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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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에 대해 알지 못하던 어린 청년의 말에서 이런 멋진 메타포가 튀어 나온다.

아름답고 한적한 바닷가에 칠레의 유명한 시인 네루다가 산다.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하는 갓 스물을 넘긴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시인을 만나면서 바다에서, 바람에서, 소녀에게서 시를 발견한다.

 

'소녀의 미소는 얼굴에 나비처럼 번지고, 웃음은 한 떨기 장미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며, 홀연 일어나는 은빛파도이다. 청순한 소녀 옆에 누워 있는 것이 새하얀 바닷가에 있을 때처럼 행복하며, 그대의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 하나하나 예찬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다'고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마리오는 시인이 된다.

이렇게 속삭이는데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겠다. 

시가 이렇게 술술 나올 수 있는건가? 나에겐 어려운 시가 마리오에게는 너무 쉽다.

 

소녀의 엄마가 내뱉는 말을 적어보자.

 

'넌 지금 풀잎처럼 촉촉해...강물은 자갈을 휩쓸어 오지만 말은 임신을 몰고 오는 법이야. 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사랑의 열병에 빠진 딸에게 퍼붓는 엄마의 말이 이보다 더 시적일 수 있을까?

 

자신의 딸을 꼬드긴게 네루다의 시라는 것을 알고 소녀의 어머니가 시인에게 따지려고 했을 때, 은근히 네루다는 마리오를 질책한다. 

그러나, 마리오는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라며 항변하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리라.

사랑에 대한 시를 적어 고백하면,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나의 마음이 되는 것...시를 읽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겠지.

 

눈을 경험하지 못한 시인의 표현은 나에겐 생소했다.

내겐 늘 그리움의 대상인 눈이 시인에겐 갑갑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파리는 아름답지. 하지만 내겐 너무 큰 옷이라네. 게다가 여기는 겨울이라 밀가루를 흩날리는 풍차처럼 바람이 눈을 휘날리고 있어. 눈은 쌓이고 쌓여 내 몸으로 기어 오르지. 나를 하얀 도포를 입은 서글픈 왕으로 만들어버려. 벌써 입까지 차올라 입술을 덮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네.'

 

우리의 5~60년대처럼 암울하면서도 격동적이었던 칠레에서 대통령 후보가 된 노벨상 수상자 네루다와 이름 없고 보잘 것 없는 청년의 우정을 그린 이 소설은 아름답고도 아리며, 잔잔하면서도 파도의 풍랑처럼 격하다.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씌여진 이 소설은 작가 스카르메타가 대시인 네루다에게 바치는 오마주이다.

일 포스티노의 원작소설이기도 하다는데, 영화를 봐야겠다.

 

칠레의 바다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되나보다.

마리오보다도 베아트리스의 어머니의 말이 더 인상적이었다.

'침대에서는 대통령이든 신부이든 공산당이든 똑같아... 키스는 불을 일으키는 불꽃이야...." 

크,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시적이란 말이야.

딸과의 말다툼을 시를 인용해가며, 시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이색적이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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