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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원제가 무엇일까 궁금해하면서 책을 읽었다. "이런 사랑"이라,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는데 "Enduring Love"이다. 어딘지 허전하다. 차라리 '이런 사랑'이 더 책에 어울린다.
이언 매큐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과학저술가인 조와 키츠를 연구하는 교수 클라리사와의 사랑, 조를 극단적으로 사랑하는 제드 패리의 사랑이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사고하는 조와 아이를 낳을 수 없지만-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 클라리사는 7년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이 둘이 어느날 피크닉을 나선다. 행복한 피크닉 장소에 고장난 열기구가 등장한다. 바구니 안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조를 비롯한 남자들이 풍선의 줄을 잡아당기지만, 공교롭게 불어온 돌풍으로 하늘로 붕 뜨게 된 그 시점에서 그들은 '우리'보다는 '나'를 택하게 되고 맨 마지막까지 줄에 매달렸던 사람은 줄에서 떨어져 사망하게 된다. 그 사망현장에서 조와 패리는 마주친다. 패리는 조를 만난 순간부터 사랑을 하게 된다.
마침내 나는 깨어났어요. 사랑 덕분에 나는 이처럼 살아 있음을 느끼고 이처럼 예민해집니다. <p.137>
패리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막무가내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조의 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시이니 그 분께 인도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조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전화하고, 편지하고, 조의 손짓하나에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 낼 수 있다고 믿는 조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폭력적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한 집착이다.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무서운 사랑이다. 이름하여 "드 클레랑보 신드롬".
내 사랑은 단단하고 격렬하며 '아니오'란 답을 받아들이지 않을겁니다. 내 사랑은 꾸준히 당신을 향해 나아가서 당신을 소유하고 인도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사랑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당신의 운명입니다. 당신의 부정과 거부와 논문과 책은 모두 지친 어린 아이의 작은 발길질입니다. 이건 시간문제일뿐이고 때가 되면 당신은 고마워할 겁니다. ... 내게 당신의 분노와 쓰라림을 보여 줘요. 난 상관없어요. 난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말아줘요. <p.192~195>
영원할 것 같던 조와 클라리사와의 사랑은 열기구 사건으로 인해, 아니 패리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같은, 온통 패리에게 집중되어 있고, 불안해하는 조의 모습을 클라리사가 견디지 못하면서 서서히 금이 간다.
가끔 신문에서 접하는,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스토커로 인해 사랑도 인간관계도 깨질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조와 클라리사의 사이에서 확인하게 된다. 조와 클라리사도 그 수순을 밟고 있다.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어쩌다 서로 다른 정신적 우주에 놓이게 된 것뿐이고 그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게 다다. 상황은 바뀔 테니 지금 한순간의 기분이 시키는 대로 섣불리 여기서 의미를 끌어낼 이유는 없다. <p.118>
우리 피부 점막 사이에 작은 먼지나 티끌이,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면서도 해변의 모래처럼 손으로 만져지는 무언가가 끼어 있는 것만 같았다. <p.145>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조와 클라리사의 사랑. 그들은 결국 위기를 극복한다. 7년을 이어온 사랑이 쉽게- 아니 쉬운 것은 아니었을지도 - 끝날 수도 있었다. 조가 패리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패리의 일방적인, 위협적인 사랑만으로도 '조와 클라리사의 사랑'이 쉽게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사랑이 대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영원한 사랑은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지도.
패리의 그 이상한 신념. 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확신,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해도 받아들여지 않는 그 벽. 그게 무섭다.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청년 패리. 그는 우울했고, 외로웠고, 사랑을 몰랐으며, 친구도 없었다. 물론 그가 그토록 외치던 하느님의 사랑도 따지고 보면, 그가 창조해 낸 신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은 아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이언 매큐언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어떻게 제대로 믿어야 되는가? 그리고, 이렇게 잘못 입력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후~ 책을 읽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런 사랑'.... 이런 지독한 사랑의 패리는 여전히 갇혀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조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가엾은 조가 헤쳐나올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사랑,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의 우울한 결말을 보면 늘, 지금의 내 부모노릇을 뒤돌아보게 된다. 언제나 문제는 사랑받지 못한 존재였다는 데 있다.
<책에서>
마치 방 안에 함께 있는 사람 하나가 감정이란 감정은 모두 독차지하고 있을 때 그러하듯, 난 공허하고 무감각한 중립 상태에 빠진 느낌이있다. <p.159>
진의 슬픔을 보자, 나 자신의 상황은 복잡할 것 없는 원소들로, 단순한 분별력만으로 정리되는 주기율표로 바뀌었다. 사랑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안다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법. 당신도 이런 고통을 겪게 되리라. 그러니 돌아가서 사랑을 지키려고 노력하라. 다른 모든 건, 패리도 포함해서, 다 대수롭지 않을 뿐. <p.160>
나는 아이들을 만날 때면 불안감을 애써 감춰야 한다. 그들의 눈을 통해 난 나 자신을 본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그때 그들은 늙다리 패거리로 보였다. 퍼질러 앉아 있는 걸 너무 좋아하고, 쓸데없는 잡담을 너무 즐기며, 그 무엇도 갈망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 나의 부모님, 부모님의 친구들, 삼촌과 고모들, 다들 저 멀리 있는 더 중요한 사람들의 더 중요한 일에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물론 그건 아이의 편협한 시각에 불과했다.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