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 숙제> 

문 : "객관적 세계는 상호주관성 또는 그것에 고유한 상호주관적 본질을 이미 본래적 의미에서는 초월하지 못하며, 내재적 초월성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나는 인식해야 한다. [...]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 [...] 상호주관적 경험의 이념적 상관자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그 자체로 무한히 개방된 이념성 속에서 구성된 상호주관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되어있다."(p.172) 이 단락에 나타난 내재적 초월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객관적 세계는 왜 단지 이념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관련되어 있는지 설명하시오. 

답: 

  후설의 현상학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들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 심각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반대는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그러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 개별학문들이 자신을 객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라고 보아야 옳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대는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각 개별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후설은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잇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가정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가정을 거부하고, 이 가정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보이는 이러한 데카르트적 동기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단어인 판단중지(epoche), 또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후설의 철학을 대표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사실상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자아와 인식대상인 세계 사이의 구분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되는데, 사실 설험적 자아는 그 안에 아무런 경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짓지 못하는 내적 구성물이다.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또한 칸트와 후설이 사용하는 '현상'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인식대상의 총체라는 의미에서는 같으나, 칸트가 인식의 대상과 그 특성이 범주로서 이미 구성되어있는 대상을 현상이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후설은 현상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 즉 인식의 과정에 대해 연구하는 의미에서 현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연구는 현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관찰자의 시점을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후설이 이야기하는 선험적 자아의 시점이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말이 되어벌니다. 모든 분절이 사라져버린 세계이며,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어떤 대상은 필연적으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반성적 능력에서 출발하는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의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와 과정은 아주 많은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관과 객관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자아와 타인의 구별이 없어진 새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설명한 것과 같은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이론적 구조 안에서도 객관적 인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려 시도해왔다. 하지만 후설은 자신의 방법론을 토대로 당시까지 시도되었던 두 가지 큰 경향을 비판한다. 하나는 관념론적(역사주의적) 통일로서, 인식주관의 본유관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것은 본유관념을 토대로 삼은 연역체계이다. 후설은, 이런 통일은 본유관념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으며, 그것이 의존할 다른 존재 혹은 논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다른 방향은 유물론적(과학주의적) 통일로서, 이들은 인간을 물질로 구성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물질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연구분야가 심리학이다. 이에 대해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즉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각자의 정신 속에서 그 지위가 상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을 연구하는 데 적합하비 않은 방법이라고 후설은 비판한다. 

  위와 같은 후설의 입장과 비판의 논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혹은 적어도 어떤 인간 집단이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객관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하지만 여기에서 후설이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후설의 선험적 자아는 이미 인식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상태에 놓여있으므로, 이러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어떤 특정한 학문이나 또는 태도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존재의 양태들을 뜻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객관적 세계는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를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고, 게다가 인식주체가 지니는 특별한 관점이나 학문적 입장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다. 사실상 객관적 세계는 객관적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며, 매우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위상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위에서 썼듯이 모든 인간은 동일한 토대에서 인식작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만약 인식의 대상이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영역에 자리잡게 된다면 그 대상은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존재가 그 자체로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거나 또는 어떤 특성을 지니거나 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식주체의 세계에 같은 양태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경험과 상관하는 외부의 존재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에 의존하며, 그 영역에 국한되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그 실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라는 의미와 상화주관적이라는 의미 또한 이와 같은 관계에 놓여있다. 

  상호주관성과 객관적 세계 가운데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것은 역시 상호주관성이다. 이는 선험적 자아의 영역이라는 그 속성상 어떤 분절도 없다. 위에서 기술했듯이, 오히려 이런 속성 때문에 주관이나 자아, 혹은 객관이나 타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상호주관적인 객관성을 마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세계는 분절 이후의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선험적 자아가 상호주관성의 영역을 겇서 세계로서 드러난 것, 비분절적 세계를 여러 태도에 따라 분절적 세계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분절적 세계의 근거로서 존재하는 비분절적 세계, 선험적 자아, 상호주관성이다. 

  이와 같은 후설의 논의에서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의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진다. 기존의 학문들은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를 모든 학문의 토대 내지는 자신들의 토대로서 객관적 세계를 상정하거나 혹은 간주한다. 또는 그 믿음을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후설에게 객관적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그 속성은 선험적 자아의 상호주관성에 토대를 두어야지만 성립할 수 있는, 이차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논의에 따르면, 학문의 토대로서 간주되는 객관적 세계의 현존이라는 생각은 포기되어야 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인식의 현상 속에서 생성되는 특수한 형태의 믿음을 간주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