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을 적시며 창비시선 342
이상국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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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

      이상국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바위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

  나는 지난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

  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틈

                           

                   시집 [뿔을 적시며] 중에서

 

 

 

  '틈'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를 안다. (안다,고 쓴 순간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다. 생애를 통틀어 10번 미만쯤 만났을 뿐이고, 마지막으로 본 지도 5년은 지났을 것이고, 어쩌다 하는 메신저도 이년 전인 것 같으니)

  그러나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틈'님일 것 같다.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려고 '틈'을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무조건 이 시를 읽으면 '틈'이 떠오른다. 사진, 연두, 볕, 홍대, 솔, 울산, 일산, 밥, 1963형, 관철동옹, 다미, 처용단장, 네이버 블로그... 등등.

  지나온 한 시절의 들뜸과 설렘이 빠듯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비 그친 오월 이 일의 오늘 아침처럼 찬란한 색채와 밝음으로 응달진 마음 한편에 '틈'을 내준다.

  고만고만하게 잘 지내시리라 믿는다. 언제나 그리운 것들은 멀리 있지만, 살다 보면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날도 오리라는 것을 '틈'도 '산'도 알고 있다.

 

 

  그래도 용산,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빼어난 박소란 시인의 [용산을 추억함]도.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 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찬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꿈이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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