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너무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p.12~13

 

만약 모모가 나에게 물었다면 아마도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고 대답해 줄 수 있었을까? 부모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모모에게.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하밀 할아버지가 모모에게 대답한 것보다 훨씬 가혹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사랑없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럼 인생이, 내 삶이, 내가 너무 가여워지니까.

 

14살 소년 모모(모하메드)는 세상에서 알아야 할 모든 지식들을 여든이 넘은 하밀 할아버지에게서 배운다. 모모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매달 송금되는 돈을 받고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의 7층에서 살고 있다.

하밀 할아버지의 말처럼 어린 나이에는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는게 좋을 일들을 수도 없이 보고 겪으면서 자란다. 로자 아줌마가 아니면 누구도 돌봐줄 이 없는  모모.

 

벌써 몇 년째 모모앞으로 보내오는 돈도 끊어졌고, 유일한 비빌 언덕인 로자 아줌마의 몸은 점점 더 나빠진다. 로자 아줌마마저 없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불안한 생각이 들때마다, 아줌마가 정신을 놓을 때마다 모모는 거리를 쏘다닌다. 

이제 아줌마는 죽음의 문턱 가까이에 와 있고, 정신도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떠날 수 없고, 로자 아줌마는 모모가 떠날까 두렵지만, 모모는 로자 아줌마에게는 모모만이, 모모에게는 로자 아줌마만 있을 뿐이다.

 

아줌마는 모모에게 그들이 자신을 병원에 가둬두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당부를 한다. 모모는 그런 로자 아줌마를 위해 은신처에 힘겹게 데려간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69

 

로자 아줌마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과 로자 아줌마의 둘만의 공간에 다른 사람이 침입할 수 없도록....그리고,  썩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가진 돈을 털어서 향수를 사서 뿌려준다.

 

모모는 늙고 병든, 몇 올의 머리카락만 남은, 코끼리처럼 뚱뚱한, 엉덩이로 빌어먹고 살았던 로자 아줌마가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러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밀 할아버지를 부를 땐, 늘 "하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모. 누군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늘 상기시켜 주려고 애쓰던 모모.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괴로워하던 모모. 정신이 나가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아줌마를 위해 그녀의 아래도 닦아주었던 모모, 썩어가는 로자 아줌마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향수를 뿌려주던 모모,  아줌마를 떠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아줌마를 따라가려 했던 모모....

 

모모 앞에 펼쳐진 삶은 장밋빛처럼 환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아프고, 슬픈 상처투성이의 고달픈 삶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맨 마지막에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이 어떻게 펼쳐지든,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사랑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니 "사랑해야 한다"고.

 

모모의 삶은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니 슬프면서도 슬그머니 미소짓게 된다. 아이의 삶이 가여워서, 아이의 삶이 버거워서, 아이의 외로움이 느껴져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고, 살며시 아이를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웬지 모르게 가슴 한켠 어두운 곳에 햇살 한줄기가 비추는 것 같은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모모처럼 아프고 힘들게 살아온 삶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모모의 삶은 말해주고 있다.

 

[책에서]

 

  처음에 나는 로자 아줌마가 매월 말 받는 우편환 때문에 나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쯤에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그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줄로만 알았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이었다.

-p.10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p.99






 "고통을 서로 나눠 가질 수 있잖아요. 젠장, 다들 그러려고 결혼을 하는 거래요." -p.155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p.252




 그녀는 무척 차분해 보였다. 다만 오줌을 쌌으니 닦아달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p.275




  사랑해야 한다.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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