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9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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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곽효환

   모래언덕아래

   '바람아래'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부터

   해무는 점점 짙어가고

   방포항 지나 꽃지다리 너머로

   시커멓게 아랫도리를 드러낸

   작은 섬, 둘

   물결 따라 바람결 따라

   점점 뿌옇게 얼굴 흐리는

   여름 같은 봄날 혹은 봄 닮은 여름날

   해마다 느는 건 주름과 약력뿐이라는

   늘 당당하기만 한 그들을 뒤로하고

   내내 말없이 걷는

   이 길 끝에 성돌 두른 담집이 있을 것 같다

   그 집 돌담에 기대어

   성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나를 떠받쳐온 아랫도리 같은 이력을 멈춰 세우고

   생략 없이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모래 더미로 바다 안개로 다 덮어버리고 싶다

   꽃지섬 밑동에 물이 차고

   곧게 뻗은 해송 숲 아래로부터 초록이 오른다

   시집[지도에 없는 집] 중에서

   역마에 발을 맡기던 시절, '바람아래'에 간 적이 있었다.

   안면도 영목항을 향해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도 늙었고 자리를 차지한 승객들도 비슷한,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 추석을 앞둔 조금은 붐비는 그런 초가을 오후였다. 구불구불한 비포장길을 버스는 바쁠 것 없는 나그네의 심사를 알았는지 느릿느릿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달려갔다. '꽃지'를 지난 어느 모퉁이, '바람아래해수욕장'나무 팻말이 바람 속에서 칠을 벗겨가며 서 있었다. '바람아래'가 마음을 붙잡았다. 급하게 내리겠다고 소리치자 모든 승객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내렸다.

   텅 빈 '바람아래 '.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모래언덕과 모래를 흔드는 바람, 그리고 멀리 바다가 비현실적으로 놓여있었다. 황량했다. 붐비던 사람들이 빠져나간 철 지난 해수욕장 같은 쓸쓸함조차 없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바람이 모래를 희롱하여 만들었음직한 풍경만이 존재했다.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면 사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에 각인된 '바람아래'를 시에서 만난다. 많이 다르고, 많이 비슷한 바람의 '아랫도리' 그 쓸쓸한 서정이 '내내 말없이 걷는' 걸음을 붙잡는다. 마지막 연의 '밑동에 물이 차고' '아래로부터 초록이 오른다'에도 불구하고 쓸쓸하다. 이 시는 쓸쓸하다. '바람아래'만큼이나 쓸쓸하다.

   그 후로 다시는 가보지 못한, 갔다 해도 다시는 그때를 만나지 못할 내 안의 풍경,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바람아래'. 나는 그런 '바람아래'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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