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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ㅣ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평점 : 
사람들의 생각은 거개가 비슷한 모양이다. 나도, 이 책을 읽고 쓴 리뷰들을 읽어보아도, 또 내 짝꿍도 책 제목을 보자마자 어느 곳의 털을 지칭하는 것일까를 헤어려본다.
5-3-3 이 강요된 오정고에서 범생이 송일호는 자발적인 3-3-3의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단정한 머리모양만이 학생이 갖춰야 할 첫번째 덕목쯤으로 여기는, 그래서 오삼삼의 규정을 어길 시에는 가차없이 바리캉을 들이대는 그 곳에서 일호의 머리모양은 모든 학생이 추구해야할 이상 - 학교의 기준에서 본다면, 물론 학생의 기준에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스타일중의 하나일 것 -이다. 일호는 공부잘하고 용모단정한,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학생이지만, 일호는 그게 웬지 불편하다. 두발자유를 원하는 친구들의 공공의 적이 된 것 같고, 선생님의 칭찬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화끈거린다. 왜? 일호는 열 일곱이니까.
어느날 일호는 드디어 일을 낸다. 일이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그저 머리모양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걸 참을 수 없어서 그랬을까?
참, 일호의 가족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하늘나라가 아닌 이세상 저세상을 20년째 여행중인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이다. 일호는 정말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줄 알았다.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의 부재때문에 일호는 일찍 철이 들었고, 엄격한 할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는 산으로 알고 살았다. 그런데, 일호가 사고친 그날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정말로 여.행.중.이.었.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서먹함이라니. 아니 아버지와 엄마의 그 서먹함이라니.
열일곱의 우직한 일호에 우리집 G군을 대입하면서 읽었다. '아, 정말 열일곱이란 이런 나이구나' 책 속 구절구절에서 확인하게 된다. 음, 그 나이의 고민과 그 나이또래의 우정을 엿본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싫었지만 할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어서 333의 머리모양을 한 것 뿐인데, 그 모습이 선생에게 잘보이기 위한 비굴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게 싫었을 그 나이또래의 모습을 본다. 공부만 하는 공부벌레들이 아닌 열일곱의 더벅머리에 여드름 덕지덕지인 얼굴도 천진한, 순수한 얼굴을 본다. 두발자유화가 언제인데 아직도 엄격하게 두발을 엄격히 제한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교라는 곳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도 예전에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을 때마다, 공부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을 때마다, '나중에 엄마가 되면 절대로 절대로 아이들에게 잔소리하지 않는, 공부하라는 소리하지 않는 엄마가 되어야지' 다짐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오늘도 우리집 Y양과 G군에게 끝도 없는 잔소리와 꾸중을 한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므로. 윽박지르지 않고 아이의 말을 전부 존중해 줄 수는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러나 매일을 살아야하는 현실에선 여러 말보다 한 번의 따끔한 혼냄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그걸 인정하는 내 모습에서 이미 기성세대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도, 일호네 학교의 선생님들은 좀 많이 도가 지나치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요즘도 그런 학교가 설마 있을까?
<책에서>
자유를 망각한 아빠들의 전근대적인 헤어스타일이야말로 우리가 타파해야 할 적이다. 안그러냐? <p.10>
아버지들은 자신의 충실했던 어린 양들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세상을 이끌고 갈 건실한 어른이 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p.13>
나도 나를 태우다 지칠 때 대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게 될 거야. 열일곱 살, 나도 금기를 넘어서 세상과 맞서 나를 태울 날이 올지 몰라. <p.16>
"아무도 너늘 얕잡아 보게 해선 안 돼. 싫은 건 싫다고 해. 네가 하기 싫은 건 절대로 하지 마. 아주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렇지만, 나는 물컹했다. 풍선으로 치자면 바람이 빠져 튀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철퍼덕 퍼져 있는 물컹거리는 풍선. 내 몸 한구석에 비워 둔 아버지의 자리로 바람이 새어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p.44>
나는 왜 이렇게 힘 조절이 안 되는 걸까. 나는 너무 물컹하거나 너무 단단하다. <p.46>
"집에 있는 아버라고 나을 거 없어. 아버지들은 말야, 집에는 껍데기만 남겨 놓고 다 집 밖에서 떠돌거든." <p.83>
"보석은 오랜 세월을 거쳐 비로소 제 빛을 만들어 낸다더라. 멋지지 않냐? 사람도 말야, 보석처럼 세월에 깎이고 닳으면서 제 빛을 찾아가는 것 같아."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