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숙제>
문 : 신이 창조한 세계에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즉 악의 문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해결책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
신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신의 속성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신은 하나인 완전한 존재인데, 이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완전히 선하다는 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신이 창조했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악한 모습을 경험적으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한 모습의 기원은 어디인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원리를 포기할 수 없다면, 신은 세계의 선한 모습이 아니라 악한 모습의 기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세계를 창조한 존재를 하나로 보지 않거나, 하나인 신의 속성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신은 선하지 않은 존재라든가, 신은 더욱 선한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즉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존재라든가, 혹은 자기가 만든 세계에 악한 모습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설명해야만 악한 모습에 대한 기원을 신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소극적인 존재, 즉 ‘~이 아니다.’ 라는 형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완결된 체계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신의 피조물로서 만들어진 모든 존재들은 ‘~이다.’ 라는 형식으로 모두 존재한다. 모든 존재들은 자신에 대한 정의를 신으로부터 온전하게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본질이 신이 그 피조물을 창조해낸 목적에 해당되고 그 모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그 존재가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악이란 악 자체에 대한 정의와 이를 충족시키는 현실이 존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대한 정의가 충족되지 못하는 상태, 즉 선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도덕적 악을 저지르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 부여한 속성, 즉 자신을 닮은 형상을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그 상태에 가장 충실한 인간들만이 도덕적으로 선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존재도 신보다 더 선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나아지려면 사랑을 매개하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행동들은 특정한 대상을 사랑하는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랑이 가장 선한 존재인 신을 향해있을 때 인간은 가장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악이란 인간이 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사랑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결핍이다.
여기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도덕적 악의 책임이 신이 아닌 인간에게 돌아가고 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사랑할지 결정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신이 예정하고 계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정한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 위험, 즉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언제든 안고 살아가게 된다. 또한 그 대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곧 선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자유의지에 의해 인간은 신을 사랑하며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신이 예비한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신앙에 일치시켜 신을 대면함으로써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방식은 대단히 형식적이다. 그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증은 세계에 일어나는 악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악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악이 구성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악을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또는 환원되는 현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 악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악은 선의 결핍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선이 존재하면 언제나 그에 따라 악도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어떤 존재들도 신과 동일한 완전성을 지닐 수 없기에 신은 언제나 창조의 과정에서 불완전한 존재들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그는 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속성을 포기한다고 시인하는 셈이다.
그나마 신과 동등한 완전성을 영혼에 의해 지닐 수 있는 인간들조차,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그것을 거부하고 다른 열등한 존재들을 사랑한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도덕성을 기초짓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신이 설계한 대로 인간이 움직인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자유의지가 없는 세계에서 인간에게 도덕성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신의 속성에서 선이 포함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복권시키려 하는 순간 신의 도덕성은 인간의 세계로 끌려내려오고, 신의 도덕성은 인간의 도덕성으로 환원된다. 오히려 신이 설계한 도덕성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수정된다. 신이 설계해놓은 도덕적인 세계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개입하여 바뀌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이 자유의지로 펼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을 신이 다층적으로 모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알고 있는 그 세계는 인간에 의해 빈번하게 악이 출현하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이 완전히 선하다는 속성을 근본적으로 지킬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과연 신이 만든 세계 내에서 피조물 간의 위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다. 성경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최고의 존재라고 쓰여있지만, 이는 인간에 의해 쓰여진 가장 인간중심주의적인 편견일 뿐이다. 신이 각 존재들을 어떻게 만들더라도, 각 피조물들은 피조물로서의 지위만 지닐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한다. 인간만이 특별히 신의 완전성에 다다르는 존재로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증거가 이성이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성경에 의거했을 때는 그 이전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탐내기 이전의 상태가 하나님과 더 가깝고 완전한 상태라는 것은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때의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는 다른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그 특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이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선한 인간을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문제에 대해서 내세운 논증은 결과적으로 실패라고 보아야 한다. 악의 존재를 선의 존재에 환원시키려고 하였지만 이는 선이 존재하는 세계엔 언제나 악도 존재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낳고 말았다. 자유의지로서의 인간의 사랑을 신에게 향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신의 속성을 부정하지 않으면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또한 성경이 아닌 다른 철학적 논변에 의거함으로써, 성경이 이야기하는 선한 인간, 이상향인 태초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인간을 선한 인간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이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되며 동시에 그것이 신과 일치하는 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기독교 본연의 모습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그 체계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독교도들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책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