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숙제> 

문 :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이에 대한 칸트의 답변과 논증을 재구성해보고, 그 타당성을 평가해보라.

답 :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의무 형식을 동기로 삼은 행위만이 도덕적인 속성을 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의무 말고도 다른 여러 동기들을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 어떤 것이 좋아서 하기도 하고, 또는 아무런 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도덕적인 행위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도덕은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일관되게 판단하여야 한다. 또한 그 행동이 순수하게 인간의 내면으로부터만 나와야 하고,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의무 이외의 다른 성향을 동기로 삼은 행위들은 일관되지 않고 매 순간마다 다를 뿐 아니라, 외부의 조건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칸트는 전통적인 의지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인간이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만 끌어낼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이다. 따라서 이 의지에서 비롯된 의무 형식의 동기, 즉 ‘~해야 한다.’는 형식에 근거한 행위만이 도덕으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 

  다른 하나는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하라는 명령이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가정에서 귀결된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이며,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성적 존재로서 존중해야한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과학적 관찰과 세계를 인식하는 순수이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실천이성이기도 하다. 인간은 스스로는 자신이 이성을 갖춘 도덕적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타인에게도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타인 또한 자신과 같이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옳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간주 또는 요청해야 한다. 칸트는 이 두 가지를 인간의 도덕성을 성립시키기 위한 중요한 근거로서 내세우며,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위와 같은 기준에 비추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우선 그는 거짓말이라는 개념이 일관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인지, 즉 다시 말해 일반화했을 때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묻는다. 이 모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만약 나 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거짓말과 거짓말이 아닌 말(진실된 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는 다시 말하면 거짓말이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어떤 말도 진실이 아니라면, ‘진실이 아니다.’라는 정의에 의해 진실에 의존하고 있는 거짓말도 마찬가지로 그 내용을 잃고 만다. 다시 말해 어떤 말도 진실이 아니라면 똑같이 어떤 말도 거짓말일 수 없다.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둘째, 대개 거짓말은 구체적인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즉, 거짓말을 한 뒤에 아무런 변화가 없거나 혹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상황일 경우에는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은 그것으로 자신에게 상황을 유리하게 변화시키거나, 이득이 생기는 경우에만 유효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거짓말의 효력이 사라진다. 따라서 거짓말을 통해 의도한 어떤 목적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거짓말을 직접 했을 때의 효과, 즉 실천적인 면에서의 모순이다. 

  또한 많은 경우 인간의 거짓말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조작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내가 설정한 그럴듯한 각본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 일반의 위치가, 특정한 어떤 인간의 목적보다 아래 놓이게 되는 일종의 전도가 생겨난다. 이러한 전도는 칸트가 매우 걱정했던 현상이다.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인 존재로서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우선해서 대우받아야 한다. 인간은 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으로 다른 존재들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거짓말은 인간을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서 바라보지 않고, 내 거짓말에 수긍하는 경우에만 존중받을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거짓말은 거짓말을 듣는 상대방의 인간성에 대한 망각이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 스스로도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같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대우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거짓말을 일반화(보편화)했을 때 모순이 생긴다는 논증을 통해, 칸트는 거짓말에 대한 매우 중요한 속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로 ‘거짓말의 기준’이다. 상식적으로 거짓말을 언제나 해야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부적인 조건이 되었든, 아니면 우리의 내면이 변화하는 것이든 거짓말은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바람과 상관없이 강제된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다. 만약 인간이 거짓말을 한다는 게 주어진 사실이라면, 인간은 언제 거짓말을 해야하고 언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인간이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말하려면, 이 기준을 매우 명확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언어적 표현으로도 이러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엄밀한 기준을 제시해도, 거짓말을 해도 되는 상황은 언제나 우리가 규정해놓은 언어의 틀을 빠져나가게 마련이다. 오히려 모든 인간들은, 사실상 자신이 한 거짓말은 언제나 그 기준에 부합한다고 주장할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거짓말에 대해서 아무런 도덕적 의식이 없는 존재라면 어떨까? 이는 칸트가 제시한 도덕의 두 번째 기준, 즉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우하라는 말에 위배되는 상황이다. 이런 조건에서 인간의 거짓말은, 동물들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포식자의 눈을 속이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또는 먹이를 잡기 위해 위장을 하는 포식자의 태도와도 같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위치를 격하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지만, 자신의 믿음과 타인의 믿음 사이에서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거짓말을 어떤 개인의 믿음의 체계와 일치하지 않는 말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거짓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각 개인에게 주어지게 된다. 자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믿는다. 만약 내 거짓말이 그것을 듣는 상대의 믿음의 체계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이런 의문은 인간을 수단으로서 대우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의 고유한 특성과도 연결된다. 거짓말은 거짓을 참으로 믿게 만드는 수단이다. 이렇게 인간의 인식을 교란시켜야 하는 필요성은, 언제나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주어진다.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를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참된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 거짓말의 가장 큰 효과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을 이용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만약 그 거짓말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 각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이 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자신은 언제나 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다고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다. 따라서 거짓말이 허용되는 합당한 기준에 대한 문제와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칸트의 논증은 충분히 곱씹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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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숙제> 

문 : 의무의 동기에서 한 행위만이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칸트의 주장에 대한 비판들을 제시하고 평가해보라.

답 :

  칸트는 인간의 도덕성의 근원을 의지에서 찾는다. 만약 도덕성이 인간 밖의 조건에 좌우되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면 그 내용이 항상 바뀌기 때문에, 도덕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획득하려면 인간이 스스로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즉 내면적 의지에서 도덕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의지가 선하지는 않으며, 의지가 선한 속성을 띄기 위해서는 이성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는 ‘~를 해야 한다.’ 는 형식을 띄게 된다. 이 형식의 내용이 도덕적인지 검증해보는 원리가 정언명법인데, 이는 이성의 속성인 보편성과 필연성에 의존한다. 검증원리는 보편화 가능성,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두 가지로 이루어지며, 이 두 원리를 모두 충족시킨 의무만이 도덕률로서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이성적 존재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도덕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이 체계에서 의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의무의 형식을 띄지 않는 모든 행위의 동기들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무가 중심에 놓여있는 칸트의 윤리학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몇 가지 비판이 가해져왔다. 첫째, 칸트가 세워놓은 체계는 형식적인 측면만을 보여줄 뿐, 그 안에서 인간들이 어떤 구체적인 덕목을 실천해야하는지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공허한 체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옳지 않다. 칸트의 정식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구체적인 덕목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도덕성을 띄며, 도덕법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둘째,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자연의 사물들이 움직이는 방식 그대로 움직이며, 인간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두 결정되어있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모든 행위의 동기가 감각자료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을 원인으로 삼아, 그 원인에 따라 결과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인과론적 입장을 내세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의무의 형식과 같은 동기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동기는 오로지 감각자료에 대한 반응으로만 설명된다. 칸트 또한 인간의 인식은 이러한 인과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더 나아가서는 인과 원리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이런 인과적 접근은 칸트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내면적으로는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타인이 자신을 보았을 때에는 인과법칙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과론적 접근에서는 인간에게 도덕의 영역이 남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영위한다고 생각되는 자유는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환원된다. 자유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만약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면, 그것은 행위라고 부를 수도 없을뿐더러 그 행동이 일으킨 효과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나 그 설계자가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과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다. 칸트의 철학이 인과적으로 파악되는 인간과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 사이의 긴장관계와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윤리학의 토대를 놓기 위해 이러한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높이 살 수 있다. 

  셋째, 칸트는 비도덕적 명제들을 일반화하였을 경우 모순이 도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 어떤 비도덕적인 세계도 불가능하다, 즉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명백하게 비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모순을 도출하지 않는 세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사람을 때려라.’ 라는 준칙을 일반화할 경우,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때리는 세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 때 거짓말과 참말의 경계가 사라져 거짓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어 모순이 발생하는 경우와는 달리, 때리는 것과 맞는 것의 구분이 여전히 존재하므로 어떤 모순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이 예에 따르면, 준칙의 일반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반드시 도덕법칙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이에 대해 논리적 모순 이외에 다른 모순이 존재한다고 답변한다. 그가 다른 모순으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우하라는 것과의 모순이다. 보편화 가능성과 목적으로서의 인간 가운데 어떤 것이 우선하는지는 의문에 부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그의 윤리학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자신과 똑같이 존중받을 필요가 있는 존재로서 다른 인간들이 서로를 존중해주어야만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이 경향성과 관계가 깊은 이익과 손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그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의무적으로도 금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보편화 가능성에 집중된 이러한 비판은 칸트의 논지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편화 가능성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너무나도 엄격한 규칙이기 때문에 실천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비판 역시 그리 설득력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예외가 허용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것을 허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기준은 어떻게 정당성을 얻게 되는가? 보편화 가능성을 거절하고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또다른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하지만 윤리학의 역사가 보여주듯, 이러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쉽게 위험하고 소극적인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 

  넷째, 의무와 그 형식적 측면을 너무 고려한 나머지, 칸트가 말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인간은 매우 삭막하고 기계적일 것 같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설득력을 지닐지는 몰라도, 칸트의 윤리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던지는 인상비평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의무로서만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을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윤리적이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도덕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경향성에 지배되는데, 이는 단지 도덕이 아닐 뿐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배척되어야 하는 부분은 아니다. 친한 친구들과 같이 놀이를 즐기는 것, 밥을 먹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이들은 도덕의 영역 바깥에 있다. 

  인간의 삶에서 느껴지는 구체적인 행복은, 대개 이러한 도덕의 바깥에서부터 비롯한다. 행복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한 측면이다. 칸트는 이를 전혀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칸트는 만약 의무가 동기가 되어 행한 도덕적 행위가, 행위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즐겁고 보람된 삶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단,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행복과 도덕이 겹치는 행위를 수도 없이 반복하게 되는데, 이럴 때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임을 판별하는 기준은 행복이 아니라 의무여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의 요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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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숙제> 

문 : 신은 영원한 법칙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의욕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생각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는 신이 영원의 법칙에 따라서 의욕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평가해보라.  

답 :

  기독교에서 신은 가장 이성적인 존재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은 그 이성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따라서 신의 법칙인 이성은 세계의 곳곳에 반영되어있다. 그 가운데 자연의 최고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신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성을 사용하여 신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법칙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선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도덕법칙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그 길은 신이 부여한 능력인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성은 신이 부여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이미 부여된 뒤에는 신과는 독립적으로 도덕법칙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신의 속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밝혀지는 과정은 분명히 신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기존에 십계명을 대표되는 신의 계시와 성서에 밝혀진 덕목들을 실천하는 일을 통해서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계시종교의 이념과는 반대된다. 

  아퀴나스는 이런 문제를 신과 도덕법칙을 동일시함으로써 해결한다. 신은 이성 그 자체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성을 사용해 깨달을 수 있는 어떤 도덕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곧 신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한 어떤 존재로서가 아니라, 이성적인 원리로서 그 의미가 확정되어야만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신이 다른 행동의 지침들을 윤리적인 원리로 삼을 수 있다면, 즉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도덕률 이외에 다른 덕목들을 주장할 수 있다면 신의 도덕과 인간의 도덕 사이에는 근본적인 괴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계시에 의해서만 도덕의 의미를 확정지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객관적일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런 맥락에서 아퀴나스는 자연법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키는데, 이는 신과 인간이 공유하는 이성적인 법칙을 뜻한다.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도덕법칙을 제시해주지만, 또한 동시에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의 본성으로서 부여한 법칙이기도 하다. 인간이 본성에 부합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자연법에 일치하는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이 자연법의 제 1원리로서 인간은 선을 추구하고 그에 반대되는 것들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혹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행동지침을 도출할 수 있으며, 실제 생활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도덕적 지침들은 이 원리를 상황에 적합하게 잘 적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인간의 도덕적 양심은 이 원리로부터 구체적 상황에 맞는 덕목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자연법을 매개로 인간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가장 선한 존재인 신과 일치될 수 있으며, 신앙을 매개하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성서가 표방하는 계시적 성격, 선한 것들은 신의 계시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고 인간은 이에 순종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특징과 일치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둔스 스코투스의 아퀴나스 비판은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질문한다. 만약 신을 이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신은 이성보다 논리적으로 앞서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의 속성에 비추어본다면, 논리적으로는 선을 자의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신의 능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고, 이성에 의한 단 하나의 도덕만을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도덕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신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속성을 포기하고 있다. 

  물론 스코투스에게도 피조물인 인간이 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없는 필연적인 덕목이다. 하지만 그는 아퀴나스가 이 지점에서 여기에서 자의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그 우연한 선과 악의 개념에 의지한 도덕률을 신의 이름으로 일반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을 매개로 인간들이 발견할 수 있는 도덕법칙들이, 이성을 통해 발견할 수 있고 발견되어야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도덕적이다.’ 라는 속성을 얻을 수는 없다. 어떤 행동지침이 선한 것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신이 그것을 ‘선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과정, 즉 신의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수많은 도덕법칙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진정한 도덕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신의 의지가 개입해 그것을 명령과 의무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좋은 처세술 이상이 될 수 없다. 

  스코투스의 이러한 아퀴나스 비판은 두 가지 측면에서 타당하다. 첫째, 아퀴나스는 신과 이성을 일치시킴으로써 분명히 신의 영역에 제한을 두고 있다. 정의상 신은 이성을 뛰어넘는 존재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완전히 선한 존재라는 신의 개념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신을 이성에 구속시키고, 무한히 많은 도덕법칙들 가운데 단 하나의 체계만을 신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세계로서 인정한다. 나아가 이러한 입장은 무한한 존재로서의 신을 포기하고, 인간의 도덕과 이성에 신을 구속시키는 역전된 결과를 낳는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수호해야 할 대상은 타락한 인간들이 아니라 그런 존재들을 선하게 이끌 능력을 가지고 실제로 그런 과정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신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신의 입지를 점점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둘째, 신의 정의 이전에 선과 악은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신이 정의하기 전에는, 신 또한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 미결정된 상태이다. 신이 완전히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이며, 그 속성이 선하기 때문에 그가 명령하는 것이 도덕성을 띄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선과 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이 세계에서 초월해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하다. 설령 신이 다른 명령들을 인간에게 지시하여 지금과는 전혀 다른 도덕적 체계를 가진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 뿐 아니라, 이미 그렇게 정해진 이상 인간은 도덕을 넘어서는 의무, 즉 신앙으로부터 비롯된 ‘신을 사랑하라.’ 라는 의무에 따라 신이 명령한 그 행위들을 실천해야, 도덕적인 면모를 포함해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 사이의 이런 논쟁은, 본질적으로는 기독교에서 인정하는 신의 개념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면서 벌어진 논쟁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논쟁은 신에 대한 질문 뿐만이 아니라, 도덕법칙은 어떤 성격을 띄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 항목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절대적인가 아니면 어떤 존재나 상황에 상대적인가를 묻는 논쟁이기도 하다. 따져보면 아퀴나스는 도덕적 절대주의자, 보편주의자이며 스코투스는 도덕적 상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기독교적인 근본적 가정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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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숙제> 

문 : 신이 창조한 세계에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즉 악의 문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해결책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 

  신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신의 속성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신은 하나인 완전한 존재인데, 이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완전히 선하다는 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신이 창조했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악한 모습을 경험적으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한 모습의 기원은 어디인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원리를 포기할 수 없다면, 신은 세계의 선한 모습이 아니라 악한 모습의 기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세계를 창조한 존재를 하나로 보지 않거나, 하나인 신의 속성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신은 선하지 않은 존재라든가, 신은 더욱 선한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즉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존재라든가, 혹은 자기가 만든 세계에 악한 모습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설명해야만 악한 모습에 대한 기원을 신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소극적인 존재, 즉 ‘~이 아니다.’ 라는 형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완결된 체계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신의 피조물로서 만들어진 모든 존재들은 ‘~이다.’ 라는 형식으로 모두 존재한다. 모든 존재들은 자신에 대한 정의를 신으로부터 온전하게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본질이 신이 그 피조물을 창조해낸 목적에 해당되고 그 모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그 존재가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악이란 악 자체에 대한 정의와 이를 충족시키는 현실이 존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대한 정의가 충족되지 못하는 상태, 즉 선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도덕적 악을 저지르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 부여한 속성, 즉 자신을 닮은 형상을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그 상태에 가장 충실한 인간들만이 도덕적으로 선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존재도 신보다 더 선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나아지려면 사랑을 매개하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행동들은 특정한 대상을 사랑하는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랑이 가장 선한 존재인 신을 향해있을 때 인간은 가장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악이란 인간이 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사랑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결핍이다. 

  여기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도덕적 악의 책임이 신이 아닌 인간에게 돌아가고 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사랑할지 결정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신이 예정하고 계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정한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 위험, 즉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언제든 안고 살아가게 된다. 또한 그 대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곧 선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자유의지에 의해 인간은 신을 사랑하며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신이 예비한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신앙에 일치시켜 신을 대면함으로써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방식은 대단히 형식적이다. 그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증은 세계에 일어나는 악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악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악이 구성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악을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또는 환원되는 현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 악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악은 선의 결핍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선이 존재하면 언제나 그에 따라 악도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어떤 존재들도 신과 동일한 완전성을 지닐 수 없기에 신은 언제나 창조의 과정에서 불완전한 존재들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그는 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속성을 포기한다고 시인하는 셈이다. 

  그나마 신과 동등한 완전성을 영혼에 의해 지닐 수 있는 인간들조차,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그것을 거부하고 다른 열등한 존재들을 사랑한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도덕성을 기초짓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신이 설계한 대로 인간이 움직인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자유의지가 없는 세계에서 인간에게 도덕성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신의 속성에서 선이 포함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복권시키려 하는 순간 신의 도덕성은 인간의 세계로 끌려내려오고, 신의 도덕성은 인간의 도덕성으로 환원된다. 오히려 신이 설계한 도덕성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수정된다. 신이 설계해놓은 도덕적인 세계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개입하여 바뀌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이 자유의지로 펼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을 신이 다층적으로 모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알고 있는 그 세계는 인간에 의해 빈번하게 악이 출현하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이 완전히 선하다는 속성을 근본적으로 지킬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과연 신이 만든 세계 내에서 피조물 간의 위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다. 성경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최고의 존재라고 쓰여있지만, 이는 인간에 의해 쓰여진 가장 인간중심주의적인 편견일 뿐이다. 신이 각 존재들을 어떻게 만들더라도, 각 피조물들은 피조물로서의 지위만 지닐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한다. 인간만이 특별히 신의 완전성에 다다르는 존재로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증거가 이성이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성경에 의거했을 때는 그 이전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탐내기 이전의 상태가 하나님과 더 가깝고 완전한 상태라는 것은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때의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는 다른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그 특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이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선한 인간을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문제에 대해서 내세운 논증은 결과적으로 실패라고 보아야 한다. 악의 존재를 선의 존재에 환원시키려고 하였지만 이는 선이 존재하는 세계엔 언제나 악도 존재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낳고 말았다. 자유의지로서의 인간의 사랑을 신에게 향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신의 속성을 부정하지 않으면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또한 성경이 아닌 다른 철학적 논변에 의거함으로써, 성경이 이야기하는 선한 인간, 이상향인 태초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인간을 선한 인간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이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되며 동시에 그것이 신과 일치하는 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기독교 본연의 모습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그 체계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독교도들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책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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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숙제> 

문 : "객관적 세계는 상호주관성 또는 그것에 고유한 상호주관적 본질을 이미 본래적 의미에서는 초월하지 못하며, 내재적 초월성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나는 인식해야 한다. [...]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 [...] 상호주관적 경험의 이념적 상관자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그 자체로 무한히 개방된 이념성 속에서 구성된 상호주관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되어있다."(p.172) 이 단락에 나타난 내재적 초월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객관적 세계는 왜 단지 이념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관련되어 있는지 설명하시오. 

답: 

  후설의 현상학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들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 심각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반대는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그러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 개별학문들이 자신을 객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라고 보아야 옳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대는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각 개별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후설은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잇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가정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가정을 거부하고, 이 가정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보이는 이러한 데카르트적 동기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단어인 판단중지(epoche), 또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후설의 철학을 대표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사실상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자아와 인식대상인 세계 사이의 구분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되는데, 사실 설험적 자아는 그 안에 아무런 경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짓지 못하는 내적 구성물이다.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또한 칸트와 후설이 사용하는 '현상'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인식대상의 총체라는 의미에서는 같으나, 칸트가 인식의 대상과 그 특성이 범주로서 이미 구성되어있는 대상을 현상이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후설은 현상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 즉 인식의 과정에 대해 연구하는 의미에서 현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연구는 현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관찰자의 시점을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후설이 이야기하는 선험적 자아의 시점이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말이 되어벌니다. 모든 분절이 사라져버린 세계이며,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어떤 대상은 필연적으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반성적 능력에서 출발하는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의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와 과정은 아주 많은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관과 객관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자아와 타인의 구별이 없어진 새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설명한 것과 같은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이론적 구조 안에서도 객관적 인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려 시도해왔다. 하지만 후설은 자신의 방법론을 토대로 당시까지 시도되었던 두 가지 큰 경향을 비판한다. 하나는 관념론적(역사주의적) 통일로서, 인식주관의 본유관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것은 본유관념을 토대로 삼은 연역체계이다. 후설은, 이런 통일은 본유관념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으며, 그것이 의존할 다른 존재 혹은 논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다른 방향은 유물론적(과학주의적) 통일로서, 이들은 인간을 물질로 구성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물질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연구분야가 심리학이다. 이에 대해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즉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각자의 정신 속에서 그 지위가 상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을 연구하는 데 적합하비 않은 방법이라고 후설은 비판한다. 

  위와 같은 후설의 입장과 비판의 논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혹은 적어도 어떤 인간 집단이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객관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하지만 여기에서 후설이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후설의 선험적 자아는 이미 인식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상태에 놓여있으므로, 이러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어떤 특정한 학문이나 또는 태도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존재의 양태들을 뜻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객관적 세계는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를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고, 게다가 인식주체가 지니는 특별한 관점이나 학문적 입장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다. 사실상 객관적 세계는 객관적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며, 매우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위상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위에서 썼듯이 모든 인간은 동일한 토대에서 인식작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만약 인식의 대상이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영역에 자리잡게 된다면 그 대상은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존재가 그 자체로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거나 또는 어떤 특성을 지니거나 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식주체의 세계에 같은 양태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경험과 상관하는 외부의 존재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에 의존하며, 그 영역에 국한되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그 실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라는 의미와 상화주관적이라는 의미 또한 이와 같은 관계에 놓여있다. 

  상호주관성과 객관적 세계 가운데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것은 역시 상호주관성이다. 이는 선험적 자아의 영역이라는 그 속성상 어떤 분절도 없다. 위에서 기술했듯이, 오히려 이런 속성 때문에 주관이나 자아, 혹은 객관이나 타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상호주관적인 객관성을 마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세계는 분절 이후의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선험적 자아가 상호주관성의 영역을 겇서 세계로서 드러난 것, 비분절적 세계를 여러 태도에 따라 분절적 세계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분절적 세계의 근거로서 존재하는 비분절적 세계, 선험적 자아, 상호주관성이다. 

  이와 같은 후설의 논의에서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의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진다. 기존의 학문들은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를 모든 학문의 토대 내지는 자신들의 토대로서 객관적 세계를 상정하거나 혹은 간주한다. 또는 그 믿음을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후설에게 객관적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그 속성은 선험적 자아의 상호주관성에 토대를 두어야지만 성립할 수 있는, 이차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논의에 따르면, 학문의 토대로서 간주되는 객관적 세계의 현존이라는 생각은 포기되어야 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인식의 현상 속에서 생성되는 특수한 형태의 믿음을 간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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