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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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줍니다.

                    허난설헌의 무덤

           ······.

   오늘 새벽 일찍이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무덤을 찾아나섰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자욱한 새벽 안개 속을 물어 물어 찾아왔습니다.

   오죽헌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무덤은 우리의 상투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판단에서 한 발 물러나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낸 결론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도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가운 시비(詩碑)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음으로써 대리현실을 창조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아니라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마저 '상품'이라는 교환가치형태로 갖도록 강요되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아픔과 비극의 화신인 난설헌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집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단단한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디즈니랜드에 살고 있는 디오니소스처럼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신격의 숭배를 받는 완강한 장벽 앞에서 작은 비극 하나에도 힘겨워하는 당신의 좌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 앞에 냉수 떠놓고 소지 올려 넋을 부르며 "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새없이 귓전을 할키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돌베개 1996)

 

 

  송하곡적갑산 (送荷谷謫甲山)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함경도길 가시느라 발걸음도 마음도 바빠보이네

  쫓겨나는 신하는 가태부 같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 회왕이리오

  강물은 가을언덕으로 잔잔히 흐르고

  변방의 구름은 석양에 물드는데

  서릿바람 불어 기러기떼 날아가지만

  중간이 끊어져 형렬을 못이루네

 

  遠謫甲山客, 咸原行色忙.

  臣同賈太傅, 主豈楚懷王.

  河水平秋岸, 關雲欲夕陽.

  霜風吹雁去, 中斷不成行.

 

  * 이 시는 허난설헌의 시로, 그의 둘째 오빠 허봉이 갑산으로 유배당할 때 오빠를 떠나보내며 열네 살의 나이에 썼다. 허난설헌은 이 시에서 오빠 허봉을 중국 전한 시대의 가태부가 억울하게 장사(長沙)로 귀양갔던 고사와 비교한다. 또한 중국 전국시대의 회왕이 바른 말 잘하는 삼려대부 굴원을 미워했던 사실을 상기하며, 우리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 회왕과 같겠냐고 은근하게 물러서지만 이 시의 행간 안에는 이미 두 임금을 비교했다고 보아야 한다.


  자식을 곡하며 (哭子)


  지난해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 일고

  소나무 숲엔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태워서 너희 혼을 부르고

  네 무덤에 맑은 술을 올린다

  그래 안다 너희 남매의 혼이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

  비록 뱃속에 아이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는가

  하염없이 슬픔의 노래 부르며

  피눈물 나는 슬픈 울음 삼키고 있네


  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哀哀廣陵土, 雙墳相對起.

  蕭蕭白楊風, 鬼火明松楸.

  紙錢招女魂, 玄酒尊汝丘.

  應知弟兄魂, 夜夜相追遊.

  縱有服中孩, 安可冀長成.

  浪吟黃臺詞, 血泣悲呑聲.


  * 허난설헌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내보였다. 그러나 열 다섯에 시집을 간 후 세 자식을 잃고 가정적으로는 불행했다. 천여 수의 시를 지었으나 대부분 유언에 따라 불태워졌는데 동생인 허균이 스스로 암송하고 있던 시와 외가에 남아있던 누이의 시를 묶어 허난설헌집을 엮었다. 마침 명나라 사신으로 온 오명제를 맞이할 사람으로 선조가 허균을 보냈는데 중국의 문장가인 오명제가 조선의 시선을 부탁하자 허균이 우리나라의 시들을 뽑아서 엮었고 누이의 시를 모은 허난설헌집도 주었다. 이것이 중국에 전해져 허난설헌은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심지어는 중국의 시선 이백에 견줄만하다는 평까지 듣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더욱 강고해진 유교 가부장제에 치여 홀대받았다.

 

 

  견흥 5 (遣興 五)


  근래에 최경창이나 백광훈 같은 이들은

  성당의 법을 삼아 시를 익혔네

  적막하기만 했던 시의 올바른 소리가

  이들을 만나서야 쩡쩡 울렸네

  낮은 벼슬 광록에 곤궁하고

  변두리 촌 벼슬살이에 화근을 사

  나이도 지위도 함께 시들어가니

  이제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믿는다


  近者崔白輩, 攻詩軌盛唐.

  寥寥大雅音, 得此復鏗鏘.

  下僚困光祿, 邊郡愁積薪.

  年位共零落, 始信詩窮人.

 

  * 최경창이나 백광훈 같은 시인은 시로서는 으뜸이지만 사는 모습은 궁벽하다고 읊었다. 시골의 낮은 벼슬살이에 시들어가는 시인의 모습, 그러나 그들의 시만은 누가 보아도 쟁쟁하니 훌륭한 문학은 지난한 삶을 양분으로 삼아 꽃을 피우는 것일까?



  *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1589)

조선 중기 시인.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허균의 누이이다.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짓는 등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이달에게 시를 배웠고, 15세 무렵 김성립과 결혼하여 27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동생 허균이 명(明)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준 <난설헌집>은 중국에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1711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 시, 해설; '허난설헌 평전' (박혜숙 지음, 건국대학교 출판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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