로 역사를 만드는 셈이 되니 의당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잘한 물리적 일들이 늘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전투 내내 나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기자들이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내놓는 올바른 상황 <분석>이란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내가 주로 생각했던 것은 이 비참한 내분의옳고 그름이 아니라, 단지 밤낮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지붕에 앉아 있는 일의 고생과 권태,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는 배고픔뿐이었다. 사실 우리는 월요일 이후로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못했다. 내 마음속에는 이 일이 끝나자마자 전선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내내 자리잡고 있었다.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백십오 일 동안 전선에 있었다. 그런 후에 약간의 휴식과 안락을 찾아 바르셀로나에 왔다. - P181
다음날, 사방에 깔린 돌격대가 정복자들처럼 거리를 활보했다. 정부는 주민이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위압감을 주기 위해 힘을 과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만일 다시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을 두려워했다면 돌격대가 병영에서 나와이렇게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어쨌든 홀륭한 부대였다. 내가 스페인에서 본 부대 가운데 최고라 할 만했다.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 <적>이긴 했지만, 나는 그들의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경탄 비슷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아라곤 전선의 남루하고 무장도 형편없는 의용군의 모습에익숙했기 때문에 공화국에 이런 부대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들은 신체적으로만 정예부대가 아니었다. 내가 가장 놀랐던이유는 그들의 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제 소총>(이 소총들은 소련이 스페인에 보낸 것이지만, 미국에서 제조된것으로 여겨진다)으로 알려진 신형 소총으로 무장했다. 나는 그소총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았다. 완벽한 소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가 전선에서 사용하던 형편없이 낡아빠진 나팔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 P186
발렌시아 정부는 바르셀로나 전투를 통해 오랫동안 찾던 구실을 얻었다. 카탈로니아를 좀더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구실이었다. 정부는 노동자 의용군들을 해산시켜 인민군에 재배치할 계획이었다. 스페인 공화국 국기가 바르셀로나 전역에서 나부꼈다. 나는 파시스트 참호를 본 이래로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노동자 계급 거주지의 바리케이드들은 철거되었다. 그러나 바리케이드라는 것이 쌓는 것보다 부수는 것이 훨씬 어려웠기 때문에 대충 치워졌다. 통일사회당 건물들 밖에 있는 바리케이드는 그대로 두어도 좋다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바리케이드가 6월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치안대들은 여전히 전략적 거점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자연맹의 요새에서 대규모의무기가 몰수되었다. 물론 몰수되지 않은 무기도 많았을 것이다. 《라 바탈랴》는 계속 발간되었다. - P187
나는 지금까지 바르셀로나 전투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어떤기분을 느꼈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낯선 느낌을 제대로 전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때를 돌이켜볼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당시에 우연히만났던 사람들의 모습, 갑자기 내 시야에 흘끗 들어온 민간인의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의미 없는 소동으로비칠 뿐이었다.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람블라스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던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장바구니를 들고하얀 푸들을 끌고 갔다. 한두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는 소총이시끄럽게 땅땅거렸다. 물론 그 여자는 귀머거리였을 수도 있다. - P191
그리고 완전히 텅 비어버린 카탈루냐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던 남자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는 양손에 하얀 손수건을 하나씩 쥐고 흔들었다. 모두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도 떠오른다. 그들은 한 시간 가량이나 카탈루냐 광장을 건너려고 하다가결국 건너지 못했다. 그들이 모퉁이의 골목길에서 나타나기만하면 콜론 호텔의 통일사회당 기관총 사수들이 사격을 개시하여 그들을 도로 쫓아버렸다. 이유를 모르겠다. 그들은 분명히무장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들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폴리오라마 위에 있는 미술관에서관리인 노릇을 하던 작은 몸집의 남자도 떠오른다. 그는 그 사태를 사교 행사로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영국인이 그를 찾아준것에 몹시 기뻐하였다. 영국인은 아주 심파티코" 하다고 그는 말했다. - P191
그러나 그 가운데 10분의 9는 사실이 아니라 해도 과장이아닐 것이다. 당시에 신문에 난 기사 대부분은 멀리 떨어져 있던 기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사실 보도로서 부정확할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왜곡할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문제의 어느 한 측면만이 대중에게 전달되도록 허용되었다. 당시에 바르셀로나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나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포되어 온 거짓말들 가운데 많은 부분에 대해 반박할 수있을 만큼은 보고 들었다. 이전 장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논란이나 혼란스러운 이름(꼭 중국 전쟁에 나오는 장성들 이름 같다)의 수많은 정당과하급단체들에 관심이 없다면 빼놓고 읽어도상관없다. 정당 내부의 논쟁에 너무 자세하게 파고드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오물 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능한 한 진실을 확립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먼 도시에서 벌어진 이 지저분한 싸움이 보기보다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93
바르셀로나 전투에 대하여 완벽할 정도로 정확하고 편견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필요한 기록이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대량의 비난 문건과 정당 선전물 외에는 검토할 자료가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 그리고 다른 목격자들에게서 들은, 그나마 믿을 만한 소문 외에는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나는 극악한 거짓말들 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있다. 그것이 넓은 시야로 이 일을 조망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있을 것이다. 우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전투가 시작되기 얼마 전부터 카탈로니아 전역에 긴장이 팽팽했다. 이 책 앞장들에서 이미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해 약간 이야기하였다. - P194
나는 지금까지 바르셀로나 시가전에 대해 객관적으로 쓰려고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가 없다. 실질적으로 어느 한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어느 편인지도 분명할 것이다. 또한 나는 이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불가피하게 사실을 왜곡시켰을지 모른다. 스페인 전쟁에 대하여 정확하게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선전용이 아닌 문건이 거의 없기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을 편견이나 내가 저질렀을 실수에 대해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정직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이 외국 언론, 특히 공산주의계열의 언론에 나온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P206
그러나 이들이 파시스트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지붕에 올라가서 물어보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는 단순히 자기가 들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리고 그 말이 공식적 설명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사실 그는 기사 앞 부분에서 선전부 장관을 경솔하게 언급함으로써 대부분의 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무심코 드러냈다. 스페인에 온 외국 기자들은 대책 없이 선전부에 휘둘렸다. 그러나 나는 그 부서의 이름만으로도 벌써 경계를 해야 한다고생각한다. 스페인의 선전부가 바르셀로나 사태에 대해 객관적인 설명을 할 가능성은 고(故) 카슨 경이 1916년 더블린 봉기에 대해 객관적인 설명을 할 가능성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기때문이다. 치지 마나는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바르셀로나 전투 설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했다. 여기에 덧붙여 통일 - P219
220노동자당이 프랑코와 히틀러의 돈을 받는 비밀 파시스트 조직이라는 일반적 비난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공산주의 계열 매체에서는 이런 비난이 되풀이되었다. 특히1937년 초부터 심해졌다.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범세계적인 운동의 일환이었다. 통일노동자당도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주의〉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간주되었다. 《프렌테로호》(발렌시아의 공산주의 신문)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는 정치적 원칙이 아니다. 트로츠키주의는 공식적인 자본주의적 조직이며, 인민에 대항하여 범죄와 파업을 자행하는 파시스트 테러리스트 집단이다.〉통일노동자당은 파시스트들과 동맹한〈트로츠키주의> 조직이며, <프랑코의 제5열>의 일부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처음부터 이런 비난의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권위적인 목소리로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비난에는 최대한의 인신 공격과 전쟁에 미칠 영향을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벽한 무책임성이 뒤따랐다. - P220
사실 나는 후방에서 그들을 향해 쏟아부은 이런 비난이 실제로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의 사기를 꺾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효과를노린,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반파시스트 연합보다 정당간의 정치적 원한을 더 중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은 결국 이런 뜻이 된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수만 명의 사람들, 외국에서 그들에게 공감하여 그들을 도우러 온 많은 사람들―그 대부분은파시스트 국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그리고 수천 명의의용군이 모두 파시스트에게 매수된 엄청난 규모의 첩자 집단이다. 이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그리고 통일노동자당의 과거 역사는 이런 주장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통일노동자당의 모든지도자들은 오랜 기간 혁명가로 활동해 왔다. - P221
또한 전쟁 동안에도 친파시스트적인 활동의 기미는 없었다. 통일노동자당이 좀더 혁명적인 정책을 다그침으로써 정부의 힘을 분열시키고, 그럼으로써 파시스트들을 도왔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다―나는 결국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게 되었지만. 개혁주의적인 정부가 통일노동자당과 같은 정당을 귀찮은 존재로여기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직접적인 반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통일노동자당이 정말로 파시스트단체였다면 그 의용군이 왜 충성을 유지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1936년-37년의 겨울 동안 견디기 힘든 조건에서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 속하는 8천 내지 만 명의 병사들은 전선의 주요부분을 담당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한번에 너댓 달씩 참호에있었다. 그들이 왜 그냥 전선에서 빠져나오거나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는지 알기 힘든 일이다. - P222
마지막으로 통일노동자당이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에 대해 살펴보자. 이 말은 이제 더욱더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다. 이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가 매우 쉽고, 또 실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여기서 잠깐 그말의 정의를 내려볼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세가지 분명한 사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1) 트로츠키처럼 일국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세계 혁명>을 옹호하는 자.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혁명적 극단주의자이다. (2) 트로츠키가 우두머리로 있는 실제 조직의 구성원(3) 혁명가로 가장한 파시스트. 특히 소련에서 사보타지 활동을 하며, 전체적으로 좌익 세력을 분열시키고 그 힘을 약화시키는 자. (1) 의 의미에서 통일노동자당은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이야기될 수도 있다. 영국의 독립노동당, 독일의 사회주의노동당, 프랑스의 좌익 사회주의자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통일노동자당은 트로츠키나 트로츠키주의자(<볼셰비키-레닌주의자> 조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P227
외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열다섯 내지 스무명 정도였다)은 처음에는 통일노동자당에서 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가장가까운 정당을 골랐지만 그 당원이 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그 추종자들에게 통일노동자당 정책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당의 간부직에서 숙청되었다. 그러나 몇 명은 의용군에 남았다. 마우린이 파시스트에게잡힌 후 통일노동자당 지도자가 된 닌은 한때 트로츠키의 비서였다. 그러나 몇 년 전 그를 떠나, 여러 반대파 공산주의자들을지난날의 정당인 노동자농민연합과 합하여 통일노동자당을 결성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매체는 닌이 한때 트로츠키와 관련이있었다는 사실을 이용해 통일노동자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라면 영국 공산당이야말로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스트래치는 한때 오스왈드 모슬리 " 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 P228
(2) 의 의미, 즉 유일하게 정확히 정의된 의미에서 보자면, 통일노동자당은 분명히 트로츠키주의가 아니다. 이런 구별은 중요하다.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다수는 (2)의 의미의 트로츠키주의자는 반드시 (3) 의 의미의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라는 것은 파시스트의 간첩 조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러시아의파업에 관한 재판에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어떤사람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살인자, 선동 분자 등으로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좌익적 관점에서 공산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받기 - P228
‘쉽다. 그렇다고 혁명적 극단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모두 파시스트에게 매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그것은 지역적 형편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맥스턴이 앞서 언급한 대표단과 함께 스페인에 갔을때, <베르다드》, 《프렌테 로호》를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 신문들은 즉시 그를 〈트로츠키-파시스트〉, 게슈타포의 간첩 등으로비난했다. 그러나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비난을 똑같이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영국 공산주의 계열의 언론에서맥스터는 그저〈노동계급의 반동적인 적>으로만 묘사된다. 이런 표현은 막연하면서도 편리하다. 물론 그 이유는 영국 공산주의 언론이 몇 번 뜨거운 맛을 보면서 문서비방법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난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는 나라에서는 그 같은 비난이 되풀이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 P229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 문제를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길게논의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내란이라는 엄청난 불행에 비추어보면 이런 종류의 정당간 내분은, 설사 불의와 거짓 비난이 불가피하다 해도, 사소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런 종류의 비방과 언론을 통한 공세,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정신의 습관은 반파시스트 대의에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잠깐이라도 살펴본 사람은 날조된 비방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는 공산주의 전술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늘날 핵심어는 <트로츠키 - 파시스트>지만 전에는 <사회주의 - 파시스트였다. 러시아 국사범 재판에서 레옹 블룸과영국 노동당의 저명한 당원들을 포함한 제2인터내셔널이 소련 - P229
230에 대한 거대한 군사 침공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입증된 지불과 육, 칠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기꺼이 블룸을 지도자로 받아들인다.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당에 들어오기 위해 야단이다. 아무리 종파적인관점에서라지만, 나는 이런 따위의 일이 도움이 될까 의심스럽다. 한편 <트로츠키-파시스트>라는 비방으로 인해 증오와 불화가 생긴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디에서나 하급 공산주의자들은 지도자들의 말에 이끌려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한몰상식한 마녀 사냥을 벌인다. 통일노동자당과 같은 유형의 정당들은 단지 반공산주의 정당이라는 이유로 몹시 불리한 처지에 몰린다. 세계 노동 계급 운동에는 이미 위험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평생 사회주의에 헌신해 온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조금이라도 더 쌓이게 되면,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혐의처럼 날조된 혐의들이 조금이라도 더 쌓이게 되면, 그 분열은 치유 불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다. - P230
예를 들어 내가 공산당 당원과 더불어 바르셀로나 시가전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다시 말해 <좋은〉 공산주의자는 내가 사실을 진실하게 설명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의 〈노선〉을 착실하게 따른다면,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기껏해야 내가 가망 없을 정도의 착각에 빠져 있으며, 사건 현장으로부터 1천 5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데일리 워커》의 머릿기사를 흘끗 본 사람이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일을 나보다 더잘 안다고 주장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논쟁이 있을 수 없다. 필요한 최소한의 합의에도 이를 수 없다. 맥스턴같은 사람들이 파시스트에 매수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되겠는가? 진지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유일한 목적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체스를 두다가 상대가 방화나 중혼죄를 지었다고 갑자기 악을 써대는 것과 같다. 진짜 쟁점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 비방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 P231
우리가 전선으로 돌아간 것은 바르셀로나 시가전이 끝나고사흘쯤 뒤였을 것이다. 시가전이 끝나고 난 후라, 그러니까 신문에서 헐뜯기 경쟁을 보고 난 후라, 예전처럼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인 관점으로 그 전쟁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스페인에서 몇 주 이상을 보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어느 정도씩은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온 첫날 만났던 신문 특파원이생각났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사기요」 그때 나는 그 말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에는(12월이었다) 그 말이 진실이 아니었다. 5월에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 점점 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모든 전쟁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락해 간다. 개인적 자유나 진실한 언론 보도는 군사적 효율성과는 절대로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232
그러나 프랑코는 단순히 이탈리아와 독일의 꼭두각시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봉건적 대지주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케케묵은 교권주의적·군국주의적 반동을 표방하는 존재였다. 인민전선이 사기일지는 모르나, 프랑코는 시대 착오였다. 오직 백만장자나 낭만주의자들만이 그가 승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더욱이 파시즘의 국제적 위신에 타격을 주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일, 이년 전부터 그 문제가 악몽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1930년 이래 파시스트들은 늘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그들이 매를 맞을 차례였다. 누구한테서 매를 맞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프랑코와 그의 외국인 용병들을 바다로 몰아낼 수만 있다면, 설사 스페인 자체가 숨막히는 독재에 시달리고 유능한 인사들 모두가 감옥에 갇힌다 해도, 그 승리는 세계 정세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려놓는 엄청난 일이 될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전쟁은 이길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 P234
병사들은 나를 다시 눕혔고, 누군가가 들것을 가져왔다. 총알이 목을 관통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총알이 목 한가운데를 관통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나 짐승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맥이 날아갔구나」 나는 생각했다. 경동맥이 잘렸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죽음을 예상한 시간이 2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는 것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처음 떠올린 것은, 다분히 관습적이게도, 아내였다. 두번째 떠오른 것은 세상 - 생각해 보면 결국 무척이나 마음에드는 세상이었다――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격렬한분노였다. 나는 그 감정을 매우 생생하게 느낄 만한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불운에 격분했다. 얼마나 의미 없는일이냐! 전투도 아니고 이 염병할 참호 한 귀퉁이에서 순간의부주의 때문에 죽게 되다니! - P240
휴가를 나온 의용병 두 명이 친구를 면회왔다가 나를 알아보았다. 내가 전선에 나간 첫주에 만났던 병사들이었다. 열여덟 살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내 침대 옆에 어색하게 서서 할말을 생각해 내느라 애를 썼다. 이윽고 내가 부상을 당해 안타깝다는 마음을보여주기 위해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일제히 꺼내 나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돌려줄 틈도 없이 달아나버렸다. 정말 스페인 사람들다웠다! 나중에야 나는 시내 어디를 가도 담배를 살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일주일치 배급받은 것을 몽땅 털어주고 간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일어나서 한쪽 팔을 삼각건에 걸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냥 늘어뜨리고 있을때보다 훨씬 더 아팠다. 한동안은 쓰러질 때 입은 상처로 인해몸 안의 통증이 심했다. 게다가 목소리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한 순간도 총상 때문에 아팠던 적은 없다. 보통 이런 식인 것 같다. 총알이 주는 엄청난 충격 때문에 국지적으로 감각이 마비되는 것이다. - P243
그러나 결국은 그가 틀렸다. 한두 달 가량 나는 속삭이는 정도로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어느 날 갑자기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른 성대가 <보정>을 해준 것이다. 팔의 통증은 총알이 목 뒤의 신경 가닥들을 끊어놓았기 때문에생긴 것이었다. 신경통처럼 쿡쿡 쑤셨다. 한 달 가량 계속해서아팠다. 특히 밤에 통증이 심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오른손의 손가락들도 반쯤은 마비되었다. 다섯 달이 지난 지금도 검지손가락에는 감각이 없다. 목 부상의 결과치고는 희한하기는하지만, 내 부상은 작으나마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여러 의사가 혀를끌끌 차며 부상을 살피고는 「케 수에르테! 케수에르테!」" 하고중얼거리곤 하였다. 한 의사는 아주 권위 있는 태도로 총알이<약 1밀리미터 정도〉 동맥을 벗어났다고 말했다. 그 의사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 P249
내가 바르셀로나에 머물러 있던 마지막 몇 주일 동안, 그곳에는 독특하고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의심, 공포, 불안,감추어진 증오의 분위기였다. 오월 전투는 지울 수 없는 후유증을남겼다. 카발례로 정권의 붕괴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확고하게정권을 잡았다. 치안 책임은 공산주의자 각료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 즉시 정적들을 숙청해 버릴 것임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진행될지 상상도 할 수없었다. 그런데도 늘 막연한 위기감을 느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눈앞에 닥쳤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음모와 아무 관계가없는 사람이라도 꼭 음모에 가담한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강요하는 분위기였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카페 구석 자리에서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면서 혹시 옆에 앉은 사람이 경찰첩자가 아닌가 의심하는 일뿐인 것 같았다. - P250
당시의 악몽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늘 바뀌는 소문으로 인한 불안감, 검열당하는 신문과 사라지지 않는 무장 병력으로 인한 불안감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 불안감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당시 분위기에 걸맞는상황이 현재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아직 정치적 불관용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물론 영국에도 사소한정치적 박해는 존재한다. 만일 내가 광부라면 사장에게 공산주의자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훌륭한정당인〉, 즉 대륙 정치에 등장하는 폭력배나 하수인 같은 인간들은 드물며,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숙청>하거나 〈제거〉한다는 생각은 아직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권좌에 올랐다.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이위험에 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254
그 마지막 여행의 세세한 내용들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나는 그전 몇 달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좀더관찰을 하려는 태도였다. 나는 제대증을 받았다. 29사단 직인이찍혀 있었다. 〈무능〉이라고 적힌 의사의 증명서도 받았다. 이제마음대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제 비로소 스페인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바르바스트로에서 하루를 지체했다. 기차가 하루에 한번밖에없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잠깐 지나가면서 바르바스트로를 본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전쟁의 일부로 보아 넘겼던 것 같다. 곳곳에 진창이 널린 잿빛의 차가운 곳. 굉음을 내는 트럭과 초라한 병사들이 가득한 곳. 그런데 이제는 묘하게도 달라 보였다. 나는 바르바스트로를 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발견하였다. - P260
꼬불꼬불하고 재미있는 거리, 오래된 돌다리, 사람 키 높이의 커다란 술통이 즐비한 포도주 가게, 사람들이 수레바퀴, 단검, 나무 숟가락, 염소가죽 물통을 만들고 있는 재미있는 반지하 상점들. 나는 염소가죽으로 물통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주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털을 없애지 않고 털이 있는 부분을 안쪽으로 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물통으로 물을 마시면 염소털에 의해 불순물이 걸러진 물을 마시는 셈이었다. 나는몇 달 동안 염소 물통으로 물을 마시면서도 그것을 몰랐다. 바르바스트로 뒤쪽으로는 옥빛의 얕은 강이 흘렀다. 강변에는 수직의 바위 절벽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바위를 파서 집을 지어놓았다. 따라서 침실 창문에서 침을 뱉으면 수십 미터 아래 강물로 떨어졌다. - P260
레리다에는 곧 부서질 것 같은 낡은 건물들의 처마장식 위에 수없이 많은 제비들이 둥지를 틀었다. 조금 떨어진곳에서 보면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장식물처럼 보였다. 어떻게지난 여섯 달 동안 그런 것을 보지 못했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제대증을 호주머니에 넣자 다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관광객이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거의 처음으로 내가 오랫동안 가보고 싶어하던 나라 스페인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리다와바르바스트로의 조용한 뒷골목에서 나는 잠깐이나마 모든 사람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아득한 소문과 같은 나라 스페인을 본것 같았다. 하얗고 뾰족뾰족한 산맥, 염소지기,종교재판을 하던 지하감옥, 무어인의 궁전, 꾸불꾸불 줄지어 가는 검은 노새, 잿빛의 올리브나무와 레몬숲, 머리에서 어깨까지 검은 베일을 덮어쓴 처녀들, 말라가와 알리깐떼의 포도주, 성당,추기경, 투우,집시,세레칸테. 간단히 말해 이것이 스페인이었다. - P261
유럽국들 가운데 나의 상상력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았던 나라였다.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어지러운 전쟁의 와중인데다가 계절도 겨울인지라 이 북쪽 한 귀퉁이만 보게 된 것이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갔을 때는 시간이 늦었다. 택시가 없었다. 마우린 요양소는 시 경계선 바로 너머에 있었지만 거기까지 갈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콘티넨털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저녁을 먹었다. 아버지와 같은 풍모를 지닌 웨이터와 떡갈나무로 만든 물병에 대해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그 식당에서는 구리를 감은 떡갈나무 병에 포도주를 담아왔다. 나는 그것을 하나사서 영국에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 P261
그러나 왜 사람들을 체포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통일노동자당의 불법화는 확실한 소급 효과를 가지는 것 같았다. 통일노동자당은 이제 불법이다, 따라서 과거에거기에 소속되었던 사람들도 현재의 법을 어기고 있는 셈이었다. 늘 그렇듯이 체포된 사람들은 정식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발렌시아의 공산주의 계열 신문들은 엄청난 <파시스트음모〉에 대한 기사로 열을 올렸다. 적과 무전으로 내통을 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서명한 문서를 주고받았다는 등등의 이야기였다. 전에도 이미 접해본 적이 있는 기사였다. 중요한 점은 그 기사가 오직 발렌시아 신문들에만 실렸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신문에는 공산주의 계열이든, 무정부주의 계열이든, 공화주의 계열이든 상관없이 <파시스트 음모> 기사나 통일노동자당 불법화에 대한 기사가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아마 내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에 대한 혐의의 성격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스페인 신문이 아니라하루 이틀 뒤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영국 신문들을 통해서였다. - P264
나는 줄곧 되뇌었다. 왜 나를잡아간단 말이야?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나는 통일노동자당의당원도 아닌데. 물론 나도 5월 시가전 때 무기를 소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 무기를 소지한 사람은 대략 4, 5천 명은 될 터였다. 게다가 나는 극도로 수면이 부족한 상태였다.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내 말을들어주지 않았다. 아내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범죄자 검거가 아니다. 단지 공포 정치일 뿐이다. 당신은 어떤 특정 범죄를 저지른것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는 죄를 지었다. 당신이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 복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옥에 갈 만한 죄가된다. 법을 지키기만 하면 안전할 거라는 영국식 사고 방식에매달려봤자 소용없다. 법은 경찰이 마음먹는 대로 만들어졌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몸을 숨기고 통일노동자당과 관계되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다. 우리는 호주머니에 있는 서류를 뒤졌다. - P270
우리는 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밤이면 추적당하는 도망자신세였지만, 낮에는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통일노동자당 지지자들을 숨겨준다고 알려진 항구의 모든 집은 감시를 당했다. 어쨌든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호텔이나 하숙집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호텔 주인은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즉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포고를 내렸기 때문이다. 결국 한데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큰 도시였기 때문에 낮에는 상당히 안전한 편이었다. 거리에는 치안대원, 돌격대원, 단총부대, 일반 경찰관들이 우글거렸다. 그외에도 사복을 입은 첩자들은 또 오죽 많았을까. - P274
그들 가운데 혹 내가 경찰에서 <수배 중인 사람임을 눈치챈 사람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행동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독일인과 공개적으로 악수하는 것과 같았다. 아마 그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파시스트의 첩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악수까지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일을 기록하는 것은, 그것이 왠지 스페인적인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최악의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스페인 사람들의 아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페인에 대해서 매우 나쁜 기억들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스페인 사람에게 정말로 화를 낸 기억은 두 번밖에 안된다. 그 두 번도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관대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들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다. 이 점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견딜 만한 형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 P285
결국 우리는 무사히 국경을 건넜다. 기차에는 일등칸도 있었고 식당칸도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카탈로니아에는 최근까지도 기차의 등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사두 명이 기차를 돌아다니며 외국인들 이름을 적었다. 그러나 우리는 식당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품위 있는 사람들이라고 안심한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지배하던 여섯 달 전만 해도 프롤레타리아처럼 보여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페르피냥에서 스페인의 세르베레로 가는 도중에 같은 칸에 탄 한 프랑스 상인이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런 차림으로 스페인에 들어가면 안 되오. 칼라와 타이를 떼시오. 바르셀로나에 가면 그곳 사람들이 그것을 떼어버릴 것이오」그의 말은 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카탈로니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났다. 국경에서는 무정부주의자 경비병이 옷을 잘 차려입은 프랑스인 부부를 돌려보내기도 했다. - P291
그런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부르주아처럼 보이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여권 심사자들은 용의자 명단에 우리 이름이 올라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경찰의 비효율성 때문에 우리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맥네어의 이름조차 없었다. 우리는 머리에서발끝까지 수색을 당했지만 범죄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나오지않았다. 예외라면 내 제대증 정도였다. 그러나 나를 수색한 단총부대들은 29사단이 통일노동자당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덕분에 우리는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꼭 여섯 달만에나는 다시 프랑스 땅을 밟았다. 스페인에서 가지고 나온 기념품은 염소가죽 물통과 아라곤의 농민이 올리브 기름을 태우는 데 쓰는 아주 작은 쇠등잔뿐이었다. - P291
우리는 바니월에 사흘 있었다. 이상하게도 불안정한 시간이었다. 폭탄, 기관총,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늘어선 줄, 선전, 음모 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한적한 어촌에서 우리는 깊은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껴야 마땅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스페인과의 거리는 멀어졌을지만, 스페인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들이 뒤로 물러나 적당한 비율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쏜살같이 우리 뒤를 덮쳐, 모든 것이 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페인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꿈을 꾸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스페인에서 나가면> 지중해 근처의 어딘가로 가서 한동안 조용히 지내며 낚시라도 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막상 그런곳에 오니 따분함과 실망뿐이었다. 날씨는 쌀쌀했다. 바다로부터 끈질기게 바람이 불어왔다. 물은 탁하고 물결은 거칠었다. 항구 둘레를 따라 재, 코르크, 생선 내장이 더껑이를 이루어돌에 부딪히고 있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아니 오히려 누군가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해도, 우리 둘 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투옥된 상태이기를 바랐다. - P293
외적인 사건들은 약간씩 기록을했지만, 그 사건들이 나에게 남긴 느낌은 기록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글로는 전달할 수 없는 광경이나 냄새, 소리와 뒤섞여 있다. 참호의 냄새, 가없이 뻗어나가는 서광, 땅땅거리는싸늘한 총소리, 폭탄의 굉음과 섬광. 지난 12월, 사람들이 아직 혁명을 믿고 있던 시절의 바르셀로나를 찾은 아침의 맑고 차가운 빛, 병영 연병장에서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음식을 사기 위한 줄과 검붉은 깃발과 스페인 의용군 병사들의 얼굴. 무엇보다도 스페인 병사들의 얼굴. 전선에서 만났지만 이제는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르는 사람들.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불구가 되고, 일부는 투옥되었겠지. 바라건대 그들 모두가 여전히 안전하기를, 그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들이 전쟁에서이겨 독일인,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할 것 없이 모든 외국인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역할에 무력함을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 P294
모두가 부담스런 생활비와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스페인에 갔다 오니 파리마저도 기운차게 번창하는 도시로 보였다. 박람회도 한창 활기를 띠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그곳을 찾지않았지만. 이어 다시 영국으로 왔다. 영국 남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산뜻한 풍경을 지닌 고장일 것이다. 그쪽을 지날 때, 특히임항 열차의 편안한 쿠션 위에 앉아 평화롭게 배 멀미로부터 회복되고 있을 때는,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 도시는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 P295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가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제복의 경찰관,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 P296
옮긴이의 말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자신의 『카탈로니아찬가가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책이라고 말했다(민음사 간행[동물농장』에 수록되어 있는 「나는 왜 쓰는가」참조). 물론 이 발언은 발언 이태 전에 나왔던 『동물농장』―― 우화적으로 에둘러간 정치 이야기에 비해 그렇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작가 스스로도 꺼림칙하면서도 결국 정당화할 수밖에 없었던 한 장(章)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는 뜻일 수도있다. 오웰은 이 <신문 기사 등을 인용한 긴 장><본 번역본에서는 11장)은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비난을 받은 트로츠키파를 변호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지만, <일이 년 시간이 지나면 보통독자들로선 흥미를 느끼지 못할 이런 장이 거기 끼어 있다는 것은 책을 망칠 것이 분명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트로츠키파의 억울함으로 인한 분노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예 그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오웰로서는 그 장을 생략할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 - P297
오웰은 이런 갈등에서 선택권을 슬며시 독자에게 넘긴다. 독자가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관심이 없다면 빼고 읽어도 좋다고허락해 준 것이다. 5장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오는데, 판본에따라서는 오웰의 말을 확대 해석하여 아예 5장과 11장을 부록으로 돌린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본 번역본이 원본으로 삼은, 1987년에 간행된 미국 하코트 브레이스사의 판본은 두 장을모두 본문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번역본 역시, 오웰의 책이 나오고 나서 두 세대가 지난 뒤에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간행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장 모두 본문에 포함시켰다. 그렇게 한 데에는 오웰의 <정치적> 의도를 존중해 주자는 의도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으로, 오웰이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독자가함께 경험해 나가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 P298
오웰은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애초에 왜 스페인으로 갔으며, 왜외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있었길래 스스로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긴 <정치적인〉 장을 쓰게되었을까? 오웰은 어떤 면에서는 시원시원하고 직선적인 작가이니만큼 이런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간단하고 추상적인 답을내놓기도 하지만(『카탈로니아 찬가』내에서 또는 「나는 왜 쓰는가」같은 답변서에서), 그 답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것이 옮긴이의 생각이다. 그런 간단하고 추상적인 답으로 만족할 독자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답이 가능했다면『카탈로니아 찬가』같은 분량의 책을 쓸 필요도 없지 않았겠는가.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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