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역시나 그의 책은 무겁지만 지루하지 않고, 감각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지적욕구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지금이 두번째 읽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궁금해서(물론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아니, 이전에는 어렵기만 하던 것이 이해가 되니 더 흥미진진했다.

사실,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 중에 제일 접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바로 그 건드리기 어려운 요한계시록을 이용해서 이 책을 엮어나간다.

 

요한계시록에서의 예언대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따라가면서 발생하는 또 다른 축인 이단 논쟁과 황제와 교황의 알력싸움, 종파간의 싸움과 마녀사냥 등의 이론 논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다같이 믿는 여호와이며 예수님이되 그들이 해석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제각기 다르니...

예수님과 사도들이 걸친 옷을, 먹고 마신 것들을 재산으로서의 소유로 보느냐, 잠시 이 세상의 것을 빌려 쓰는 소비재로서의 소유로 보느냐가 뭐가 그리도 중요한 것인지...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

교묘한 말놀림 속에 숨어있는 광기어린 매카시즘이 만연하던 중세시대에서 마을여자를 마녀로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쉽다. 가난한 처녀를 마녀로 만들어가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단논쟁은 꽤 흥미가 있었다.

윌리엄수도사의 '진리의 수호자인 교회가 이단을 규정할 수는 있으나 교회가 이단자를 처벌해서는 안된다. 제왕은 이단자의 행위가 국가의 안위를 위협했을 경우에만 이단자를 처결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이 시기가 암울하고, 무서웠던 것은, 종교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이며, 그 애매모호한 이단 논쟁으로 인해 수많은 자들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종교중심으로 사회가 유지되는 곳도 있지만, 내가 사는 이 곳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상당히 다행이다 --이렇게 말하다가 벌 받는 것은 아닌지....

 

여자는 남자의 영혼을 유린하는 데 능하니 아무리 강한 자라도 여기에서는 폐허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여호와께서 성경에 이런 글을 쓰셨다니 섭섭할 따름이다. 그 어두운 세상에서는 여자의 존재가 저러했으니, 그 시대에 살지 않았음을 감사라도 해야겠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중략>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고서와 성전등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는 그 결말의 끝은 그렇게 지나친 믿음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왔으니 윌리엄수도사처럼 나 역시도 허망한 마음이 든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1장2~4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 책을 다 읽고 느낀 감정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는지....

좋아하는 시 중에 "까막눈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서운 법. 한 눈으로 보지 말고 두 눈 겨누어 살아야 한다. 깊은 산 속 키 큰 나무 곁에 혼자 서 있어도 화안한 자작나무같이. 내 아들아 그늘에서 더욱 빛나는 얼굴이어야 한다"...

그렇게 치우지지 않게, 화안한 자작나무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쩜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장미의 이름을 읽고나서 아직까지 다른 책을 집어들지 못하고 있다. 감동과 여운이 오래 남아서 아직은 다른 책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 작가는 장미의 이름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장미의 아름다운 실체는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본질은 보지 못한 채 사소한 것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그리는 제목일까?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속죄양 되신 참 뜻은 기억하지 못하고,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구절에만 매달려 예수님의 얼굴을 더럽히는 것에 대한 내용인지... 그래서 장미의 이름이라 붙였는지...제목이 주는 의미가 참...유추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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