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바닥 위의 숲

                             김태정

   꽃이삭을 늘어뜨린 상수리

   열푸름한 꽃을 피운 회잎나무

   흰꽃 잔조롬한 덜꿩나무

   연보랏빛 물이 빠진 현호색

   그 옆의 작은 개별꽃 노란 금붓꽃

   부질없는 세간의 말로나마

   이 숲의 삶들을 손바닥에 받아적고 나니

   손바닥은 또 하나의 숲을 이루었습니다

   뒷모습을 불러 세우는 듯한 휘이, 휘요호

   새초롬하니 토라진 삐친삐친삐친

   어눌한 날 놀리는 쥬비디쥬비디쥬비디

   오래된 흉터를 쪼아대는 쑤잇쑤잇쑤잇

   넋과 바람을 부르는 휘휘휘요 휘용휘용휘용

   그리고, 산밑 길을 돌아 내게로 오는

   물소리 바람소리

   이 숲이 부르는 진혼가를

   손바닥에 받아적고 나니

   당신께 보낼 말이 달리 없습니다

   쉰 목청으로 우는 산꿩의 간절함과

   불러도 불러도 허공으로나 되돌아오는

   수취인불명의 메아리와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남긴 물의 발자국과······

   그 모든 간절함과 추억을 받아적고 나니

   당신께 보낼 전언이 달리 없어

   흐르는 물에 가만히 저들을 띄워보냅니다

   흙으로 누워 상수리가 되고

   현호색 금붓꽃 박새 후투티가 되고

   물소리 바람소리가 되어

   내 손바닥 위 숲으로 돌아오는 당신

   빗돌 아래 제비꽃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향기로

   당신께 타전하는데

   오늘밤 달은 없고

   이름만 덩두렷한 망월에서

   솟 솟쩍, 쓴 울음 삼키는 소리까지 적고나니

   당신께 보낼 것은 단지 슬픔밖에 없어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맙니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중에서

 

   시는 문사철과 마찬가지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어는 그 언어의 개념적 의미를 뛰어넘는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처럼 일종의 메타언어(meta language)다. 예를 들어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말하는 '연탄재'는 자기를 아낌없이 불태운 사람의 초상이다.[담론,26]  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2013)을 보면 시인에 관한 설명이 있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8쪽) 시인은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야 한다. 언어의 지시적 의미, 일반적 의미를 '살해'하지 못한다면 시인이라 할 수 없다. 【신영복 평전, p268】

   쇠귀는 "사실성과 사회미에 충실하되 사실 자체에 갇히지 않는 것"[담론,32]을 시적 관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시는 언어의 한계, 문학 서사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 현실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고 글로 쓰는 것은 시공과 감각의 한계 속에서 건져 낸 사실의 조각들(facts)에 불과하다. '진실'은 건져 낸 사실이나 언어 너머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실을 진실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머를 볼 수 있는 고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시는 문학 서사 양식을 뛰어넘는 인식틀이다.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하면 시적인 틀에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그것을 설약(說約)이라고 했다. 시는 설약의 전형이다.[담론,57~58] 사물과 세상에 대한 유연한 시적 사유는 우리의 인식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확장할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쇠귀의 생각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시는 시를 만드는 사람 스스로도 감동할 수 있는 진정성의 공감이 있어야 한다. [담론,32]    【신영복 평전,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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