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체 높으신 점잖은 양반이 쓰신 소설이 8선녀와 놀아나는 이야기여서 웃겼다. 고등학교때 이름으로만 배운 구운몽은 '인생사 부귀영화 모든 게 부질없고 헛되다는 일장춘몽을 노래한 소설이었다'라고 기억한다. 책에서의 해설도 그렇고...그러나 읽어보니 그런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육관대사의 아름다운 불제자 성진이 어느날 다리 위에서 아름다운 8선녀를 만났다. 자리를 피해달라며 말을 섞고 희롱한 것에 대한 죄때문에 세상으로 내쳐진다. 성진과 8선녀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양소유와 8명의 아름다운 처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와 부귀영화까지 누리다가 불제자 성진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서포 김만중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 쓴 소설이다. 왜, 어머니에게 이런 짜증나는(!) 소설을 썼을까? 차라리 서포 자신을 위해 씌여진 소설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남자들의 로망이 담긴 소설이다!!!
지은이 김만중이라는 것만 없었다면, 구운몽은 중국 환타지소설이다. 시대배경은 당나라에 구름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선녀와 물 속에 사는 용왕의 딸 용녀하며...축지술로 한달음에 아무곳이나 갈 수 있는 능력하며...소설은 시대를 반영하는 작은 그릇일 터. 조선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소중화사상을 보는 듯했다.
구운몽의 양소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간의 사랑(정확하게 말하면, 아름다운 여인과의 육체적인...)이다. 하룻밤의 운우지정을 위해서라면 귀신도 마다하지 않으며, 완전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어도- 비늘이 붙어있어도 - 마다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학문에, 백아도 울고 간다는 거문고솜씨에, 무술도 출중하니 양소유(성진)는 그야말로 완전 소중한 남자다. 그런 남자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아름다운 8명의 처녀가 모두 양소유를 사랑한다. 그러니,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할만하지 않은가?
다만, 조선시대의 여성상과 다름이 있다면, 그네들은 적극적으로 양소유에게 다가간다. 예를 들어 정처자는 먼저 양소유에게 다가가 자신과 백년가약을 맺을 것을 요구할 정도로 당차고 진취적이다. 다들, 먼저 나서서 자신 이외의 다른 처녀가 더 합당하다느니, 친자매처럼 양소유를 함께 모시자느니, 처로 들이거나 첩을 맞이해야 한다느니...양소유가 아닌 그네들이 나서서 처첩의 관계를 기꺼이 맺고자 하니 이런 해괴한 광경이 또 있을까?
공주, 기생, 명망가의 아씨, 용신의 딸, 몸종 할 것없이 서로 화합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한 자매처럼 지내며 양소유의 아내로 살아간다.- 완전 남자들의 로망이다. - 2처와 6첩이 서로 위하고 투기하지 않고 아름답게 지낸다는 말도 안되는 설정이 웃겼다.
작품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의 소설은 일정부분 계도의 성격을 띄기 때문에 부인들과 첩들이 갈등하지 않고 돕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는 해설이 있긴 하지만, 좀 심하게 비현실적이란 생각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아름다운 부인들과 행복하게 아들딸 낳고, 높은 벼슬에도 오른 나이든 양소유가 이제 성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면서, 한낱 부귀영화와 남녀간의 사랑은 부질없다 하니...푸웃..귀여워라...
나(내가 남자라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8선녀와 말을 섞고 희롱한 죄로 세상에 다시 태어나 아름다운 선녀8명과 아무 문제없이 사랑하고,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린 후에, 늙어서(!) 다시 원래의 성진으로 돌아오는 벌이라면, 열 두번도 더 받겠다고 하지 않을까?
왜 이걸 인생사 다 부질없고 덧없는 일장춘몽같다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